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 경찰 총수로서 조병옥이 대단히 독선적이고 난폭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언행 도처에서 확인된다. 그 정도를 넘어 그가 반민주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도 1946년 4월 7일 일기에 인용했던 아래 발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 경찰진용은 사회추천에 의한 민선기관이 아니고 그 직원은 군정관이 부여한 경무부장의 임명권에 의하여 그 신분이 보장된다.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는 것이다. 군대와 같은 명령계통을 가지고 규율적으로 복무를 다함으로써 의무를 다하게 되어 있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7일)

 

해방된 민족의 진로에 해로운 역할을 맡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이 정도 확인해 놓고도 한 달 전(1948년 5월 5일) 일기에 옮겨놓은 김익렬 제9연대장의 회고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회고에 따르면 조병옥은 난폭한 파시스트일 뿐 아니라 극히 간사하고 음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야당 지도자의 간판에 가려져 온 그의 진면목을 그 동안 많이 밝혀 왔지만, 이 정도까지 끔찍한 인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개인적 회고라는 점을 감안해서 편향성의 여지를 두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6월 8일 조병옥의 제주도 사태 ‘진상’ 발표를 보면 김익렬의 회고가 사실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부녀자 폭행 후 생매(生埋)까지 - 이렇다! 제주도의 인민항쟁 진상”

 

조 경무부장은 공산계열이 감행한 만행의 진상에 대하여 8일 대략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남조선의 질서를 교란하고 치안을 파괴하여 북조선과 같이 소련에 예속시키려는 공산계열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무자비한 폭동 만행은 총선거 실시에 따라 민중에 대한 공포심 주입과 단말마의 최후 발악으로 더 한층 포학과 잔인성을 나타내었으니 그 일례를 제주도 폭동에서 들면 다음과 같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지서가 빠짐없이 습격을 받았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타버렸을 뿐 아니라 그 살상방법에 있어 잔인무비하여 4월 18일 신촌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를 목을 잘라 죽인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 된 형수를 참혹히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신 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배를 갈라 죽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 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 된 경찰관의 누이를 산 채로 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서는 대동청년단 간부로서 피살된 김용조의 처 김성히와 3세 된 장남을 30여 명의 폭도가 같은 동리 고히숙의 집에 납치한 후 십수 명이 윤간하였으며 같은 동리 김승옥의 노모 김 씨(60)와 누이 옥분(19) 김중삼의 처 이 씨(50) 16세 된 부녀 김수년 36세 된 김순애의 딸 정방옥의 처와 장남 20세 된 허연선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 등 11명을 역시 고히숙 집에 납치 감금하고 무수 난타한 후 눈노름이라는 산림지대에 끌고 가서 늙은이 젊은이를 불문하고 50여 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리고도 부족하여 총창과 죽창·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배·음부·볼기 등을 함부로 찔러 미처 절명되기 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중 김성히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왔다. 그리고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민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이 공노할 그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제민일보 4-3취재반이 1988년 활동을 시작한 이래 4-3사태의 진상이 많이 밝혀져 왔으므로 조병옥의 위 발표 내용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지금 새삼스럽게 따지고 나설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저런 내용을 경찰 총수라는 자가 공식적으로 발표한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지는 한 차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일반인들이 저런 발표 내용을 곧이들을 것이라고 조병옥은 생각한 것일까? 아니라고 본다. 이 발표 며칠 후 제주 파견에서 돌아온 한 검찰관의 견해가 보도되었다.

 

“제주도 사건 원인 - 첫째는 경찰과 민심 이반, 해결엔 무력보다 행정력”

 

지난 5월 26일 서울로부터 제주도로 파견된 판검사 일행은 사건처리를 끝마치고 지난 12일 공로로 무사히 귀경하였는데 검찰관을 대표하여 박근영 검찰관은 14일 다음과 같이 그 실정을 말하였다.

 

“제주도에는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가 많은데 그 중에는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으나 이번 사건이 전적으로 공산당의 지령에서만 발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사건 원인은 경찰이 민심과 유리된 것인데 사건이 발생하면 민중은 경찰에 신고를 아니하고 방관하며 심지어는 반항까지 하고 있다. 이 사실은 경찰이 제주도 특수 사정에 대한 사찰을 등한시한 시책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는 사건해결을 단시일 내로 수습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수습은 무력으로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경찰력과 행정력을 통일하는 유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설단체를 경찰력으로 이용한 데 대하여 사설단체에 대한 비난이 높아가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5일)

 

경찰의 책임은 경찰 내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주에 파견되었던 수도경찰청의 최난수 경감의 6월 21일 발언을 살펴본다.

