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전반부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지내는 동안 연구분야를 중국역법사에서 근세동서교섭사로 옮기게 되었다. 명말청초의 서양 천문학 도입을 살펴보다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양문명 소개 작업으로 관심이 넓혀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방학 때마다 파리에 가서 지내게 되었다. 자크 제르네 교수를 따르며 교섭사를 연구하는 소장 학자들이 파리에 여러 명 있고 콜레쥬 드 프랑스의 인문사회도서관에 자료가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방학 때 한 달 남짓씩 가서 지내는 데 감질내고 있다가 90년 여름 학교를 그만두고는 4개월 가량 지내면서 박사논문을 위한 자료조사를 진행했다. 모처럼 길게 지내려니 손이 좀 근질거렸고, 마침 일본인 연구자 아니크와 가오루 부부에게 얹혀 지낼 때여서 가오루에게 바둑 두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가오루가 미니텔(당시 프랑스의 국영 인터넷 통신망)에서 뽑아준 목록을 보니, 대개 카페에서 체스판 갖춰놓는 것처럼 바둑판을 놓아두고 손님 적은 오후 시간에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오후 두 시에서 여섯 시까지 제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딱 한 군데 일곱 시에서 자정까지 여는 곳이 있었다. 설명이 따로 없어도 '꾼'들 모이는 곳이 분명했다.
이튿날 저녁을 일찍 먹은 후 찾아가 봤다. 퐁뇌프 북단 부근의 골목길 안, 무슨 복지시설 같은 곳을 업무시간 후에 바둑클럽으로 활용하는 곳이었다. 20조 가량의 바둑판이 있고, 맥주와 간식 파는 사람도 있었다. 프랑스인만 있고 중국인이 두엇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고수를 놓고 한참 왁자지껄했다. 앉아 있던 선수 중 제일 쎈 사람이 두던 판 걷어치우고 달려들어 판을 벌였는데, 2단이라 하기에 석 점을 붙였다. 데리고 노는 데 전연 힘이 들지 않아서 여기에선 5단 두는 데 별 애로가 없겠구나, 생각했다. 성격부터 참 싹싹한 친구였다. 두 판 두고 일어서려니까 지도비로 자기가 맥주 한 잔 대접할 테니까 좀 기다려 보라고, 곧 고수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9시쯤 되어 나타난 고수가 앙드레 무사였다. 바둑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피에르 콜메즈와 함께 프랑스 바둑계의 쌍벽이라고. 그 후 차츰 알게 되었는데, 둘 다 명문 고등사범 출신으로 앙드레는 물리학, 피에르는 수학 전공이었다. 그런데 피에르는 착실하게 일도 하고 가정도 꾸리면서 취미로 바둑을 즐기는 사람인 반면 앙드레는 누구 표현대로 "잡기에 정진하는" 사람이었고, 바둑은 정진하는 여러 잡기 중 한 갈래였다.
1 대 2로 밀렸지만, 평수로 느껴졌다. 판을 거두고 내가 맥주 한 잔 권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며칠 후 대회가 하나 있으니 나가 보라고 권한다.
프랑스 바둑협회에서는 매주 각지를 다니며 한 차례씩 대회를 연다. 지역의 바둑팬들이 지부를 통해 주최를 신청하면 협회에서 일정을 잡아주는 것이다. 방방곡곡을 다 돌아다니는 이 대회에서 연중 거둔 성적 중 제일 좋은 것 몇 차례를 비교해(아마 다섯 차례?) 고수들의 서열을 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주 주말에 라데팡스 곁의 조그만 위성도시에서 대회가 열릴 참이었다. 동네 이름은 잊었지만, 라데팡스가 안양이라면 평촌 정도 되는 곳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대회장으로 갔다. 가오루가 자기도 구경하고 싶다며 길을 안내해 줬다. 그 날 대회에 앙드레는 나오지 못하고 피에르가 나왔다. 고등사범 수학과 동창인 아니크에게 전화로 얘기 들었다며 반가워한다.
대회는 스위스 리그로 진행되었다. 첫 판은 가볍게 따냈는데, 둘째 판에서 재미있는 선수랑 마주쳤다. 공격일변도였다. 잡아먹겠다고 눈 감고 달려드는데, 설마설마 하다가 꽤 큼직한, 들어가는 집이 50집이 넘는 덩어리가 잡히게 됐다. 그래도 워낙 무리한 공격이라 그거 떼어주고도 다른 곳에서 남는 게 더 클 만한 판이었다. 선선히 잡혀주니까 얼굴 표정부터 천진난만하게 행복해진다. 그곳 빼고 다른 곳을 내가 다 장악해 가는 동안 잡은 돌 확실히 잡느라고 가일수, 가이수, 가삼수를 한다. 이 큰 것 잡았으니 판은 끝났다는 기분인 모양이다. 형세판단 이렇게 안 하는 선수 처음 봤다.
나중에 얘기 들으니 그 선수가 5단은 5단이지만 피에르나 앙드레한테는 대적이 안 되고, 대신 하수 잡는 데는 귀신이라고 한다. 일본 바둑책을 열심히 봤는데, 일본어를 모르니 "이렇게두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국 망한다"는 설명을 못 보고 그런 수법을 열심히 익혀 '암수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직업이 화가라서 형세판단을 색깔로만 하지, (새하얗거나 시커멓거나) 숫자로 하지 못한다고 하니, 직업병도 가지가지다.
셋째 판에서 피에르랑 마주쳤다. 앙드레 같은 힘은 없지만 기본기가 착실하고 성격도 침착하다. 피에르가 판세를 리드해 가는 동안 나는 여기저기 지뢰를 묻었다. 중반전이 다 지나갈 무렵까지 터지는 지뢰가 없어서 피에르 표정에도 안도의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드디어 하나가 터졌다. 둘러선 구경꾼들이 극적 반전에 경탄해 마지 않는다.
피에르와의 일전이 실질적인 결승국이었다. 넷째 판 두 점 대국에서 초반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상대 선수가 충분히 응징하지 못한 것은 나를 너무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일한 전승자로 우승, 3백 프랑 상금을 챙겼다. 가오루 부부에게 모처럼 외식 대접을 하고도 마음에 드는 가방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진행비는(별로 드는 것도 없지만) 지부 회원들이 부담하고 참가비를 모아 상금으로 쓰는 '돈 놓고 돈 먹기' 대회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바둑협회에도 5단 선수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한국기원 5단에 일본기원 (정신적) 5단, 그리고 프랑스 바둑협회 5단을 땄으니 합이 15단, 아마추어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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