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건국 저지를 위한 남북협상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오늘날의 한국인은 대개 김구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김구가 남북협상 운동에 나선 것은 1948년 1월말 유엔위원단에 의견을 제출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 남북협상 운동을 추진해 온 것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간파였다.

 

해방공간의 정치노선을 ‘좌익’, ‘우익’, ‘극좌’, ‘극우’ 등의 용어로 표현하는 데는 정확성에 문제가 있다. 그 동안 <해방일기>에서도 이런 용어를 쓴 기준에 스스로 문제를 느끼는 대목이 꽤 있다.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일단 좌익과 우익의 구분에 있어서는, 민족주의 과제를 앞세우는 입장을 우익, 사회경제 과제를 앞세우는 입장을 좌익으로 본다. 해방 조선 사회에는 양쪽 과제가 다 주어져 있었으므로 원론적 의미의 좌익과 우익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없었다. 여운형을 비롯한 많은 좌익 인사들도 민족주의 과제를 존중했고 김규식, 안재홍 등 대부분 민족주의자들도 사회경제 과제를 인정했다. 좌우합작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했던 풍토였다.

 

그런데 이 합작 가능성을 부정하는 두 개의 세력이 있었다. 두 세력이 각각 우익과 좌익을 표방했으므로 극우와 극좌라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용어의 정확성에 문제가 생긴다. 극우의 경우 이승만과 한민당의 민족주의 표방은 좌익을 배척하는 수단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 아니다. 해방 전의 활동도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것이었고, 해방 후 추구한 노선도 반민족적인 것이었다. 극좌 경우는 원론적 좌익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념에서 일탈하는 패권주의 성향이 있었다.

 

이러한 배신과 일탈이 널리 일어난 것은 외세에 의존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이남에서는 과거의 친일파가 미군정의 힘에 의지해 민족국가 수립을 회피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편 좌익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발판으로 좌익 내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파벌투쟁이 남북 양쪽에서 일어났다.

 

1945년 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나온 ‘신탁통치’를 둘러싼 극좌와 극우의 극한대립이 조선 정치계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남에서 이를 거부하는 좌우 온건파가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에 나섰다. 여기 나선 사람들을 ‘중간파’라 부르는데, 민족주의를 거부하거나 경시하는 극우-극좌와 대비시킨다면 이 중간파가 곧 진정한 민족주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여름 이후 이뤄진 극우-극좌-중간파의 틀에 맞춰지지 않는 기형적 위치에 김구는 서 있었다. 한민당이 친일파 지주정당이라는 사실은 1946년 10월 합작 7원칙 거부를 계기로 여지없이 확인되었다. 이승만이 민족국가 건설에 뜻이 없다는 사실은 1946년 6월 ‘정읍 발언’ 이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김구가 어떻게 그들과 1947년 말까지 보조를 함께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김구는 1947년 말까지도 이승만을 받들어주면서 그 대가로 조직을 넘겨받으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 노력의 좌절이 확실해진 뒤에야 남북협상 노선으로 돌아섰다. 돌아선 이후의 행적과 면모가 후세에 강렬하게 전해져 한국 민족주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지만 귀국 후 2년간, 1947년 말까지의 행적에는 민족주의자로서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 이 점은 지금 더 따지기보다 지금부터 그가 걷는 길을 살펴보며 계속 생각해 보겠다.

 

1947년 가을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기미가 짙어지자 중간파는 남북협상을 바라보며 민족자주연맹(민련)을 결성했다. 민련 결성에서 눈에 띄는 점은 좌익 인사들을 전면에서 배제한 것이다. 이남에서 극우세력의(지금부터 ‘극우’는 분단건국 추진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분단건국 노선에 저항하는 남북협상 노선에는 중간파와 좌익이 모이고 있었는데, 민련은 좌익의 민전과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혼선을 피하고 극우세력의 모함을(남북협상파는 좌익의 꼭두각시라는) 차단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민련에 뒤이어 김구의 한독당이 남북협상 노선에 가담함으로써 범위가 확장된 우익 남북협상파는 평양 회의를 앞둔 1948년 4월 3일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를 결성했다. 김규식과 김구 사이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지만 이 협의회를 매개로 공조관계를 조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평양 회의에서 어느 정도 일관성 있는 우익의 입장을 제시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돌아온 후 열흘이 안 되어 벌어진 송전 중단 사태는 남북협상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김구의 마곡사 정양여행 얘기도 그 충격 속에서 나왔다. 마곡사 행을 취소한 것은 남북협상파의 동지들이 만류한 결과로 알려졌다. 그러자 남북협상파의 진용 정비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독립 열의 불변 - 출발 전 김구 씨 담”

 

김구 씨는 불일간 마곡사로 출발하게 된 데 대하여 작 19일 요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나는 평양에서 귀환한 후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여 당분간 휴양이 필요하다는 내방 인사들의 권고를 받았으며 원래 나와 인연이 깊은 공주 마곡사에서도 불탑의 축조가 완성된 후 수차 참여를 요청하여 왔으므로 잠시 휴양하기 위하여 마곡사 행을 결의하였다. 마곡사에 갔다가 서울에 일이 있을 때에는 어느 때든지 돌아올 예정이다.