 

“폭도 귀순은 가장(假裝) - 장기항전을 기도”

 

제주도사건 수습차 두 번째 현지에 출장한 최난수 경감은 21일 중간보고를 하러 서울에 돌아왔는데 동씨는 제주도 현 사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중앙의 경찰관 등도 폭동의 원인이 경찰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해방 직후 경찰행정책임자들의 부패로 말미암아 좌익 진영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모든 조직체 훈련을 방임하고 제주도를 공산혁명의 저수지로 만들게 하여 사상·정치·경제적 혼란을 이용하여 민중의 불평불만을 그 때 그 때의 투쟁형식으로 폭발시켰다. 그와 같이 도민은 대소 폭발사건으로 투쟁의 세력과 조직체를 완비하였다. 부패한 경찰은 모리배와 결탁하여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이를 미연에 방지치 못한데 큰 원인이 있다.

 

현재의 수습 상황을 말한다면 폭도들은 5월 20일 이후 투쟁방법을 변경하여 일부(약 2천 명)는 귀순을 가장하고 일부 정예부대는 수개 부대로 분산하여 무장한 채로 산중에 도피 잠적 중이다. 말하자면 '장기항전'에 돌입한 모양이다. 현재 제주도 경찰은 군경 1천여 명과 운수경찰 수백 명의 응원을 받고 있는데 완전수습을 하려면 대다수의 강력무장 부대의 응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4일)

 

최난수가 어떤 인물인가? “해방일기”에서는 장덕수 암살사건 관계로 김석황을 체포하는 장면에 등장한 일이 있다.(1948년 1월 16일) 그리고 장차 반민특위 파괴에서 큰 공을 세울 인물이다. 수도청장 장택상의 심복 중 하나로, 4-3사태가 터지자 좌익 사찰을 위해 제주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그런 ‘반공투사’ 최난수의 보고조차 조병옥의 발표보다는 비교가 안 되게 점잖고 합리적이다. 도대체 조병옥은 누구의 보고를 받고 폭도들의 그토록 참혹한 만행을 그려내게 된 것일까? 김익렬의 회고에 나오는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멋대로 상황을 지어내는 탁월한 창작능력을 가진 것이었을까? 도대체 그는 누가 읽어주고 곧이들어주기를 바라고 그런 황당무계한 발표를 했던 것일까?

 

조병옥의 6월 8일 발표가 하지 사령관과 딘 군정장관 등 미군정 수뇌부 몇몇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월 5일 ‘최고수뇌회의’에서 조병옥은 다른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딘 한 사람만을 상대로 (영어로) 이야기한 것으로 김익렬의 회고에 그려져 있다. 앞에 앉아 있는 연대장이 공산주의자라고, 그 아버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돌아서서 확인만 하면 탄로날 거짓말을 태연하게 늘어놓은 것으로 김익렬은 회고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래서 김익렬의 회고에 착오나 과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6월 8일 발표를 보면 그 회고도 사실대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병옥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그저 딘이 만족할 만한, 미군정 수뇌부가 정해놓은 방침을 뒷받침해 주는 말만 하면 되는 입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미군정은 여러 가지 무리한 정책의 핑계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내세우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태에는 이 핑계를 정당화해 주는 호재로 받아들일 만한 측면이 있었다. 사태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통치권자로서 공식적 책임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현존하고 실재하는 위협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이 사태를 이용할 동기도 있었다.

