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9. 15:11
 

 

85년 전반부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지내는 동안 연구분야를 중국역법사에서 근세동서교섭사로 옮기게 되었다. 명말청초의 서양 천문학 도입을 살펴보다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양문명 소개 작업으로 관심이 넓혀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방학 때마다 파리에 가서 지내게 되었다. 자크 제르네 교수를 따르며 교섭사를 연구하는 소장 학자들이 파리에 여러 명 있고 콜레쥬 드 프랑스의 인문사회도서관에 자료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방학 때 한 달 남짓씩 가서 지내는 데 감질내고 있다가 90년 여름 학교를 그만두고는 4개월 가량 지내면서 박사논문을 위한 자료조사를 진행했다. 모처럼 길게 지내려니 손이 좀 근질거렸고, 마침 일본인 연구자 아니크와 가오루 부부에게 얹혀 지낼 때여서 가오루에게 바둑 두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가오루가 미니텔(당시 프랑스의 국영 인터넷 통신망)에서 뽑아준 목록을 보니, 대개 카페에서 체스판 갖춰놓는 것처럼 바둑판을 놓아두고 손님 적은 오후 시간에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오후 두 시에서 여섯 시까지 제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딱 한 군데 일곱 시에서 자정까지 여는 곳이 있었다. 설명이 따로 없어도 '꾼'들 모이는 곳이 분명했다.

이튿날 저녁을 일찍 먹은 후 찾아가 봤다. 퐁뇌프 북단 부근의 골목길 안, 무슨 복지시설 같은 곳을 업무시간 후에 바둑클럽으로 활용하는 곳이었다. 20조 가량의 바둑판이 있고, 맥주와 간식 파는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인만 있고 중국인이 두엇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고수를 놓고 한참 왁자지껄했다. 앉아 있던 선수 중 제일 쎈 사람이 두던 판 걷어치우고 달려들어 판을 벌였는데, 2단이라 하기에 석 점을 붙였다. 데리고 노는 데 전연 힘이 들지 않아서 여기에선 5단 두는 데 별 애로가 없겠구나, 생각했다. 성격부터 참 싹싹한 친구였다. 두 판 두고 일어서려니까 지도비로 자기가 맥주 한 잔 대접할 테니까 좀 기다려 보라고, 곧 고수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9시쯤 되어 나타난 고수가 앙드레 무사였다. 바둑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피에르 콜메즈와 함께 프랑스 바둑계의 쌍벽이라고. 그 후 차츰 알게 되었는데, 둘 다 명문 고등사범 출신으로 앙드레는 물리학, 피에르는 수학 전공이었다. 그런데 피에르는 착실하게 일도 하고 가정도 꾸리면서 취미로 바둑을 즐기는 사람인 반면 앙드레는 누구 표현대로 "잡기에 정진하는" 사람이었고, 바둑은 정진하는 여러 잡기 중 한 갈래였다.

1 대 2로 밀렸지만, 평수로 느껴졌다. 판을 거두고 내가 맥주 한 잔 권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며칠 후 대회가 하나 있으니 나가 보라고 권한다.

프랑스 바둑협회에서는 매주 각지를 다니며 한 차례씩 대회를 연다. 지역의 바둑팬들이 지부를 통해 주최를 신청하면 협회에서 일정을 잡아주는 것이다. 방방곡곡을 다 돌아다니는 이 대회에서 연중 거둔 성적 중 제일 좋은 것 몇 차례를 비교해(아마 다섯 차례?) 고수들의 서열을 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주 주말에 라데팡스 곁의 조그만 위성도시에서 대회가 열릴 참이었다. 동네 이름은 잊었지만, 라데팡스가 안양이라면 평촌 정도 되는 곳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대회장으로 갔다. 가오루가 자기도 구경하고 싶다며 길을 안내해 줬다. 그 날 대회에 앙드레는 나오지 못하고 피에르가 나왔다. 고등사범 수학과 동창인 아니크에게 전화로 얘기 들었다며 반가워한다.

대회는 스위스 리그로 진행되었다. 첫 판은 가볍게 따냈는데, 둘째 판에서 재미있는 선수랑 마주쳤다. 공격일변도였다. 잡아먹겠다고 눈 감고 달려드는데, 설마설마 하다가 꽤 큼직한, 들어가는 집이 50집이 넘는 덩어리가 잡히게 됐다. 그래도 워낙 무리한 공격이라 그거 떼어주고도 다른 곳에서 남는 게 더 클 만한 판이었다. 선선히 잡혀주니까 얼굴 표정부터 천진난만하게 행복해진다. 그곳 빼고 다른 곳을 내가 다 장악해 가는 동안 잡은 돌 확실히 잡느라고 가일수, 가이수, 가삼수를 한다. 이 큰 것 잡았으니 판은 끝났다는 기분인 모양이다. 형세판단 이렇게 안 하는 선수 처음 봤다.

