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ism"은 그리스어에서 동사를 명사화하는 어미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 관습, 상태, 원리, 신조, 특성, 지향 등을 나타내는 여러 용도로 쓰인다. 이것을 흔히 "~주의"라고 번역하는데, 이 번역은 영어에서의 용도 중 일부만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 말에서 "~주의"라 하면 윈리, 신조, 지향 등 목적의식이 개재된 규정적(normative)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현상을 묘사하는 기술적(descriptive) 의미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criticism, barbarism 같은 말은 "~주의"로 옮기지 못하지 않는가?)

'자본주의"로 번역되는 "capitalism"은 원래 "자본을 가진 상태"라는 기술적 의미로만 쓰이다가 20세기로 넘어올 무렵부터 규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자본론>(1867, 85, 94)에서도 "capitalist"란 말은 수천 번 쓰이지만(물론 "자본주의자" 아닌 "자본주"의 뜻으로) "capitalism"이 쓰인 것은 총 10회도 되지 않는다. 대신 "kapitalistisches System", "kapitalistische Produktionsform" 등의 표현이 많이 쓰인 것은 이념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서, 기술적 의미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베르너 좀바르트의 <유대인과 근대 자본주의>(1902)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이 나올 무렵에야 "capitalism"이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는 20세기의 역사적 현상이다. 따라서 19세기 이전의 'capitalism'을 규정적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시대착오(anachronism)에 해당된다. 전근대 사회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런 의미의 한계를 가진 것이다. "맹아"라 함은 장차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잠재력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꽃과 열매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규정적 의미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 어느 시기에 나타난 현상을 실제로 나타나지 않은 현상의 예고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자본주의 맹아"에 집착해 온 것은 자본주의의 위력이 어마어마한 세태 때문에 마치 문명 발전의 필수적 단계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본주의를 문명의 궁극인 것처럼, 또는 문명 그 자체인 것처럼 받드는 유사종교 행태까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순수한 믿음이라기보다 기득권 고수를 위해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주장하기 위한 정략적 행태가 더 많은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이념을 가리키는 인상을 주는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19세기 이전 기술적 의미의 "capitalism"을 "자본체제"라 부르기로 한다. "자본주의 체제"라 하면 이념으로서 자본주의를 전제로 하는 체제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세 초부터 서유럽 지역에서 자라난 하나의 경제체제가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힘을 키워 정치와 사회 방면까지 통합하는 강력한 세계체제로 자라나고 20세기에 들어와 이 체제의 원리에 대한 깊은 믿음이 널리 일어나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이 세워졌다고 나는 본다.

1861년 프루동이 내린 "capitalism"의 정의를 "자본체제"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력으로 자본에 작용을 하여 수입의 원천이 되게 하지만 이들 노동자가 자본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회경제체제". (황런위,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 20쪽에서 재인용)

 

자본체제의 특성을 논하는 데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사적 소유권의 강화에 초점을 맞춘다. 각 관점이 바라보는 측면들은 어차피 서로 얽혀 있는 것인데, 이념으로서 자본주의가 소유권의 절대화를 중심에 두는 것이므로 이에 맞춰 소유권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소유권 개념은 문명과 함께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문명 초기에는 '원시 공산제'가 존재했으리라고 인류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이고, 실제로 미개사회에는 소유권 개념이 미약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농업문명이 발달하면서 소유권 개념도 자라나지만 농업사회 단계에서는 그 성장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의 소유권 강화를 억제하는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농지의 경우가 명백한 예다.

농지는 경작하는 농부가 있음으로써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재산이다. 따라서 농부는 자기가 경작하는 땅의 주인이 아닐 수 없다. 대지주가 소작꾼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절대적 소유권은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이 넘쳐나게 되는 먼 후세의 일이다. 개간할 땅이 넉넉히 있는 데 비해 노동력이 아쉬운 것이 초기 농업사회에서는 보통이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경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 기록을 보면 영주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백성이 떠나가는 것이었고, 제일 바란 것이 백성이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농부가 경작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처지도 아니었다. 농지의 획득과 유지에 권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력자와 경작자가 호혜적 공생관계를 맺게 되고 토지는 공유의 대상이 된다. 이 공유는 절대적 소유권 사이의 평면적 분할이 아니라 부분적 소유권의 중층적 결합이다.

권력과 생산력의 공생관계가 농업사회 질서의 본질이다. 권력과 생산력이 1 대 1로 만나면 공생관계의 효율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권력에는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된다. 권력 내부에서 몫을 다투는 중간권력의 경쟁이 배타적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사회에서는 최고권력자가 말단의 문제를 모두 직접 보살피기 힘들기 때문에 중간권력이 만들어져 권력 자체가 중층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생산자 위에 소영주 계층, 그 위에 대영주 계층, 그리고 그 위에 왕이 자리 잡는 것이다. 권력의 중층화는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하나는 권력의 유통구조가 복잡해서 비용이 많이 들게 되는 것이고, 또 하나가 중간권력 사이의 경쟁으로 소유권의 배타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서 생산자와 최고권력자 양쪽의 부담을 크게 만든다.

중국에서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 '왕토(王土)'사상이 자리 잡은 것은 중간권력이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최고권력자의 소유로 선포함으로써 중간권력의 경쟁이 과열되지 않도록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왕의 지배권과 농부의 경작권을 직접 결합시키면서 중간권력의 주체적 역할을 배제하고 보조적 기능만 허용한 관념이다.

