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4월 미국과 스페인이 전쟁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쿠바는 스페인 식민지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미국 시장과 더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미국 사회에 1890년대 들어 팽창주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기는 했지만, 쿠바를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자는 주장이 강하게 일어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1895년부터 시작된 쿠바인들의 독립운동이 상황 유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소요로 인해 쿠바 관계 미국인들의 사업에 지장이 생긴데다가 스페인 당국의 가혹한 진압작전을 미국의 황색 언론이 열심히 선전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미국의 매킨리 행정부는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재에 따라 스페인 정부도 1898년 1월부터 쿠바의 자치권에 동의,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2월 15일 21:40분경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 호가 폭발을 일으키고 침몰해 탑승자 355명 중 27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났다.


1890년 진수된 메인 호는 같은 때 건조된 텍사스 호와 함께 미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있던 해군 함정이었다. 침몰의 원인은 배 앞부분에 있던 탄약고 폭발이었다. 사고 직후 스페인 측과 미국 측은 별도의 조사를 행하고 서로 다른 결과를 내놓았다. 스페인 측 조사는 탄약고 옆의 연료실에서 불이 나 탄약고 폭발로 이어졌다고 했는데, 미국 측 조사는 기뢰 폭발이 있었고, 탄약고 폭발은 그로부터 촉발된 것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주장이 맞서는 동안 미국에서는 퓰리처의 <뉴욕월드>지와 허스트의 (뉴욕저널>지가 경쟁적으로 전쟁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매킨리 대통령과 토머스 리드 하원 의장은 전쟁을 막기 위해 합심 노력했으나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도 4월 하순 전쟁이 선포될 때까지 메인 호 침몰은 개전 이유로 제기되지 않았다.


불과 석 달에 끝난 전쟁을 통해 미국은 쿠바를 독립시켜 보호국을 만드는 외에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획득해 제국주의 대열에 진입했다. 미국이 원하고 스페인이 회피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의 기뢰 폭발이 메인 호 침몰 원인이었다고 하는 당시 미국 측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미국인들 자신이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후 몇 차례 조사가 다시 행해지게 되었다.


1910년 말 메인 호 선체를 아바나 항에서 치우기로 결정하면서 정확한 재조사를 위해 선체 주변에 담을 쌓고 물을 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1월에서 12월에 걸쳐 브릴랜드 제독이 이끄는 조사위원회가 모든 조사 내용을 검토했다. 이 검토로 1898년 미국 측 조사의 핵심 내용 일부가 번복되었다. 외부의 폭발이 있기는 했지만 문제의 탄약고보다 훨씬 뒤쪽에서 일어난 조그만 것이었으며, 기뢰 폭발의 ‘결정적 증거’라 했던 선각의 휜 상태는 잘못 관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74년에 미국의 하이먼 로코버 제독은 1910년의 재조사 결과에도 만족하지 않고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아 개인적인 조사 작업을 행했다. 그는 연료실 화재가 폭발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How the Battleship Maine was Destroyed>(1976)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1998년 침몰 백주년을 맞아 <내셔널지오그래픽> 지에서 최신 기술을 동원해 또 한 차례 재검토를 했다. 그 결과는 로코버의 주장에 비해 연료실 화재의 가능성을 낮추고 기뢰 폭발의 가능성을 높인 것이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메인 호 침몰을 ‘영구미제’ 사건으로 규정한 셈이다.


비록 메인 호 침몰을 개전 이유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사회 분위기를 전쟁 쪽으로 몰고 가는 데 메인 호가 결정적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음모론이 제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뢰 공격의 가능성과 우발적 사고의 가능성을 모두 낮춰 본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철저한 조사가 자해설을 더 부추기기도 하고 있다. “도둑 귀족”이라 불리던 당시 미국 대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전쟁에 워낙 크게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음모설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1898년 당시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이뤄진 미국 측 샘슨 위원회의 조사가 편파적이었다는 사실은 1911년의 재검토로 분명히 드러났다. 샘슨 위원회는 폭발한 화약고와 가까운 선각에 기뢰 폭발로 보이는 구멍이 있고 구멍 주변이 안쪽으로 휘어 있으므로 선각 밖에서 폭발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스페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분노와 적대감을 최대한 이끌어낸 보고였다. 같은 시기에 이뤄진 스페인 측 조사 내용은 미국 신문에 일체 보도되지 않았다.


