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1> 요즘 미국을 보며<中>

기사입력 2002-09-12 오전 11:43:50

  미국은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인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인 거야 뉴욕테러의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지금 벼르고 있는 이라크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도 지지하는 나라가 없다. 유일하게 공조를 취하고 있는 영국도 실리를 취하는 정책일 뿐, 국민 여론은 냉담하다. ‘미국의 고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11년 전의 걸프전쟁이 지금보다 넓은 지지를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꼭 필요한 전쟁이었는지 석연치 않은 사람들이 많다. 베트남 전쟁의 확대는 미국 내에서도 거국적 반전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공식 전쟁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CIA의 도발행위는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힘을 가진 자는 힘을 쓰고 싶어하는 법,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는 전쟁의 가능성을 늘 걱정해야 한다. 이 호전성을 군산복합체의 작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이 좋아하는 전쟁은 한 마디로 자본집약적 전쟁이다. 장비와 물자에 승부를 건다. 그러니 컴퓨터 게임 하듯 모니터와 스위치로 전투를 수행하는, 인간이 배제된 전쟁이 된다. 굳이 지상전에 병력을 투입할 경우 장비와 훈련이 뛰어난 정예부대로, 람보와 같은 활약을 기대한다. 전세계 기아문제를 해결할 만한 비용을 펑펑 투입하더라도 자기 군대의 피는 절대 흘리면 안 되는, 그런 전쟁이다. 상대방에게는 전쟁이지만 자신에게는 게임에 그쳐야 하는, 그런 전쟁이다.
  
  전쟁은 오랜 문명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활동 중 가장 영예로운 것이었다. 어느 시대에건 전쟁은 참혹한 상황을 불러왔지만, 그 피해를 참여자들이 함께 겪는 것이기 때문에 규모와 양상에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앞장서서 겪는 사람들이 영예를 차지하고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 대량살상무기가 발달하면서 지도자들이 전투의 현장에서 물러서게 되고, 국민국가의 발달로 동원능력이 커지면서 규모에서나 잔혹성에서나 한계가 없는 무한전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위험을 직접 겪지 않는 지도자들에게 전쟁이 추상화된 것이며,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과 예술은 전쟁의 구체성을 고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에서는 지도층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추상화된 전쟁의 구경꾼이 된 것이다.
  
  몇 해 전 노스웨스턴대학의 전쟁사학자 마이클 셰리 교수가 낸 ‘전쟁의 그림자 속에(In the Shadow of War)’에 미국인의 기묘한 전쟁콤플렉스가 설명되어 있다. 미국의 역사적 경험이 이 콤플렉스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1백년간을 통해 본토에서 전쟁의 참화를 겪은 일이 없다는 것이 미국 역사의 한 가지 특이성이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 본토에서 최대의 군사적 참화는 1876년 커스터가 이끈 2백 명의 기병대가 인디언을 공격하다가 섬멸당한 일일 것이다.
  
  한편 미국의 해외 군사활동은 계속 늘어나고 미국의 군사적 위상은 상승했다. 1899년의 대 스페인 전쟁으로 열강의 말석에 끼어들었고,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강대국의 반열에 들었으며,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는 양대 초강대국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미국이 앞장선 것은 초강대국의 위상 때문이었다. 해외 군사개입의 확대는 전쟁을 겪지 않는 본토의 상황과 불균형을 빚어내게 되었고, 그 결과 1960년대 이래 대대적 반전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의 참혹성을 싫어하는 국민정서의 압력으로 미국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양상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피를 전혀 흘리지 않는 전쟁이 있을 수 있는가. 그래서 남의 피는 흘리되 자기 피는 흘리지 않는 전쟁양상이 된다.
  