나중에 얘기 들으니 그 선수가 5단은 5단이지만 피에르나 앙드레한테는 대적이 안 되고, 대신 하수 잡는 데는 귀신이라고 한다. 일본 바둑책을 열심히 봤는데, 일본어를 모르니 "이렇게두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국 망한다"는 설명을 못 보고 그런 수법을 열심히 익혀 '암수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직업이 화가라서 형세판단을 색깔로만 하지, (새하얗거나 시커멓거나) 숫자로 하지 못한다고 하니, 직업병도 가지가지다.

셋째 판에서 피에르랑 마주쳤다. 앙드레 같은 힘은 없지만 기본기가 착실하고 성격도 침착하다. 피에르가 판세를 리드해 가는 동안 나는 여기저기 지뢰를 묻었다. 중반전이 다 지나갈 무렵까지 터지는 지뢰가 없어서 피에르 표정에도 안도의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드디어 하나가 터졌다. 둘러선 구경꾼들이 극적 반전에 경탄해 마지 않는다.

피에르와의 일전이 실질적인 결승국이었다. 넷째 판 두 점 대국에서 초반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상대 선수가 충분히 응징하지 못한 것은 나를 너무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일한 전승자로 우승, 3백 프랑 상금을 챙겼다. 가오루 부부에게 모처럼 외식 대접을 하고도 마음에 드는 가방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진행비는(별로 드는 것도 없지만) 지부 회원들이 부담하고 참가비를 모아 상금으로 쓰는 '돈 놓고 돈 먹기' 대회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바둑협회에도 5단 선수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한국기원 5단에 일본기원 (정신적) 5단, 그리고 프랑스 바둑협회 5단을 땄으니 합이 15단, 아마추어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게 되었다.
 



Posted by 문천
상: 이대 동료 이윤재, 이혜숙, 김호순 선생님과 함께 (네 분 연세 합이 342세)
하: 네 분 + 남지심 선생님과 셋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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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9세기 말에 일어난 미국의 민족주의를 '민족주의'라 부르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국가주의보다는 민족주의의 특성을 가진 것이 맞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국가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하는 경향은 강하지 않았으니까. 남북전쟁을 통해 국가의 통합성이 강화되고 그 후 산업 발전으로 국력이 신장된 결과로 민족주의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민족'들과 달리 미국인들은 공유하는 전통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길지 않은 역사 속의 몇 가지 독특한 요소들을 신화화하여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삼는 작업이 이 무렵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중 중요한 요소 하나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였다. 미국이란 국가에 앞서 '문명된 아메리카'의 조상으로 추앙받은 사람들이다.

원주민들이야 아예 무시하던 시절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의 미국 본토에 유럽인이 진출해 활동한 것은 16세기 초부터의 일이었다. 다른 유럽인 아닌 영국인이 식민활동을 시작한 것도 160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유독 1620년 11월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지금의 매서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 102명의 승객을(그중 '메이플라워 서약'에 서명한 41명 성인 남성을) 조상으로 각별히 받드는 까닭이 무엇일까?

'필그림 파더스'라는 이름대로 종교적 입장이 분명한 집단이 서명자의 주축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집단의 존재가 이 지역 식민지 사회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긴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너무 늦은 계절에 도착해 배 안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절반 가까운 인원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출발이 처참했는데도 이곳 식민지가 짧은 기간 내에 자생력을 확보한 데는 이 집단의 정체성이 큰 작용을 했다. 먼저 출범한 버지니아 식민지가 여러 해 동안 자생력을 키우지 못해 감옥 같은 억압적 분위기로 운영되다가 상품성 있는 담배 재배에 성공해서 겨우 궤도에 오른 것과 달리, 종교의 자유를 찾아 플리머드 식민지에 온 사람들은 곡식농사, 고기잡이 등 생존을 위한 활동에 전념했던 것이다.

'필그림 파더스'란 이름은 1900년 경부터 널리 쓰이게 된 것이지만, 필그림 정신은 뉴잉글랜드 문화의 핵심적 요소로 인식되어 있었다. 남북전쟁 승리와 그 후 산업 발전의 주축으로 미국을 이끌어가고 있던 뉴잉글랜드 지방이 '영광스러운 미국'의 출발점으로 메이플라워 호를 선포한 것이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05)에도 당시 미국에서 요란하게 떠받들던 필그림 파더스가 자극을 주었을 것 같다.