 

우리는 지금 전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주권을 전취하여야 될 혁명 시기에 있는 것이요 정권 쟁취가 목표가 아니니 내가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말은 나에게 부적절한 용어이다. 남북통일을 추진시키려는 나의 입장은 변치 않으며 독립 달성을 기원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0일)

 

“김구 씨 마곡사 행 중지”

 

과반 김구 씨는 평양으로부터 귀경한 이래 건강 상태가 당분간 정양이 필요함을 느끼고 마곡사 행을 결의한 바 있었는데 평양회담에 참석하였던 중간파 인사들의 권고로 마곡사 행을 중지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3일)

 

“통일 추진 문제 - 위원회를 설치?”

 

최근 민련 한독 민독당에서는 빈번히 상집(常執)을 개최하여 주목을 끌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기 각 상집에서는 주로 남북통일 추진 문제를 논의하고 5-10선거를 합법적으로 반대하기 위하여 모종의 위원회 설치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하는데 앞으로 동 위원회의 발전 여하가 주목된다. 한편 마곡사로 정양차 여행하기로 되었던 김구 씨는 돌연 20일 이를 중지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3일)

 

같은 남북협상 노선이라도 좌익과 우익의 길이 갈라진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고 있었다. 남로당의 강경투쟁 노선은 애초부터 분명한 것이었는데, 사로당 계열 등 좌익 비주류도 이제 남로당을 따라 강경투쟁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것은 평양 회의 중 나타난 이북 지도부의 노선에 추종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단선반대투위 어디로 가나 - 돌격하는 5당캄파와 완보(緩步)하는 민련”

 

평양회담에 참석하였다가 소위 ‘단선단정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귀경한 각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은 남로당의 무자비한 동포상잔을 제외하고는 과거 2주간 괄목할 만한 정치동향을 볼 수 없었으나 기실은 평양에서 결정한 투쟁방법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정중동의 내부알력을 양성하여 오던 중 드디어 그것이 표면화되었다.

 

즉 근민당에서는 지난 15, 18일 등 수차에 걸쳐 상위를 개최하고 주로 평양에서 결정하였던 소위 단선단정반대투쟁 방법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하는데 동 문제를 싸고 구 인민당계와 구 사로파의 의견의 타협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구 사로파에서 당의 헤게모니 장악을 의도하고 있다 하여 동당 소장파의 분격을 사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원인은 저간 평양에서 개최된 전정회의[전 조선 정치회의]에 참석차 북행하였던 사로계 정백 씨는 북로당 책임자 앞에서 동당 부당수 장건상 씨는 친미파라고 무고한 일이 있었다는데 그것은 북로당 강진 씨를 통하여 자기의 정치생명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장건상 씨는 이러한 오해를 북로당 측에 풀기 위하여 장시일 북조선에 체류하였다가 지난 17일 귀경한 것이라는데 장 씨의 귀경에 앞서 지난 15일 개최된 동당 상위에서 부위원장 이영 씨는 이번 반투의 전 지휘권을 자기가 북조선으로부터 임명받았다고 발표하고 합법적 투쟁을 하여 오던 근민당의 노선을 180도 전환시켜 비법투쟁에 유도하려고 책동한 사실이 폭로되어 근민당의 내분은 점차로 확대되어 갈 우려가 있다고 한다.

 

한편 평양 전정회의에서 결정한 동 투쟁을 비합법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하여 남로당 측은 물론이거니와 동당에 뇌동하고 있는 신진당 김충규 민주한독당 김일청 등 제씨도 근민당 정백 이영 씨 등과 호응하여 암약하고 있는데 지난 16일 전기 양 씨는 삼청장으로 김규식 박사를 방문하고 비합법투쟁 전개에 관한 김 박사의 의견을 타진하였다 한다.

 

그런데 민련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민련으로서는 남로당 식 무자비한 투쟁에는 가담하지 않고 합법적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 하며 이를 토의하기 위하여 민련에서는 18, 19일 상집을 열었다 한다.