증거의 확보와 보전 기술이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미개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선체 상태에 관한 정보가 대통령의 눈도 속인 채로 해군 내에서 ‘마사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를 받아들인 매킨리 대통령의 태도는 신중했다. 의회와 여론에 떠밀려 전쟁으로 끌려가면서도 메인 호 침몰에 대한 스페인의 책임 문제는 극력 차단했다. 아무리 우리 쪽 조사라 하더라도 전쟁처럼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그 신빙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1890년대의 미국 사회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에 들떠 있었다. 원래 ‘명백한 운명’은 대서양 연안에서 출범한 미국이 서쪽으로 확장해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는 길을 가리키는 서부개척시대의 구호였다. 이 목표가 완성에 가까워짐에 따라 떠오른 더 큰 목표가 쿠바 등 인접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이었다. 당시의 미국인들은 확장을 원하고 있었고, 그중 대다수는 쇠퇴하고 있던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한 급속한 확장을 원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후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로 제국주의를 지향해 가고 있던 미국의 팽창주의에 방향을 잡아준 것이 앨프레드 메이헌 제독의 <역사에 대한 해상력의 영향 The Influence of Sea Power on History: 1660-1783>(1890)이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1832)에 버금가는 전쟁론으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의 양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이 책이 미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당시 미국이 처해 있던 위치를 말해준다.


미국의 대기업과 황색언론은 전쟁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팽창주의가 국익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일반 국민들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호전적 분위기(jingoism)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황색언론은 쿠바인들이 당하는 압제를 과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명백한 운명’에 대한 사명감을 고취했다. 메인 호의 침몰은 여러 해에 걸친 선동 작업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인만이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도 이 선동에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매킨리 대통령은 끝까지 냉정을 지켰다. 전쟁을 다수 국민이 원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선정성이 강하면서 근거가 박약한 이유에 전쟁이 휩쓸리는 것만은 막았다.


전쟁은 어차피 벌어졌지만 매킨리의 자제력이 가져온 차이가 적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3개월간의 전쟁을 마무리할 때, 메인 호의 ‘피값’이 개전 이유에 명시되어 있었다면 타협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쿠바를 미국 식민지로 만들지 않는다는 텔러 수정안이 개전 직전 상원에서 채택된 것도 행정부의 자제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매킨리가 미국의 ‘국격(國格)’을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대기업과 황색언론의 선동에 휘말려 메인 호 침몰에 대한 스페인 측 책임에 목청을 높였다면 당장의 ‘국론 통일’에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여 년 후 재조사에서 당시의 미국 측 조사가 편파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미국 정부의 신뢰도는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매킨리 행정부는 온 사회가 호전적 분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 속에서도 자기네 해군의 조사 결과에 지나친 믿음을 두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별로 ‘결정적’이라고 보이지도 않는 증거들을 내세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시나리오를 그려 보이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 시나리오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만 봐도 반역자처럼 몰아붙이고 있다. 상식적 의문조차도 ‘국론 통일’에 저해되는 것이라면 이미 대한민국이 전쟁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 정부와 여당은 1898년의 미국에서 대기업과 황색언론이 맡고 있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과연 자임할 만한 역할인가 생각이나 해보고 하는 짓인지? 당시 미국에게는 전쟁에 이길 실력도 있었고 전쟁으로 얻을 것도 있었다. 실력도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면서 그저 엄살을 떨어서 큰형님이 편들어 주기만 바라고 있다. 도대체 한 국가에서 정부의 역할이란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