  2차대전의 경험도 큰 작용을 했다. 나치의 학살과 일본의 교쿠사이(玉碎) 작전 등 전쟁의 참상은 간접경험을 통해 미국인의 전쟁 공포심을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영국의 V-2 피해는 머지않아 대서양도 안전한 울타리가 되지 못하게 될 상황을 예고했다. 또, 스스로 터뜨린 원자폭탄의 위력은 미국도 더 이상 전쟁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했다. 20세기 후반 미소간 핵탄두와 미사일을 둘러싼 군비경쟁의 양상은 미국의 지정학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다.
  
  셰리 교수는 군인 출신 정치인이 민간 정치인보다 현대미국의 군국화에 온건한 편이었음을 지적한다. 야전 경험이 있는 군인은 전쟁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베트남에 원자폭탄을 쓰자는 제안에 “자네들 미쳤나? 그 끔찍한 물건을!” 하고 펄쩍 뛰었다는 일화를 전한다. 군산복합체의 개념을 제기한 것도 아이젠하워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케네디 대통령은 군국적 성향이 강했다고 한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보다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그의 말을 떠올리면 수긍이 가는 의견이다. 지금 미 행정부에서 파월 국무장관이 온건파를 대표하고 있는 것도 그럴싸한 일이다.
  
  뉴욕 테러는 미국에게 참혹한 타격이다. 그러나 과거 수십년간 세계 각지에서 미국이 개입하고, 또 야기하기도 한 숱한 참화들에 비하면 그리 큰 타격이라 할 수도 없다.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의 위협을 면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원리다. 미국은 이 원리에서 오랫동안 면제되어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뉴욕 테러는 영원한 면제가 불가능함을 깨우쳐주었다.
  
  미국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폭력의 역풍을 휩쓸어 버리도록 더 큰 폭력의 바람을 일으키려 할 것인가, 아니면 폭력의 소용돌이를 줄이도록 노력할 것인가. 부시 행정부는 강경책만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공격을 당해 보는 경험을 통해 전쟁과 폭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인식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요즘 미국을 보며<上>

기사입력 2002-09-11 오전 9:19:11 

  걸프전쟁을 끝내면서 당시의 부시 미 대통령은 "우리는 드디어 베트남 콤플렉스를 이겨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반세기의 가상적국 소련의 퇴장 이후 무적의 미 군사력을 유감없이 과시했으니 '역사의 종말'은 아니라도 '전쟁의 종말'을 맞았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게는.
  
  그로부터 10년 후 미국의 심장부가 테러 벼락을 맞았다. 남북전쟁 후로 미국 본토가 겪어본 적 없는 최악의 공격을 이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맞은 것은 어찌된 일인가.
  
  냉전시대는 평화가 없는 시대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나라가 잠재적 전쟁의 불안에 잠겨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모든 나라가 불안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 전쟁을 억제하는 역설적 논리가 통할 수 있었다. 미-소 두 나라가 가진 '확실한 상호파괴능력(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이었다.
  
  군사력의 균형에 입각한 이 논리가 경제력의 불균형 아래 무너지고 난 뒤 미국은 '확실한 일방파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에 도전하는 어느 나라도 미국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 전에 철저하게 파괴될 정도의 군사력 격차다. 미국은 이 격차를 지키고 키우기 위해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과 같은 수준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다. 모든 나라가 미국을 두려워하면 어느 나라도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미국밖에는.
  
  강한 힘을 가진 것만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깡다구가 있어야 하고 독기가 있어야 한다. 미국은 베트남전 때부터 이 점을 투철하게 인식했다. 닉슨은 "소련인들이 나를 비이성적 행동도 불사할 인물로 인식한다면 미국 국익을 위해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미치광이 이론(mad man's theory)'이라는 이름을 얻은 원리였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미치광이 같은 행태, 미국이 선택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두 축이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아프가니스탄을 작살내러 나서면서 "반테러전쟁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의 적"이라고 선언하는 데서 이 두 축이 분명히 드러난다. 과연 이것이 세계와 미국을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길이 될 수 있을까?
  
