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5. 08:59

요양원에 모셔놓고 1주일만에 가 뵙는데, 이모님을 모셔갈 생각을 했다. 어머니보다 열세 살 아래지만 하나뿐인 이모님은 자식이 없어서 우리라도 좀 살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여의치 못하다. 연전에 여주 어느 구석의 가톨릭 시설에 들어가 계신데, 그리로 가 뵙지도 못하고 있었다.

여주 치고는 아주 외진 곳이라 하셨지만, 이천과 붙어 있는 여준데 멀면 얼마나 멀겠나, 그리 가서 어머니 요양원으로 모셔 왔다가 나중에 도로 모셔다 드리는 게 과히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점심 후에 모시러 갔다가 저녁 전에 돌려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군포의 사촌형님께 들러 점심을 하고 바로 일어섰는데, 4시가 넘어서야 이모님께 도착했다. 생각보다 멀었고, 영동고속도로가 심하게 막혔다. 이모님 계신 파티마 성모의 집은 일종의 실버타운이랄까, 열 평 남짓한 아파트를 쓰시고 세 끼 식사는 식당에서 배식하는 곳이다.

이모님 성모의 집에서 어머니 너싱홈까지 꼭 40분. 다섯 시 정각에 도착하니 식사를 막 시작하셨다. 수십 명 노인분들이 식사하는 저쪽 끝 식탁 앞에 휠체어를 대놓고, 간병인이 떠먹여드리는 죽을 받아 잡숫고 있다가 이모님과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한 차례 환하게 웃으시고는 한 숟갈 받아 잡숫고, 또 한 차례 우리 보고 웃으시고 또 한 숟갈...

식사를 끝내신 후 20분 가량 정원에 모시고 나와 옅은 햇볕을 쪼이며 꽃 구경을 시켜드렸다. 그 사이에 습관이 하나 생기셨다. 병원 떠나기 전부터 조금씩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셨던 것인데, 열 자 가량 길이의 말씀 하나를 하시고는 리듬감에 얹어 서너 차례 되풀이하시는 것이다. "우리 아들은 신통강아지", "꽃은 어디에 피어도 예쁜 거예요", "아무리 먹어도 나는 배가 고파요" 등등.

정신이 흐릿해서 하신 말씀을 또 하고 또 하시는 것과는 다르다. 언어에서 새로운 맛을 찾으시는 게 아닌가 내게는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노래 수준이 근래 달라지셨다. 가사를 보시면서도 옆에서 거들어드리지 않으면 시 낭송이 되거나 엉뚱한 학도가 가락으로 흐르시던 것이, 요즘은 이 가락, 저 가락이 쉽게 잡히신다. <푸른하늘 은하수> 같으면 가사를 안 보고도 2절까지 완벽하게 부르신다.

건물로 들어와 거실 한 쪽 구석 의자 한 줄을 벽에 붙여놓은 앞에 휠체어를 주차시켰다. 다른 분들과 어떻게 어울리시는지 보고 싶어서. 의자에 한 분, 어머니보다 조금 연하로 아주 선량하고 소심한 인상의 할머니가 앉아 계시다가 어머니와 웃음을 조금 나누시고는 덕담을 하신다. "할머니도 점잖으신데, 아드님도 점잖게 생겨서 참 보기 좋네요." 어머니는 뭐라 응대할지 막연한 듯, 애매한 웃음만 띠신다. 내가 찔러 드렸다. "어머니, 여기선 욕도 안하고 지내시나 봐요. 어머니 보고 점잖으시대요." 역시,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버럭 지르신다. "이놈아! 내가 왜 욕을 안해!"

앞의 할머니는 어머니가 그렇게 소리 지를 줄 아는 분인 줄 모르셨던 듯, 일견 놀라며 일견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시다. 그러나 사회 활동을 않으시던 분인 듯, 어찌 대응할지는 잘 모르시겠는 눈치다. 그런데 어머니의 고함이 조금 떨어져 있던 분들 두엇을 끌어들였는데, 그중 한 분이 어머니와 족히 오십합은 겨루실 만한 공력의 소유자로 보였다.

깔끔한 얼굴에 스타일 있는 안경과 헤어스타일로 보아 인텔리가 분명한데, 80 안쪽으로 보이지만 일본어에 능통한 것으로 보면 더 되셨는지도. 교사나 전문직에 종사하신 분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 곁에 와 앉으시더니 나를 보고 말씀하신다. "아드님이 오셨군요. 어머님께서 여기 오셔서 참 반가워요. 연세가 높으신데도 얘기를 너무 재미있게 하시고, 아직 일본어까지 잊어버리지 않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하고 어머니께 일본어로 뭐라 하시자 어머니는 "나니모 와카라나이." 하고는 거기 또 리듬을 붙여서 몇 차례 외우신다.

