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복무기간이 짧아진 요즘은 군대 풍속도 많이 바뀐 모양이다. 1970년대에는 육군사병 복무기간이 만 3년에 육박했는데, 지겹게 길었다. ‘고참’ 대우가 각별했던 것도 그 긴 시간에 변조(變調)를 좀 넣어주지 않으면 견뎌내기가 너무 힘들고, 따라서 사고 위험이 엄청나게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부대 성격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 3년차에 접어들면 공식적인 고참 대우를 받기 시작하고, 전역이 서너 달 앞으로 다가오면 ‘말년고참’이라 하여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존재가 된다. 말년 고참 자신도 ‘몸조심’을 한다. 근 3년 고이 지켜온 몸을 사회 복귀를 앞두고 다친다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또, 그만큼 은인자중하는 존재를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탈이 날지 알 수 없으니 윗사람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말년 고참을 ‘갈참’이라고도 불렀다. 이제 갈 사람이니까 관계를 정리할 대상이란 말이다. 1948년 6월, 미군정도 갈참이 되어 있었다. 진주한 지 33개월이 되었고, 철수 조건인 정부수립도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있었다. 병력은 이미 진주 초기에 비해 많이 줄어들어 있었고, 최근에는 조선에 와 있던 군인가족의 귀국 명령이 떨어졌다.

 

군대생활을 조용히 하던 고참은 말년에 별로 긴장할 일이 없다. 그런데 조그만 권력을 악착같이 휘둘러 졸병들의 원한을 많이 샀던 악질 고참은 말년이 전전긍긍이다. 누가 들이받아도 보복할 길이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말년고참이 있는 내무반에는 응징의 수위를 둘러싸고 긴장이 흐르기도 한다.

 

1948년 6월 말년의 미군정은 어떤 모습이었나? 엊그제 일기에서 하지가 국회의원들에게 ‘공함(公函)’이랍시고 보냈다가 국회에서 ‘사한(私翰)’으로 규정당하는 수모를 겪은 이야기를 했다. 이 무렵 일어난 다른 두 가지 사건에서도 당시 미군정이 조선인의 눈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총독부 고관 출신 일본인들이 조선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나돈 것이 하나의 사건이다.

 

“전범자, 전 총독부 고관들, 해방된 이 땅에 다시 출몰”

 

서른여섯 해 동안 조선민족의 피를 빨아먹다가 나중에는 세계질서를 교란시키는 전쟁을 일으키고 이를 빙자하여 젊은이들은 싸움터와 군수공장으로 끌려가고 창씨령을 나리어 성을 갈게 하고 머리를 깎게 하고 농촌으로부터는 곡식과 심지어는 볏짚에 이르기까지 깡그리 훑더듬어 빼앗아가서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오직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며 침묵의 한숨을 쉬게 하던 불공대천지원수인 일본인 그중에서도 총독 시절의 고관급들이 해방 이후 무사히 제 땅으로 돌아간 것만도 천행이거늘 건국기에 처한 오늘날 무슨 까닭인지 조선 땅에 하나씩 둘씩 자취를 나타내어 조선민족의 분격을 사는 동시에 항간에 불길한 유언비어를 빚어내고 있다.

 

그 한 가지 실례로 지난 4일 오후 부산에서 모 통신사 기자가 그전 조선총독부 재무국장 미즈다(水田直昌)를 만났는데 미즈다는 당황한 빛을 띠며 말하기를 자기 외에 학무국장을 하던 시오바라(鹽原時三郞)와 조선은행 부두취 기미지마(君島一郞)도 조선에 와 있다고 하며 조선에 온 이유와 행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었다 한다. 이밖에도 항간에는 여러 명의 그전 총독부 시절 일본인 고관이 조선에 와 있다는 풍문과 함께 상서롭지 못한 이야기가 떠돌고 있는데 특히 일본인에 대하여서 조선민족은 절치부심하는 원한을 가진 만치 만일 부득이한 사정으로 미군당국에서 데려온다면 그때마다 데려오는 이유를 명확히 발표하여 민중에게 불안한 자극을 주지 말도록 하기를 바라는 요망이 높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8일)

 

일본인 몇 명 얼굴이 보였다고 해서 이렇게 긴장하는 것이 지금 사람 눈에는 과민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십 년간 일본인의 폭압지배를 받은 직후의 피해의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전의 피해에 대한 원한만이 아니다. 일본과 남조선을 점령한 미국의 조선인 대접이 일본인 대접보다 못하다는 불만까지 겹쳐져 있었다.

