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3. 22:31

8시 45분 병원 도착하자 여사님들이 휠체어에 바로 앉혀드렸다. 그런데 원무과에서 정산이 빨리 되지 않아 10시가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기다리다가 하도 늦어져 내려가 재촉하니, 간병비 한 항목의 책임자가 연락 닿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래서 넉넉히 놓아두고 갔다가 나중에 정산하자고 했더니, 그러실 것 없이 그냥 가시고 나머지는 나중에 연락드릴 때 납부해 달라고 한다. 병원에서 돈 덜 받은 채 퇴원시켜 주는 건 첨 봤다. 세상이 좋아진 건지, 내가 신용을 잘 쌓은 건지.

꼬박 한 시간 동안 휠체어에 앉아 계시는 걸 괴로워하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노상 누워 계시던 것보다 기분이 좋은 기색이시다. 정말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 드렸지만, 병원이란 곳은 어쩔 수 없다. 그만큼 회복이 되셨으면 몸에 자극이 늘어날 길을 찾아야 할 텐데, 3월에 재활치료 며칠 시도해 보다가 포기한 이후로는 너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지내셨다. 병원은 생존하는 곳이지, 생활하는 곳이 아니다.

오락가락하다가 틈틈이 아내가 모시고 있는 어머니께 가 보면 휠체어에 앉아 싱글벙글하고 계시다가 "기협아, 난 여기가 좋은데,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되니?" 하신다. 긴장을 풀어드리는 편이 좋다. "여기 좋으시면 여기 계세요, 어머니. 그런데 저쪽에도 좋은 면이 좀 있어요. 한 번 가 보세요. 갔다가 시원찮으면 바람 쐬고 돌아오시는 셈이죠, 뭐." "그래그래, 네가 알아서 해라." 하면서도 미심쩍은 기색이 잘 걷히지 않으시고, 한참 있다간 또 한 차례.

그래도 막상 떠날 때는 오랫만에 차에 앉으시는 게 싫지 않으신 기색. 굳이 앰뷸런스를 부를 필요까지 없겠다는 닥터 한 의견에 따라 내 차 뒷자리에 아내가 모시고 앉았다. 조심조심 두 시간 가까이 달리는 동안 아무 불평 없다가 거의 다 가서 "아이고, 궁둥이가 아프구나." 하셔서 아내 무릎을 베고 누우셨다.  출발 직후 구일산을 지날 때는 밖을 열심히 내다보며 "야! 뭐, 구경할 게 많다!" 하셨는데, 외곽고속도로에 오른 후로는 눈길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꼿꼿이 앉아 계셨다. 그러나 눈을 내내 활짝 뜨고 계신 걸 보면 풍경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계셨던 것 같다.

아내가 방에 모시고 가 짐을 정리해 드리고 첫 식사를 간병인과 함께 보살펴드리는 동안 나는 사무실에서 계약서 등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올라가 보니 도착한 지 40분 밖에 안 된 어머니께서 "야 기협아, 여기 참 좋다. 나 다른 데 안 갈란다." 다른 환자들과 아직 제대로 어울려 보지 않으셨지만, 어울릴 만한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하다는 걸 눈치채신 것 같다. 그리고 건물 안의 분위기만 해도 병원의 살풍경과는 차원이 다르다. 열린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부터.

아내와 너싱홈에서 나와 해장국으로 점심을 하고 남한강변까지 한 바퀴 돌아본 뒤 2시반쯤 돌아와 보았다. 침대에 누워계셨다. 우리가 모시고 정원을 산책하고 싶다고 양해를 얻어 휠체어를 가져오는 참에 간식이 나왔다. "먹을거다!" 외치고 손을 막 뻗치신다. 초코파이 하나와 크림샌드('크라운 산도' 같은 것) 두 쪽인데, 간병인이 어릿어릿하는 사이에 초코파이를 움켜쥐셨다. 누운 채로 입에 우겨넣으시는 바람에 침대 등을 올릴 경황도 없이 등을 받쳐 일으켜 앉혀드리고, 아내가 작동 레버를 찾아 침대 등을 올려드렸을 때는 초코파이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잘 잡수시던 과자(웨하스와 홈런볼)와 과일통조림을 상당량 가져가기는 했지만, 너싱홈의 간식으로 바로 적응이 되실 것 같다. 더 달라는 타령이 없으신 것이 막 옮겨서 얼떨떨하신 탓도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분들도 다 함께 간식을 받아 드시니까 혼자서 더 내놓으라고 난동을 피우기도 좀 뭣하실 게다.

