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18:02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주칼 교수의 '過誤'
기사입력 오후 3:06:30
주칼 교수의 '過誤' 1991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비밀경찰 관계 기록을 조사해 비밀경찰에 협력한 일이 있는 의원들에게 자진사퇴를 권유하고 불응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3월 22일에는 끝끝내 사퇴를 거부한 의원 10인의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 첫머리에 경제위원장 루돌프 주칼의 이름이 있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이래 대표적 저항 지식인으로 시민포럼의 공천을 받아 의회에 진출했던 주칼의 혐의는 프라하대 교수로 있던 1961년 오스트리아에 체류할 때 같이 어울리던 미국인 학생들에 관한 정보를 비밀경찰에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주칼은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협박 때문에 부득이하게 행한 일이며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대상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였음을 밝혔다. 국내 정치와 관계없는 일이기 때문에 고백할 필요도 없는 일로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스스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로 소명을 마쳤다. 그러나 동료 의원들도 선거구민들도 냉담했다. 사퇴가 유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여기고 버티던 주칼은 결국 다음 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프라하의 봄을 잊지 못해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전향을 거부해 교수직에서 쫓겨난 뒤 20년간 막노동으로 살아오면서도 경제 정책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로 체제의 변화를 촉구해 온 한 양심적 지식인이 기다리던 새 체제 아래 매장당하고 만 것이다. 동구권 해체 후 드러난 비밀경찰의 행적을 보면 인간의 약점을 여지없이 파고든 온갖 추악한 공작이 다 있었다. 돈, 권력, 명예, 섹스, 이용되지 않은 미끼가 없다. 고삐 풀린 인간성 파괴 속에서 주칼의 '과오'는 '인간의 조건'을 결코 넘어선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몰락을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런 안타까움을 밟으며 동유럽의 민주화는 진행됐던 것이다. 고영복 씨 간첩 혐의 발표는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사회에서 그만큼 능동적으로 활동해 온 인물이 도대체 무슨 동기로 36년간 두 얼굴을 지켜왔다는 말인가. 남한에서 고 씨의 위치가 황장엽 씨가 북한에서 가졌던 위치보다 더 안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동기에 대한 설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고 씨가 체제의 갈등 속에 희생되더라도 그의 '과오'에 대한 인간적 이해가 있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체제가 '인간의 얼굴'을 가질 것이다. (1997년 10월) |
▲ <춘추>의 기재는 매우 간략하고 포폄의 표현이 전혀 붙어 있지 않다. '팩트'만을 적어놓은 것일 뿐인데, 생각 있는 사람은 그 팩트만을 보고도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포폄이 저절로 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춘추>를 정리하매 난신적자가 떨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역사 서술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고, <친일인명사전>은 그 의미를 잘 살린 작업이다. ⓒ프레시안 |
기원전 11세기 중엽의 중국에서 상나라를 물리친 주나라 왕은 무왕이었다. 무왕이 몇 해 후 갑자기 죽었을 때 아들 성왕이 아직 어린 나이였다. 무왕의 동생 주공이 섭정을 맡아 천자 노릇을 대신하다가 성왕이 성년이 된 후 물러났다. 주공이 실질적인 천자 노릇을 잘하면서도 신하의 본분을 잘 지킨 것을 공자가 높이 찬양하여 유교의 전범이 되었다.
주공이 섭정을 맡고 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일은 그 형제인 관숙과 채숙이 상나라 잔여세력과 함께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반란을 진압한 후 주공은 형 관숙을 처형하고 동생 채숙을 추방했다. 형제들에게 가혹한 처분을 내린 이 일이 가족에 대한 의무와 사회에 대한 의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에 유교 도덕론의 중요한 사례가 되었다.
맹자가 기원전 319년부터 몇 년 동안 제나라 선왕에게 의탁하고 지낸 일이 있었다. 당시 선왕의 큰 과제는 북쪽의 연나라 정벌이었는데, 정벌의 명분을 맹자 같은 도덕군자에게 승인받고 싶은 것이 그를 우대한 동기였던 모양이다. 맹자는 이 명분을 승인해 줬다. 그런데 정벌군이 살인·약탈 등 명분을 무색하게 하는 행태를 보여 맹자가 승인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왕이 난처한 입장이 되었을 때 진가라는 신하가 총대를 메고 나섰다. 주공 같은 성인도 형제들에게 상나라를 맡겼다가 일이 잘못되어 참혹한 형벌을 내리기에 이르렀으니, 그리 될 줄 알면서 맡겼다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모르고 맡겼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 아닌가? 성인도 이처럼 완벽할 수 없는 것인데 왕께서 하신 일에 약간의 허물이 있다고 맹자가 심하게 따질 수 있는 것인지, 그 입을 틀어막아 놓겠다는 것이었다.
진가가 맹자를 만나 마음먹은 대로 따졌다. "주공이 반란 일으킬 것을 알고 맡기셨는가?" "모르고 맡기셨다." "그러면 성인에게도 허물이 있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주공을 옹호하는 명 논설로 전해진다.
