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카테고리를 만들어놓은 덕분에 강연 맡아 온 자취를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다. 강연 할 일이 새로 있어도 전에 한 강연보다 발전시킬 길을 여기 모아놓은 글들 보며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주 유용한 카테고리다.

 

재작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몇 차례 강연과 발표가 있은 후로 오랫동안 입을 쓰지 않고 지냈다. 1년 반 동안 국토해양부 강연 한 차례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강연 열심히 할 생각을 하려니 이 카테고리를 많이 쓰게 되겠다.

 

어제 강연은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강연장 크기와 청중 수가 적당히 어울렸고, 행사팀 세 분의 이해심도 깊은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곳 시민강좌에 비해 연령층이 젊었다.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쓰지 않고 청중 반응에 따라 적당한 표현반응을 찾아나가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로서는 모처럼의 '열강'이 가능했다. 초청을 또 받고 싶다는 눈치를 주최측에게 잔뜩 뿌려놓았는데 잘하면 여름 전에 한 번 더 갈 수 있을 것 같다.

 

프레시안에서 7-8월 중 갖고자 하는 8회 강연 준비에도 자신감이 붙는다. 어제 강연 준비의 네 배 정도 내용을 정리해 놓으면 함량 확보는 되겠고, 프리젠테이션 방법 궁리에 노력을 충분히 쏟을 수 있겠다. 그 강연 준비가 되면 해방일기를 주제로 한 강연은 조자룡 헌 창 쓰듯 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 특히 한국현대사 관계자들 앞에서 짤막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이 하나 들어왔다. 6월 10일 서중석 선생 고별강연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참석할 뜻을 밝혀 놨는데, 그 자리에서 한 마디씩 할 지인들 틈에 끼어달라는 것이다. 서 선생과의 연분을 생각해도 의미있는 일이거니와, 현대사에 데뷔하는 입장에서 현대사 관계자들의 모임이 처음이니 무슨 얘기를 할지 궁리를 좀 해놔야겠다.

 

뭔 얘기를 하나? 내가 종북주의자 아닌 종서(從徐)주의자라고 넉살을 떨까?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추천사에 박인규 대표가 내가 서 선생의 '현하지변'에 넘어가 사학과 전과를 결심했다는 소문을 적었다.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사학도가 되는 과정에서 서 선생과의 대화는, 내용을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입력 내용의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 또래 퇴직할 무렵이 되어 서 선생이 길을 연 한국현대사 분야로 쫓아들어오고 있으니 종서주의자를 자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내 인생의 또 하나 중요한 고비에 서 선생이 끼어든 일이 있다. 아버지 일기를 입력한 후 서 선생께 검토를 부탁한 일이다. 그분의 검토가 <역사 앞에서> 출판 계기의 일부가 되었고, 그 책 출판이 그 후 내 진로에 은연중 큰 작용을 계속했던 것이다. 자주 만나며 지낸 것도 아닌데 그렇게 중요한 고비에서 역할을 맡아준 일을 생각하면 그분과의 인연이 각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는 한데, 생각이 더 필요한 일이다. 대면한 자리에서나 없는 자리에서나 단 1년 선배인 서 선생을 '형님'이라 하지 않고 꼭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내 유별난 버릇이 언제 시작된 것이었나 가물가물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스스로 석연한 설명이 떠오르면 그 얘기도 하고 싶은데, 하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 오늘 국회 개원식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경사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선생님 마음은 착잡하시겠죠. 지난 3월 하순 민정장관직 사직서를 제출했던 것이 ‘가능지역 선거’에 반대하는 뜻을 가진 입장에서 그 선거를 주관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선거가 시행되고 오늘의 개원식이 그 결실입니다. 선생님이 그 선거를 반대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 말씀으로 충분히 이해는 합니다만 독자들을 위해 한 번 다시 정리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안재홍: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점령에 애초의 문제가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 민족은 ‘독립’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억압을 벗어나더라도 일본을 이긴 연합국의 힘 아래 놓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게 ‘의존’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죠.

 

그런데 한 나라의 영향 아래 놓인다면 당장은 답답하더라도 장래의 발전을 바라보며 노력을 쌓아나갈 텐데, 반쪽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는다면 발전의 방향을 찾는 데서부터 혼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근 3년 동안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 이제 ‘독립’보다 ‘통일’이 더 절실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통일은 당사자인 두 나라의 책임입니다. 미소공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유엔에 가져간 것은 미국의 책임회피입니다. 유엔은 모든 나라로 구성된 기구입니다. 모든 사람이 책임진다는 것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결국 유엔이 결정한 ‘가능지역 선거’란 미국이 바라는 분단 고착입니다. 대다수 대표들에게는 미국이 강하게 요구하는 방향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조선인 자신의 목소리는 들어보지도 않고 미국의 제안에 동의하고 마는 것입니다.