 

“조선인보다 일인 우대 - INS 특파원의 조-일 군정 비판”

 

[동경 6일 발 INS 합동] 최근 서울을 방문했던 INS 특파원 리처드 씨는 조선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최근까지 미국의 적이었던 일본인은 미국에 협력하였던 조선인보다도 좋은 이지적(理智的) 대우를 받고 있다. 조선은 불행히도 미-소 양국의 열강정책의 무대화하여 있으며 미 국무성 당국은 조선인이 엄혹한 개인적 제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에게 그네들이 종래 향유하지 못하던 자유를 일상생활에 부여함으로써 일본인에게 민주주의의 덕택을 부여하려는 맥아더 장군의 대일 정책과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인은 가로를 통행할 때 희색을 보이지 않는 반면 일본인은 희색이 넘쳐 가로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은 해외에서 교양을 받은 조선 지도자를 갖고는 있으나 조선인은 자기 자신이 저능아 혹은 죄인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맥아더사령부 관할 하에 전쟁을 야기한 책임은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권리와 위엄성은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친미국가로서 아시아 반소 민주전선의 보루화하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 국무성의 대조선 정책은 민주주의화한 조선의 장래 중요성과 조선인의 미국관에 대한 고려를 등한시하고 있는 듯하다. 조선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지의 하나이다. 현재 허다한 남조선 인민은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북조선 인민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입국하려고 하고 있다.

 

또 맥아더사령부는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지 않고 있는 반면 조선에서는 밤 10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또 조선주둔 미군은 조선인과 사회적 교제를 못하고 있는 반면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인과 미 군인 간의 사상교류를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또 조선에서는 50대 1의 비현실적인 미화 교환율이 지정되고 있는 반면 일본에서는 실제성 있는 500대 1의 시세가 시인되어 일본 무역은 조장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무역 발전을 자랑하고 있으나 조선 상품은 제반 제한 금지로 말미암아 무역 진흥이 불가능한 실정에 있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7일)

 

미군의 일본인 편애에 대한 조선인의 의심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상륙하는 인천부두에서 일본 경찰이 환영인파에 발포하여 사상자를 낸 일이 있었는데도 미군정은 정당한 치안 행위로 인정하고 불문에 붙였다. 그리고 총독부의 조선인 통치를 물려받으면서 몇 달 동안 일본인 간부들의 도움을 받았다. 갓 해방된 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외세’로서 미군의 성격을 의심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제 전 총독부 고관들의 모습이 보인다니 ‘갈참’이 된 지금까지도 미군정이 조선인 통치에 일본인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널리 일어난 것이다. 딘 군정장관이 서둘러 해명에 나선 것은 이런 불온한 분위기 때문이었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바로 그날로 언론계의 반박이 들어왔다.

 

우리겨레의 고혈을 착취하던 전 총독부 고관들이 내조하여 이 강산을 활보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전 겨레의 격분을 사고 있는 이때 9일 딘 군정장관은 일인 내조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모 통신기자가 6월 4일 부산에서 미즈다라는 일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였다는 보도는 허보이다. 이 허보로 인하여 조선 언론기관이나 개인 간에 비난이 자자하였다. 이것은 허보 또는 오보의 전파로 야기되는 혼란과 흥분의 불행한 일례이다. 재일 미군당국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문제의 일인은 모 기자가 부산에서 만났다는 날에는 동경에 있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군정당국에서 미즈다의 내조를 요청한 일도 없으며 또 같이 보도된 미즈다 이외의 기타 일인 2명에 대하여도 요청한 사실이 없다. 본관이 작일 발표한 바와 같이 미군당국은 조선국민을 해하는 일인을 조선에 불러올 의사는 전연 없다.” (<서울신문> 1948년 6월 11일)

 

전 총독부 시대의 일인고관이 내조하여 당당이 우리 땅을 활보하고 있으며 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하여 일반의 의혹이 점점 심해 가고 있는데 대하여 9일 딘 군정장관은 철저 조사 후 발표할 것을 약속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나 10일 군정장관실에서는 조사의 결과 전연 허보로 판명되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동 발표에 의하면 미즈다의 내조도 근거가 없고 또 동시에 보도된 시오바라·기미지마의 2명도 요청한 일이 없다고 발표되어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다시 어떠한 다른 의혹을 자아내고 있다.

 

기미지마에 관하여서는 지난번 사임한 안 민정장관이 다녀간 일이 있다고 기자단 회견석상에서 언명하였고 또 그전 군정장관에 물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군정장관실 모 씨가 역시 중앙청 기자실에서 기미지마와 오쿠무라라는 자는 왔다 갔다고 언명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미즈다 내조에 관하여도 이 문제를 보도한 기관에서는 내조를 확인했다고 하고 있어 앞으로의 진전은 극히 주목을 끌고 있다.

 

◊ 조선통신 본사 담: “이번 기사에 관하여 공보부에 가서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고 돌아온 길인데 방금 이 기사를 보도한 부산 기자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그 기사 내용에 허보가 없을 뿐더러 그 왜놈들의 사진까지 취재 당시에 찍어두었으니 틀림없다는 확답이 왔군요.” (<조선일보> 1948년 6월 11일)

 