아메리카 식민지 인구는 1700년 25만에 이르고 1760년 170만에 이르렀다.(약 40만으로 추정되는 흑인 포함) 17세기 중에 기초를 잡고 18세기 들어 폭발적 팽창이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업 중 농업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지만 상품작물에 치중된 식민지의 특성을 보였다. 따라서 상업활동의 규모가 컸고, 큰 재산을 이룬 상인들이 정치적 영향력도 키우게 되었다. 독립전쟁 무렵 식민지 지도층은 상인과 농장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미국 독립의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배경은 1756~63년의 7년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 불렀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자원 수집과 교역에만 활용하고 영국처럼 인구 정착에 주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착한 프랑스인 인구가 영국인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앞 회에서 설명한 것처럼 프랑스가 이 때까지 중상주의 정책을 지키고 있었던 결과다. 그래서 프랑스인의 존재는 영국인처럼 원주민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원주민이 프랑스 편에 서서 영국군과 싸웠다.

전쟁의 결과 인근의 프랑스 세력이 제거되고 원주민의 저항이 줄어듦으로써 영국 식민지에게는 안보상의 위협이 사라졌다. 독립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영국은 막대한 전쟁비용의 일부라도 식민지 주민들이 분담해 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식민지 주민들은 주머니 털어줄 필요를 이제 별로 느끼지 않게 되어 있었다.

7년전쟁 전까지 영국 본국과 아메리카 식민지는 공생관계였다. 안보문제에도 공동으로 대처했고, 경제적으로도 상호간의 독점적 거래로 이익을 함께 했다. 그런데 프랑스 세력이 없어짐으로써 공생관계의 조건이 무너졌다. 본국은 캐나다 등 새로 획득한 식민지의 안보 부담을 가지게 되었지만 식민지에게는 안보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프랑스인의 경쟁이 사라져 식민지인들은 영국과의 독점적 거래가 아니라도 충분한 활동영역을 가지게 되었다.

왕권이 억제되어 있는 영국의 정치적 상황도 식민지를 지키기 힘들게 만들었다.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이해관계가 전보다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은 7년전쟁 종결 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갈등이 증폭됨에 따라 식민지인들은 본국 의회를 비난하며 국왕의 중재를 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헌법정신'에 대한 논란도 거듭해서 일어났다. 분권적이고 유연한 18세기 영국의 정치풍토에는 식민지를 통제할 압도적 권위가 없었던 것이다.

본국 의회에서도 식민지 지도층에서도 자본의 힘이 강했다. 양쪽 대표자들은 비슷한 문화적 취향과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본국에 있느냐 식민지에 있느냐에 따라 그 이해관계가 정면 충돌한 것이다. 소인(小人)은 "같으면서 어울리지 못한다"(同而不和)는 공자 말씀 그대로였다.


프랑스의 압박이 없어지니까 본국과 식민지가 갈라섰듯, 본국의 압박이 사라지니까 남부와 북부가 갈라서게 된다. 남북전쟁은 1861년에야 일어나지만, 남북간 갈등의 조짐은 독립 직후부터 나타났다. 재무장관 해밀턴의 재정정책에 대한 남부 지역의 반발이 그것이다. 대외 교역에 많이 의존하는 남부 지역에 불리한 정책이기 때문이었고, 그 때문에 보호관세 등 일부 정책이 저지되었다.

이 갈등의 폭발을 70여 년간 늦춰준 것은 무엇보다 영토의 팽창이었다. 대서양 연안의 13개 주로 출범한 미국이 팽창의 기초를 마련한 것은 1803년의 루이지아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이었다. 현 미국 중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스페인으로부터 넘겨받은 나폴레옹 정부가 전략적 이유로 200여만 평방km, 미국의 기존 영토보다 더 큰 땅을 당시 돈 1500만 달러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뉴올리언즈 항구 하나를 마음에 두고 흥정을 붙였다가 프랑스 측의 제안으로 이 엄청난 땅을 얼떨떨한 채로 사들였고, 이 땅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미국이 다시 서쪽으로 더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 40년 후의 일이었다. 이 무렵 '드러난 천명'(Manifest Destiny)이란 말이 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빛의 제국'을 세울 운명을 타고났다는, 팽창을 정당화하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대략 지금의 미국 본토를 대상으로 대개 쓰여졌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더 넓은 영역을 대상으로 쓰이기도 했다. 20세기 말 미국의 세계경찰론도 이 구호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파이가 커지는 동안에는 분배 문제가 쉽게 무마된다. 19세기의 전반부 동안 미국 영토는 다섯 배로 늘어나 지금의 본토 영역을 다 끌어들였고, 남부로는 노예가, 북부로는 이민이 계속 유입되어 인구도 열 배 가까이 팽창, 3천만에 이르렀다. 사회의 최하층부까지도 새로 도착한 이민에 대해 기득권을 누리는 상황이 내내 계속된 것이다.