안경 할머니는 어머니가 어떤 엉뚱한 반응을 보이셔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다. 두 분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머니의 엉뚱하실 수 있는 능력을 익히 아는 나로서도 실소를 금치 못할 대목이 거듭거듭 나오는 것을 이 할머니는 제대로 즐길 줄 안다. 아들이 몇이냐는 질문에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난 몰라요. 셋째야, 넌 아니? 나한테 아들이 몇 갠지?"

"어머니, 제가 셋째면 적어도 세 개는 되나보죠?" 하니까 "셋? 그렇게 많아?" 확인해 드리느라고 "보세요, 어머니. 여기 한 개 있잖아요? 그리고 미국에 또 한 개 있죠?" 하니까 "그래, 기봉이 있지. 그리고?" "또 하나 기목이라고 있잖아요,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는 놈." 나는 어머니 듣기 편하시라고 형들 이름도 대고 '놈'자도 붙이는 건데, 작은형에 대해서는 뭔가 못마땅한 기분이 묻어나는 것인지, 예민하게 반응하신다. 아니, 내가 형을 좀 우습게 보긴 하지만 미워하는 건 아닌데, 크게 묻어날 게 없다. 이건 작은형에 대한 어머니의 특별한 보호 본능이다.

"기협아, 남들은 형을 놓고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너는 형을 아껴줘야지."로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어리버리와 영판 다른, 조리 있는 일장 훈시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펼치시는 동안 옆의 할머니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당장 어디 가서 고등학교 교장 선생 하시라 해도 전혀 꿀릴 데가 없으시다. 훈시가 마무리될 조짐이 보여 얼른 "네 어머니, 남들은 뭐라 해도 저는 기목이를 사랑할께요." 했더니 흡족한 웃음을 지으신다.

그러고 나서 이런저런 어리버리한 말씀을 하시다가 아이쿠, 내게 또 벼락을 내리신다. "이 쌍놈아!" 이젠 곁의 할머니들도 어머니 가닥에 꽤 익숙해져서 실실 웃으며 구경들 하시는 중에 맨 처음부터 계시던 착한 할머니가 순진하게 나를 구원하러 나오신다. "할머니, 이렇게 착한 아드님을 왜 그렇게 야단치세요?" 어머니는 씨익~(진짜 '씨익~', 아주 터프한 웃음이다.) 웃고는 "착한 아드님이요? 세상에 쓰잘 데 없는 녀석이예요." 나는 쓰잘 데 없는 표정으로 쩔쩔매는 시늉을 하고 있는데 또 한 할머니가 나서신다. "쓰잘 데 없다니요? 이렇게 어머님 말씀을 잘 듣는 분을!" 여기에 어머니 대꾸가 진짜 어머니다우시다. "그러니까 쓰잘 데 없죠. 내 말 듣는 거밖에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 대목에서 안경 할머니는 끼어들지 않고 웃으며 구경만 하고 있는데, 즐기시는 기색이 완연하다. 정신이 뚜렷하지 않으실 때도 어머니는 나름의 유머감각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으시는데, 그걸 즐길 줄 아는 분이 한두 분만 계셔도 어머니 생활에는 큰 덕이 될 것이다. 그 유머감각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분 같으면 어머니가 쾌활하실 때는 좋아하다가도 심술 피우실 때는 가까이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일단 안경 할머니는 어머니 편으로 확보가 된 것 같고, 함께 있던 다른 두 분 할머니도 30분 가량의 어머니 공연을 즐기며 어머니께 꽤 가까워지신 것 같다.

연출을 마무리짓는 단계에서 통상적인 수법을 여기 와서는 처음으로 써먹었다. "어머니, 가기 전에 뽀뽀 좀 해도 될까요?" 오만상을 찌푸리며 "안돼!" 곁의 할머니들, 완전 뒤집어지신다. "어~머~니~ 한번만요! 살살 할께요." 하니까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로 환한 웃음을 띠고 얼굴을 내미신다. 병원에서 수십 차례 연습한 대목인 걸 모르는 할머니들, 신기해서 어쩔 줄들을 모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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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망국 100년> (2) "산업화형 근대화"


문명간 교섭이 근세에 들어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 비교해 보면 근세 이전의 문명권들은 서로 격리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어느 정도의 교섭은 있었다. 한자문명권, 기독교문명권, 이슬람문명권, 힌두문명권 등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자리잡고 있던 사회들은 상당한 범위의 기술적 요소들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눠가지게 되었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렐리아의 주민들이 격리되어 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조그만 지역 안에서 대부분의 소비재를 자급자족하던 중세적 경제체제에서 벗어날 필요도 여러 지역에서 나란히 나타났다. 어느 정도 시점과 형태의 차이는 물론 있었지만, 생산성 향상과 인구 증가를 위한 기본적 기술 조건을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체제에서 벗어나는 발전 방향은 여러 가지가 열려 있었다. 그 모두를 "근대화"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산업화 중심의 근대화가 현실에서는 전 세계 근대화의 중심축이 되었지만, 그것은 근대화의 모델 중 하나일 뿐이며, 근대화의 의미가 그 형태에 제한될 근본적 이유는 없다.