의혹이 가라앉기는커녕 확산되기만 하자 6월 15일 공보부장과 경무부장 연명으로 이 소문이 남로당 세포인 신문기자가 만들어낸 허위선전이라고 발표했다.(<동아일보> 1948년 6월 16일) 그러나 이 발표는 씨가 먹히지 않았는지 이튿날 하지가 직접 특별성명을 내야 했다. 이 성명에서 하지는 크레믈린이 “미국의 위신을 손상시킴을 의도하는 신노선을 발견”한 것이라며, 공산당의 선전이 이런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1. 미국은 목하 일본을 군국(軍國)으로서 재건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것. 이것은 미국 당국이 최근 일본인 자신의 의식을 자급하여 이 이상 나머지 세계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게 하려는 인도적 계획안을 발표한 고로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점차 신빙케 된 것으로서 전연 허언이다. 이 계획은 실재적으로나 또는 잠재적으로나 일본의 군사력을 복구시키는 문제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이는 다만 세계평화에 공헌하며 인류의 생존을 원조함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2. 주조선미군사령부는 목하 전 조선총독부 고관들을 비호하며 또한 이들을 사용 중이라는 것. 이것은 공산당 선전에 빠지기 쉬운 조선인들에게는 좋은 화제이다. 그러나 그중에 내지 그 의미하는 바에는 하등의 진실도 없는 것이다. 본 사령부는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선에 일본인 전 총독부 관리가 있음을 모른다.

 

3. 제주도 평화회복에 무장한 일본인이 참가 중이라는 것. 이것은 제주도에 격렬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 공산당이 그들의 형제자매 살육계획에 조력시키고자 약간의 일본인 공산당원을 수송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전면적으로 미군 점령 하의 조선에 있어서는 제주도나 어느 곳을 막론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일본인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7일)

 

당장 문제는 3개항 중 제2항이다. 하지는 “조선에 일본인 전 총독부 관리가 있음을 모른다”며 현재형을 썼다. 앞서 들어온 적이 있었느냐 하는 질문에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 옮겨놓은 딘의 6월 9일 담화문에는 “조선국민을 해하는 일인을 조선에 불러올 의사는 전연 없다”고 했다. 조선국민을 해하지 않는 일인이라고 생각되면 불러올 수 있다는 말이다. 정병준은 <독도 1947> 240-241쪽에 이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미군정이 일본인 고관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소문은 강력한 반일감정과 반군정-반미 감정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것은 진주 후 미군이 한동안 일본인 관료들을 그대로 활용했던 과거의 정책과 연결되면서 나름대로 있음직한 일이라는 의혹을 자아냈다. (...) 한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존재는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그림자는 곧바로 침략 혹은 한국 이익의 침해로 해석되었다. 사상적-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대립은 반일과 민족이익 수호라는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었다.

 

전 총독부 고관들이 잠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독당과 민독당을 비롯한 총 11개 정당이 6월 15일 반일제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해 반일투쟁을 천명하며, 미국의 일본 재무장 정책을 비판했다. 주한미군 정보당국은 미군 감독하에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한다는 소문이 만연하고 있으며, 제주도 반군진압에 일본군이 활용되며, 독도폭격사건의 조종사가 일본인이라는 얘기가 신뢰를 얻고 있다고 적었다. 한독당 선전부는 미국이 일본을 재무장시키기 위해 특공대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독도폭격사건이 “그 왜적들의 소위(所爲)”가 아닌가 심히 우려되고 격분되는 바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건, ‘독도폭격사건’이 나온다. 1948년 6월 8일 정오 가까운 시각에 독도 인근에서 조업하고 있던 수십 척의 어선이 ‘정체불명’의 비행대의 폭격을 받아 십여 명이 목숨을 잃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6월 11일 <조선일보>에 첫 기사가 나간 후 며칠 동안은 비행대가 ‘정체불명’으로 계속 보도되었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피해 어민의 증언으로 미국 비행대라는 사실에 애초부터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에 주둔하는 미공군 비행대가 독도에 와서 조선 어민들에게 폭격을 퍼붓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니 ‘일본인 조종사’ 설까지 나온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겠다.

 

 

Posted by 문천

 

1948년 6월 2일자 <경향신문>의 “헌법을 신중 선택, 통일의 길을 열어두라 - 하 중장 국회에 공함(公函)” 기사에는 전날 하지 사령관이 막 개원한 국회의 의원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공함’이란 이름으로 게재되었다.

 

“본관은 귀하가 조선정부 조직과 조선국가통일(사업)에 참여하도록 국민의 대표로 피선된 것을 축하합니다. 귀하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것은 귀하도 주지하시는 바요 또한 그 책임을 귀하와 귀하가 대표한 양민은 큰 광영으로 알고 잘 이행하리라고 본관은 확신합니다. 이번 선거에 가장 중대한 점은 조선의 운명과 장래를 조선인 손에 일임한 것입니다.

 

남조선에서 당선된 제위가 어떠한 형식과 방법으로 국사처리를 시작하느냐 하는 것이 조선국민 장래에 중대 항구한 영향이 미칠 것입니다. 미국의 정책은 시종일관하게 외국의 지배가 없는 민주적 정부를 가진 통일독립조선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동일한 정책은 국제연합 총회에서 43대0으로 조선국민정부 수립의 제일보적인 조선 내 선거를 감시하며 조선정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당선된 대의원들을 협조하는(결의문을 표결할 때에) 국제적으로 반영된 것입니다. 이 정책은 조선 3천만 국민의 희망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남조선에서 시행이 된 자유선거가 38이북에서 동시에 시행되지 못함을 우리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미국과 국련은 자유선거로 피선된 북조선대표가 남조선대표와 합석하여 진정한 국민정부를 수립하며 남북을 통일하여 국가를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은 본관과 미국정부와 수차에 걸쳐 본관에게 표시한 국련조선위원단의 희망으로 이번 새로 당선된 대표 제위가 전력을 다하여 참된 민주적 정부를 세워 조선을 통일하였으면 합니다.