 

김기협: 오늘 뵙자마자 뜻밖의 말씀을 여러 가지 듣습니다. 독립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씀부터 뜻밖인데요. 하지만 준비가 얼마만큼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상대적인 문제인 만큼 똑같은 상황을 놓고도 다른 표현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미국이 바라는 분단 고착”이란 말씀입니다. 미국과 미군정의 정책을 보며 “과연 저들은 조선의 통일건국을 바라는 것일까?”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들의 무능 때문에 통일건국의 길을 잘 찾아주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설마 그들이 조선의 분단 고착을 진심으로 바란다고는... 만일 그렇다면 일본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 아닙니까?

 

안재홍: 좋은 놈 나쁜 놈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나라건 자기네 국익을 추구하는 입장은 다 마찬가지인데, 각 나라가 처한 입장에 따라 그 추구하는 방향이 우리에게 많이 해로울 수도 있고 적게 해로울 수도 있는 거죠.

 

미국과 소련은 세계 도처에서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 걱정까지 나오고 있지요. 미국이 전체적으로 우월한 국면입니다. 엄청난 경제력 위에 원자폭탄까지 혼자 갖고 있으니까요. 유엔에서도 미국의 힘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유독 조선에서만은 미국이 소련보다 불리한 입장입니다. 본국에서 멀기도 할 뿐더러 해방 조선의 현실이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정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죠. 지난 3년간 이북에서 소련은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조선인의 친소적 정권을 키워낼 수 있었던 반면 이남에서 미국은 많은 원조를 제공하고도 민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통일국가를 세울 경우 미국보다 소련에 가까워질 것으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점령하고 있는 이남이라도 영향권 안에 지키기 위해 무리한 짓을 하는 겁니다.

 

김기협: 그렇군요. 미군정이 일제시대보다도 강한 경찰력을 키워내고 친일파를 싸고 돈 것이 모두 민심과 실정에 합당한 정책을 펴내지 못하기 때문이었군요. 그런 상황에서 미군정의 조선인을 대표하는 선생님 입장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이해가 됩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폭동자에게 실탄발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군요. 내용 1백 자의 짧은 기사를 6월 1일자 <조선일보>에서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서울시내에서 고작 삐라 뿌리고 시위하는 일뿐인데 그것을 ‘폭동자’라고 한 것 아닙니까? 표현의 자유를 실탄발사로 억압하라는 명령에 사람들이 전혀 놀라지도 않게 되었으니 이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길들여져 있는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찰도 민정장관이 이끄는 남조선과도정부의 휘하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장택상의 실탄발사 명령에 선생님도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안재홍: 책임이 있지요. 변명에 불과한 말이지만, 경찰 문제를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완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민정장관직을 수락한 것은 하지 사령관에게 “정부 내의 인사쇄신, 경찰문제, 식량문제, 부일협력자 문제 등을 양심적으로 인내성 있게 해결”하라는 서한을 받고서였습니다. 그리고 취임 후 제일 먼저 주력한 일이 경찰 개편이었는데, 석 달이 안 되어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5월 5일 제주도의 대책회의장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만, 민정장관을 맡은 이래 마음속으로 통곡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조병옥과 장택상은 민족에게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은 미국인들이 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상황도 개선하지 못하면서 왜 자리를 지켰느냐고 묻겠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상황의 개선은커녕 악화라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버텨 왔습니다. 공자가 노나라 임금에게 들어주지 않을 것이 빤한 일을 진언했다가 물리침을 받고 나오며 “내가 대부의 반열에 있으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다.(吾以從大夫之後也 故不敢不言)”고 했다죠.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김기협: 반대하시던 선거가 치러졌는데, 막상 치러진 선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재홍: 내가 반대한 이유는 두 가집니다. 첫째 이유는 이 ‘가능지역 선거’가 분단 고착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지금의 치안 상황에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문제입니다. 두 가지 문제가 걱정했던 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김기협: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여부를 유엔위원단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원단이 보고서 작성을 위해 도쿄로 갔다가 6월 초에 돌아올 계획은 4월 30일에 세웠던 것이죠. 결국 도쿄가 아닌 상해에 가 있지만 6월 초 돌아올 계획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위원단 귀환 후에 국회를 개원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귀환을 며칠 앞둔 오늘 개원식을 가진 것이 뜻밖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안재홍: 이상한 일입니다. 지난 25일 하지 사령관의 포고가 나올 때까지도 선거 한 달 후인 6월 10일 개원식을 대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미군정이 시행한 것이지만 유엔의 권고에 따른 것이고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를 받은 것입니다. 며칠을 못 기다려서 위원단이 참석하지 못하는 개원식을 연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도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이상한 소문까지 나돌고 있어요. 선거의 자유분위기와 공정성에 대한 위원단의 결정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군정이 국회 성립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 서두른 게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미군 측에서는 위원단의 8개국을 세 그룹으로 구분해서 봅니다.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세 나라는 미국 방침을 무조건 지지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필리핀 대표의 경우 너무 편파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미국에 있는 김용중 씨가 교체 필요를 주장한 일까지 있죠. 그리고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리아 세 나라는 미국 방침에 비판적인 나라들로 봅니다. 인도와 프랑스는 중립적 입장으로 보고요.