 

반공의 명분에 이용하기 위해 제주도를 ‘공산혁명의 저수지’처럼 만들기로 미군정과 경찰 수뇌부의 방침이 일찍부터 정해져 있으리라고 볼 만한 대목이 많이 있다. 그러지 않고는 1947년 3-1절 발포사태 이후 제주도 사정을 악화시키기만 해온 일련의 조치를 이해하기 힘들다. 어리석음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섣부른 ‘음모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4-3사태 발발 이전과 발발 초기의 상황에서 미군정과 경찰의 조치는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조병옥의 6월 8일 발표도 그런 예의 하나다. 무엇을 위해 증오심과 공포심만을 부풀리는 그런 해괴한 황색 선전을 내놓았나? 민심 안정을 위해서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효과적인 해결을 위해서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반공정책 강화를 위해 제주도민을 희생시키려는 책략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점령 3년 동안 미군정은 친일파와 유산계층을 기반으로 한 단독건국세력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었고, 단독건국세력의 전위대가 경찰이었다. 남조선이 외부 세계와 절연된 고립지역이었다면 미군정과 경찰의 폭력 독점상태는 무한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이목이 있었다. 미국은 남조선의 단독건국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유엔을 이용했지만 유엔 이용이 공짜는 아니었다. 다른 회원국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했고 내키지 않는 찬성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반대급부가 있어야 했다. 유엔을 대표한 조선위원회가 공의(公義) 실현을 위한 충분한 힘을 가진 기구는 아니었지만, 미군정과 경찰의 비행을 견제하는 얼마간의 힘은 갖고 있었다.

 

6월 7일 상해에서 서울로 돌아온 유엔위원회는 5-10선거에 대한 평가를 아직 확정하지 않고 있었다. 경찰에 의한 선거 자유분위기 침해가 부정적 평가의 첫 번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특히 무조건적 좌익 탄압이 두드러진 문제였다. 이 무렵 장택상과 조병옥이 잇달아 좌익 취체의 합리적 기준을 내세운 것은 유엔위원회의 눈치를 본 것으로 이해된다. 장택상은 6월 8일에 이런 성명서를 내놓았다.

 

“지하운동은 싫다 - 파괴 말고 당당 이론으로 싸우라”

 

수도관구경찰청 장택상 총감은 8일 “좌익운동자에게 고함”이라는 대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번 수도경찰청의 기구개혁에 따라 다소 경찰조직에 이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근자 좌익진영에서 사실 아닌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경찰이 무차별로 좌익관계자를 무조건 탄압하는 줄 오인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오해가 없다. 나는 무엇보다도 좌익운동자가 지하운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다. 해방된 조선에서 당당히 이론 투쟁을 하고 민중을 계몽한다면 그야말로 이상적 민주주의이다. 동족이 상쟁하는 살인 방화 기타 남조선에서 감행하는 악질분자의 범죄만은 용서 없이 실력으로 박멸하겠다. 내가 수도치안책임자로 있는 한 이론투쟁 운동선상에서 활동하는 동포에게는 절대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것을 맹서한다.

 

폭력을 피하고 이론과 계몽으로 천하의 공론에 호소하여 각자의 진영 세력 획득에 힘쓰라. 이제까지 경찰에서 찾던 좌익 범죄자 즉 살인범과 방화범 이외에는 전부 불문에 부치겠다. 그대들은 이 정책에 순응하여 남자답게 나와 경찰의 온정을 재인식하라. 경찰은 그대들을 포옹할 용의가 있다. 그러므로 경찰은 속이지 않을 것이니 믿고 외선(外線)에 나와 제가끔 자기 이념에 따라 건국노선에 매진하자. 나의 중대한 결의인 만큼 그대들도 경솔히 생각 말고 협력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1946년 5월의 정판사사건 이래 경찰의 소행을 보아 온 독자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들리겠으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태연히 하는 것이 장택상의 주특기다. 끝 문장에서 자신의 “중대한 결의”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또 한 차례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이튿날 또 한 차례 성명을 발표했다. “폭동을 종용하는 삐라 외 이론전개로 구성된 삐라는 취체치 않음” 등 구체적 취체 기준을 밝혔는데, 그중 “경찰비판은 취체치 않음. 정당한 비판 즉 근거 있는 경찰의 불법행위 등을 비판한 문자는 절대 포용함”이 특히 눈길을 끈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9일 “탄압 일관(一貫) 아니다 - 장 청장 좌익동포에 재성명”)

 

비슷한 취지의 담화문이 6월 11일 조병옥에게서도 나왔다. 6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요지를 옮겨놓는다.