 

본관은 국회의원 제위는 개인으로나 정당원으로 이 목표달성을 어떻게 하였으면 된다는 이념을 가지고 계실 줄 압니다. 이에 관련하여 여러분이 정부조직을 토의 시작하려고 집합할 때에 가급적 속히 고려하여야 할 이하 3개안을 제의합니다.

 

(1) 남북통일의 길을 열어두기 위하여(국회가 소집되면) 곧 결의문을 통과하여 북조선의 100명(혹은 인구비례로 계산된 수)의 석(席)이 국회에 공석으로 있어 북조선에서 합법적으로 피선된 대표동포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표명할 것.

 

(2) 국회에서 조속히 국련조선위원단과 연락을 취할 연락위원을 임명하여 조선독립정부 수립의 편의를 도모하여 촉진하라는 특수한 사명을 가진 그 위원단과 연락할 것. 제위가 조직할 정부로서 세계국련의 찬동을 얻게 되기를 물론 희망할 터인데 이런 연락위원은 1947년 11월 14일부 국련 결의문에 남아 있는 조항을 실현시키는데 있어 국련과 조선국회에 가장 유용할 것입니다.

 

(3) 국회로서 조선국민의 요구와 심리에 부적당한 형태의 정부를 비치한 그런 류의 헌법을 경솔히 채택함을 피할 것. 헌법은 국가의 기초라 가장 신중 주도히 고려할 것.

 

본관은 조선국민대표로 당선된 제위에게 성공을 축복하며 주조선 미국수석대표의 자격으로 확신하는 바는 제위의 일생을 통하여 숙원하던 통일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있어 본관은 계속하여 조선국민을 각 방면으로 협조하려 합니다.”

 

국회의 개원으로 남조선의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미군정의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다. 5-10선거를 시행한 것은 미군정이지만, 만약 이 선거가 미군정 주장대로 민의 수렴에 성공한 것이라면 당선된 의원들의 집합인 국회는 적어도 남조선 지역에서는 정치적 정통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국회의 손으로 헌법을 만들고 정부를 조직한 다음 미군정으로부터 권력과 책임을 넘겨받기 위한 제반 절차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국회는 선거를 통해 실질적 정통성을 이미 확보해 놓고 있는 것이다. 미군정과 새 국회는 상하관계 아닌 협력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주둔군사령관이 개원하는 국회의 전 의원을 상대로 ‘공함’을 보내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당시 상황에서 국회와 미군정의 관계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관계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 앞으로 문서를 보낼 수는 있어도, 입법부 구성원들 앞으로 ‘공함’을 보낸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행동으로 보인다. 입법의원이 군정청의 부속기구였던 시절의 버릇을 고치지 못한 것이다. 국회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하 중장의 ‘공함’ 운(云)에 이론 - 국회본회의 제3차 경과”

 

국회 제3차 회의는 2일 오전 10시부터 국회의사당에서 의장 이승만 박사의 사회로 개회되었다. 먼저 국민의식이 끝난 후 제2차 회의록 낭독이 있었는데 동 회의록 중 하지 중장의 ‘공한’이라는 어구를 수정하자는 발언이 있자 동 어구 해석 문제가 논란의 초점이 되었다. 즉 진헌식 의원으로부터 “하지 중장의 서한은 공한이 아니라 사한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발언이 있자 서정희 의원으로부터 “누구의 지시를 기다릴 것 없이 이북 동포에게 국회 성립을 전달하자”는 발언이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이 의장으로부터 “그렇잖아도 우리 국회는 독촉 또는 한민당이 운영하느니 하는 풍설이 있는데 하지 중장의 서한을 ‘공한’으로 인정한다면 국회는 하지 중장의 의견대로 운영된다는 오해를 살 것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중대발언이 있었다. 다음 동 회의록을 약간 수정 통과한 후 (...) (<경향신문> 1948년 6월 3일)

 

이렇게 해서 하지 사령관이 체면을 구기는 결과가 되었는데, 공한이든 사한이든 이 편지에서 하지가 제기한 3개항의 내용을 살펴본다. (1)항 ‘가능지역 선거’의 한계를 한 차례 확인해두는 것은 괜찮은 일이고, (2)항 유엔과의 관계를 강조한 것도 미군정 입장에서 적절한 권고다. 그런데 (3)항 헌법 제정 방향을 왈가왈부한 것은 망발이다. 공한이건 사한이건 국회에 대해 이런 차원의 잔소리를 늘어놓는 데서 하지와 그 보좌진의 의식수준이 드러난다.