현실 역시 세밀히 살펴보면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나라들 사이에도 상당한 성격 차이가 있다. "산업화형 근대화"를 중심축으로 공유하기는 하지만 각자의 문화적 기반 위에서 나름대로 모색해 온 근대화 노선에 접목시킨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유의 특성들이 약화되고 하나의 표준에 수렴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완벽한 수렴이란 없고 어느 정도의 접근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근대성을 넘어서는 "탈근대" 상황에서는 이 수렴 경향이 뒤집히면서 새로운 가능성들이 펼쳐지고 있다. 각 사회가 나름대로 지켜온 고유의 특성들은 이제 탈근대 노선의 열쇠 노릇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인구밀도가 중세 체제의 한계에 접근한 사회들은 모두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모색하고 있었다. 공통된 당면 과제는 시장의 확대였다. 지역별 전문화로 시장의 지역 범위가 넓어지고 상품의 종류가 늘어났다. 농민 1인당 식량 생산량 증가에 따라 상공업과 서비스업 등 직종과 종사자가 많아졌다. 새로운 직종들을 바탕으로 도시가 발전했고, 이에 따라 상품 유통량은 더욱 늘어났다. 중세 말기에 이른 모든 사회에서 펼쳐진 상황이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중세 체제를 벗어나는 시장 확대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국가 성격이 무력(武力)국가와 재정(財政)국가로 대비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송나라의 국가 기능은 경제 운용으로 중점을 옮긴 것이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 중국에는 중세의 오호십육국이나 오대십국 같은 긴 혼란기가 없었다. 황제의 조정이 천하를 통제하는 상태가 큰 단절 없이 계속되었다. 시장은 계속 확대되고 상업은 발달했지만 중앙정부의 존재가 그 확대와 발달의 배경조건으로 작용했다. 중앙정부는 부득이한 변화를 받아들이되, 기존 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요소들을 극력 통제했다. 화약 등 군사기술의 자유로운 민간 연구를 금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명나라 초까지 대부분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확보하고 있던 중국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던 셈이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중국인은 세계 어느 인구집단보다도 안온한 상황을 누렸다. 당시의 중국 정책이 발전을 억제하는 방향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안온한 상황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세기의 유럽은 훨씬 불안정한 상태였다. 유럽 주민의 3분의 1 이상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14세기 후반의 흑사병은 인구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유럽 질서의 본산이던 교황청의 권위와 권력은 쇠퇴해 갔고, 수십만 내지 수백만 인구 규모의 작은 정치조직들이 유럽 전역에 할거했다. 그리고 전성기에 이른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세계를 동쪽으로부터 압박하고 있었다.

15세기 말 이후 대항해활동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동방에서 전해받은 모든 기술을 활용해 함대를 조직했으나 터키 함대로부터 지중해 제해권을 빼앗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대서양으로 나갔다. 항해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큰 목적은 이슬람 세력에 막혀 있던 동방교역의 새 길을 뚫는 것이었고, 작은 목적은 뭐든 닥치는 대로 약탈해 오는 것이었다.

항해활동을 통해 늘어난 유럽의 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빈부의 극심한 격차가 온갖 새로운 활동을 위한 동력이 되었고, 급격한 변화를 억제하는 중앙정부가 유럽에는 없었다. 작은 규모의 국가들은 날로 격화되는 경쟁의 주체로서 변화를 억제하기보다 오히려 촉진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술의 전면적 발전 가운데 시대적 필요에 부합해 날이 갈수록 집중적으로 발전한 것이 산업기술과 군사기술이었다. 생산력 발전이 전쟁의 대형화를 불러오고 전쟁의 대형화가 대량생산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피드백 현상이 일어났다. '부국강병'이란 이름이 붙은 이 피드백 현상 속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중세체제를 넘어서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었고, 각 사회는 각자의 조건에 따라 적합한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유럽 한 모퉁이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도 그런 모색의 한 갈래였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다른 지역에서 모색된 진로들보다 강한 공격성을 보였다. 대량생산 체제의 확장이 필요로 하는 급격한 시장 확대가 외부를 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1인당 생산량의 증대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다른 진로들에 대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궤도에 오르자 인접한 지역에서는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르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경쟁을 견뎌낼 수 없었다. 영국에서 시작해 서유럽을 거쳐 중부유럽으로 산업혁명은 마치 암세포가 번지듯이 퍼져나갔다. 19세기 중엽까지 산업화를 이룩한 유럽국가들은 근대화의 선진국으로서 국제무대의 열강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미국, 러시아와 일본이 그 대열의 꽁무니에 붙었다.