 

“국립경찰이 과거 좌익운동에 대하여 무차별 탄압을 가하여 온 것 같은 오해를 일반사회로 하여금 가지게 하고 경찰의 운영방침이 돌연 변경된 것과 같은 악인상을 주고 있음은 천만유감이다. 그러나 경찰은 정치운동과 정치이념 그 자체를 탄압한 일은 없다. 오로지 정부의 행정을 방해하고 법과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동만을 단속 또는 처단하여 왔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는 정치사범은 1건도 없다.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는 경찰은 다른 정치운동에 비하여 엄중한 사찰을 실시함이 요청되어 있다. 소련이 공산주의 팽창정책을 세계적 규모로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고 조선에 대한 그의 야망을 철회하지 않는 한 또는 남로당계열이 북로당 세력과 합류하여 5·10선거의 결과로 성립된 국회의 임무인 정부수립을 방해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하는 근본적 설계를 취소하지 않는 한 그 도당들의 합법적 운동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고 보는 바이다. 본래 공산주의운동이란 그 본질상 합법적 운동을 행하기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남로당계열의 운동에 대한 경찰의 방침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국립경찰은 사찰을 엄중히 하여 폭동과 음모의 근거지 또는 파괴운동의 원천이 되는 세포조직을 경찰의 실력을 기울여 수사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끝으로 좌익운동에 대한 경찰단속의 실례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들어 보겠다. (...)

 

이렇게 모처럼 점잖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지금도 경찰은 이해하기 힘든 일을 계속 벌이고 있었다.

 

“경북 상공국장 등 피검 - 극비리 준엄한 문초 계속”

 

대구경찰서에서는 10일 상오 11시경 돌연 백 대구부 후생과장 이하 약 30명의 부정직원을 검거하고 연달아 11일에는 경북 상공국장 신현수 씨 이하 광공과장 동 계장 등 30명을 검거하였다고 하는데 피검 이유는 일체 비밀에 부치고 있다. 한편 대구서에서는 기자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준엄한 문초를 계속하고 있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모 정당 세포조직 관계인 듯하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3일)

 

“2백여 학생 피검”

 

[전주] 지난 16일부터 부내 각 중등학교에 검거 선풍이 일어나 남녀 학생 2백여 명이 검거되었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이 학생들은 모 당의 지령에 의하여 동 당에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학원의 적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0일)

 

대구의 공무원 대량검거는 7월 초까지 계속, 모두 201명이 검거되어 “경북 관리 적색사건”이란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동아일보> 1948년 7월 16일) 남로당의 ‘특수세포조직반’으로서 그 직위를 이용해 온갖 나쁜 짓을 “표면합법적으로 감행”했다는 것이다. 도청 직원만 54명인데, 총원의 10퍼센트에 달한다. 전주의 학생들, 대구의 공무원들이 모두 살인범이고 방화범이었단 말인가?

 

 

Posted by 문천

 

독도폭격사건을 보도한 첫 기사는 6월 11일자 <조선일보>의 “국적불명의 비기(飛機)가 투탄(投彈) 기총소사, 독도서 어선 파괴 16명이 즉사”였다. 6월 8일 오전 11시 반경 국적불명의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어선 20여 척이 파괴되고 어부 16명이 즉사하고 10명이 중상을 입었다는 보도였다. 이튿날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은 사망 9명, 행방불명 5명, 중상 2명, 경상 8명의 인명피해를 보도했다. 같은 날 <서울신문>에는 피해자 장학상(‘배학상’이라고 한 자료도 있음)의 증언도 실렸다.

 

“내가 본 비행기 수효는 11대였는데 처음에는 산에 떨어뜨리는 줄 알았더니 배와 바다에 떨어뜨려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고 폭격을 받았다. 나중에는 비행기에서는 배로 향하여 총까지 놓았다. 나는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살아나왔다.”

 

이 기사만 보고도 당시 사람들은 미군 비행기라는 사실을 거의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그곳에 비행기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미국과 소련뿐인데, 소련이 그곳에 보냈을 가능성은 원체 희박할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면, 지목하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이 폭격이 자기네 소행인지 조사 중이라고 12일 발표했다.

 

“시인 반 부인 반 - 독도폭격과 재일미군당국 담”

 

[동경 13일 AP 합동]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지난 8일 독도 근해에서 조선 어선대가 폭격을 받은 사건에 미국 비행기가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12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조선 어선이 폭격을 당하였다는 수역을 포함한 해역 일대에서 실탄훈련을 할 계획이 서 있었고 그 훈련은 8일부터 시작하기로 되었었다. 조선 어선 조난사건에 미기가 관련된 것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방금 조난현장 사진을 조사 중이다.”

