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지적되어 왔지만,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하는 것은 앞 회에서 이야기한 인클로저 현상이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는 점이다. 중세체제에서 벗어난다는, 산업화의 기본 의미에도 적합하다는 점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근 5백년에 걸쳐 진행된 인클로저 현상은 영국 사회에 많은 갈등과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보상이 19세기 대영제국의 패권이었다고 흔히 얘기한다. 나는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긴 시간에 걸쳐 후발국들보다 완만한 전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여러 종류 선택의 기회를 누림으로써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영국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클로저 현상의 진행에는 영국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다. 영국 내부의 조건에 따라 진로가 결정되었다.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을 때는 속도를 늦출 수도 있었고, 두 갈래 이상의 길이 보일 때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따라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후발국들은 다른 사정이었다. 선발 산업국과의 경쟁 상황에 몰려 산업화를 모색하게 된 후발국들은 경쟁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경쟁을 빨리 따라잡기 위해 내부 조건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산업화 정책을 추진해야만 하는 상황을 많이 겪었다. 영국에 바로 뒤이어 산업화를 수행한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혁명(1789) 이전의 프랑스 정치사회 체제를 '앙샹 레짐'이라 부른다. 이 앙샹 레짐은 매우 안정성이 높은 체제로서 한 세기 이상 유지되어 온 것이었다. 정치체제와 사회체제가 강력하게 결합된 것이어서 정치나 사회 어느 한 방면에서 변화의 필요가 제기되어도 두 방면의 변화가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았던 것이었다.

이 체제는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 초년에 구축된 것이었다. 17세기 초반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 국력 성장을 중심으로 변화가 많은 시기였고 왕권과 귀족세력 사이의 갈등이 증폭된 시기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잉글랜드 내전(1641-1651)을 통해 왕권이 몰락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프롱드'(Fronde)라 불리는 1648~53년의 항쟁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다.

루이 14세는 앞서 리슐리외가 궤도에 올려놓은 중상주의 정책을 굳건히 밀고 나감으로써 앙샹 레짐의 경제적-재정적 기반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 재력으로 당시 유럽에서 독보적인 40만 상비군을 조직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결합은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고, 귀족세력은 왕권에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1695년의 인두세와 1710년의 십일조는 귀족층의 전통적 권익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었지만 아무 저항이 없었다.

체제가 안정된 만큼 프랑스는 변화에 소극적이었다. 인클로저처럼 뚜렷한 농촌 분화 현상이 프랑스에는 없었다. 1710년의 도시 인구 비율이 10%였던 것이 1789년 15%에 이른 정도였다. 1770년 영국의 석탄 생산량이 6백만 톤이었는데 프랑스는 70만 톤이었다.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이 제조업 발전을 전연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처럼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1740년대부터 프랑스에는 변화의 필요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가 없었다. 집중된 권력을 쥐고 있던 국왕은 앙샹 레짐에 집착했다. 왕권에 대항할 실력을 가진 두 집단, 귀족층과 상업 브루주아지는 영국에서처럼 연대감을 쌓지 못하고 서로 견제했다. 효율성을 잃은 채 견고성만을 지키고 있는 앙샹 레짐의 배경 위에서 개혁의 욕구는 계몽사상이라는 형태로 펼쳐졌다.

나는 프랑스혁명을 개관할 능력이 없다. 영국과의 경쟁의 압박이라는 한 가지 측면을 밝히고자 할 뿐이다. 앙샹 레짐 기간 내내 프랑스는 영국과 긴장상태에 있었다. 1740년대 이후 재정 문제의 가장 큰 원인도 영국과의 전쟁에 있었고, 미국 독립전쟁 개입으로 결정적 파탄에 이르렀다.

18세기의 프랑스 경제는 괜찮았다. 1730년대 이후 공업생산량이 연 평균 2% 가까이 성장해서, 1700년에서 1790년 사이 영국의 성장율 190%보다 더 큰 260%에 달했다. 한 세대 뒤진 산업화를 추격해 가는 기세였다. 서인도제도 등 식민지를 발판으로 한 무역활동도 크게 자라나 1780년대에는 수출이 국민총소득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었다. 내부 조건만으로는 무너지기 힘든 경제지표였다.

그러나 1756~63년의 7년전쟁으로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는 등 영국과의 경쟁에서 뚜렷해지는 열세가 앙샹 레짐의 위기를 재촉했다. 18세기 두 나라의 경쟁은 냉전시대 미-소의 대결과 어떤 면에서 비슷한 양상이었다. 견고한 체제의 프랑스가 내부 유동성이 큰 영국과의 장기간 대결에서 힘을 탕진하고 무너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보인 믿음은 두 나라의 경쟁 양상을 참고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정신없이 진행되던 18세기 말까지도 독일 지역은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거의 완전한 중세 상태였다.

