김기협: 오늘 국회 개원식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경사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선생님 마음은 착잡하시겠죠. 지난 3월 하순 민정장관직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이 ‘가능지역 선거’에 반대하는 뜻을 가진 입장에서 그 선거를 주관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선거가 시행되고 오늘의 개원식이 그 결실입니다. 선생님이 그 선거를 반대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 말씀으로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만 독자들을 위해 한 번 다시 정리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안재홍: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점령에 애초의 문제가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 민족은 ‘독립’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억압을 벗어나더라도 일본을 이긴 연합국의 힘 아래 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게 ‘의존’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죠.

 

그런데 한 나라의 영향 아래 놓인다면 당장은 답답하더라도 장래의 발전을 바라보며 노력을 쌓아나갈 텐데, 반쪽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는다면 발전의 방향을 찾는 데서부터 혼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근 3년 동안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이제 ‘독립’보다 ‘통일’이 더 절실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통일은 당사자인 두 나라의 책임입니다. 미소공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엔에 가져간 것은 미국의 책임회피입니다. 유엔은 모든 나라로 구성된 기구입니다. 모든 사람이 책임진다는 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결국 유엔이 결정한 ‘가능지역 선거’란 미국이 바라는 분단 고착입니다. 대다수 대표들에게는 미국이 강하게 요구하는 방향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조선인 자신의 목소리는 들어보지도 않고 미국의 제안에 동의하고 마는 것입니다.

 

김기협: 오늘 뵙자마자 뜻밖의 말씀을 여러 가지 듣습니다. 독립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씀부터 뜻밖인데요. 하지만 준비가 얼마만큼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인 만큼 똑같은 상황을 놓고도 다른 표현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미국이 바라는 분단 고착”이란 말씀입니다. 미국과 미군정의 정책을 보며 “과연 저들은 조선의 통일건국을 바라는 것일까?”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들의 무능 때문에 통일건국의 길을 잘 찾아주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설마 그들이 조선의 분단 고착을 진심으로 바란다고는... 만일 그렇다면 일본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 아닙니까?

 

안재홍: 좋은 놈 나쁜 놈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나라건 자기네 국익을 추구하는 입장은 다 마찬가지인데, 각 나라가 처한 입장에 따라 그 추구하는 방향이 우리에게 많이 해로울 수도 있고 적게 해로울 수도 있는 거죠.

 

미국과 소련은 세계 도처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 걱정까지 나오고 있지요. 미국이 전체적으로 우월한 국면입니다. 엄청난 경제력 위에 원자폭탄까지 혼자 갖고 있으니까요. 유엔에서도 미국의 힘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유독 조선에서만은 미국이 소련보다 불리한 입장입니다. 본국에서 멀기도 할 뿐더러 해방 조선의 현실이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정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지난 3년간 이북에서 소련은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조선인의 친소적 정권을 키워낼 수 있었던 반면 이남에서 미국은 많은 원조를 제공하고도 민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통일국가를 세울 경우 미국보다 소련에 가까워질 것으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점령하고 있는 이남이라도 영향권 안에 지키기 위해 무리한 짓을 하는 겁니다.

 

김기협: 그렇군요. 미군정이 일제시대보다도 강한 경찰력을 키워내고 친일파를 싸고 돈 것이 모두 민심과 실정에 합당한 정책을 펴내지 못하기 때문이었군요. 그런 상황에서 미군정의 조선인을 대표하는 선생님 입장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이해가 됩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폭동자에게 실탄발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군요. 내용 1백 자의 짧은 기사를 6월 1일자 <조선일보>에서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서울시내에서 고작 삐라 뿌리고 시위하는 일뿐인데 그것을 ‘폭동자’라고 한 것 아닙니까? 표현의 자유를 실탄발사로 억압하라는 명령에 사람들이 전혀 놀라지도 않게 되었으니 이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길들여져 있는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찰도 민정장관이 이끄는 남조선과도정부의 휘하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장택상의 실탄발사 명령에 선생님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안재홍: 책임이 있지요. 변명에 불과한 말이지만, 경찰 문제를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완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민정장관직을 수락한 것은 하지 사령관에게 “정부 내의 인사쇄신, 경찰문제, 식량문제, 부일협력자 문제 등을 양심적으로 인내성 있게 해결”하라는 서한을 받고서였습니다. 그리고 취임 후 제일 먼저 주력한 일이 경찰 개편이었는데, 석 달이 안 되어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5월 5일 제주도의 대책회의장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만, 민정장관을 맡은 이래 마음속으로 통곡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조병옥과 장택상은 민족에게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은 미국인들이 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도 개선하지 못하면서 왜 자리를 지켰느냐고 묻겠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상황의 개선은커녕 악화라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버텨 왔습니다. 공자가 노나라 임금에게 들어주지 않을 것이 빤한 일을 진언했다가 물리침을 받고 나오며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吾以從大夫之後也 故不敢不言)”고 했다죠.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김기협: 반대하시던 선거가 치러졌는데, 막상 치러진 선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재홍: 내가 반대한 이유는 두 가집니다. 첫째 이유는 이 ‘가능지역 선거’가 분단 고착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지금의 치안 상황에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문제입니다. 두 가지 문제가 걱정했던 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김기협: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여부를 유엔위원단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원단이 보고서 작성을 위해 도쿄로 갔다가 6월 초에 돌아올 계획은 4월 30일에 세웠던 것이죠. 결국 도쿄가 아닌 상해에 가 있지만 6월 초 돌아올 계획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위원단 귀환 후에 국회를 개원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귀환을 며칠 앞둔 오늘 개원식을 가진 것이 뜻밖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안재홍: 이상한 일입니다. 지난 25일 하지 사령관의 포고가 나올 때까지도 선거 한 달 후인 6월 10일 개원식을 대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미군정이 시행한 것이지만 유엔의 권고에 따른 것이고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를 받은 것입니다. 며칠을 못 기다려서 위원단이 참석하지 못하는 개원식을 연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도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이상한 소문까지 나돌고 있어요. 선거의 자유분위기와 공정성에 대한 위원단의 결정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군정이 국회 성립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서두른 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미군 측에서는 위원단의 8개국을 세 그룹으로 구분해서 봅니다.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세 나라는 미국 방침을 무조건 지지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필리핀 대표의 경우 너무 편파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미국에 있는 김용중 씨가 교체 필요를 주장한 일까지 있죠. 그리고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리아 세 나라는 미국 방침에 비판적인 나라들로 봅니다. 인도와 프랑스는 중립적 입장으로 보고요.