 

그런데 조선 경찰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내습 비행기는 4발기로 날개에 원과 별의 표장이 있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5일)

 

하지는 6월 15일에야 담화를 발표했다.

 

“본관은 독도폭격사건의 보도에 접하여 여러분과 함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선주재미군사령부에서는 즉시로 철저한 조사를 명하였는데 상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본 사령부에는 조선에 기지를 둔 또는 조선부대에 배속된 비행기는 동 지역에 없었고 또 폭격한 사실도 없고 따라서 본 사건에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미 인정하였습니다. 일본에 기지를 둔 미기의 본 사건 관련 여부에 대하여서는 방금 극동공군사령부와 극동총사령부에서 조사 중에 있으므로 동 조사가 완료되는 대로 즉시 사건의 전모가 발표될 것입니다. 만약 미기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면 미군당국으로서는 사망자의 유가족 및 피해자를 위하여 만반의 대책을 강구할 것을 조선국민에게 보장하는 바입니다. 또 미군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판명되면 그 책임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7일)

 

조선주재미군 책임은 없지만 다른 미군의 책임은 거의 시인하는 내용이다. 미 극동공군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는데, 어떤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조사 중이었던 것이다.

 

6월 17일자 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하지의 담화는 15일 늦게 발표된 모양이다. 같은 15일 극동공군사령부 발표는 6월 16일자 신문에 보도되었다.

 

“우발적 폭격일 듯 - 미기 관련 여부 미확인 - 독도사건”

 

[동경 15일발 UP조선]미 극동항공대사령부에서는 일본해 중의 조선 어선 폭격사건에 미국 비행기가 관련이 있는지를 조사한 결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국 항공대가 일본해에서 행한 폭격연습에 관한 사진과 보고를 조사한 결과 아직 미군 비행기가 지난 6월 8일 11척 조선 어선 침몰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설혹 미기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하더라도 이 폭격은 전연 우발적일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 지점은 소정의 폭격연습장으로 얼마 전부터 폭격연습의 목표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8일 이 구역을 비행한 부대는 고공에서 비행하였으므로 암석 가운데 또는 부근에 있는 폭격장 범위 내외에 있는 어선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기에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 극동항공대에서는 이 날 총격행동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6일)

 

이어 6월 16일에 극동공군사령부의 조사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이것이 이후 사건에 대한 미군 측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과연! 독도 폭격기는 B29 - 어선을 도서로 오인 - 촬영한 사진으로 판명”

 

[동경 17일 AP합동]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16일 독도 참변 사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현장 촬영 사진을 심사한 결과 독도 근해에 있는 어선들은 B29폭격기의 고도 폭격 연습 때에 암석으로 보이었던 것이 판명되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키나와기지를 출발한 B29폭격기대가 폭격을 하기 30분 전에 정찰기가 6회나 독도 부근(북위 37도15분 동위 131도45분 지점)을 시찰하고 연습에 무방하다는 것을 보고하였던 것이다. 현지 부근에는 폭격대상이 될 수많은 작은 섬이 있는 만큼 이 어선들도 섬으로 보이었던 것 같다.

 

B29폭격대는 2만3천 피트 상공에서 연습탄을 투척한 것이었으며 이들은 해상에서 아무런 선박도 보지 못하였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폭격 30분 후에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에 의하여 이 위험지역 구내에 많은 작은 배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정식 조사가 끝나는 대로 완전한 보고를 상급사령부에 제출할 터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8일)

 

미군 측은 확인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확인된 뒤에도 완전히 확인된 사실만 인정했다. 섣불리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심스러운 자세겠지만,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결국 B29기의 폭격연습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나 우발적 사고였고 기총소사는 없었다는 주장을 끝까지 지켰다.