10세기에 세워진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 무너질 때까지 독일 지역의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오랫동안 그 실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합스부르크 가는 15세기 중엽 이후 계속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었고, 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17세기까지 스페인, 나폴리, 네델란드 등지까지 통치권을 가졌던 유럽 최고의 권력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세가 당당하던 시절 독일은 수십 개의(때로는 수백 개의) 조그만 정치조직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 군주들이 신성로마황제의 제후였다. 황제는 현상 유지를 위해 제후들의 안보를 책임졌다. 그래서 군주들은 자기 나라 안에서 견제 없는 권력을 행사했고, 다른 나라와 경쟁할 일도 없었다. 중세적 질서를 벗어날 필요가 없었던 이유다.

18세기 들어 프랑스의 국력이 자라나 오스트리아의 힘을 견제하게 되면서 독일 지역에서도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다. 가장 강한 도전자가 프러시아였다.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프러시아는 몇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큰 영토국가로 자라났다. 그러나 18세기 중 프러시아의 성장은 아직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영지를 가져 더 큰 영주가 되고 싶은 욕심일 뿐이었다. 정치를 질적으로 바꿀 생각도 없고 독일 민족을 일으키려는 뜻도 없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나폴레옹의 패권이 동방으로 뻗쳐오면서 독일 지역이 갑자기 근대에 노출되었다. 반세기 후 동아시아 지역이 겪게 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오랜 종주국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군에게 저항과 굴욕을 몇 차례 거듭하다가 결국 신성로마제국을 포기하고 축소된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주저앉은 것은 중국의 경험과 흡사하다. 독일 지역의 제일 뒷쪽에 있던 새 실력자 프러시아가 약간의 시련 끝에 새로운 상황에 앞장서서 적응한 것은 일본의 경험과 비슷하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압력이 꾸준히 계속된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압력은 20년만에 사라지고 독일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대표하는 반세기 동안의 복고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20년에 걸친 충격은 독일 지역에 깊고 큰 파장을 남겨 독일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갔다.

서유럽의 여러 기술, 사상과 제도가 19세기 초의 독일에 몰려 들어왔다. 서양문명의 여러 요소들이 20세기 초의 우리나라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선망하는 측면이 엇갈리기는 했지만, 변화의 방향이 차츰 조정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 진취성을 보인 프러시아가 결국 오스트리아를 제치고 근대국민국가 독일의 새 역사를 열어가는 주역이 되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구체제가 무너진 후 1866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결전을 거쳐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 중 독일제국이 선포되기까지 65년 시간이 걸렸다. 이 기간에 벌어진 일보다 1866년 이후의 일이 사람들의 주목을 더 받는 것은 '독일'이라는 행위의 주체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1866년 이전의 일 중에서도 프러시아의 행적이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러나 새 '독일제국'이 프러시아의 단순한 확장은 아니었다. 프러시아는 독일제국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이고, 독일제국의 성격은 1871년까지의 형성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나라들이 망했다. 어떻게 망했는지, 그리고 망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살피는 데서 문명 전환의 의미에 관해 배울 것이 많다. 이 글에서 그 과정을 세밀히 살피지 못하지만 1848-49년의 상황 한 장면을 예시한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은 독일 지역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 보냈다. 그 파장이 크게 증폭된 것은 반동체제 아래 잠복해 있던 개혁의 열망이 갑자기 촉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메테르니히가 퇴진하고 많은 나라에서 개혁파가 정권을 맡았으며, 통일국가의 헌법 기초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잠복해 있을 때는 한 목소리 같던 개혁파가 막상 칼자루를 쥐자 분화 현상이 나타났다. 모든 국면에서 온건파와 과격파의 대립이 일어나는 가운데 지지 기반도 약화되어 1년이 지나자 더 이상 상황을 끌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온건 개혁파가 모색한 돌파구가 프러시아의 실력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의 연방의회가 세습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통일연방국 헌법을 만들고 프러시아 왕이 황제에 오를 것을 청했다. 이것을 프러시아 왕이 거절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49년에 황제 자리를 거절한 것은 전제적 황제권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2년후 빌헬름 1세가 장악한 황제권도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그보다 더 전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차이는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이었다. 1849년에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선택이 분명하지 않았다. 1871년에는 숙적 프랑스에 대한 복수의 기쁨에 들떠 민주적 절차까지도 경시하는 분위기였다. 1850년대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산업화의 성과를 가지고 국제 경쟁에 당당히 뛰어드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는 프러시아의 독일제국 형성을 선망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제국에 합류한 작은 나라들은 언어와 문화를 프러시아와 공유하는 나라들이었고, 1871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두루 검토한 끝에 프러시아 중심의 독일제국을 유력한 방안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조선 망국이 가진 세 가지 의미 중 그들에게 문제된 것은 왕조의 중단 뿐이었다. 프러시아인은 그들에게 이민족이 아니었으며, 문명 전환은 국가체제와 관계 없이 모두가 함께 서서히 겪어온 것이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독일 민족이 정치적 분열 상태에 있다가 근대국민국가로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 겹쳐졌기 때문에 독일의 근대화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강한 힘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발전을 빠르게 해줬다. 그러나 1871년 이전부터 독일제국이 시원시원하게 제거해 온 장애물 중에는 민주적 가치도 있었고 문화적 가치도 있었다. 20세기 들어 독일인이 밖으로는 무분별한 전쟁을 일으키고 안으로는 극도로 비인간적 상황을 펼치게 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의 빛나는 추진력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 아닐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