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2. 21:06

어제 대덕화 보살님과 그 올케인 성진행 보살님이 다녀갔다. 어머니께서 정확하게 인식하지는 못하신다. "졸업생들이구먼." 하신다. 그러나 어렴풋이 기억이 깔려 있으신 듯, 몇 마디 주고받으면서 도반을 상대하는 어투가 되신다. 사고력이 명민하신 데 비해 기억력에 결함이 있으신 것인데, 생각하면 그걸 꼭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기억력이 완벽한 사람은 보르헤스 작품에나 나온다. 찾아오는 이들을 그 정도 응대해서 당신 마음을 보여주실 수 있다면 나름대로 정상적인 삶이라 할 것이다. 요양원에 옮기시면 생활을 충분히 즐기며 지내실 것이 기대된다.

두 분 보살님이 재작년 초여름 어머니 쓰러지실 때 모시고 있던 분들이다. 병원에 여러 번 찾아준 것이 어머니를 불제자로서 존경하기 때문이라 하지만, 아마 그 인연도 많이 생각될 것 같다. 대덕화 님에 비해 성진행 님이 자주 못 왔는데, 알고 보니 전주에 사신다 한다. 그렇게 먼 데서 서울 오는 길에 이렇게 시간 내 찾아와 주시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다. 나무 관세음보살...

대덕화 님은 산뜻한 용모처럼 성품도 명민한 분인데 성진행 님은 차분한 눈길에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분이다. 두 분 다 어머니의 씩씩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에 무척 기뻐했지만, 더 오랫만에 온 성진행 님의 소감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런 모습으로 회복되시도록 보살펴드린 공로를 치하받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되어 가고 있는데, 성진행 님의 치하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어머니만이 아니라 내 모습도 좋아졌다고, 큰 수행을 닦은 스님 같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씀 들으며 참 눈밝은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맞다. 지난 2년간의 내 생활에는 수행의 의미가 있었다. 엄격한 절제를 통한 수행은 아니었지만, 일과 생활이 의미가 큰 화두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축이 어머니 모시는 일이었다. 2년간 어머니께 제일 많은 자극을 드린 것이 나였는데, 내 마음에 그만큼의 안정감이 있었던 것이 어머니의 회복 방향에 작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두 분을 보낸 뒤 작은형과 통화가 되었다. 일요일날 오후에 다녀간 얘기를 여사님들에게 듣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드디어 받았다. 실망감을 어쩔 수 없다. 파라밀과 용인백암을 들러 보라고 당부한 지 보름이 넘었는데 아직 못 가봤다는 것이다. 일요일 올라오는 길에 들러보려 했는데 못 찾았다고 한다. 동네 이름과 시설 이름만 외워 가지고 전화번호도 없이 나섰던 모양이다.

왜 그럴까? 3월 초 이래 매주 어머니 뵈러 오는 것을 보며 생활감각이 좀 안정됐는가 했는데... 남쪽으로 모시면 형이 더 쉽게 자주 찾아뵙는 것이 어머니께도 기쁨이 되고 우리 내외도 책임을 더는 길이 되지 않을까, 형제간에 당번 교대하는 것도 모양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형 성격에 맞지 않는 역할을 내가 꿈꾸었던가보다. 딴 세상 사는 신선인 줄 뻔히 알면서도. 역시 요양원도 우리 내외가 결정해야겠다. 요즘 어머니가 사람들 응대하시는 가닥을 보면 한편으로 요양원에 가서 생활 내용이 풍부해지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빠지고, 또 한편으로는 답답한 병원 생활에 언제 짜증을 일으키기 시작하실지 조마조마하다.

진인선원과 용인백암 사이의 선택이다. 진인선원이 오래된 곳이라 운영에도 안정감이 느껴지고 시설, 환경에서도 약간 우월하다. 위치에서만 용인백암이 우월하다. 그런데 내 마음에는 불교계 시설을 꺼리는 구석이 있었다. 이번 회복되시면서 여러 가지 집착을 벗어나신 느낌을 받는데, 불교에 대한 집착도 그중의 하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여생을 지내시는데, 불제자라는 이름표도 떼어버리시고 가급적 보통 할머니로 지내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불교계 시설을 꼭 피할 것은 아니라도, 더 못하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있으면 하는 생각으로 용인백암을 살펴 왔다.