1830년대 초 미국에 2년간 체류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미국의 사회적 유동성이 큰 상태였던 것처럼 적었는데, 근래의 정밀한 연구로 이것이 토크빌의 착각이었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미국에서 빈부 격차는 유럽 어느 선진국보다 컸고, 부호들은 부를 세습하는 계급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귀족제도 등 공식화된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크빌이 미국을 "기회의 나라"로 본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다른 나라보다 더 기회가 큰 나라가 아니었다.

영토와 인구의 팽창은 장기적으로 농업보다 제조업의 발달에 더 유리한 현상이었지만, 팽창의 이익이 워낙 큰 동안은 농업지대인 남부의 불만도 덮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이 1850년대에 한계에 도달하면서 남북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노예제 폐지론은 넓은 범위에서 펼쳐졌다. 그중에는 종교적 정의관도 있었고 인도주의적 입장도 있었다. 그러나 1840년대까지 북부에서도 대중의 외면을 받던 폐지론이 1850년대를 지나면서 정치적 쟁점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역시 남부 농장에 묶여 있는 노예 노동력을 산업화에 끌어들이려는 '실용주의' 입장 덕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뒤에도 실질적으로 노예제 못지않은 제도적 차별이 수십년간 계속된 사실에서도 전쟁의 동기에서 인도적 요인이 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식민지 경제구조를 가지고 태어난 나라였다. 상품 작물의 대량재배에 의존도가 큰 기형적 경제구조였다. 1850년대까지 영토가 다섯 배, 인구가 열 배로 늘어나는 폭발적 팽창 속에서 기형적 경제구조의 모순이 덮여져 있다가 결국 한계에 이르러 남북전쟁을 겪었다. 그리고는 산업화를 통한 팽창의 길로 들어섰다.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의 대외수출 가운데 면화의 비중이 절반이 넘었다는 사실에서 그 때까지 산업화 수준이 초보 단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옛 본국과의 인적 교류를 통해 산업혁명의 신기술을 도입하는 데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미국 직물업의 시조로 알려진 새뮤얼 슬레이터와 프랜시스 로웰의 경력에서 이 이점을 알아볼 수 있다.

1789년 21세 나이로 미국에 건너온 슬레이터가 미국의 첫 방적공장을 열었다. 영국에서 방적공장 견습공으로 일한 경험으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은 직물산업을 국가기밀로 취급해서 기능공의 출국을 막고 있었는데, 슬레이터는 감시를 피해 건너온 사람의 하나였다.

미국 상인 로웰은 1810년 영국에 다니러 갔을 때 직물공장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다. 일체의 기록이 금지된, 눈으로만 보는 견학이었다. 2년 후 영미전쟁이 일어나 직물 수입이 끊어졌을 때 로웰은 견학 때 기억을 되살려 직물공장을 세웠다. 영국 공장보다는 물론 효율과 품질이 뒤지는 것이었지만, 무역이 끊긴 상황에서는 내수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공업이 뉴잉글랜드 지역에 집중되었던 것은 기계 돌리는 동력을 수력(물레방아)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유수량과 유속을 가진 하천이 뉴잉글랜드 지역에 많았다. 1850년대부터 증기기관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공장 건설이 이 조건에서 풀려나오고 있던 참에 남북전쟁으로 산업화의 확대가 순조롭게 되었다.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에는 산업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렸다. 당시 공화당 정권의 부패상은 정치가들의 도덕성 문제에 앞서, 급성장하는 자본의 힘 앞에 정치가 압도당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산업자본주의가 자리 잡은 나라들이 식민지 경쟁을 벌일 때 미국은 확보해 놓은 영토를 식민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1890년대 들어서야 미국이 더 큰 무대를 찾게 되었다. 극단적 애국심이 미국 사회를 휩쓰는 가운데 스페인과의 전쟁(1898)으로 열강의 일원이 된 모습을 세계에 드러낸다.

미국은 독립 때부터 팽창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를 20세기까지 가져왔고, 20세기 동안은 대외 영향력의 증대를 통해 팽창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다음 주 자본주의의 속성을 설명할 때 나오겠지만, 이 팽창의 욕구가 자본주의의 속성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은 자본주의 시대의 총아라 할 나라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