 

그런데 피해자들의 증언에는 미군 발표와 배치되는 내용이 많았다. 의도적 공격이었고 기총소사도 있었다고 많은 피해자들이 확신하고 있었다. 미군이 끝까지 감추거나 속이는 것이 있다는 의심이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정병준은 <독도 1947>(돌베개 펴냄) 179-237쪽에서 독도폭격사건 관계 연구와 자료를 검토한 결과 우발적 사고였으리라는 점(승무원 입장)과 기총소사가 없었으리라는 점을 인정했다. B29기는 전투기의 요격 위험이 없는 2만 피트 이상 고공에서 폭격하는 것이 정상이므로 어선을 식별할 수도 없었고 해상을 향한 기총소사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정병준은 그 대신 다른 의문들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폭격연습 구역에 어민들이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이 왜 없었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독도는 1947년 9월 16일 연합군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1778호에 의해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었는데, 이 지령은 “오키(隱岐)열도 및 북위 38도 이북 혼슈지방의 서해안 섬 및 항구의 주민들”에게 폭격연습 이전에 통보할 것을 명시했다는 것이다.

 

조선 주민들에게 폭격연습을 통보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폭격연습장 지정 사실을 주조선미군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하지에게 통보된 것은 독도폭격사건이 터진 뒤인 6월 14일의 일이었다. 게다가 제5공군은 이 날 주조선미군에게 독도 연습장 재개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내고 있었으니 하지가 얼마나 열 받았을까. 6월 15일에 하지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독도 1947> 189쪽에서 재인용)

 

“사건은 엄청난 정치적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이 문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모든 정치적 관심에 따라 본 사령부에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 이제 국회의사당에서도 완벽한 조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해 이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어떻게 다루든지 간에, 공산주의자의 과중한 공격에 당면한 한국 내 미국의 위신은 이 사건 때문에 흔들릴 것이다.”

 

하지 입장에서는 가히 날벼락이었다. 미군은 조선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만큼 인민의 눈에 억압자로 비쳐질 수 있는 존재였다. 미군 장병의 개인 범죄가 있으면 엄벌에 처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소요사태에는 미군이 직접 진압에 나서는 일을 극력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부대 미군이 자신에게 통보도 없이 조선 해역에서 폭격연습을 하다가 조선인 어부들을 무더기로 죽이는 사태가 벌어지다니! 하지는 맥아더를 만나 수습책을 조율하기 위해 6월 21일 도쿄로 날아가야 했다.

 

민심 이반을 걱정한 미군정은 사태 수습에 전력을 다했다. 피해보상은 신속히 이뤄졌다. 그러나 조선인에 대한 사과는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않았다. 맥아더사령부도, 하지사령부도, 극동공군사령부도 이 사건을 ‘우발적 사고’로 규정한 것이다. 조선인의 분노와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이 사건을 넘기려는 미군 측 자세는 7월 1일 딘 군정장관 기자회견에서의 문답에 나타난다.

 

문: 독도사건에 대한 미군당국의 태도는 너무도 냉정하다. 공분을 느끼고 있는 조선민족의 앞에 적절한 사과와 피해자에 대한 배상조치가 있어야 할 것으로 아는데 귀관의 의견은 어떠한가?

 

답: 이 문제는 군정당국에서 조처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조선주둔미군사령관의 권한과 처리에 속하는 사건이다. 이미 하지 중장도 이에 대한 사과를 하였다고 믿는다. 소청위원회에서 사건 책임과 피해상태의 조사를 완료하고 돌아오면 다시 상세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2일)

 

여기서 말하는 하지 사령관의 사과란 위에 옮겨놓은 6월 15일자 담화를 가리킨 것이다. “만약 미기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되면”이란 조건을 붙인 ‘잠정적’ 사과였다. 이제 판명된 사실을 보고 “사망자의 유가족 및 피해자를 위하여 만반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미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딘은 믿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하지는 극동공군과 맥아더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가 책임 맡은 구역을 침해당한 것이니까. 진짜 사과할 책임은 극동공군과 맥아더에게 있었고, 하지에게는 그들의 만행을 막지 못한 부차적 책임만이 있었다.

 

‘만행(蠻行)’이라고 했다. 독도폭격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만행이었다. 어선을 일부러 폭격한 것이 아니고 기총소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승무원들을 면책시키는 조건일 뿐이다.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고 승무원들을 그리로 보낸 극동공군 당국과 그것을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맥아더를 면책시켜주지 못한다. 조선 어민들에게 통보도 없이 독도를 폭격한 것은 평화시에 있을 수 없는 만행이었다. 주조선미군에게조차 통보하지 않은 것은 관할권 침해였다. 하지는 극동공군과 맥아더를 미국정부에 제소해야 했다.