 

그런데 8개국 중 5개국이 지난 선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즉 자유분위기가 부족했다거나 위원단의 감시가 불충분했다고 하는 의견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인도와 프랑스 대표까지 이 선거에 불만을 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설득에 나서고 있는데 쉽게 설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개원식을 강행하기로 했다는 얘기죠.

 

김기협: 사실 직원 수 20여 명에 불과한 유엔위원단이 전국 선거를 감시한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죠. 지난 2월 유엔소총회에서 미국 대표가 ‘가능지역 선거’ 제안 설명 중 도별 순차적 시행을 얘기했던 것도 그 문제 때문 아닙니까? 유엔에서 파견한 소규모 위원단이 선거 감시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곧이들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시행에서는 전국 동시선거로 나갔으니 충분한 감시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이죠.

 

투표소마다 다니며 감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신문만 보면 자유로운 선거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죠. 그런데 위원단이 진짜로 부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런 결론을 내릴 위원단이라면 애초에 동시선거부터 반대할 일 아니었나요?

 

안재홍: 유엔은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기구로서 그 성격이 아직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선 선거에 대해 위원단이 엄정한 태도를 취한다면 국제기구로서 유엔의 권위가 크게 높아지겠지요. 반대로 조선위원단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면 유엔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보는 소련 주장이 힘을 얻을 겁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위원단이 엄격한 태도를 취할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유엔에서건 어디에서건 모든 나라는 자기네 국익을 위해 움직입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가 엄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미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나라들이기 때문이고 시리아 경우는 유태인국가 건설 문제로 미국에 대해 반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원하는 결론을 위원단으로부터 얻어낼 수단을 얼마든지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유엔입니다.

 

김기협: 지난 5월 14일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 중단 이후 당국이 예견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민간에서 겪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력협정을 등한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해 온 미군정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고 있다는군요.

 

안재홍: 오정수 상무부장을 비롯해 과도정부 정무위원들은 전력협정을 서두르는 데 모두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송전 중단의 피해가 어떤 것일지 아니까요. 민생에 중요한 그런 문제에조차 조선인의 입장을 배려받지 못하는 그런 기구에 ‘과도정부’란 이름이 부끄럽습니다.

 

아까 “미국이 바라는 분단 고착”이란 말을 했습니다만, 이런 일도 미국의 의지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줍니다. 남북 간의 관계를 어떻게든 떼어내려는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이런 사태를 불러올 수 있습니까? 미국의 발전선을 구세주처럼 바라보게 되기를 그들은 바란 것일까요? 몇 만 킬로와트 정도는 끄떡없다고 큰소리친 발전선이 고작 8천 킬로와트밖에 생산하지 못하고 있으니, 미국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좀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김기협: 이 송전 중단이 남북협상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김구 김규식 두 분이 평양에서 돌아올 때 송전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이북 지도자들의 약속을 민족 간 협력정신의 증거로 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불과 열흘도 안 되어 송전이 중단되었으니 협상 반대파에서 그것 보라며 손가락질하고 있지요.

 

안재홍: 그 직후 백범께서 정양을 위해 마곡사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 떠돈 얘기가 있죠. 이북 지도자들에게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남북협상에 대한 태도를 정리할 것이라느니, 정치에 의욕까지 잃고 은퇴를 생각한다느니.