 

새 국회의 가장 급한 일은 헌법, 국회법, 정부조직법 제정 등 정부수립을 위한 작업이었다. 6월 3일 오전의 제4차 회의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30인)와 국회법 기초위원회(15인)를 구성한 후 휴회로 들어가고 오후부터 두 분과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갔다.

 

“헌법 등 기초 착수 - 전문위원 10명을 선정”

 

국회법 및 헌법 정부조직법 등을 기초하기 위하여 국회 본회의는 3일 오전 회의로써 일단 휴회하고 오후부터는 각 분과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즉 3일 오후 2시부터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는 국회의사당에서, 국회법 기초위원회는 의원실에서 각각 시간을 같이하여 열렸는데 이 날 국회법기위에서는 동 분과위원장으로 서정희(한민) 의원을 선출하고 극히 간단히 회의를 끝마쳤다.

 

그러나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에서는 위원장에 서상일(한민) 의원과 부위원장에 이윤영(조민) 의원을 선출한 다음 국회임시준칙 제7조 후항에 의한 전문위원으로 학계 사법계 경제계 등 각 부문의 권위자를 망라하여 다음 10명을 선정하였다.

 

유진오(고대 교수) / 고병국(전 법대 학장) / 권승렬(사법부 차장) / 노진설(대법관) / 한길조(변호사) / 윤길중(국선위 선전부장) / 노용호(국선위 사무국 차장) / 김용근(국선위 계획부장) / 차윤홍(국선위 전문위원) / 임문환(중앙경제위원) (...)(<경향신문> 1948년 6월 5일)

 

대략 같은 내용을 보도한 같은 날 <동아일보> “양 분과위원장 결정 - 헌법 기초 업무 진행” 기사 끝에는 기사 끝에 유진오의 역할을 부각시킨 대목이 붙어 있다.

 

(...)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국가 건설의 기초가 될 헌법은 과거 30여 년간 전문적인 연구를 계속하여 오던 사계의 대권위자 유진오 씨가 초안한 것을 중심으로 토의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동 씨가 초안한 법안은 프랑스헌법과 제2차 대전 후 일본에서 제정한 일본헌법 등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하는데 일본헌법보다는 훨씬 사회화하여 초안된 것이라 한다.

 

전문위원들은 위촉받자마자 헌법 초안을 내놓았다. 헌법 제정은 건국을 위한 필수과제였으므로 민주의원에서도 입법의원에서도 그 준비를 위한 노력이 있었다. 5-10선거를 앞두고 진행된 체계적 준비가 있었던 사실은 아래 기사로 보아 분명하다. 그 경위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앞으로 파악되는 것이 있으면 보완하겠다.

 

“국체는 민주공화국으로 - 3권 정립(鼎立), 대통령임기 6년 - 양원제의 창설에 책임내각”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지난 3일 오후와 4일로써 제1독회를 끝마치고 5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2독회로 들어가 축조토의를 시작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 기초안은 2개월에 걸쳐 차윤홍 김용근 노용호 유진오 노진설 등 전문위원 5씨가 5-10선거 전부터 준비하였던 것으로 전문은 10장 108조로 되어있는 것인데 그중 중요한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제1조에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고 국체를 규정.

2. 민의-참의원제를 창설.

3. 제2장에 인민의 권리가 규정되어 있는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 권리를 강화하고 “주권은 인민에게 있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4. 대통령을 행정수반으로 하고 임기는 6년으로 되어 있으며 책임내각제로 되어 있음.

5. 3권분립을 명확히 하고 법률 심사권은 대법원장에게 줌.

 

이상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책임내각제를 선택한 것은 프랑스의 헌법을, 그리고 대법원장의 권한을 강화한 것은 미국헌법을 참고한 것으로 동 초안의 입안 의도는 민주정신에 입각한 것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한다. 그런데 동 초안이 본회의에 상정되려면 예정 기일이 내 8일보다 2, 3일 지연되리라고 보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6일)

 

같은 날 같은 신문에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 위원인 조헌영의 헌법에 관한 개인 의견이 칼럼 형식으로 실렸다. 경북 영양 출신의 조헌영(1900-1988)은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한의학 연구에 몰두해 근대한의학 발전에 공헌한 특이한 경력의 인물이다. 제헌의회 출범 때까지 한민당에 속해 있었지만 곧 탈당하고 반민특위 활동에 주력했다. 전쟁 중 납북된 후에도 한의학 연구 등 많은 업적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시인 조지훈이 그 아들이다. 칼럼 내용도 흥미롭거니와 불운한 시대를 만난 한 걸출한 인물의 흔적을 아끼는 마음에서 여기 옮겨놓는다.

 

“헌법 제정에 임한 사안(私案) - 조헌영”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나라는 민족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국가이니 헌법은 이러한 정신으로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몰각하고 계급을 토대로 해서 독재주의를 실시하려는 정치형태는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또 국민 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민 전체의 이익을 몰각한 군주전제나 귀족전횡은 말할 것도 없고, 자칫하면 그리로 흘러가기 쉬운 관료독선이나 재벌농단의 정치가 되지 않도록 국민의 모든 권리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것을 충분히 보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정치적으로 부여된 국민의 권리가 공문화(空文化)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국민이 평등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된 헌법이라면 사소한 조문 상 차이 같은 것은 크게 문제로 하지 말고 하루빨리 이 법안을 통과시켜 시급히 정부를 수립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요망하는 몇 가지 의견을 말해보기로 한다.

