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②
기사입력 2008-08-14 오전 9:27:40
뉴라이트 진영에서 8·15를 광복절 아닌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1945년 8월 15일보다 1948년 8월 15일이 더 중요한 날이었다는 주장이다.
일본 식민 통치를 근대화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뉴라이트에게는 일본의 패전으로 이뤄진 민족의 광복이 반가운 일이 아니라 안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광복 당시에 일본의 패전을 슬퍼한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에 속한 채 수십 년을 지낸 시점에서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에 속한 채 수십 년을 지낸 시점에서 그런 사람들을 떼로 보게 되는 것은 참 뜻밖의 일이다. 대한민국의 나라 노릇에 결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 부실했던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떠받들고 나서는 것이 또한 해괴한 일이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민족분단을 굳힌 대한민국 건국을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찬양할 수 있다니…. 도대체 민족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진 사람들인가?
이런저런 계제에 여러 형태로 펼쳐져 온 그들의 논설을 보면 민족에 대해 별 의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통치가 정당한 통치였고, 모든 국가가 정당한 국가였던 것 같다. 적어도 1910년 이후로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건국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는가?"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문제 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그들이 하는 말이다. 근세 이후 유럽 여러 나라에서 현실 체제에 대한 비판이 국가와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해 온 사실이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모든 체제 비판을 '히고쿠민(非國民)'으로 몰아붙인 일본 군국주의만이 그들에게는 올바른 국가관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대한민국에는 자랑스러운 면도 있고 부끄러운 면도 있다"
이 시점 한국의 상황에서 뉴라이트처럼 정치 지향성을 가진 집단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점은 사상의 자유에 맡겨놓고,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관부터 따져봐야겠다. 민족은 도외시하면서 대한민국은 떠받든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진정성을 가진 것인가? 예수 사랑을 내세워 이익 챙기기 바쁜 사이비 종교인들처럼, 뭔가 다른 속셈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팔아먹는 것은 아닌가?
내게는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는 면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면도 있다. 다만 내 나라이기 때문에 아낀다. 자랑스러운 면이 많고 부끄러운 면이 적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는 데 내 힘이 쓰일 기회를 찾는다.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이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18개월 되었을 때 태어나 60년 가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내 나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냐 하는 실제 내용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구만 해도 세 배 가까이 늘어났고, 가난하던 나라가 제법 잘 살게 되었고, 폭력이 판치던 나라에 민주질서가 꽤 자리 잡았다.
정말 큰 변화다. 그 변화 속에서 '내 나라'에 대한 내 생각도 변해 왔다. 4·19가 있던 열 살때까지는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생각했다. 5·16 후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자라는 동안 부끄러움이 생겨났다. 졸업 후 유신을 겪으면서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서른 살 무렵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사회에 대한 내 책임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후 10·26, 5·18, 6·10을 차례로 겪었다.
1960년대 이후 내 생각의 전체적 변화는 부끄러움이 자랑으로 바뀐 것이다. 우선 빈곤과 독재를 벗어난 덕분이다. 그러나 더 밑바닥에 깔려 있던 불안감을 걷어내고 내 나라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2000년의 '6·15 공동 선언'이었다. 평생 불안하게 바라봐 온 민족과 국가의 괴리상태를 극복하려는 '지속적' 노력의 출발점이 바로 6·15였다.
민족이라는 것이 하나의 공허한 관념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시점 이 사회의 상황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주장이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 힘을 어찌 "공허"하다 할 것인가.
"분단 상태 아래서도 사회 발전이 가능하다는 믿음"
'지속적' 노력이라 함은 그 이전에 대한민국이 민족 분단 문제를 대해 온 태도와 대비하는 것이다. 1948년 건국 이래 '통일'의 당위성을 부정한 대한민국 위정자는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북진 통일에서 박정희의 유신용 통일을 거쳐 김영삼의 흡수 통일 주장에 이르기까지, 정략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이용당해 온 것이 통일이었다. 그런 주장을 내놓은 사람들에게는 통일보다 더 요긴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
나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아니다. 학생 때, 한국의 경제도 민주주의도 시원찮게 보이던 시절에는 통일지상주의 비슷한 심정에 빠지기도 했다. 미국의 힘에 묶이고, 독재가 지탱되고, 경제가 종속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문제가 민족 분단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통일 하나만이 우리 사회의 질곡을 풀어줄 열쇠처럼 보였다.