 

그런데 송전 중단 사태가 여러 날 계속되는 동안 일반인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한 미군정의 노력이 너무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전기 대가의 20퍼센트밖에 못 받았다는 북쪽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는 게 40퍼센트나 줬다고 하는 주장이니 이게 무슨 꼴입니까? 그나마 작년 봄까지 쓴 전기의 대가 얘기고, 최근 1년간의 대가에 대해서는 협정조차 맺지 않고 있는데, 상식으로 생각해도 돈 받을 사람이 무성의해서 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다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게다가 전기 부족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의 불편은 고사하고 공장은 물론, 모를 낼 논에 물도 대지 못하는 곳이 허다합니다. 나라 경제까지 절단 나고 있어요. 피해가 현실적인 만큼 그 책임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현실적인 판단을 합니다. 이북의 조선인과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미군정 방침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 사람들은 모욕감까지 느끼고 있습니다.

 

김기협: 며칠 전(5월 28일) 김구 선생께서 남조선 조선인 대표들이 가서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면 단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죠. 그리고 같은 날 자주통일구국생산위원회에서도 미군정에게 “종래의 고집을 즉시 포기하고 진심으로 조선민족을 위하여 본문제 해결에 허심탄회할 것을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조선인 대표들이 나서면 정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재홍: 해결되고말고요. 그쪽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그쪽 선전에 얼마나 유리한 일입니까? 조선인을 못 살게 만들려고만 드는 미국인을 제쳐놓고 조선인이 나서서 “우리 조선 사람끼리”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선전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선전에 이용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문제는 그렇게 해결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온 인민의 고통과 산업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방법을 미군정이 허용할 리가 없지요. 선전에 이용당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Posted by 문천

 

5월 29일 오전에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폐원식이 창덕궁 비원에서 열렸다. 1946년 2월 어울리지 않는 ‘민주의원’이란 이름으로 출범한 이 군정사령관 자문기구는 1946년 12월 입법의원이 설립된 후로는 기능이 사라졌는데도 형식상 존속하고 있다가 이제 제헌국회 출범을 앞두고 문을 닫은 것이다. 폐원식에는 “이승만·오세창·김준연·김도연 등 제 의원을 비롯하여 사무국원 등 40여 명이 출석”하였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30일)

 

며칠 전(5월 20일)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폐원식은 이보다 성대했다. 41명 의원이 참석했고 딘 군정장관과 안재홍 민정장관이 축사를 했다. 이튿날 <조선일보> 기사에는 의원 이동상황이 집계되어 있는데, 정원 90명 중 사직 27명, 제적 19명, 별세 4명, 피살 1명으로 51명 감소에 보선 8명의 증가로 폐원 당시 재적 47명이었다고 한다.

 

5-10선거로 선출된 의원들이 구성할 기구는 ‘국회’라는 이름만을 갖고 있었다. 이 국회를 통해 만들어질 국가의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 아닌 그냥 ‘국회’로 출발했던 제1기 국회가 후세에 ‘제헌국회’로 불리게 된다.

 

의원들이 선출되어 있는 이 국회를 누가 소집하고 구성할 것인가. 선거 시행의 주체가 미군정이었으므로 소집과 구성의 주체도 미군정일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 기구인 국회선거위원회(국선위)가 ‘최초의 집회’ 소집 공고를 5월 25일에 내놓았다.

 

◊ 국회선거위원회 공고

 

단기 4281년 5월 10일에 선거된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를 단기 4281년 5월 31일 상오 10시에 국회의사당에서 행하기를 결정하였으므로 이에 차(此)를 공고함.

 

단기 4281년 5월 25일 국회선거위원회위원장 노진설

 

이 공고는 같은 날자 하지 사령관의 “국회에 관한 포고”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1. 1947년 11월 14일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와 1948년 2월 27일부 국제연합소총회의 결의로 확인한 제의와 1948년 3월 17일부 국회의원선거법에 의하여 조선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조속 달성함에 관하여 국제연합임시조선단과 협의하고 또 국회를 조직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할 국민대표를 선거키 위한 선거가 본년 5월 10일에 국제연합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 하에 시행되었음.

 

2. 선거의 결과 당선인에 대한 당선통지와 일반공고가 완료되었다는 통지를 접하였으므로 본관은 재조선미국주둔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이에 재기(在記)의 권한을 국회선거위원회 위원장에게 부여함.

가. 수도 서울시에서 거행될 국회의원의 최초 집회 일자를 결정 공고할 것.

나. 최초 집회를 소집할 것.

