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페리스코프>를 책으로 낼 때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가 써준 추천사에 "서울대 문리대를 수석 합격한 물리학도에서 선배 역사학도 서중석의 현하지변에 매료돼 역사학도로 변신"했다는 대목이 있었다.

잘못 안 내용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러면 어떠냐 하고 그냥 지나쳤다. 내가 1년 선배인 서 선생의 현하지변에 매료된 것은 사실이지만 사학과로 옮긴 뒤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마 2년 후배였던 이근성 고문에게 박 대표가 들은 이야기일 텐데, 이 고문은 그런 설화를 학교 때 들었거나 상상해 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그런데 며칠 전 바람개비님을 만났을 때, 서 선생과도 자별한 사이인 그분이 그 대목을 들먹이며 사실이냐고 물었다. "전연 기억에 없습니다." 상투적인 대답으로 넘어갔는데, 헤어진 뒤에 문득 생각하니 그게 사실이었던 것도 같다. 그로부터 기억의 실마리 하나가 풀리기 시작했다.

내가 사학과로 전과할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구자명 선배가 "내 친구가 사학과에 있는데, 대단히 훌륭한 친구이니 한 번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도움이 될 거다." 권해서 서 선생을 전과 전에 만났던 것 같은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언제 어디서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만남 때문에 사학과로 가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학과 간 것은 다른 데 갈 데가 없어서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실마리로부터 구자명 선배를 이어 룸비니가 떠오른다. 구 선배는 서 선생과 서울고 동기로 법대생이었는데, 내가 중딩 때거나 늦어도 고딩 초년부터 대학 때까지 친하게 지낸 분이다. 룸비니를 통해 어울리게 된 분이다.

불교 학생회인 룸비니는 중딩 후반에서 고딩 시절까지 내 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다. 룸비니를 이끈 '법사님'은 당시 장안의 기인의 하나였다. 당시 나이가 40대? 짧게 깎은 머리, 탄탄한 몸집, 투실투실한 동안에 승복을 편안하게 걸치고 학교 하학 시간이면 명문학교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학생들을 '스카우트'하는 게 그분의 큰 일과였다.

그분의 기인 자격은 무엇보다 그 스카우트 방식에 있었다. 인상이 괜찮은 학생이 있으면 불문곡직 달려들어 뺨을 손가락으로 움켜쥔 다음 봉익동인가 익선동인가 종묘 옆에 있는 대각사까지 1킬로미터 이상 거리를 끌고 가는 것이다. 인상이 대체로 선량하게 생긴 분인데다 끌고 가는 동안 걸직한 농담을 제멋대로 흘리니까, 봉변을 당한 입장에서도 뿌리치기 힘들고 지나치던 사람들도 납치범으로 보고 신고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별로' 없었다고 했다. 아주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후일 생각하면 명문교 학생들의 배경 조사도 해 가면서 표적 스카우트도 꽤 했던 것 같지만, 대개는 길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의 인상과 행동거지를 보아 사냥감을 고르고, 볼따귀를 틀켜쥔 뒤의 반응을 살펴 당신이 원하는 재목인지 심사한 것 같다. 그래서 모아놓은 학생들의 품성이 대개 괜찮았기 때문에 룸비니는 불교 학생회일 뿐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의 엘리트 클럽이기도 했다. '독특한 분위기'라 함은 무엇보다 어수룩한 품성의 회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학생들이 대체로 어리숙한 편이었지만, 그 우악스러운 스카우트 방식에 순응할 정도면 그중에서도 특히 어리숙한 편이 아니겠는가.

거기서 만난 친구, 선배들이 그 후 거의 어울리지 않고 지내게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경기고 동기로는 마음이 더 깨끗할 수가 없는 권오석, 마음이 더 풍성할 수가 없는 최용태, 그리고 예외적으로 관계를 오래 계속했던 중앙일보의 홍석현이 있었다. 1년 선배로 물리학과도 선배가 되었던 박광서 형, 공대의 권장혁과 법대의 권남혁 쌍둥이 선배, 그리고 서울고를 나온 구자명 형이 있었다.

여학생도 좋은 분들이 많았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딱 한 분 생각나는 것이 정혜자님인데, 어떤 일 하나를 누가 맡느냐 학생들끼리 의논하고 있던 중에 홍석현이 그랬나, 최용태가 그랬나, "정혜자로 정하자!" 해서 쉽게 결정한 일이 묘하게 기억에 머물러 있어서 생각난다. 법사님이 여학생 스카우트도 볼따귀를 틀켜쥐는 방식으로 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궁금하다.

법사님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의 하나다. 은근히 큰 영향을 끼쳐 주신 미술반의 최경한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만, 개성을 자연스럽게 펼쳤다는 것이 두 분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다. '법사님'이라는 호칭만 써서 함자가 뭔지 거의 생각할 거를도 없이 지냈는데, 휘자가 김홍철님임을 돌아가신 뒤에야 들었던 것 같다. 설령 휘자를 잘못 기억했더라도 법사님의 명복을 빈다. 대학 이후 룸비니를 떠나고 돌아가실 때까지 인사도 차리지 못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까지 깍듯이 모시고 있다.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의의 어려움  (0) 2011.07.05
Parce que j'etait superieur.  (5) 2011.06.22
프랑스에 만든 마음의 고향  (3) 2010.01.26
'촌놈 정신'이 그립다.  (11) 2010.01.23
프랑스 평정기  (2) 2010.01.19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