 

1. 국호는 ‘고려민국’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그 이유는 첫째 ‘고려’는 전 세계가 통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호인 것, 둘째 고려는 우리나라가 외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주독립한 때의 국호인 것, 셋째 고려라는 국호에는 민족적으로 반감 대립감 등이 없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한’은 3한으로 분립된 때 쓰던 국호인 것, 또 ‘대한’이란 ‘대’ 자는 제국주의를 표상하는 스스로 존대하는 것인 것, 해방 후 ‘대한’이란 국호에 까닭도 모르게나마 반감을 가진 민중이 적지 않은 것,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많은 것 등으로 ‘한’이나 ‘대한’은 ‘고려’보다 못한 감이 있다.

 

또한 ‘조선’은 단군조선을 하나 빼어놓고는 기자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이다. 중국의 지배를 받던 때의 국호요 더욱 왜정 36년간 나라 없는 이 땅의 칭호가 ‘조선’인 것을 생각할 때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은 조선을 국호로 하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방 후 이 땅을 소연방으로 편입하려는 인민공화국이 또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한 데는 말할 여지도 없다.

 

2. 대통령의 권한과 내각의 책임에 있어서는 미국식과 프랑스식이 있는데 이것도 우리나라의 실정을 고려해서 순 미국식도 아니요 순 프랑스식도 아닌 제도를 택해서 책임내각제를 쓰되 정변만 반복해서 혼란을 조장하고 국정이 말이 못 되게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될 것이다.

 

정체에 있어서 3권분립제 같은 것을 쓰는 것 같은 것은 일반의 상식이나 말할 것 없고 입법기관은 양원제를 찬성하나 국토를 다 찾고 민론이 귀일할 때가지는 신중을 기한다는 것이 도리어 전신불수가 될는지도 모르니 당분간은 일원제로 나가는 것이 좋을 줄 안다.

 

3. 행정기관에는 고시원 감찰원 계획원 같은 것을 구색으로 두지 말고 그 기능을 강력적으로 발휘해서 인재를 공정히 등용하고 관기문란과 사회의 부패를 철저히 방지하고 국리민복을 증진할 새로운 현명한 계획을 세워서 착착 실행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안다.

 

 

Posted by 문천

 

지난 금요일(5월 31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오찬 자리에서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을 북한 측에 미루고 당국 간 대화에 앞서 민간의 대북 접촉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朴대통령, 취임 100일 맞아 대북 '강경론' 눈길”) 이 뜻에 따라 개성공단 재개나 6-15 기념행사를 위한 민간 접촉을 정부가 불허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신뢰 프로세스’ 이행의 의지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측이 이 의지를 무시하고 개성공단에서 “생각지도 않게 모든 합의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몇 주일 전 나는 진행 중이던 군사훈련을 장차 조금이라도 축소할 제스처를 보인다면 ‘신뢰 프로세스’의 실마리로서 큰 효과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적은 일이 있다. (“박근혜만이 '한반도 핵전쟁' 막을 수 있다”) 그런 제스처는 없었고, 북한 측에서는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 의지에 대한 믿음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신뢰 프로세스’의 실마리를 풀 의지가 대통령에게 있다면 관계 경색의 책임을 북한 측에 미루는 데 너무 힘을 들이거나 민간 접촉을 가로막는 것이 과연 현명한 태도일지 의문이다. 민간 접촉을 비롯해서 접점이 많아야 실마리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책임 문제를 놓고 대립의식이 너무 강하면 실마리가 설령 나타나고 놓쳐버릴 위험이 큰 것 아닌가? ‘신뢰 프로세스’를 대통령이 전매특허처럼 독점하려 한다면 그것은 상대가 없는 신뢰, 혼자서 자기 자신만을 믿는 신뢰에 그치고 말 것이다.

 

같은 날 익명의 ‘정부 당국자’가 “북한 군부가 5년 주기로 실시하는 개성공단 총화를 실시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 자리에서 개성공단이 북한 체제 유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취지의 비판적 의견이 다수 개진되며 '폐쇄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는 발언이 몇몇 매체에 실렸다. (<Chosun.com> “북 군부, 연초부터 개성공단 폐쇄로 작심하고 몰고 갔다”) 개성공단 폐쇄를 비롯한 남북관계 경색이 북한 지도부의 의지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정황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익명으로 나오는 이런 추측성 발언에서 정부 전체가 ‘북한 책임론’에 매달려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만약 정부에게 대화 의지가 있다면 관계자의 이런 발언을 통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65년 전 북한의 송전 중단을 둘러싸고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1947년 6월 남북 간에 맺어진 전력협정은 1947년 6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이렇게 보도되었다.