다. 국회가 의장을 선출하여 그 기구를 결정할 때까지 그 회의를 사회할 임시의장으로 최고령의원을 지명할 것.

 

3. 1948년 3월 17일부 국회의원선거법 제43조에 의하여 선거구 선거위원회는 당선통지서를 당선인에게 발하도록 규정하였으므로 해 당선통지서는 당선인에 대한 신임장이 되고 또 국회의석을 갖는 자격을 인정하는 증서가 됨.

 

1948년 5월 25일 재조선미주둔군사령관 육군중장 존·알·하지 (<동아일보> 1948년 5월 26일)

 

포고 중 2-다항 내용에 잠깐 생각이 머문다. 임시의장을 최고령자로 하는 기준까지 사령관이 명시해준 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새로 결성되는 기구의 첫 집회에서 최고령자가 임시 사회를 맡는 것은 유력한 관습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당선자 중 최고령은 이승만인데, 하지는 포고를 통해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지명한 셈이다.

 

그런데 이 포고가 나온 뒤에 이승만은 다른 경로를 통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5월 27일 열린 ‘국회의원 예비회의’에서였다.

 

국회의원 예비회의는 27일 오후 2시부터 국회의사당에서 이승만 박사를 비롯하여 의원 141명 참석 하에 신익희 사회로 개최되었다. 국기경례 묵념이 있은 다음 국회준비위원 김상돈·김도연·장면 3씨의 경과보고와 이에 대한 질의문답이 있은 후 임시위원 선거에 들어가 무기명투표의 결과 재석 141명중 119표의 다수로 이승만 박사(독촉)가 선출되었으며 차점은 신익희(독촉) 13표, 김동원(한민) 3표, 김약수(조선공화), 이청천(대청), 김도연(한민), 이윤영(한민), 백관수(한민) 등 5씨가 각각 1표 무효가 1표이었다.

 

임시회의장에 선출된 이승만 박사로부터 간단한 취임사가 있었고 (1) 개회식 일자에 관한 건 (2) 선서문 통과의 건 (3) 초대장문 통과의 건 (4) 국회 식순 통과의 건 (5) 국회 임시사무소 설치에 관한 건 (6) 기타 사항 등 안건을 토의하였는데 31일의 전체회의에서 추후 승인을 받기로 하고 준비위원회의 보고를 기초로 각 의원의 의견을 참작하여 약간 수정한 것을 준비위원회에 일임 통과하고 동 5시 반 산회하였다. 그리고 내빈초청은 장소관계로 미국요인·국련조선위원단·재경 각국 영사·과정 각부처장·각도지사·각도선거위원회에 한정하기로 되었으며 동회에서 수정 통과한 선서문은 여좌하다. (...) (<조선일보> 1948년 5월 28일)

 

이 회의가 5월 28일자 <동아일보>에는 ‘제1차 국회준비위원회’ 또는 ‘국회소집 제1차 준비위원회’란 이름으로, 이튿날 <경향신문>에는 ‘국회준비회(의)’란 이름으로 보도되었다. 참석의원 수도 기사에 따라 ‘130여 명’도 있고 ‘142명’도 있다. 이 회의는 제도적 근거가 없는 모임이었다. 이승만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신익희가 사회를 본 것은 입법의원 해산 때 그가 의장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입법의원과 새 국회 사이에는 아무런 공식적 관계가 없었다.

 

정확한 참석자 명단은 물론 있을 수 없다. 한민당과 독촉 중심의 이승만 옹립세력 모임으로 보인다. 5월 22일 독촉 회의실에서 열린 45명 당선자의 ‘간담회’ 이야기를 그 날 일기에 적었는데, “국회 소집을 자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하여” 모인 그 간담회에서 “27일경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회 소집에 대한 국회의원 사이의 준비 협의를 하기 위하여 준비위원 12명을 선출”했었다. 그렇게 추진한 결과가 5월 27일의 모임이었다. 이승만 옹립세력이 아닌 당선자 중에도 사람 많이 모이니까 멋도 모르고 참석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세 과시’의 성격을 가진 이 모임에서 이승만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틀 전 하지 사령관의 포고로 내정되어 있던 인물을 이 모임에서 투표로 ‘선출’했다니 우스운 모습이긴 한데 그냥 웃기에는 좀 뒷맛이 씁쓸하다. 임시의장은 기능상 필요한 역할인데 아직 구성이 되어 있지 않아 투표로 의장을 뽑지 못한 상황에서 큰 반대가 없을 만한 방법으로 선정해 맡기는 자리다. 그런데 일부 당선자의 임의적 모임에서 임시의장을 ‘선출’하다니. 가식적인 ‘자주성’이기에 입맛이 씁쓸한 것이다.