그런데 어제 두 분 보살님이 찾아왔을 때 어머니가 보이신 불제자 모습에서 느껴진 것이 있었던지, 불교계 시설을 회피하는 마음이 약해졌고, 또 형에게 책임을 떠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진인선원에 무게를 두게 된다. 요양원이 안정된 곳이면 가족에게 살펴볼 부담이 적고, 또 진인선원 같으면 우리가 다니기 쉬운 곳이다. 형이 다니기엔 좀 힘들지만, 덜 힘들다 해서 책임감을 더 느낄 사람도 아니니 앞세워 고려할 조건이 아니다. 다음 주 중에 진인선원에 모실 준비를 하고, 형이 이번 주 중에 의견을 내면 받아들일 여지를 두기로 한다.

막상 진인선원으로 마음을 돌리고 보니, 불제자 이름표 붙이고 지내시는 것이 어머니께 크게 불편한 일 없으실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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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2. 21:01

음식을 입으로 잡숫기 시작한 지 이제 넉 달 돼 간다. 처음 잡숫기 시작하실 때 오랫만에 새로 즐기는 음식을 맛보실 때마다 넋을 잃으실 정도로 감동하시던 충격은 이제 가라앉았지만, 먹는다는 행위는 여전히 큰 즐거움이시다. 틀니 없이 잡수실 수 있는 음식 범위가 그리 넓지 않지만, 한 가지 한 가지를 다 알뜰하게 즐기신다. 식사시간은 기쁨의 시간이고 음식을 권하면 사양하시는 일이 없다.

그래도 근래에는 많이 절제가 되신다. 처음에는 드리는 사람이 그치지 않으면 끝없이 받아 잡수려 하셨고, 어떤 때는 그만 드리려 한다고 화를 내시기도 했다. 요즘은 드리는 사람에게 "너도 먹어라." 권하기도 하시고, 드실 만큼 드신 뒤엔 "이제 됐다." 하기도 하신다.

식사 후에 과자와 과일을 드릴 때, 나는 아직 식전이기 때문에 "너도 먹어라." 하고 너무 많이 권해 주시는 것이 벅찰 때도 있다. 엊그제는 웨하스를 드리는데, 한 쪽 잡수실 때마다 잊지 않고 내게도 권하신다. 그대로 따라 먹을 수도 없어 나는 한 쪽을 입에 문 채로 어머니께 권해 드리고 내게 권하실 때마다 조금씩 먹고 있었다. 한참 드시다가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웨하스 반쪽이 입 밖으로 나와 있는 꼴이 눈에 거슬리셨던지 잡아챌 듯이 손을 내미신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과자를 낼름 입 안으로 집어넣었더니 내 표정을 흉내내시며 하시는 말씀, "너 지금 무슨 지랄을 한 거냐?"

욕설을 많이 쓰지는 않으셔도 쓰실 때는 참 힘도 안 들이고 경쾌하게 쓰신다. 지금의 당신 생활에서 욕설이 주성분은 아니라도 주요 첨가물 노릇을 하고 있다. 음식에서 조미료의 역할이랄까? 많이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욕설 대상이다. 제일 만만한 건 물론 여사님들. 욕창이나 근육의 굳어짐을 막기 위해 수시로 자세를 바꿔 드리는데, 그럴 때 통증을 느끼면서 욕설을 내뱉으시는 일이 많다. "아이구, 아파라! 에이, 쌍년!" 새 자세가 안정되신 다음 여사님이 짐짓 "할머니 편안하시라고 고쳐 눕혀 드리는데 왜 욕을 하세요?" 하면 "욕을? 내가?" 시치미떼시는 건지 진짜 잊어버리신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연덕스러우시다.