 

그런데 8개국 중 5개국이 지난 선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즉 자유분위기가 부족했다거나 위원단의 감시가 불충분했다고 하는 의견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인도와 프랑스 대표까지 이 선거에 불만을 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설득에 나서고 있는데 쉽게 설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개원식을 강행하기로 했다는 얘기죠.

 

김기협: 사실 직원 수 20여 명에 불과한 유엔위원단이 전국 선거를 감시한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지난 2월 유엔소총회에서 미국 대표가 ‘가능지역 선거’ 제안 설명 중 도별 순차적 시행을 얘기했던 것도 그 문제 때문 아닙니까? 유엔에서 파견한 소규모 위원단이 선거 감시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곧이들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시행에서는 전국 동시선거로 나갔으니 충분한 감시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죠.

 

투표소마다 다니며 감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신문만 보면 자유로운 선거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죠. 그런데 위원단이 진짜로 부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런 결론을 내릴 위원단이라면 애초에 동시선거부터 반대할 일 아니었나요?

 

안재홍: 유엔은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기구로서 그 성격이 아직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선 선거에 대해 위원단이 엄정한 태도를 취한다면 국제기구로서 유엔의 권위가 크게 높아지겠지요. 반대로 조선위원단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면 유엔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보는 소련 주장이 힘을 얻을 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위원단이 엄격한 태도를 취할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유엔에서건 어디에서건 모든 나라는 자기네 국익을 위해 움직입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가 엄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미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나라들이기 때문이고 시리아 경우는 유태인국가 건설 문제로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원하는 결론을 위원단으로부터 얻어낼 수단을 얼마든지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유엔입니다.

 

김기협: 지난 5월 14일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 중단 이후 당국이 예견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민간에서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력협정을 등한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해 온 미군정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고 있다는군요.

 

안재홍: 오정수 상무부장을 비롯해 과도정부 정무위원들은 전력협정을 서두르는 데 모두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송전 중단의 피해가 어떤 것일지 아니까요. 민생에 중요한 그런 문제에조차 조선인의 입장을 배려받지 못하는 그런 기구에 ‘과도정부’란 이름이 부끄럽습니다.

 

아까 “미국이 바라는 분단 고착”이란 말을 했습니다만, 이런 일도 미국의 의지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줍니다. 남북 간의 관계를 어떻게든 떼어내려는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이런 사태를 불러올 수 있습니까? 미국의 발전선을 구세주처럼 바라보게 되기를 그들은 바란 것일까요? 몇 만 킬로와트 정도는 끄떡없다고 큰소리친 발전선이 고작 8천 킬로와트밖에 생산하지 못하고 있으니, 미국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좀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김기협: 이 송전 중단이 남북협상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김구 김규식 두 분이 평양에서 돌아올 때 송전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이북 지도자들의 약속을 민족 간 협력정신의 증거로 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송전이 중단되었으니 협상 반대파에서 그것 보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지요.

 

안재홍: 그 직후 백범께서 정양을 위해 마곡사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 떠돈 얘기가 있죠. 이북 지도자들에게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남북협상에 대한 태도를 정리할 것이라느니, 정치에 의욕까지 잃고 은퇴를 생각한다느니.

 

그런데 송전 중단 사태가 여러 날 계속되는 동안 일반인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한 미군정의 노력이 너무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전기 대가의 20퍼센트밖에 못 받았다는 북쪽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는 게 40퍼센트나 줬다고 하는 주장이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나마 작년 봄까지 쓴 전기의 대가 얘기고, 최근 1년간의 대가에 대해서는 협정조차 맺지 않고 있는데, 상식으로 생각해도 돈 받을 사람이 무성의해서 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게다가 전기 부족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의 불편은 고사하고 공장은 물론, 모를 낼 논에 물도 대지 못하는 곳이 허다합니다. 나라 경제까지 절단 나고 있어요. 피해가 현실적인 만큼 그 책임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현실적인 판단을 합니다. 이북의 조선인과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미군정 방침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 사람들은 모욕감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김기협: 며칠 전(5월 28일) 김구 선생께서 남조선 조선인 대표들이 가서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면 단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죠. 그리고 같은 날 자주통일구국생산위원회에서도 미군정에게 “종래의 고집을 즉시 포기하고 진심으로 조선민족을 위하여 본문제 해결에 허심탄회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조선인 대표들이 나서면 정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재홍: 해결되고말고요. 그쪽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그쪽 선전에 얼마나 유리한 일입니까? 조선인을 못 살게 만들려고만 드는 미국인을 제쳐놓고 조선인이 나서서 “우리 조선 사람끼리”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선전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선전에 이용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문제는 그렇게 해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온 인민의 고통과 산업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방법을 미군정이 허용할 리가 없지요. 선전에 이용당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