  뉴욕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참혹과 암울에서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이라도 확인한다면 '테러 응징'의 상징적 효과라도 있을텐데, 그나마도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아프간 대학살'이 정당한 것은커녕 미국에 별로 이익이 되지도 못하는 것이었다는 인식이 미국인 사이에도 널리 일어나고 있다.
  
  뉴욕 테러에 대해 '맹목적 보복'이라는 처방은 별로 약효를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테러 1주년을 계기로 이 처방을 더 고단위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다. 부작용이 클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적극 동조하던 유럽국들은 회의적인 태도로 돌아서고 있고 미국을 지지하던 아랍국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미국내 여론의 지지도 엄청나게 약화되었다. 전쟁 수행중에는 지지도가 올라가겠지만 고단위 마약과 같은 효과일 뿐이다.
  
  탈냉전시대에 미국은 '세계경찰'의 역할을 자임했다. 이 '경찰'이 어떤 경찰일까? 경찰관이 업무중에 총기를 원칙적으로 휴대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경찰의 도덕적 권위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경찰관이 모습만 나타내도 완력이나 화력을 쓸 필요 없이 대개의 분쟁을 정리해 줄 수 있는 사회다. 그런데 미국 경찰은 어떤가? 이른바 세계경찰의 의미가 미국식 경찰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다른 곳에서 배워 왔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질서 유지의 선봉인 경찰에 대한 공격은 질서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이며, 다른 어떤 위협에 대해서보다도 철저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찰이 습격당했다고 해서 누구 짓인지 확인도 않은 채 평소 밉보인 녀석들을 즉결처분하러 돌아다닌다면 경찰의 자격에 문제가 있다. 온 세계인이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경찰의 권고와 지시에 따르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인가,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인가? 경찰이 시민에게 신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려고만 든다면 그 자체가 테러체제로 전락하고 만다.
  
  한 사회 안에서 누군가가 압도적 힘을 독점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요소가 되기 쉽다. 소련의 견제를 벗어난 무적의 군사력 자체가 세계평화의 불안요소이며 미국 자신에게도 큰 짐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소련을 상대로 익힌 미치광이 춤사위를 혼자서도 싫증내지 않고 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신명나는 춤을 어울려 함께 추려고 나서는 자들이 없을 수 없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9>

기사입력 2002-08-24 오전 9:18:57

  청해(靑海)라... 썩 괜찮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제교류가 많지 않던 개항 이전에는 같은 바다를 놓고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무 상관 없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힘센 나라가 우기는 이름이 통했다. 그런데 이제 국제간 협력이 경쟁 못지않게 중요한 세계화시대를 맞아서는 바다 이름 하나라도 의논성 있게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만이 아니라 극동러시아도 이 바다를 면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이 바다에 오랜 연고가 없어 그 이름에도 큰 집착이 없다. 한국과 일본이 문제인데, '동해'나 '일본해'나 일방적 관점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상대방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바다 자체의 모습을 그리는 ‘청해’ 같은 이름이라면 양쪽 다 겸허하고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아닐까? (서쪽의 ‘황해’와 짝을 이루기 때문에 한국 쪽에 사실 더 좋다는 점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근대국가는 배타적 주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영토에 대해서도, 국민에 대해서도, 경제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화시대에 국가의 배타적 주권이 약화되는 현상은 먼저 경제활동에 나타났고, 이어 시민권에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영토의 배타성은 아직도 끄떡없다.
  
  세계화 이전의 시대에도 바다는 영토의 엄밀성을 적용시키기 어려운 곳이었다. 바다 위에 줄을 그어 봤자 추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분쟁이 바다에서 일어났다.
  
  바다의 유동성은 섬에서도 나타난다. 저쪽 건너편 육지에 있는 나라에 속하는가, 이쪽 건너편 육지의 나라에 속하는가, 섬 자체의 모양과 위치가 확연히 말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문제가 독도 문제인데, 일본에는 독도 문제만이 아니다. 북쪽으로 북방사도(北方四島) 문제가 있고 남쪽으로 조어도(釣魚島) 문제가 있다.
  