 

“전력문제 해걸 - 양 대표 간 협정 수(遂) 성립 - 남은 물자, 북은 8만 킬로 송전”

 

해방 이후 1945년 8월 16일부터 1947년 5월 31일까지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에 공급되어 온 8억3767만8737킬로와트의 전력에 대한 1633만4735원으로 추산되는 대가의 지불과 금후의 조치를 원만히 해결짓고저 지난 13일부터 동 18일까지 남북조선 대표와 미소 양국 대표가 평양에 회합하여 상의한 결과 남조선에서 일본으로부터 배상받는 기계와 기타 물자로 지불하도록 상호간 협정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북조선에 지불된 기계와 기타 물자는 북조선 각지의 발전소 시설을 확충 개선케 될 것이므로 남조선으로 현재의 3만5천 킬로와트에서 8만 킬로와트씩 송전을 증가하며 또 완전 복구된 후에는 앞으로 10만 킬로와트까지 전력을 증가하여 주기로 합의를 보았으며 지불될 기계와 기타 물자는 오는 8월까지에는 북조선에 교부하기로 되었다.

 

금년 6월 1일부터 명년 5월 31일까지의 기간 중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공급할 전력요금은 매월 계산하게 되는 동시 동 협정이 만기되기 1개월 전에 쌍방에서 이의가 제기되지 않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1개년 동 협정이 연장되기로 되었다 한다.

 

이 협정의 정확한 내용을 찾아보지 못했지만 1948년 5월의 송전 중단 사태 때 양측에서 나온 주장 속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 협정에는 남북의 조선인 대표와 미소 양군이 모두 참여했다. 이 협정 전, 즉 1947년 5월 31일까지의 송전 대가는 액수가 결정되어 몇 달 내에 지불하기로 약속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송전 대가는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남측은 1948년 4월까지 지불이 약속된 대가의 일부만을 지불했다. 북측이 20퍼센트 미만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미군정에서는 훨씬 더 많이 지불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래도 약속의 절반에 미달하는 액수였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새 협정의 주체가 되겠다고 하는 것을 미군정이 거부해서 새 협정이 맺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측은 5월 10일 평양방송을 통해 5월 14일까지 “전력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의 평양 방문을 요청하면서 불응할 때는 송전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러 아무도 평양에 가지 않았고(미군정에서 가로막아 못 간 것인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5월 14일 정오에 송전이 끊어졌다.

 

이 사태에 임해 5월 15일자 <경향신문>에는 조선전업사 측의 낙관적 전망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별 통양(痛痒) 없다 - 조선전업사 측 담”

 

14일 오전 12시부터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은 절단되었으나 당일 오후 1시부터는 벌써 당인리발전소에서 발전이 되어 서울시내를 중심으로 근방의 송전은 아무 이상이 없다. 그리고 이 날 오후 1시부터는 인천 미군 발전함으로부터도 발전이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이 절단된다 하여도 인천 부산 등지에 있는 미군 발전함을 비롯하여 청평 영원 섬진강 당인리 등 7개소의 발전소는 한 시간 이내에 발전을 개시할 수 있으며 이 전력을 합하면 남조선 일대에 약 8만 킬로와트의 송전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소 부족되는 곳은 있으나 남조선 산업기관에 이르기까지 별 지장이 없다.

 

이남의 발전시설을 모두 가동하면 8만 킬로와트를 생산할 수 있으니 북으로부터의 송전 중단이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랬나? 송전 중단이 2주일째 되는 5월 28일자 같은 신문에 실린 기사는 이와 전혀 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한심타 발전량 점차 감소 - 그러나 긴급방면은 모두 확보된다”

 

북조선으로부터 송전이 단절된 지 2주일이 경과함에도 불구하고 쌍방의 태도는 서로 강경하여 언제나 송전이 복구될 것인지 이렇다 할 교섭 성과를 보여주지 않아 애꿎은 백성만 애태우고 있다. 남조선의 전력으로써 자급자족을 못할 것이라면 무슨 선책이 있어야만 할 것인데 그와 반대로 남조선 발전량은 점차 감소의 일로를 걷고 있고 이로 말미암아 생활필수품의 가격은 고등하여만 가니 우선 전력문제 해결이 일일이 천추로 기다려짐이 요즈음 백성의 심경이 되고 있다.

 

현재 남조선의 최대 수요량은 12만 킬로와트로 되어 있으며 적어도 7만5천 킬로와트는 확보되어야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남조선 수력화력발전소의 총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전한다면 이 수요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는데 기계 고장과 석탄 부족 등 여러 가지 난관으로 부득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나마 비까지 내리지 않아 2만 킬로와트 청평발전소는 27일부터 4천 킬로와트밖에 발전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한다. 각 발전소의 발전량을 26일 현재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청평 8,000 / 섬진강 10,000 / 영월 18,000 / 부산발전함 8,000 / 부산화력 2,000 / 인천발전함 2,000 / 당인리 7,000 합계 55,000

 

이 숫자는 남조선 최소수요량보다 2만 킬로와트, 최대수요량보다 2분지 1이 못되고 있다. (...) 서울지구만 보더라도 최대 7만 킬로와트, 최소 4만5천 킬로와트는 확보되어야 하는데 경전에서는 2만2천 킬로와트로 치안 수도 교통 통신 관계 특수시설 등에만 겨우 확보할 정도라 한다. 이로써 의식주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는 방직공장 정미소 등에 종전의 3분의 1의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정전이 되는 때가 더욱 많아 생산을 하지 못할 경우가 빈번하다 한다. (...)