그런데 비교적 뜸하게 보이는 사람들, 예를 들어 간호사나 의사에게는 그런 욕설이 나오실 일도 어차피 없지만, 좋은 인상을 주시려는 노력이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시는 것 같다. 식사 중에도 눈길이 내 뒤쪽을 향하고 입가에 애교스러운 미소가 떠오를 때는 누군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남의 눈'에 대한 의식은 거의 천성이 되어 버리신 것 같다. 내 신체와 정신 상태가 지금의 어머니처럼 된다 해도 '남'에게 잘 보이려는 습성이 그만큼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다. 타고난 천성은 그분과 나 사이에 큰 차이가 없겠지만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욕설은 상대방 마음을 해치려는 굳센 의지 없는 취미생활의 일부로 보인다. 지난 달 물리치료를 며칠 받으실 때 아내가 참관하던 날 치료사에게 보이신 태도 이야기를 들으면 증오심도 묻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특별한 상황에서 예외적인 일일 것이다. 1년 전 기력이 떨어지시기 전까지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드러내시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내 놓고 생각하면 상대방의 사람됨에 대한 직관이 상당히 예민하셨던 같다. 간병인 한 사람은 일하는 태도가 썩 좋아 보였는데 어머니는 그 사람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자주 보이셔서 당혹감을 느낀 일이 있는데, 겉과 속이 매우 다른 사람이었음을 다른 일로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같이 지내 보신 동료 환자 십여 분 중에 혐오감을 보이신 상대가 한두 분에 불과했으니 마음이 아주 어두우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이 분노나 심술 모드로 접어들면 심신이 그 기분에 온통 휘말리시는 경향이 꽤 보였는데, 금년 회복 후에는 그런 마음의 고통이 별로 안 보인다. 신체조건이나 환경의 차이에도 얼마간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역시 마음 상태가 달라지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노래를 대하시는 태도에서도 마음이 밝아지신 것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의 나라로>, <꿈길>, <섬아기> 세 곡을 몇 주일 전부터 즐기기 시작하셨는데, 며칠 전에 가사를 적어달라고 하셨다. 그 후 내가 불러드릴 때 가사를 보면서 조금씩 따라 부르시다가 이제 가사는 거의 외우셨다. 기억력이 쇠퇴하셨다고 하지만 정서적 공감이 따르는 대상은 기억이 잘 되시는 것 같다.

그런데 노랫말에 대한 느낌이 뚜렷하신 것이 놀라울 정도다. <섬아기>에 대해서는 "참 쉬우면서도 좋구나." 하는 말씀이 여러 번 있었고, <꿈길>을 부른 뒤에는 "거 참... 아주 좋은 말이면서도..." 하고 말씀을 잇지 못하신다. 절절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을 못하시겠다는 듯이.

<행복의 나라로>에 대한 반응이 제일 활달하시다. "햐, 정말 좋다." "아니 어쩌면..." "어떻게 이런 노래를 지을 수가 있을까?" 한 번 부를 때마다 이런 표현 중 하나가 뒤따르지 않는 일이 거의 없다. 여러 번 그런 반응을 뵌 후에 한대수 씨와 몇 번 '뭉쳐' 본 일을 근거로 "어머니, 그 노래 만든 게 제 친군데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보니까 만든 노래도 참 좋네요." 했더니 반색을 하시고 어떤 친구냐, 뭐하는 친구냐, 한참 시시콜콜이 캐물으신다.

이 노래들에 대한 반응에서 어머니의 정서가 매우 순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슬픈 느낌, 포근한 느낌, 간절한 느낌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떠오르고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대하시는 태도 역시 이런 순화된 정서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것 같다.

세 곡에 대한 몰입 때문에 다른 곡은 시도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 근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이 곡 정도면 하고 새 노래를 꺼내도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런데 가사를 거의 외우시는 단계에 오니 어머니가 곡조보다 가사에 집중하시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앞서 부르지 않고 혼자 외워서 부르실 때 완전히 작곡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국어학자로 평생을 지내 오신 습성 때문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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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망국 100년> (1) 망국의 의미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한국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두 나라의 합병조약이 체결되었고, 1주일 뒤인 29일에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종결이 확정되었다. 8개조로 된 합병조약은 제 1조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게 양여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이 한반도 주민들에게 가진 의미를 세 개 층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 5백여 년간 한반도를 통치해 온 조선 왕조의 종말이다. 마지막 십여 년간은 대한제국으로 국호와 국체를 바꾸고 있었지만 조선 왕조의 실질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으므로 대한제국 시기를 조선 왕조의 일부로 보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둘째,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일천수백만 인구의 한민족이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신라 통일 이래 반도국가가 이민족의 침략과 정복을 받은 일은 여러 번 있었지만, 전국이 이민족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백여 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은 것이 가장 비근한 예지만, 그것은 직접 지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배' 대신 '간섭'이란 표현을 굳이 쓰는 이들도 있다.

셋째, 고대 이래 한국이 속해 있던 동아시아문명권으로부터 유럽에서 발원한 근대문명으로의 전환 과정이 촉진된 것이다. 조선은 19세기 중엽부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도에 휩쓸려들기 시작했다. 유럽의 산업화로 시작된 이 파도는 전 인류에게 '근대화'라는 이름의 문명 전환을 통해 전 세계적 산업사회에 편입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 변화에 저항하던 왕조 체제가 제거되고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 온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변화가 빨라지게 되었다.