휠체어로 모시고 나오다가 외출에서 조금 전 돌아온 원장님과 만났다. 강남성모병원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했다는 원장님, 다시 봐도 사람이 참 끌끌하다. 잠깐 몇 마디 나눠보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일에 종사하는 분들 중엔 자기가 좋은 사람이란 인상을 주려고 자기 표현에 열중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 원장님은 상대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태도가 분명하다. 어머니에 대해선 '참 재미있는 어른 오셨구나.' 하는 인상이 금세 잡히는 것 같다.

아내는 현관 앞 비치파라솔에서 쉬게 하고 휠체어를 밀어 정문까지 한 바퀴 다녀왔다. 150미터 가량, 수준급의 정원, 참 기분좋은 곳이다. 더운 날씨지만 길 한 쪽으론 나무그늘이 짙다. 다람쥐도 꽤 많은지, 다닐 때마다 눈에 띈다. 길가의 꽃나무 가지가 길 안쪽으로 드리워진 곳에서 어머니는 손을 뻗어 잎새도 만져보시고 꽃도 만져보신다. 작년 4월 자유로병원에서 산책시켜 드린 후로 처음이란 생각에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현관 앞에 돌아와 보니 원장님과 원무실장님이 나와 있었다. 공무원에서 퇴직했다는 원무실장님은 나보다 몇 살 위가 분명한데, 마음은 훨씬 더 젊은 것 같다. '교수님', '박사님'을 대단하게 여기는 티를 너무 많이 내서 나도 듣기가 좀 거북스러운데, 어머니는 "하! 교수? 그게 뭐 별거라고!" 하며 태연하시다. 원장님은 살아오면서 응대해 온 범위가 넓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태도가 자연스럽다.

기억력 테스트도 겸한 듯, 원장님이 묻는다. "어르신,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아까 말씀드렸죠." 나는 당연히 "아, 당신이야 내 제자지." 하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뜻밖에 잠깐 머뭇 하시더니 "당신? 누구지? 나 잊어버렸어." 하시는 것이었다. 아마 원장님이 '제자'로 얼렁뚱땅 묶어내는 범위를 벗어나는, 특별한 역할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이 그 사이에 자리 잡히신 것 같다. 원장님이 "네, 다시 가르쳐 드릴께요. 제가 여기 원장이예요." 하자 대뜸 "원장? 당신 어마어마한 사람이구만!" 하시는 바람에 다들 크게 웃었다. 내가 "어마어마한 분은 아니라도, 여기서 저희들 대신 어머니 살펴드릴 분이세요. 어머니께선 어마어마하게 보셔도 돼요." 했더니 정색을 하고 원장님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거 참 고마운 분이군요." 하고 멀쩡하게 인사를 차리신다. 원장님도 살짝 눈짓으로 내 한 마디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표현을 아끼는 사람이지만 전혀 모자라지 않다. 참 믿을 만한 사람이다.

방에는 원장님이 모셔드리겠다고 해서 현관 앞에서 바로 작별하고 떠났다. 가지 말라고 붙잡지도 않으신다. 어머니 마음에 아마 원장님도 믿음직하고, 장소도 편안하게 느껴지시는 것 같다. 가기 전에 아내와 그 근처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에 편안히 자리 잡으신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자고 의논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겠다 판단하고 바로 돌아왔다. 다음 주 화요일 아내가 중국으로 떠난 뒤, 봉하 가는 길에 들러서 뵈어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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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3. 22:26
 

요양원으로 옮겨 모실 궁리는 지난 3월부터 해온 것이다. 연초부터 식사를 시작하시고 회복이 좋으셔서 3월 되어서는 닥터 한이 이제 병원 아닌 요양원에 가서 지내셔도 아무 문제 없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의료계의 과도한 영리성이 갈수록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데, 의료인들이 모두 닥터 한처럼 환자 위주로 생각하고 얘기해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병원에서는 어머니가 관리 대상인 환자다. 간병인과 간호사들이 아무리 친절을 다한다 해도 생활의 주체가 되시는 데 한계가 있다. 매일 가서 응대해 드려야 하는 필요도 여기에 있다. 어머니다운 생활을 최소한으로라도 확보해 드리기 위해 우리랑 노는 시간을 마련해 드려야 한다. 용태가 좋으실수록 그 필요가 더 크다.

