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24일 소집? 군정과 선위 연일 협의”

 

전 조선 인구의 3분지2를 대표하고 앞으로 신생 조선국가의 모체가 될 사상 최초의 국회는 선거 종료와 더불어 이미 그 진용이 완비되어 이제 남은 문제로서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회를 소집하여 중앙정부 수립에 매진하는 것이다.

 

즉 바야흐로 탄생되는 우리 국회는 내외 인사의 다대한 관심 속에 시급한 소집이 요청되고 있는 이때에 국회선거위원회와 군정요로 측에서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연일 협의하고 있다 하며 권위 있는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오는 20일에 입법의원의 해산식을 거행한 후 24일에 정식 국회를 소집할 것으로 결정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국회 소집자는 국회의원 중에 최고연령자로 할 것이라 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승만 박사가 국회를 소집하게 될 것이며 이는 미군이 조선 문제에 대해서 간섭한다는 인상을 없애기 위함이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8일)

 

5월 10일의 선거는 미군정이 시행한 것이었다. 선거를 관리한 국회선거위원회(국선위)는 미군정이 구성하고 임명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국회 소집도 당연히 미군정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국회가 미군정이 만든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북의 최고인민회의의 경우, 소군정으로부터 1946년 2월에 행정권을 넘겨받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11월에 시행된 선거를 준비하고 관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남의 이번 선거는 미군정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시행되었고, 선거법 제정 등 모든 준비와 선거관리가 미군정의 책임 하에 이뤄졌다. 조선인의 ‘자주적’ 선거로 내세우기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소집이라도 자주적으로 하는 모양새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일에 언제나 제일 부지런한 것이 한민당이다. 5월 21일에 이런 담화가 나왔다.

 

“국회의원 2백 의석 중 본당원으로서 당선된 자는 우선 판명된 분만 하여도 84명에 달한다. 이는 동포의 열렬한 지지의 결과인 줄로 생각한다. 의회 소집에 관하여서는 딘 장관은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미-소 회담설에도 구애할 것이 없이 선거위원회의 알선 형식으로 6일 이내로 국회를 소집할 것을 희망한다.” (<조선일보> 1948년 5월 22일)

 

한민당으로 표시하고 등록한 후보 91명 중 당선자는 29명뿐이었다. 한민당의 처참한 패배였다. 그런데 84명이란 무슨 얘긴가?

 

5-10선거 때 한민당에 대한 인상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당원이란 사실을 감추고 출마한 한민당원들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 숫자가 55명씩이나 되었을 리는 없다. 한민당은 80여 명의 무소속 당선자 중에서 동조자를 찾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용양호박의 대결전 - 한민당, 무소속의원 흡수에 혈안 - 독촉은 제1당으로 군림 태세”

 

5-10선거의 결과로 무소속 83명, 독촉 56명, 한민당 29명, 대청 13명 등으로 장차 조직될 국회의 세력 구성이 거의 결정적으로 낙착되게 되어 선거 전에는 제1당이었던 한민당도 이제는 제2당으로 전락하고 독촉이 제1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여짐에 따라 한민당에서는 당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무소속의원 흡수공작을 암암리에 개시하였다 한다.

 

즉 무소속 국회의원 중에는 김구, 김규식 양 씨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은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그밖의 의원은 노선 상으로는 한민당에 접근하고 있으나 아직 정식 당원이 아니므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런데 동 무소속이 독촉 산하에 참가하여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으로 출현하게 되면 제1당으로서 한민당을 능가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으니 만치 한민당에서는 무소속의원을 흡수하고자 입당 종용에 암약하고 있다는데 결국 무소속의원이 끝까지 무소속으로 일관하게 되었는지, 또는 한민당의 무소속의원 흡수공작이 어느 정도 성공할 것인지?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8일)

 

독촉을 중심으로 한 이승만 세력은 한민당과 힘을 합쳐 5-10선거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이제는 경쟁관계로 돌아서고 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시점에서 경쟁의 표면화를 가급적 억제하고 늦춤으로써 건국 과정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쪼개지지 않고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5월 22일에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정당 조직은 정부 수립 후 - 국권회복이 급무”

 

총선거 완료를 계기로 국내 정국은 신국가 건설의 모체인 국회 소집과 더불어 이 국회 내의 세력 구성에 관심이 집중되어 가는 한편 영도권 장악을 위한 자파 세력 부식에 대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 동향과 아울러 한독계열을 중심으로 한 독촉 일부 대청(大靑) 등을 중심으로 이 박사를 최고책임자로 하는 제1당 조직이 대두되고 있으며 또한 일부에서 그 공작을 추진시키어 왔다 하는데 이승만 박사는 22일 정식으로 정당 조직은 국권을 완전히 회복한 후에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번 총선거의 대성공으로 세계의 칭찬을 받을 만치 되어서 지금 하루바삐 국회를 소집하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전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요 세계 우호국가의 기대하는 바이니 경향 각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국권 회복에만 동일한 목적을 삼을 것인데 다소 정객의 사사 요망으로 정당을 조직한다 파벌을 부식한다는 등 모든 활약으로 낭설을 유포해서 민심을 현혹하여 정계를 소란케 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든 유지 애국남녀의 통분히 생각할 일이다.