 

결국 국선위 공고대로 5월 31일 오전10시에 열린 ‘국회의원의 최초 집회’에서 노진설 국선위 위원장은 하지의 포고대로 최연장자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추천하고 이 추천이 만장일치(박수)로 받아들여졌다. 이승만이 사회를 본 오전 집회에서 이승만이 의장으로, 신익희와 김동원이 부의장으로 선출된 후 오후 1시20분경에 폐회하고 오후 2시에 국회 개원식이 열리게 된다. 오전 회의에 관한 6월 1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옮겨놓는다.

 

“의장에 이 박사, 부의장 신익희 김동원 씨 피선 - 1차 본회의”

 

조선사상 초유의 민주독립국가 수립의 산실이 될 국회는 드디어 5월 31일 오전 10시 의사당으로 배정된 중앙청 대홀에서 막을 열었다. 먼저 국회선거위원회 사무총장 전규홍 씨의 사회로 개회되어 애국가 제창, 국기 경례, 묵념, 의원 출석보고가 있은 다음 국회선거위원회 위원장 노진설 씨로부터 국회 소집에 관하여 간단한 인사가 있고 임시의장 추천에 들어가 최고연령자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할 것을 부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리하여 이 박사는 의장석에 등단, “오늘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은 무엇보다 감격에 넘치는 바이며 우리는 먼저 감사의 뜻을 하나님께 기도드리자”는 발언으로 이윤영 의원의 인도로 “하나님께 의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는 맹서의 기도를 올리었다.

 

이어서 앞서 준비위원회에서 초안한 국회구성과 회의준칙을 접수한 다음 축조검토에 들어가 제3항의 부의장 1인을 2인으로 증원할 것을 동의 가결 채택하고 제4항의 임시의장 건에 대하여 삭제 혹은 보류 등의 동의 개의로 한참동안 질의응답이 있은 후 원안대로 두기로 가결 통과하고 제6항의 의석 배치 문제로 들어가 도별로 하느냐 추첨으로 하느냐에 관하여 상당한 논전이 있었으나 결국 시간관계로 정식 의장 부의장 선출 후 재토의키로 하였다.

 

그리고 제 7, 8, 9항은 일괄 통과시키고 의장 선출에 들어가 무기명단기투표를 시행한 결과 총투표 수 198 중 이승만 박사 188, 이청천 4, 김약수 2, 신익희 2, 이윤영 1로 이 박사가 정식 의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부의장 2명 선출에 있어서도 동일한 투표방법으로 시행한 결과 신익희 씨 76표 김동원 씨 69표가 나왔는데 과반수 부족으로 결선투표 결과 신익희 씨가 당선되었고 다음 투표 역시 처음에는 김동원 77표 이청천 73표로 과반수 부족이었던 관계로 결선한 결과 김동원 101, 이청천 95의 격전으로 결국 김동원 씨가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이어서 의장 이승만 박사는 부의장 신익희 김동원 양 씨를 각 의원에 소개한 후 오후 1시20분 제1차 회의를 마치었다. 그리고 국회 개원식은 주식 후 오후 2시부터 거행하였다.

 

한민당과 독촉은 힘을 합쳐 이승만을 의장으로 밀었고, 김구도 김규식도 없는 국회 안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부의장 선거에서는 한민당과 독촉이 맞섰는데, 독촉이 먼저 제1부의장 자리를 확보해 놓고도 나머지 한 자리까지 차지하려고 들었다. 의장 이승만이 국가원수로 빠져나갈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부의장 선거가 치열했던 것이다. 이 첫 번째 힘겨루기에서 한민당이 보인 약세가 대한민국 제1야당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개원식에 참석했는지는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누가 참석 않았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그런데 참석하지 않은 사실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다.

 

위원단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상해로 떠나면서 6월 초순에 돌아온다는 예정을 밝혔다. 아마 선거 후 한 달 내에 국회가 개원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개원 전에 선거에 대한 위원단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기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위원단이 떠나 있는 동안에 개원 일정을 결정하고 실행했다. 유엔을 대표해 5-10선거를 감시한 위원단은 그 선거로 만들어진 국회의 개원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거가 유엔이 납득할 만한 자유분위기 속의 공정한 선거였는지, 위원단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