망국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조선 왕조의 종말이라는 의미가 압도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 인식은 경험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조선 왕조체제는 한국인들이 십여 대에 걸쳐 생활을 꾸려나가고 자손을 퍼뜨리는 과정의 기반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이 조건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왕조 교체가 비록 일상적인 사건은 아니지만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은 아니었다. 유가 정치사상에도 역성(易姓)혁명의 개념이 있고, 실제 역사에도 왕조 교체가 있어 왔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이 중세 이래 처음 겪어보는 이민족 지배가 더 중대한 사태였다.

중국의 경우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의 소위 정복왕조들을 이민족 지배로 본다면 이민족 지배 역시 왕조 교체와 큰 차이 없는 주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복왕조를 세운 이민족들이 정복 당시에 중국문명을 이미 상당 수준 받아들인 존재였고 한족에 비해 아주 작은 크기의 집단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넓은 의미의 중국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의 위치로 볼 수도 있다. 정복민족은 통치체제의 최상층부만을 점유했을 뿐, 중국인은 중국인 그대로 살게 했다. 언어도 사상도 통째로 바꾸려 한 일이 없었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도 이 틀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와 다른 것이었다.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살게 놔두고 그 상전 노릇 하는 데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 집단을 일본인 집단에 종속된 존재로 개조해서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작용을 35년간 계속했다. 그 결과 1945년 이후의 한국인은 1910년 이전의 한국인과 상당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한민족이 중세 이후 가장 짧은 기간에 겪은 가장 큰 변화였다.

한국인을 일본인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일본인과 같은 존재로 만들려 한 것이라고 주장한 일본인들도 있었고 한국인들도 있었다. 거짓말쟁이 아니면 바보다. '일부' 한국인이 일반 일본인과 비슷한 위치에 접근하는 것은 가능했다. 일본인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인 집단 전체가 일본인 집단에 '동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변화의 칼자루를 일본이 쥐고 있는 한 변화의 목적은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한국인 그대로는 일본을 위한 이용가치가 적기 때문에 이용가치를 늘리기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바꿔놓는 것이 한국 지배의 기본 목적이었다. 이민족 지배는 피지배 민족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거니와,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 문제가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심각했던 사례의 하나다.


조선 왕조가 끝나는 것은 동아시아문명의 맥락 속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있을 수 있는 일 정도가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로는 왕조 교체를 위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는데도 3백년이나 더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1910년 당시 사람들에게는 왕조의 종말이 충격이었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안 되어 독립운동의 목표가 "대한민국"으로 옮겨져 있었다. 조선 왕조는 그 역할을 포기하자 몇 해 안돼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 존재 당위성이 잊혀질 만큼 기능이 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큰 안목에서 더 충격적인 것은 이민족 지배였다. 한민족이 신라 통일 이래 천여 년간 이민족의 직접 지배를 겪지 않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원나라와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한반도를 정복하고도 직접 지배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한민족이 고유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지배가 힘들고, 그토록 힘든 일을 할 만한 강력한 동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의 일본은 한국을 직접 지배하겠다고 나섰다.

일본에게도 한국 지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이 어려운 일을 하러 나설 충분히 강한 동기가 있었다. 제국주의 단계의 근대적 세계체제에 편입한 일본은 식민지를 필요로 한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류큐, 홋카이도, 타이완, 한국으로 지배 영역을 넓혀갔다. 류큐와 홋카이도는 오랫동안 식민지 대접을 받았지만 결국은 그야말로 '합병'이 된 셈이다. 문화적 저항이 비교적 약해서 일본이 상당한 투자를 해서라도 고정자산으로 확보할 엄두를 낼 수 있는 곳들이었다. 그러나 타이완과 한국은 일본에 동화될 수 없는 전통의 힘을 가진 곳이었고, 일본에게는 어디까지나 식민지였을 뿐이다.