19세기 말까지의 산업화는 지역적 착취-피착취 관계를 형성했다. 피착취 지역을 식민지로 확보하는 산업화 선진국들 사이의 경쟁이 제국주의로 나타났다. 산업화의 확장이 자발적 경쟁보다 무력에 의한 강제로 진행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식민지가 된 사회들에게는 산업화의 종속적 위치가 강요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세계체제'였다.

자발적 경쟁을 통해 산업화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산업화를 근대화의 중심축으로 채택하면서도 그 이전에 각자 나름대로 모색해 온 근대화의 의미를 얼마간 병행시킬 수 있었다. 전통이 통째로 무너지지 않고 점진적 변화를 겪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식민지가 된 피착취 지역의 사회에서는 전통이 근대화의 장애물로만 여겨져 파괴 대상이 되었다. 그 보존 가치를 통치국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사회에 적합한 길을 찾을 기회를 잃고 산업화 구조 속의 불리한 위치만을 떠맡게 되었다. 그것이 식민지의 불행이었다.


1945년 8월 15일에 한민족이 식민지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족에게 적합한 발전 방향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식민지의 불행에서 제대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없고 해방도 명목상의 해방일 뿐이다. 분단국가 건설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거니와, 그 한 쪽인 남한의 발전 방향이라도 이 사회에 적합한 방향을 잘 찾아낸 것일까?

남한이 걸어온 길이 잘된 길이다, 못된 길이다, 이 단계에서 서둘러 단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잘된 길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한 가지 점은 지적해 둔다. 우리 사회에, 우리 민족에게 적합한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치기준에만 매달리는 추세가 식민지 시대와 별 다름이 없었다.

조선 후기를 통해 중세 체제를 넘어서는 길을 모색한 노력의 흐름이 있었다. 전통 속에서의 발전을 추구한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개항기에 이르러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열강의 위세 앞에 움츠러들었고,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흐름이 잘못된 흐름이었다고 묵살한 식민통치자들의 주장을 넘어서지 못하고는 우리 사회에 맞는 길을 찾을 희망이 없다.

산업화를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인 사회라도 전통을 다소나마 지켜낸 사회들은 탈 산업화, 탈 근대 시대를 내다보는 지금도 자기 자세를 갖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산업화에 매몰되어 전통을 잃어버린 사회는 어느 시대가 되어도 남의 꽁무니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지난 150년 동안 외세의 위력 앞에 넋을 잃고 잊어버리고 말았던 우리의 전통 속에 되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는 노력이 우리 사회에 너무 적었다.


Posted by 문천
2009. 12. 23. 22:33

 

뭐든 꼬투리를 찾아 너싱홈에 전화를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원장님이 먼저 전화를 줬다. 밤새 잘 주무셨다는 소식부터 전하고, 몇 가지 디테일을 제공한다. 어제저녁에는 7시까지 건물 밖에서 노인분들과 어울려 담소를 즐기시고, 아침식사 후에도 어울려 앉아 계시는데,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신다고. (전화받은 시간이 8시반이었다.) 식사를 홀에 나와서 하신다는 소식도 반갑다. 어제 점심은 방에서 하셨고, 떠먹여 드리려면 방에서 하셔야만 하는가 생각했는데, 많은 분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실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보호자를 안심시켜 주려고 전화 한 통 하는 내용을 봐도 우리 원장님, 참 센스가 훌륭한 분이다. 어떤 측면을 내가 요긴하게 여기는지 정확하게 파악이 되신 게 분명하다. 내가 마음을 놓는 데 필요한 얘기는 효과적으로 다 담겨 있고, 군더더기는 별로 없다. 그렇게 파악이 되어 있다면 어머니와 관계된 어떤 판단과 결정도 나보다 더 잘해 줄 것을 믿을 수 있다.

7월 22일 중국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매주 한 차례씩 찾아갈 수 있겠지만 그 뒤는 기약하기 힘들다. 7월 9일 작은형이 미국에서 돌아오면 역할이 되겠지. 친구나 제자분들 중에 아직 기동력 있는 분들이 찾아뵙기는 병원 계실 때보다 나을 것 같다. 2년 전까지 대자암 계실 때보다 생활도 편안하시고 손님 맞이하기도 편리하게 되셨으니 이제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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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