 

이상과 같이 전정이 요구하는 남조선선거 반대투쟁은 어디까지나 공산당 식 투쟁이나 김구 김규식 양 씨의 노선은 그러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의견의 차이가 생긴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에 관련하여 김구 씨의 마곡사 행도 단순한 정양차로만 볼 수 없는 일로, 김구 씨의 앞으로의 태도가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1일)

 

이남 남북협상파가 평양에서 단선단정반대투위를 결성한 것은 이북 지도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이북 지도부는 이 투위를 통해 이남의 단선반대 운동이 강경노선에 접근하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이남 협상파는 원만한 회담 진행을 위해 이를 받아들이고 대신 외군 철수시 무력 동원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송전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약속 등을 얻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후 송전은 중단되고 좌익 인사들의 책동이 일어나는 상황에 직면하자 협상파 진용을 재정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5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언급된 위원회는 이 필요성에서 제기된 논의로 보인다.

이후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우익 남북협상파는 4월 초 결성했던 통협을 확대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족주의자 대오 속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독립노농당(독로당) 대표로 국민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유림의 반발에 관해 내가 찾을 수 있는 신문기사는 1948년 7월 3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것이 제일 빠른 것이다.

 

“3상 결정 옹호를 호소한 전제적 영도는 받기 싫다 - 통협 문제와 유림 씨 성명”

 

독로당 유림 위원장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전국대표자대회가 연기된 데 대하여 2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통협 개조에 관한 민련 한독의 모든 조건에 나는 반대주장을 한 것이 하나도 없고 대회에서 반대 아니 할 약속도 했다. 대회 연기는 그들의 결정이요, 나는 기정(旣定)대로 하자고 애걸복걸을 했으나 그들은 최후의 태도로 거부했다. 회기가 박두했으므로 소집책임자로서는 부득이 연기 통지를 낸 것인데 사실을 왜곡 선전함은 자기 인격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그들이 동의하면 오늘이라도 대회를 소집해서 사무를 교체하고 깨끗이 손을 떼는 것이 나의 최대 희망임을 다시 한 번 말한다.”

 

그런데 서중석은 <우사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2> 242-243쪽에서 “유림은 양김이 평양에서 돌아온 후 남-북 협상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하여 ‘공산당 제5열 운운’ 하면서 공격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고 했다. 이 성명은 어디에 발표된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유림의 반발이 5월 중에 이미 시작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재명은 해방공간의 민족주의자들을 소개한 책 <한국현대사의 비극>의 한 장을 유림에게 할애했는데 그 제목이 “고집불통의 우국혼(憂國魂)”이다. 민족주의자 중에는 고집불통이 많다. 고집불통이 아니고야 험난한 길을 다년간 걸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유림은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고집불통이라고 이재명은 본 것이다. 이 책 300쪽에 이렇게 나온다.

 

그 무렵 유림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서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러한 땀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다. 이 협의회에서 유림은 홍명희 조소앙과 더불어 3인 간사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의 일치에도 불구, 유림은 김구 김규식 등과는 달리 남북협상, 보다 정확히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38선을 베개 삼아 자결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4월 19일 아침 북행하려는 김구의 옷깃을 붙잡고 유림은 이렇게 말했다. “백범선생, 가지 마시오. 가시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백범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니까 백범선생이지, 신탁통치 찬성자들과 무엇을 협상하자는 것입니까? 그들의 속셈을 모르십니까?”

 

이 책 303-304쪽에 실린 신익희와의 대화는 1946년 8월 4일자 일기에서도 인용했던 것인데, 유림의 결벽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므로 다시 한 번 옮겨놓는다. 1946년 봄부터 김구를 배신하고 이승만을 받들며 승승장구하던 신익희가 1952년 5월의 부산정치파동 후 이승만과 결별하고 반 이승만 세력을 모으려 애쓸 때의 대화라고 한다.

 

신: 단주(旦洲, 유림의 아호), 우리는 과거 친한 동지 사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한 사이 아닌가? 이제부터 같이 힘을 합쳐 독재자의 손길에서 구민운동을 해보세.

 

유: 그래 해공(海公, 신익희의 아호)!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 내가 이승만의 첩하고 타협을 해? 차라리 구국타협이라면 이승만하고 하지.

 

신: 단주, 과거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용서하시게.

 

유: 과거는 동지고 팥죽이고 간에 기생첩과 같은 사람과 타협할 수 없네.

 

유림처럼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사심 없는 인물조차 통일건국의 길 위에서 김구, 김규식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정의로운 길이 현실 속에서 승리를 거두기 어려운 하나의 문제를 읽을 수 있다. 불의가 존재할 때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대항하려 한다. 그러나 그 대항 방법에 의견이 합치기 힘들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정의의 규정에 지나치게 엄격해서 서로를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거듭거듭 일어나는 현상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