왕토사상은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오랫동안 중앙집권체제를 지지하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물론 이 이념이 언제나 완벽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해 행정의 효율화 등 노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유럽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중앙집권성과 안정성이 뛰어난 정치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지배층에게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與民爭利)"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도덕적 전통이 있었다. 권력, 학식 등 경쟁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계층의 경제활동을 억제함으로써 불공정 경쟁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은 관념인데, 또한 중간권력층의 역할에 한계를 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는 중간권력의 비용을 줄이고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권력자와 생산자 양쪽을 다 이롭게 해주었다. 이런 좋은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 동아시아 사람들이 다른 곳 사람들보다 꼭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농업사회가 일찍 발달하고 인구밀도가 조밀해져서 갈등을 최소화할 압박을 더 많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소유욕에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이 체제의 핵심적 요소였다.


농업사회 후기로 넘어오면서 내부 압력이 늘어나 변화 방향이 모색된 것은 유라시아 대륙 어디에서나 일어난 일이다. 변화의 중심축이 소유권 강화에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제 권력자의 경쟁 못지않게 생산자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최고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질서가 개인을 직접 보호해 주는 힘이 약해지면서 각자가 자기 안전과 번영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 각개약진에 나서면서 들고 나온 무기가 소유권이었다.

농업사회 안에서도 소유권 강화 현상이 일찍부터 나타난 영역이 있었다. 상업 영역이었다. 농업사회의 생산력 발전에 따라 비생산 인구가 늘고 지역적 분업이 형성되면서 시장이 확대되고 상업의 비중이 커졌다. 상업활동은 안정된 소유권의 발판을 필요로 했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 안에서도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강한 소유권 의식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리고 상업활동이 집중되는 지역이 생기기도 했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회사 제도를 비롯해 많은 '근대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이 지역에서 나타나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강력한 소유권을 전제로 하는 제도들이었다. 그래서 근대 자본체제의 출발점을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찾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특별히 똑똑해서 안정성 높은 중앙집권체제를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중세 말기 이탈리아에서 선진적 금융-경제 제도들이 나타난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당시의 유럽에는 중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도시국가들이 특화된 기능을 발전시키는 데 대한 권력의 통제가 약했다. 그리고 당시 유럽 지역은 생산력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선진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제도들이 북해-발틱해 연안의 일부 지역에 이식되는 데는 몇백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시기 이탈리아의 금융-경제 제도 발전의 배경에 '이슬람 자본체제'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Wikipedia>의 "capitalism" 항목을 보면 이 주제에 관한 연구가 근년 활발한 것을 알아볼 수 있고, 약간의 설명 중에는 8~12세기 '이슬람 농업혁명'에 힘입은 '이슬람 황금시대'에 화폐, 회사 제도 등 선진적 금융-상업 제도들이 고도로 발전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중세 말기에서 근세 초기에 걸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교역활동에 이슬람 지역과의 교역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시기에 이슬람권의 문화가 기독교권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은 더욱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실증적 연구결과에 접해 보지 않았더라도 이런 정도 배경 위에서 가설을 세울 만한 길은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슬람권의 선진적 제도와 문물을 가장 앞장서서 배워 온 유럽인이었다."

근대 자본체제의 뿌리를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찾는 관점은 유럽 중심주의의 인상을 준다. '세계체제'라는 본질을 떠나 자본체제의 존재를 논하는 의미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슬람 자본체제'에 관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이 이 관점의 밑바닥을 흔들고 있다. 상업활동이 고도로 발달한 이슬람권에서 교역활동을 벌인 여러 미개지역 중 하나가 유럽이었고, 그 방면의 창구 역할을 맡은 이탈리아인들이 거래 과정을 통해 선진 기술을 배워 온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Wikipedia>의 "Islamic capitalism" 항목 일부 내용을 옮겨놓는다. 나도 읽으면서 놀랐지만 독자 여러분도 놀랄 것이라 믿는다.

"11-13세기에 카리미(Karimi)라는 기업이 이슬람세계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초기 다국적기업이라 할 수 있는 카리미를 통제하는 50명 가량의 상인들도 역시 '카리미'라고 불리웠는데, 그중에는 예멘인, 이집트인, 그리고 더러 인도인도 있었다. 카리미 상인들은 상당한 재산가여서 각자 최소한 10만 디나르, 많으면 100만 디나르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 그룹은 동방의 많은 주요 시장, 그리고 더러는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금융활동의 고객으로 왕후(Emir), 술탄, 대신(Vizier), 외국 상인, 그리고 일반 소비자들까지 넓은 접촉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리미 그룹은 지중해, 홍해와 인도양의 많은 교역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북쪽으로는 프랑키아, 동쪽으로는 중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 너머까지 그 교역 범위 안에 들어갔다. 카리미 그룹이 발명한 제도 중에는 대리인 제도, 자금 동원을 위한 프로젝트 제도, 그리고 대출과 예금을 위한 은행 제도 등이 있다. 카리미 그룹이 그 당시까지의 다른 기업들과 다른 점 또 하나는 세금 징수자나 지주가 아니라 순전히 교역과 금융거래만을 통해 구축된 자본체제라는 것이다."

13세기 말 마르코 폴로 여행의 배경도 보다 석연해지는 설명이다. 아직 이슬람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성과에 직접 접해 보지 못했지만, 12-13세기의 이슬람권이라면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권보다는 훨씬 '세계체제'에 근접한 현상을 보였을 수 있을 것 같다. 차후 조사로 흥미로운 내용을 얻는 것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전할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