 

독도폭격이 만행이었다는 사실은 드러나 보이는 문제다. 그런데 정병준은 더 밑바닥 문제를 제기한다. 극동공군이 독도를 연습장으로 지정한 까닭이 무엇인가?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야욕과 이에 대한 일부 미국인의 동조가 독도 연습장 지정의 배경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정병준은 추측한다. 정황증거만 있을 뿐, 확증은 없는 추측이다. 그러나 정황증거라도 상당히 강력한 것이고, 달리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추측이다. 정병준의 추론 일부를 옮겨놓는다.

 

그런데 왜 SCAPIN 1778호가 일본의 정치상-행정상 권리가 정지되고, 일본 선박-선원들이 13해리 이내 접근 혹은 접촉이 허용되지 않는 독도에 일본 어민들이 가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중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일본 외무성 등이 직간접적 방식의 공작력을 발휘했을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이미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은 (...) 허위사실에 기초한 팸플릿을 통해 일본의 독도영유권을 주장했던 것이다. 즉, 1947년 4월 일본 어부는 독도에 불법 상륙해 독도가 자신의 어구라며 한국 어부에게 총격을 가했고, 1947년 6월 일본 외무성은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연합국에 대대적인 홍보작업을 벌였다.

 

일본 외무성의 주장은 주일미정치고문이자 연합군최고사령부 외교국장이던 지일파 윌리엄 시볼드에게 액면 그대로 수용되었다. (...) 일본정부가 주일미군으로 하여금 독도를 군사시설로 활용하게 함으로써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강화하고, 미군을 통해 증거문서를 확보하는 책략을 구사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1948년의 독도폭격은 1947년의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 때문이었는데, 같은 상황이 1951~1953년에도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51년 일본 외무성과 일본국회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벌인 공작은 1947년의 독도 폭격연습장 지정에 끼친 일본의 영향력 유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제13회 중의원 외무위원회(1952. 5. 23)에서 야마모토 도시나가 위원은 “이번 일본 주둔군 연습지 설정에서 다케시마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되면 이를 일본의 영토로 확인받기 쉽다는 발상에서 외무성이 연습지 지정을 오히려 바란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냐”라고 질문했고, 이시하라 간이치로 외무성 정무차관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한다고 답변했다.

 

1951년 체결된 미일안전보장협정의 후속조치로 행정협정(SOFA)이 체결되었고, 이의 이행을 위한 미일합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미일합동위원회는 1952년 7월 26일 ‘군용시설과 구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는 일본 외무성이 추진한 대로 독도를 미군의 공군훈련구역으로 선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독도를 일본령으로 만들고자 주일미군을 활용해 증거문서를 확보하려는 일본 외무성 책략의 구현이었다. 그 후 1952년 9월 한국 어선과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대에 대한 미군기의 폭격사건이 재발했다. (...)

 

일본 외무성의 계획에 따라 독도를 일본령으로 전제한 토대 위에서 주일미공군 훈련장으로의 지정, 일본 어민을 내세운 독도 훈련장 지정의 해제, 이후 한국정부를 향한 미일교섭과정 공개 등이 진행되었다. 미군은 독도 접근이 불법인 데다 원천봉쇄되어 있던 시마네현 등 일본 어민에게만 훈련사실을 통보했고,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한 채 자국 어장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어민들은 폭격에 희생되었다. 일본 외무성과 중의원은 거리낌 없이 이런 책략의 진행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은 이용당했고, 한국의 주권은 침해당했으며, 한국인들의 생명은 존중되지 못했다. (<독도 1947> 233-236쪽)

 

우리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힘들다. 나부터 그렇다. 그러나 일반 일본인이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일부 근거만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독도에 대한 미군의 폭격연습장 지정도 그런 근거의 하나다.