요양원에서는 간병인의 도움을 아무리 많이 받더라도 '생활인' 대접을 받으실 수 있다. 텔레비전도 보고, 날씨 좋을 때는 정원에서 햇볕도 바람도 쐬고, 무엇보다, 다른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다. 대등한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 이것이 생활다운 생활을 위해 제일 요긴한 것이라 생각한다.

기본 비용도 매달 40만원 정도 절약되고, 우리가 살펴드려야 하는 시간도 줄어든다. 모든 것이 다 좋은데, 의료서비스 수준만이 병원보다 못하다. 방침을 정하고, 괜찮은 시설들도 답사해 놓은 상태에서 석 달 동안 늦춘 것이 그 때문이다. 마침 감기에 한 차례 걸리셨는데, 가벼운 감기 하나로 두어 주일 동안 기력이 푹 떨어지시는 것을 보니 옮기시는 것을 가급적 늦추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더 늦출 수 없게 되었다. 여름부터 일이 바빠질 것을 예견하고는 있었는데, 생각보다도 빡빡한 상황이 코앞에 닥쳤다. 일산 살림을 지키더라도 당분간 집을 많이 지키지 못하고 지내야 할 상황이다. 그리고 계절도 더 늦추기가 아깝다. 정원 좋은 요양원에 가서 햇볕과 바람이라도 즐기는 생활을 내년에 또 누리실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지난 금요일, 세 군데 시설을 둘러보려고 길에 나섰다. 안성 죽산의 파라밀요양원은 불교계 시설이고 병원이 같은 구내에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권위주의적 분위기랄까, 노인들을 관리 대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던 곳. 용인 백암의 백암너싱홈은 좀 작은 규모지만 분위기가 좋아보였다. 두 달 시차를 두고 다시 둘러보아 분위기의 안정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또 한 군데는 인터넷 상으로 그럴싸해 보였지만 아직 가본 적이 없던 이천의 세종너싱홈.

세종으로 제일 먼저 갔다. 그리고 다른 두 군데 가보려던 계획은 취소했다. 시설이 훨씬 낫고 운영도 잘하는 것 같아서 바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적성의 진인선원에 못하지 않은 생활여건으로 보였고, 위치가 훨씬 더 좋으니까.

이천 읍내에서 5킬로 가량 떨어진 세종너싱홈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잘 가꿔진 정원 사이로 백여 미터 올라가니 건물 앞 비치파라솔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영감님이 맞이해 준다. 인상 좋은 영감님과 몇 마디 기분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원장님이 식사를 마치고 내려와 인사를 하는데, 알고 보니 영감님이 이사장이었다. 요양원 세우기 전에는 장애인 시설을 이곳에서 꾸렸다 하고, 이사장님은 내내 정원을 가꿔 왔다는 것. 지금도 정원 일을 계속하고 계시단다.

간호사인 원장님도 꽤 연만해 보이시고(내 연배쯤?) 언행이 침착한 분인데, 가족이 없으신지 원내에서 생활하신다고 하여 더욱 마음 든든하다. 이사장님도 정원 속의 아담한 집에서 사시고.