  일본의 도서분쟁 이슈는 실익보다 상징성이 강하다. 패전 이후의 평화헌법 체제를 ‘패배주의’ 체제라 부르며 ‘국권회복’을 외치는 사람들이 일반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에서 우리조차 “대마도는 일본땅”이라고 불러주는 쯔시마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조짐이 보이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다. 한국 영토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제주도가 일본인의 관광지와 투자대상이 되어 온 것처럼 쯔시마가 한국인의 관광지와 투자대상이 되어 갈 징조가 보이는 것이다.
  
  쯔시마의 위치에서는 자연스러운 발전방향이다. 일본에서는 오지 중의 오지로 낙후된 이 지역이 한국인, 특히 부산지역의 수백만 인구에게는 훌륭한 관광지, 휴양지로서 잠재적 가치를 가진 곳이다.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국과의 관계 속에 이 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역사의 흐름에도 맞는 방향이다.
  
  3년 전 부산 직항로 개설을 앞두고 일본에서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한국인이 많이 드나들게 되면 한국에 먹히는 것 아니냐, 깨끗한 섬을 한국 관광객들이 망쳐놓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었다고 한다. 제주도를 일본 관광객들에게 열어줄 때 우리 사회의 걱정과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섬 주민들은 대개 이런 걱정보다 지역 발전 가능성에 더 기대를 보인다고 한다. 지금 여섯 개의 기초자치단체로 되어 있는 것을 묶어 섬 전체를 하나의 자치단체로 통합하는 움직임이 진행중이라고 하는데, 쯔시마의 진로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이 마련되면 한국에 대한 개방의 촉진이 기대된다. 제주도의 ‘국제자유도시’화에 상응하는 변화가 이곳에서 일어난다면 부분적이나마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쯔시마의 장래는 쯔시마 주민들이 일차적으로 결정하되 일본과 한국은 주민들의 의지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쯔시마를 활용하고, 또 그에 상응한 공헌을 쯔시마에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쯔시마를 자위대 기지로 활용한다면 그만큼 쯔시마를 어떤 방법으로든 지원해 주어야 할 것이고, 한국인이 그곳을 관광지로 활용한다면 그만큼 그곳의 산업과 재정에 보탬을 주어야 할 것이다.
  
  제주도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원리다. 섬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상황 속에서 섬 주민들은 오랫동안 많은 피해를 입어 왔다. 닥쳐오는 개방과 유동성의 시대에는 섬을 국가의 부속물로 삼아 끌고다니려 하기보다 섬을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길잡이로 삼아 따라다니는 편이 국가를 위해서도 새 시대에 더 잘 적응하는 길이 될 것이다.
  
  제주도에는 일본인, 중국인이 많이 와서 놀게 하고 투자의 길도 열어 주자. 그리고 쯔시마와 산둥에는 우리가 많이 가서 놀고 투자의 길도 열자. 이런 곳들에서 두 나라 사이에 활발한 접촉면이 생긴다면 그곳 주민들에게도, 두 나라에게도 모두 이득이 될 것이다.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세계화, 바다와 섬을 통해 그 충격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독도? 당연히 우리 땅이다. 다만 영해나 경제수역을 결정하는 근거로 독도를 이용할 생각일랑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한국인의 생활범위는 울릉도까지고 일본인의 생활범위는 오키(沖) 군도까지다. 경계선을 긋는다면 울릉도와 오키 군도의 중간이면 되고, 독도는 그 안에 들어온다.
  
  아무리 우리 섬이라 하더라도 바다에서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섬에 부담스럽도록 큰 선착장을 만들고 수비대를 주둔시키면서 이웃나라의 일부 성질 급한 사람들 자극하는 일은 그만두었으면 한다.
  
  끝으로 광운대 일본학과의 이향철 교수와 임영준군 등 쯔시마 답사단이 참여를 허락해 주고 8월 15일에서 17일까지 답사기간중 많은 도움을 준 데 감사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