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6. 15:28
1990년 가을, 4개월간의 파리 체류를 끝내며 약간의 여유시간을 가졌다. 1984년 초 타이완 구경으로 해외 나들이를 처음 시작한 이래 부지런히 다니기는 다녔지만, 연구 목적의 여행이기 때문에 다니는 곳이 뻔했다. 이제 귀국하면 학교도 그만뒀겠다, 밖으로 나다니기도 힘들어질 텐데, 좀 못 보던 것을 며칠이라도 보고 싶었다. 이름난 관광지보다 그냥 시골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어느 곳에서 바둑대회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같이 다닐 사람도 없는데, 바둑대회를 쫓아가면 고수라고 대접을 해주니까 지내기 좋을 것 같았다. 지방의 바둑대회에서는 외부 선수들, 특히 고수들 참가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참가비까지 따로 주지는 않아도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다.
캉. 노르망디의 중심도시다. 과히 멀지도 않고 시골은 확실한 시골일 것 같고 괜찮다. 토요일 점심때 파리 발 기차가 캉 역에 도착하니 주최측에서 마중나와 있다. 지역 회원들이 모처럼의 큰 행사에 신이 나서 열심히들 일해주는 가운데 대회는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두 판씩 둔 뒤에 야외파티로 저녁을 함께 하고 주선해 준 모텔에 일찍 들어와 쉬었다. 대회 임원에게 부탁해 놓았다. 내일 대회 끝난 뒤 부근에서 이틀쯤 쉬다가 가고 싶은데, 좀 더 시골스러운 숙소를 알아봐 달라고.
일요일 오전에 세 판씩 두고 점심때 대회가 끝났다. 나는 오전 첫 판에 앙드레에게 지고, 맥없이 두다가 또 한 판 날려서 입상은 못했다. 그래도 앙드레와 함께 정상급 고수로 대접받는 기분이 괜찮았다.
점심 먹을 때 어제 부탁해 둔 임원이 지역 회원 한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 이분이 선생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싶어 하는데, 가 보고 불편하시면 다른 숙소를 구해 드릴 거라고. 내 또래로 보이는데, 뼈대가 굵직굵직하고 표정이 순박한 것이 농사꾼 같다. 그런데 임원은 "독토르 콜송"이라 해서 좀 어리둥절했다. 좋은 친구가 될 피에르 콜송과의 만남이었다.
피에르의 차에 타서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큼직한 밴인데, 차 뒷칸이 어지러운 창고 같았다. 한참 둘러보고서야 싱크대도 있고, 침대도 있고, 자기 손으로 만든 모바일 홈이란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 푸랑수아도 입성이나 행동거지나 구김살 없는 촌 아이지, "독토르 콜송"댁 자제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계속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나를 싣고 차는 어느 낡고 아담한 집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말끔한 집안은 어지러운 차 안과 달리 확실한 인텔리겐챠 중산층 분위기였다.
차츰 알게 되었다. "독토르 콜송"은 의사였다. 집의 옆 필지에 진료소가 있는데, 조그맣지만 단단한 석조건물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파괴된 건물의 일부만 살아남은 것이라 한다. 한 필지가 2~3백 평 정도 되는 꽤 오래된 동네 같은데, 전쟁의 파괴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집의 뒤 필지는 건물 없이 피에르의 집 뒷마당에 연결되어 있는데, 거기다 닭, 토끼, 오리, 거위까지 골고루 키우는 것이 피에르의 취미의 하나였다.
피에르는 취미도 많았다. 가장 중요한 취미는 윈드서핑 같다. 신나던 서핑 경험을 설명할 때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근년 몰입하고 있는 취미가 바둑. 바둑을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하나의 '도'로 여기는 친구들이 유럽 바둑꾼들 중에 많다. 5급도 안 되는 하수들이 바둑판을 무슨 숭고한 원리의 실험장이나 되는 것처럼 심각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면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깨물기 바쁘다.
자기 집에서 지낼 만하겠냐고 묻기에 아주 좋다고 대답하니까 너무너무 행복해 한다. 그리고는 사실 그 전에 나를 봤다고 한다. 라데팡스 부근에서 내가 우승한 대회에 왔다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너무나 흠모해 마지 않았는데, 자기 집에 묵게 되어 꿈처럼 행복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뭐가 그렇게 흠모스럽더냐고 웃으며 물었더니 시계 누르는 내 폼이 너무나 멋지더라고. 체스용 시계를 쓰는 데 나는 익숙지 않아서 바둑돌을 누른 다음 시계로 손을 가져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익숙한 친구들은 번개처럼 후닥닥 손을 움직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엉성한 내 동작이 너무나 여유만만해 보여서 "아! 이것이 전정한 고수의 시계 누르는 자세구나!" 탄복했다는 것이다.
화요일에 돌아오려 했는데, 화요일에 자기 일을 치워놓고 같이 바람쐬러 나가자고 꼬셔서 하룻밤 더 지냈다. 친절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 대한 감각도 서로 비슷한 것 같아서 참 같이 지내기가 편안했다. 화요일에는 유명한 관광지에 데려다주었다. 관광지를 잘 안 돌아다니다 보니 이름도 잊었는데, 육지 바로 곁의 섬을 수도원이 덮어씌운 곳, 썰물 때만 걸어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경치도 아름답고 시설도 멋있었지만, 내게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피에르에게 듣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학삐리 아닌 유럽인과의 넓고 깊은 대화는 처음이었다.
나를 우상처럼 쳐다보며 졸졸 따라다니던 프랑수아에게 떠나기 전날 밤 조그만 선물을 하나 줬다. 여행 때 쓰고 다니던 군용 스타일의 모자를 주며(그 녀석 머리통이 참 컸다.) "이 모자를 쓰고 바둑 두면 좀 더 잘 둘 수 있을 거야." 하니까 "정말요?" 하면서 모자를 얼른 써 보는데, 얼굴이 마치 전등에 불 들어오듯이 확 밝아진다. 뒤에서 피에르가 표정으로 나타내는 감사의 뜻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서로 익숙해졌다.
85년부터 뻔질나게 유럽에 다니면서 즐거운 경험이 수없이 많았지만, 독토르 콜송 집에서의 편안함은 각별한 즐거움이었다. 그 이듬해 프랑스에 다시 간 것은 자료조사 미진한 것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피에르네 집에 또 가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재회의 즐거움에 이어 멀지 않은 앙쥬의 바둑대회에 함께 가 이번에는 마침 다시 마주친 앙드레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 우승상품은 지역 특산의 적포도주 여섯 병에 백포도주 여섯 병. 적포도주는 체류 중에 마셔 치우고, 백포도주는 피에르 진료소 지하에 있는 와인셀라에 넣어두었다. 그 백포도주 피에르랑 함께 따러 언제 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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