제국주의 단계의 세계체제는 먹지 않으면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전 세계가 산업화의 길을 향함에 따라 지역들이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역할로 갈라지고 있었다. 앞선 자들은 착취자의 역할을 맡기 위해 피착취자를 필요로 했고, 피착취자 쟁탈 경쟁이 격화된 결과 특정한 피착취자를 식민지란 이름으로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러 대륙을 식민지로 만든 유럽 국가들이 마지막 남아있던 동아시아로 향했을 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착취자의 길을 배운 일본이 식민지 쟁탈전의 한 주체로 끼어든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큰 줄기는 물론 산업화였다. 농업사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던 한국에 많은 공장들이 세워졌고, 근대적 교통수단이 만들어졌고, 도시들이 자라났고, 행정과 의료를 비롯한 근대적 서비스들이 도입되었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원활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본 통치를 계기로 가속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 통치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많이 진척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근대화"를 무조건 신성시하는 유사종교 행태다.

근대화가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탈근대적 의문까지 아니더라도, 인간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근대화도 볕과 그늘의 양면을 가진 하나의 현상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떤 방식에 따라 진행되느냐에 따라 개인과 집단, 지역과 국가의 득실이 엇갈리는 변화였다.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방향과 방식을 결정할 칼자루를 근대화 초기 단계에서 일본인들에게 맡겨놓았다는 것은 한국인의 큰 불행이었다. 가장 가까운 상대일수록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선택은 어떤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 어느 철도를 언제 놓느냐 하는 물적 자원 관리에 그치지 않았다. 미래 세대에게 어떤 교육을 제공하느냐, 토지와 자본의 소유를 어떤 부류 사람들에게 맡기느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관리하는 자와 관리받는 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유도하느냐, 등 사회 조직 방법도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맞춰 결정되었다.


일본은 식민지 한국 근대교육에서 고등교육의 비율을 매우 작게 했다. 국내보다 일본에 가서 대학교육을 받은 한국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국 내의 초-중등 교육도 일본에 종속시키는 방향이었지만, 엘리트 교육의 경우는 더욱 철저하게 일본 교육체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든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 토지 소유의 지주 집중을 더욱 강화했다. 일본의 이해관계와 밀착된 입장에 서는, 통치자가 관리하기 쉬운 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부를 집중시킨 것이다. 정상적 사회에서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취약한 민중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배려를 일본은 한국 민중에게 베풀지 않고 물리적 힘으로 억누르기만 했다. 일본 입장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쉽게 뽑아내기 위해 현지 사회의 안정성을 무시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장래를 스스로 찾아나갈 지도층을 육성하는 대신 일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협력자 집단을 키워냈다. 정상적 사회의 지도층이 갖춰야 할 도덕성이 경시되고 이기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이 풍토 속에서 재산과 고등교육은 도덕성이 약한 특권층에게 집중되었다.

산업화를 주축으로 하는 근대화는 세계 어디에서나 전통시대에 비해 사회 조직 원리로서 도덕성보다 이기심이 득세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변화가 특히 극심했던 것은 통치권을 쥔 종주국보다 통치를 당하는 식민지였다. 최소한의 사회적 건강도 고려하지 않는 능률 위주의 지배정책 때문이다.

그리고 가깝고 비슷한 나라의 식민지 노릇이 식민지 중에서도 제일 엄혹했다. 식민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종주국은 두터운 층의 협력자를 필요로 하고 식민지 상황에 깊이 개입하기 힘든 데 비해 한국을 비교적 잘 아는 일본은 식민지에 깊숙이 파고들어 최대한의 능률을 추구할 수 있었다. 35년이라는 주어진 시간 내에 가장 철저하게 한국 사회를 망가뜨릴 능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중세체제에서 벗어난다는, 넓은 의미의 "근대화"는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그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들은 비교적 완만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폭력성이 강한 산업화 중심의 근대화가 18세기 유럽에서 궤도에 오르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해일과 같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 물결이 19세기 중엽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 물결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증폭시켜 대륙을 향해 쏟아부었다. 일본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한국과 중국은 협공당하는 입장이 되어 선택의 폭과 적응의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었다. 서양 열강들의 앞선 위치를 따라잡기 바쁜 일본은 서양 열강들보다 훨씬 더 혹독하고 다급하게 한국과 중국을 몰아붙여 두 나라의 주체적 대응 기회를 빼앗았다.

1860년대에 외세의 압박을 뚜렷이 느끼기 시작하고서부터 1910년의 망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저항력은 세 개 차원에서 작동했다. 왕조 차원, 민족 차원과 문명 차원이었다. 문명 차원의 저항력 붕괴가 결정적 고비였다. 동아시아문명 전체가 짓밟히는 상황 속에서 왕조의 저항력과 민족의 저항력은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망국의 의미를 문명 전환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