 

그런 근거만이 일본에서 횡행하는 것은 일본사회의 문제고, 또 한국에서 일체 무시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의 문제다. 각자에게 불리한 증거와 유리한 증거를 함께 검토해서 종합적 판단을 해야 영원한 평행선을 면할 수 있다. “독도는 우리 땅”임을 굳게 믿는 사람들도 정병준의 책을 보면 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훨씬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믿는 일본인을 만나도 설득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서중석 선생 고별강연 행사 참석을 너무 늦게 결정했나보다. 강연 뒤의 좌담 사회를 맡은 김득중 선생이 거듭 전화해서 옛날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한다. 좌담 공식 멤버는 벌써 정해져 있지만 학부 시절의 서 선생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부터 좀 나왔으면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지난 주 김 선생 전화를 받은 후 틈틈이 생각을 굴려보니, 꽤 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어울리다가 하나의 질문을 빚어낸다. "서 선생은 어쩌다 한국현대사를 전공하게 되었을까?" 됐다! 이 질문 하나 내놓으면 그 자리에서 내 몫은 충분히 되겠다.

 

그게 무슨 질문거리가 될까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시절 상황을 생각하면 심각한 의미가 있는 질문이다. 우리가 학부 다니던 1970년경, 한국사에는 '현대사'가 없었다. 대한민국시대는커녕 식민지시대를 다루는 강의도 없었다. 내가 졸업한 얼마 후 일본인 학생이 식민지시대 연구하러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20세기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어느분께 들었다.

 

20세기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한국사 연구에는 금기가 많았다. 그래서 현실과 관련된 주제를 연구하려면 역사학 중에서는 서양근대사가 제일 괜찮은 영역이었다. 서 선생이 만약 1970년대 초에 순조롭게 졸업하고 진학했다면 서양사를 전공으로 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입학한 지 17년이 넘는 1984년에야 졸업했고, 연세대 대학원에 한국사 전공으로 진학해서 한국현대사 연구를 시작했다. 1971년과 1984년 사이의 13년 세월이 한국사회에 가져온 변화와 서중석 개인에게 가져온 변화가 합쳐져 그의 진로를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서 선생이 1970년대 초에 서양사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그의 학문활동 내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제도권 학계에는 나와바리를 지키는 관성의 힘이 강하다. 학부 시절 은사의 한 분인 양병우 선생은 서양사학계 원로로서 한국사 관계 주제에 대한 의견을 두 차례(내가 기억하기로) 적극적으로 내놓은 일이 있는데, 국사학계의 반발이 작지 않았고, 그 반발은 대개 내용의 타당성보다 행위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이었다.

 

나 자신 한국사에 마음을 두고도 대학원 진학에 동양사를 택했다. 사상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한국사학계의 담론 내용이 너무 척박해 보였기 때문에, 중국사상사를 일단 전공하면서 동서양 학자들의 담론을 두루 섭렵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단 동양사로 전공을 정하자 한국사로 돌아올 길이 막혔다. 박사논문 준비할 때 한 번 시도했다. 동아시아 3국의 서학(西學)을 묶어서 보는 쪽으로 논문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당시 대학원 학과장을 맡고 있던 중국사 전공의 황원구 선생이 "한국 서학을 다루는 것은 동양사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승인을 거부했다. 그래서 중국 서학만으로 계획을 다시 세워 논문을 작성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한국현대사에 달라붙어 있는데, 제도권 밖에서 공부해 왔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 계속 있으면서 학회활동을 이어 왔다면 동양사학계 원로 노릇 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 동안 학계 풍토가 달라져서 약간은 울타리 너머 기웃거릴 수 있게 되기는 했겠지만, 지금 하는 것처럼 '원도 한도 없이' 마음껏 뛰어놀게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 공부는 '지금 여기'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현대사는 역사학 중 '지금 여기'에 제일 직접 달려드는 방향이다. 물론 다른 분야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중에도 목적의식이 투철한 분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이 전체적으로 다른 분야 연구자들보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 선생이나 나나 10여 년에 걸친 '제도권 밖에서의 공부'가 한국현대사에 달려드는 배경조건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도권 밖에서의 공부였기 때문에 학계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밑천과 동기를 키울 수 있었던 결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좌고우면할 게 없으니 '지금 여기'로 곧장 뛰어들게 된 것이고.

 

1968년 가을, 사학과 전과를 생각하고 있을 때 서 선생을 만난 것이 내 역사학계 활동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동숭동에서 헤어지고 난 후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그와 얼굴 마주친 것이 스무 번이나 될까? 같은 자리에서 밥 먹어본 것은 한쪽 손으로 셀 수 있을 것이다. 가까이 지낸 것은 아닌데 가까이 느껴 왔고, 그로부터 받아온 영향이 참 크다. 나는 역시 종북주의자가 아니다. 종서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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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