분단 상태 아래서도 사회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6·10 이후 키우게 되었다. 아직도 통일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희생시켜서라도 시급히 이뤄야 할 유일의 절대과제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경제와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을 바탕으로, 천천히 착실하게 이뤄 나갈 과제로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대해 나는 여러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내 나라'로 여겨 아끼는 마음 때문이다. 나의 노력, 우리의 노력으로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 조국에 아무 불만도 가져서는 안 된다느니, 절대 충성을 바쳐야 한다느니 떠들어온 자들이 있다. 조국을 아끼는 마음이 없는 자들, 조국을 이용할 생각만 가진 자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리다.
대한민국에 대한 내 가장 큰 불만은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제대로 풀지 못해 온 것이다. 민족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국가가 거기에 종속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민족도 국가도 우리 정체성의 바탕으로 모두 중요한 존재다. 두 존재가 원만하게 어울리기 바란다. 그 길을 국가 차원에서 비로소 열어낸 6·15를 계기로 나는 대한민국에 대해 애정만이 아니라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곧 문명인가?"
뉴라이트 논객들은 학계 주류의 대한민국관을 좌파로 몰아붙이며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을 주장한다. 이승만 정권에 비해 박정희 정권의 평가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개재되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시각만을 검토하겠다. 당장 '건국절' 주장도 이승만 정권의 평가와 관련된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내 생각을 단도직입으로 말하겠다. 그는 해방 후 한국 땅에 세워질 국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못한 짓이 없는 사람이다. 분단과 전쟁이 그가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해방 후 한민족에게 최악의 위험으로 닥쳐온 그 일들을 그는 막기는커녕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리고 내정에 있어서는 부패와 독재로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민주주의를 억눌렀다.
뉴라이트에서는 나와 다른 눈으로 이승만을 본다. 사실 인식에 있어서는 그들과 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평가의 기준, 가치관이 서로 다른 데서 시각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문명'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 크나큰 공로 앞에서는 민족분단도 부패와 독재도 별 흠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뉴라이트가 말하는 '문명'이란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본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문명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이유다.
"자본주의가 곧 문명"이란 황당한 개념정의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를 거의 신앙 차원으로 높이 받들다 보니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강력한 표현을 찾다가 문명이란 말을 욕보이게 된 모양이다. 사실, 이승만을 찬양한답시고 "한국을 자본주의로 이끈" 공로를 내세워서야 별로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런데 아무리 자본주의를 받든다 해도 일본 식민통치와 이승만 정권에게 한국 자본주의화의 공로를 돌리는 데는 문제가 있다. 두 정권은 한국을 자본주의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한국이 지금까지 이만큼이라도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두 정권이 빠트려놓은 구덩이에서 어렵사리 헤어 나와 온 국민의 힘으로 쌓아온 업적이다.
"이승만 시대의 대한민국을 부끄러워할 줄 알자."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이 민족 해방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은 구성원들의 노력에 의해 진화, 발전해 나가는 유기적 공동체가 아니다. 사회적 가치를 가진 살아있는 국가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시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뉴라이트는 자본주의를 받든다고 한다. 그래서 반도 남쪽의 우리가 사회주의라는 대륙의 야만에 빠지지 않고 해양의 문명,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을 축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 사회가 어떤 위치를 가진다는 것인지가 석연치 않다. '캐치업'이니 뭐니 장미빛 그림을 띄우지만, 앞선 나라들이 따라잡으라고 기다려 준단 말인가? 이명박 정부 몇 달 만에 '7-4-7' 공약이 증발하는 꼴을 벌써 보고 있지 않은가?
뉴라이트 멤버들은 자기네가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우기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딱이다. 세계대전을 겪고 공산혁명을 목격한 자본주의 진영은 그런 위험이 되풀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2차대전 후 자본주의 모순을 완화하는 정교한 제도를 발전시켜 세계경제를 부흥했다. 이 부흥이 1970년대 들어 한계에 접근할 때 반동적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다. 모순 완화의 노력을 포기하고 정글 자본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민족을 부정하며 국가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소속감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자본계급, 투기세력에게만 소속감을 가진 자들이다. '건국절' 주장을 비롯한 그들의 대한민국 찬양은 민족과 국가 사이의 이간질일 뿐이다. 사람들의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을 헷갈리게 해놓고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온 나라를 투기판으로 만들 기회를 얻으려는 교란작전일 뿐이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현대세계에서 제 발로 첫 걸음마를 뗀 계기였다. 서툴 때 고생도 많았지만, 피땀 흘려가며 여기까지 왔다. 오죽잖은 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도 그 동안 국민들이 잘 키운 덕에 이제 국가 노릇을 제법 하게 됐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해서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이 저절로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승만 시대의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아는 것,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에 불만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대한민국을 더욱더 자랑스럽게 키워나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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