 

이런 심각한 사태를 미군정은 왜 초래하고 방치하느냐는 불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 사령관이 코르트코프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를 5월 22일 공개한 것은 이 불만에 대한 대응일 텐데, 대응이 잘 되었을 것 같지 않다. 5월 23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편지 내용 중 앞부분을 옮겨놓는다.

 

“친애하는 코르트코프 장군,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하여 북조선으로부터의 남조선에 대한 송전은 단절되었습니다. 북조선을 관리하고 있는 소련사령관으로서의 귀하는 귀하의 점령지대 내의 제반 조치에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이 단전은 조선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거 5월 10일의 자유선거에 있어서 독립을 갈망하는 의사를 표시한 남조선 내 2천여만 주민의 행동에 대한 보복적 수단으로 남조선 국민을 전율케 하려는 일 정치적 술략으로밖에 볼 수 없는 금반 고압적 조치에 대하여 귀하에게 항의를 제출하는 것은 본관의 의무입니다.

 

본관은 송전에 대한 정당한 지불을 위하여 누차 노력한 데 비추어 금반 귀하의 조치가 전연 부당한 것이며 전력 미불액에 관한 귀하의 성명은 그 조치 배후에 있는 의도를 은폐하려는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성명을 조선 국민은 물론 전 세계 자유국가를 기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귀하가 과거 누차 서면으로 본관이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라는 요구도 역시 이 종류에 속한 것입니다. 귀하가 잘 알고 또 귀하가 누차 서면으로 발표한 바와 같이 양 점령군사령관은 세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독립조선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각 점령지대 내에 있어서 책임이 있습니다. 작하 개최되었던 전력회담에 있어서는 각 사령부에서는 동 회담에 조선인 대표자를 참가시켰으며 그들의 결정은 미소 양 대표가 재검토한 후 승인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의 회담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관의 확호한 주장입니다. (...)”

 

첫 문단에서 송전 중단 조치를 5-10선거에 대한 “보복적 조치”로서 남조선 주민을 위협하는 하나의 “정치적 술략(術略)”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요구도,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라는 요구도 모두 이 술략의 “의도를 은폐하려는 일종의 구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고통받고 있는 주민들을 이런 주장으로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정말로 생각한 것일까? 엄청난 바보 아니면 대단한 악질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하지 사령관보다는 똑똑하고도 착한 사람이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송전 중단 상태를 살펴보면서 정태헌이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202-203쪽에 미군정의 경제정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놓은 내용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해방 후의 급선무는 각종 자원과 노동력, 생산력을 고갈시켰던 식민지자본주의 유산을 극복하고 재건정책을 통해 일제하에 억압되었던 잠재력을 평화산업으로 집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점령당국인 미군정이 세계 냉전체제에 대응하고 동아시아의 전후처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남한을 일본 등에 비해 주변적 변수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따라서 남한의 경제재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적산기업에 대한 부실한 관리는 생필품 부족을 가중시켰습니다.

 

적산 혹은 귀속재산이란, 해방 때까지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갖고 있던 기업체, 부동산, 유무형의 동산과 주식 및 지분 등을 말합니다. 1941년 말 현재 일본인 회사의 자본이 91%나 될 정도로 조선 경제는 압도적으로 일본 자본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적산공장이 원자재 결핍, 대체설비의 어려움, 자금부족 등과 더불어 미군정의 관리부실로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미군정이 임명한 관리인도 책임감이 떨어졌고요. 일제시기부터 축소재생산이 불가피했던 상황에서 해방 후 자재와 자금까지 조달되지 못하면서 생산 회복이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이 기계시설이나 재고원료를 팔아치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고, 일본인 기술자를 잔류시켜 공장가동에 나서도록 하지도 않았습니다. 방임된 초인플레 속에서 생산적 투자보다 물자난에 편승하여 생산시설과 자재를 불법으로 내다 팔아 축적을 꾀하는 투기꾼들이 날뛰어서, 경제재건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원조물자가 들어와도 생산적으로 활용되기 어려웠습니다.

 

(...) 또한 북한과의 경제단절이 남한 경제에 미친 여파도 컸습니다. 남북교역 규모는 1949년 3월 국방부가 전면중단시킬 때까지 대외무역에 필적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반출액에 비해 반입량이 2배 이상이었습니다. (...) 중공업이나ㅑ 전력시설이 집중된 북한의 경제재건 입지가 남한보다 유리했기 때문에 교역단절에서 오는 충격도 남한이 훨씬 커서, 북한의 송전중단(1948. 5)으로 생산고의 3/4이 축소될 정도였습니다.

 

경제 분야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늘 미안했는데, 정태헌의 이 책을 권한다. 알기 쉽게 쓰고 균형도 잘 잡힌 서술이다. 해방공간을 다룬 분량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대략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