"주공은 동생이고 관숙은 형이었으니 주공의 허물이라 하더라도 그 또한 마땅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옛날 군자는 허물이 있으면 그것을 고쳤는데, 지금의 군자는 허물이 있을 때 그것에 매달린다. 옛날 군자의 허물은 일식과 월식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고, 고침에 이르러서는 모두 우러러보았는데, 지금 군자는 어찌 허물에 매달리기만 하는가? 게다가 그에 맞춰 변명만 늘어놓는구나."
어젯밤 <친일인명사전>을 다룬 문화방송(MBC) <100분 토론>을 보며 생각난 대목이다. 허동현과 주익종, 이 사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쪽 얘기의 주된 내용인즉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여 포폄을 행해야 한다, 민족국가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잣대로 식민지 시대의 행위를 재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하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허물에 매달려 변명만 늘어놓는" 꼴 아니겠는가. 어느 누구도 상황에 대한 완벽한 판단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허물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한국이 일본 지배에서 독립한 것이 우연한 일이겠는가? 식민 지배는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인 상황이었다. 일본의 힘이 아무리 압도적인 것으로 보일 때라도 그 문제점은 감춰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생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민족을 위한 친일"이란 말까지 나온다. 일신의 영달을 위한 친일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속을 어떻게 꿰뚫어보고 그 본심이 착한 것이었다고 판단한단 말인가? 그리고, 본심이 착한 것이라고 해서 있는 허물이 없어지는가? 민족의 독립이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한다면 그 흐름을 가로막은 허물은 본심의 선악에 관계없이 엄연한 것이다.
양쪽 패널의 관점 차이는 '친일'의 의미에서 극명하게 갈라졌다. 새 사전의 가치를 옹호하러 나선 박한용과 주진오는 '친일'이라는 "팩트(fact)"를 밝히는 것이 사전의 목적이라고 하는 반면 허동현과 주익종은 '친일'을 "죄악"으로 보는 전제를 바닥에 깔고 있었다.
10년 전의 논의 양상이 뒤집힌 것이다. 10년 전의 친일 논의에서 민족주의자들은 '친일'을 무조건 '반민족'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고, 반대자들은 친일 행위라 해서 합리적 행동까지 싸잡아 범죄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반론을 펴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친일을 규명하자는 쪽에서는 가치판단 없이 사실만을 밝힌다고 하는 반면 그 반대자들은 친일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유죄 판단을 하는 것처럼 펄펄 뛰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여기에 바로 <친일인명사전>의 가치가 있다. 최소한의 사실 규명도 되어 있지 못한 상황에서 친일을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합리적 기준에 관계없이 목청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사전 편찬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사실이 규명된 상황에서는 보다 냉정한 시각과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친일을 옹호하려는 입장에서는 변명할 길이 좁게 되었다. 그래서 사전 수록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있는 몇몇 사례를 지적하고 나오는데, 적절치 못한 수록일 경우 문제가 심각한 것처럼 과장하기 위해 수록 자체가 마치 '단죄'인 것처럼 엄살을 떨게 되는 것이다.
<춘추>의 기재는 매우 간략하고 포폄의 표현이 전혀 붙어 있지 않다. '팩트'만을 적어놓은 것일 뿐인데, 생각 있는 사람은 그 팩트만을 보고도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포폄이 저절로 된 것이다. 그래서 "공자가 <춘추>를 정리하매 난신적자가 떨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역사 서술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고, <친일인명사전>은 그 의미를 잘 살린 작업이다.
'친일'이 과연 죄악일까? 친일 문제를 깊이 연구해 온 박한용이 친일 행위를 '매국형', '직업형', '전범형'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매국형'과 '전범형'은 분명히 범죄 차원에서 생각할 대상인데 극소수에 해당되는 것이고, '직업형'의 경우는 사정이 복잡하다. 허물이라 하더라도 '죄악'이라기보다 '어리석음'으로 생각할 측면이 많다.
진가가 맹자에게 따진 주공의 허물도 나쁜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문제다. 주공은 그 허물을 반성하고 고침으로써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도덕에서 반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역사의 흐름에 어긋나는 짓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반성을 제대로 한다면 일시적인 고통을 통해 허물을 고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 그 일시적인 고통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친일을 통해 확보해 놓은 기득권을 지킬 수 있을까, 눈치만 보며 허물에 매달려서는 새 시대를 당당한 자세로 맞을 수 없는 것이다. 해방 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큰 죄악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 대신 눈치로 빠져나갈 여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 일각의 '친미' 경향은 일제시대의 '친일' 못지않은 수준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반미'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우방으로서 미국을 존중하되,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 사회를 등짐으로써 역사의 죄인이 될 위험을 피하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조심할 필요를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데는 친일의 의미를 제대로 밝히지 못해 온 사정이 작용해 왔다. 역사의 경험을 이 사회가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해서 사회 차원의 반성이 안 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스스로 말한다. <100분 토론>에서 박한용과 주진오가 목청 한 번 높이지 않고 담담히 임하는 태도와 비교해 허동현과 주익종이 말 자르기에 바쁘고 눈길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며 정직한 역사 서술이 "난신적자를 떨게 하는" 힘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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