 

나는 자초(自初)로 정당운동을 정지하고 전 민족 통일로 국권을 먼저 회복하고 정부를 수립한 후에 정당을 조리 있게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였던 바 불행히 나의 주장대로 되지 못하고 외국 신문 상에 4백여 정당이 분쟁한다는 수치로운 말이 선전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분개히 여길 줄 모르고 오직 당쟁을 힘써서 경향에 분규한 상태를 이룸으로 통일에 방해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냐. 이런 쓰라린 경험을 맛보고도 종시 정당투쟁으로만 일삼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 민족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일반 애국남녀는 다시 경성해서 정당이나 파별이나 지방열 등의 사상을 일체 포기하고 국회를 지지하는 유일한 정신으로 대동단결해서 국권회복과 정부수립에 공헌하여 주기 바란다. 정부 수립 후에는 국법으로나 민론으로나 2~3 정당을 세워서 국권과 민권을 동일히 보호해야 할 것이나 오늘 형편으로는 정당주의를 반대할지언정 새 정당을 더 만든다는 것은 결국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3일)

 

이승만은 1945년 10월의 귀국 이래 파벌을 지양한다면서 정당 가입과 결성을 거부해 왔다. 그러면서 자기 지지 세력을 전국적으로 조직해서 실제로는 정당 역할을 하게 했고, 이번 선거에서는 독촉국민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초월적인 지도자의 위치에서 다른 정치인들과 같은 평면 위에서 경쟁하지 않는다는 자세였다.

 

5월 22일 40여 명 국회의원 당선자가 모였다. 독촉 회의실에서 모인 것으로 보아 독촉 중심의 모임으로 보이는데, 국회 개원을 준비한다는 목적이었다.

 

“국회에 대기 태세 - 준비 협의차 위원 12씨 선정”

 

국회 소집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22일 오후 3시부터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이번 당선된 국회의원 45씨의 간담회를 개최하였는데 동 석상에서 “국회 소집을 자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하여 준비해야겠다.”는 요지의 소감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리고 동 석상에서 국회 소집에 관한 문제를 논의한 결과 내 27일경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회 소집에 대한 국회의원 사이의 준비 협의를 하기 위하여 준비위원 12명을 선출하였는데 서무에 이윤영 씨 통신에 김도연 씨 연락에 장면 씨가 각각 선출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5일)

 

이승만의 측근으로 당시 미국에 있던 올리버의 회고록에도 이 움직임이 언급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대다수의 지지를 얻은 리 박사는 제헌국회에 제출할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부하들로 구성된 위원회들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 다수의 한국 언론지들은 국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리 박사가 자기 자신의 위원회를 너무 서둘러 조직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 6월 1일 리 박사는 자기가 성급하게 “지배”하려 든다고 한 언론의 비판에 관해서 나에게 편지를 썼는데 자기의 순전한 목적은 “개원식 준비를 위한 것일 뿐 달리 무슨 의도가 있었겠는가.” 하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 234-235쪽)

 

“제헌국회에 제출할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위 <경향신문> 기사에는 이 모임이 국회 소집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모임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있던 올리버는 준비위원회의 조직 목적이 제헌국회 운영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민당이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상황일 때 이승만은 제헌국회 운영을 위한 조직 활동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대통령책임제 주장이 한민당의 내각책임제 주장을 누르게 되는 한 가지 이유가 이승만의 발 빠른 아젠다 준비에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서중석은 5-10선거 당선자가 이승만 지지 세력 60명 내외, 한민당 세력 60~70명, 그리고 “김규식-김구 노선을 걷는다고 볼 수 있는” 무소속구락부-소장파 세력 60명 내외로 3분되어 있었다고 보았다.(<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한울 펴냄) 239쪽) 세 세력 중 이승남 세력과 한민당 세력은 선거 직후부터 움직임을 보인 반면 무소속구락부가 6월 10일에야 결성된 것은 선거를 거부한 김구와 김규식이 국회와 관련된 활동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우익에서 활동하던 고려대 교수 변영태가 “만일 김구 씨와 그의 지지자들이 선거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국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재에도 입법부 내에는 그의 동정자가 한민당보다 수적으로 더 많다.”고 당시 한 말을 강준만은 인용하며(<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 133쪽) “5-10선거 거부는 옳았는가?” 의문을 제기한다. 김구와 김규식이 외면한 제헌국회에 상당수의 ‘정의적(情誼的)’ 민족주의자들이 진출해서 반민특위 등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에 맞서는 활동을 벌이다가 탄압당하고 만 뒷일을 생각하면, 양김 씨가 나섰을 경우 제헌국회 구성이 민족주의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남북협상을 추구한 이남 민족주의자들에게 5-10선거 거부를 요구한 좌익 측, 특히 이북 지도부 주장의 문제점을 또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5-10선거가 실질적으로는 이남 단독선거였지만 명분상으로는 전 조선 총선거 중 ‘가능지역 선거’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이 거부해야 할 절대적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남북협상 성사를 위해서는 선거 거부를 통해 ‘진정성’을 표해야 했고, 그 결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쉽게 해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북 지도부의 남북협상에 대한 진정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통일건국을 지향하는 뜻도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북의 단독건국을 확실히 하고 나서 다음 단계에 이남을 끌어들인다는 ‘민주기지론’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 5월 14일의 송전 중단에서는 후자의 뜻이 읽힌다.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것도 민주기지론의 궤도를 따른 것이 아니었던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