다른 요양원보다 한 달에 15만원 정도 비싸지만 시설만으로도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지금 상태의 어머니로서 자연을 즐기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보인다. 수안보의 작은형이 쉽게 찾아올 수 있고, 내가 부산 쪽에 가서 지내는 동안에는 한 달에 한 번 차 몰고 다니러 올 때 오는 길 가는 길에 들르기도 쉬운 편이다. 일산에서 지낼 때는 차로 두 시간 가량이니 주 1회 다니기가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어머니께는 옮길 계획을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일요일에 간병인 여사님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다. 월요일엔 닥터 한과 병원 관계자들에게 알려야 할 텐데, 어머니를 가장 가까이서 살펴드리던 분들이 나중에 알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오는 길에 강 여사에게 얘기하니 어머니께 쪼르르 쫓아가서 "할~머~니~ 할머니 가시면 우리 심심해서 어떻게 살아요?" 재롱을 떤다. 조금 어리둥절한 채로 몇 마디 대꾸하시다가 기본 개념이 파악되신 듯, 나를 처다보고 말씀하신다. "난 여기가 좋다. 다른 데 안 갈란다." 그러자 여사님들이 번갈아 나서서 아드님이 매우 좋은 곳을 찾아서 모시려는 것이니, 우리는 서운하더라도 할머니는 가셔야 한다, 우리도 시간 나면 찾아 뵙겠다, 하고 달래 드리니까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신다.

월요일 오후에 다시 가 뵈니, 그 사이에 여사님들과 몇 차례 이야기가 있었던 듯하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정색을 하고 말씀하신다. "기협아, 나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되니? 난 여기가 좋은데." 서두를 일이 아니다. "어머니, 여기가 편안하시다니까 제 마음도 기쁩니다. 여기 그냥 계시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그쪽은 제가 보기에 여기보다도 더 좋던데요? 조금 있다가 기목이 올 테니까 기목이 생각도 한 번 들어보세요."

세 시에 온다던 형은 다섯시 반이 되어서야 나타났지만, 어머니 얼러드리는 솜씨는 확실히 나보다 윗길이다. 형이 다녀가고서는 옮기는 것이 어머니 마음에도 당연한 일이 된 것 같다.

오늘도 두시 반쯤 가 뵈니 기분이 괜찮으시다. 엑스선 사진 찍으러 휠체어로 다녀오시는데, 힘든 기색이 전혀 없으시다. 병원에선 휠체어 타시는 것도 목욕하실 때 외엔 없었는데, 요양원에선 가급적 침대에 누워서보다 휠체어에 앉아서 많이 지내시게 해드린다니 그것만 해도 무척 좋아하실 것 같다. 병원에 정원만 있더라도 휠체어에 앉혀 바람 쏘이시게 해드릴텐데,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지 못하는 옥상정원 외에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뿐이니 여사님들께 휠체어 앉혀 드려 달라고 수고를 청할 멋도 없었다.

결단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한 것을 넘어 오는 금요일 이후 어머니 생활을 생각만 해도 기쁘다. 병원급 의료서비스가 현장에 없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주저주저 해왔는데, 지난 번 감기 정도 대응에는 아무 문제 없겠고, 이천의료원이 10분도 안 걸리는 위치에 있으니 더 큰 필요가 있더라도 큰 걱정은 없겠다.

 

 

세종너싱홈 원장 성기순

467-832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우곡리 374-11

전화 031-6343-119   팩스 634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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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3. 22:20

"아! 기협아! 네가 오니까 참 좋구나."

얼굴을 보자마자 싱글벙글이시다. 오늘은 모시고 앉았기가 꽤 편하겠다.

"네, 어머니. 어머니야 제가 곁에 있건 없건 늘 행복하시잖아요?"

"그야 그렇지. 허지만 네가 있으면 더 좋은 걸?"

"그러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기쁩니다. 아부도 참 잘하시네요."

"아부? 아부? 아부야 네가 잘하지."

기분 좋은 표시를 하느라고 눈까지 쫑긋쫑긋 하시다가 급기야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치신다. 얼굴을 대 드리니 두 손으로 만지다가 손을 멈추고 한 마디. "너 어째 이렇게 이쁘냐?"

이렇게 흥이 나셨을 때는 최대한 재미있게 끌고 가야 오래 즐기실 수 있다. "아니, 어머니! 이 얼굴이 이쁘다구요? 아부가 너무 심하신 거 같아요."

"아니야, 진짜로 이뻐!"

분위기를 한 차례 묵직하게 잡아드린다. "어머니, 어머니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시니까 이 아들까지 이쁘게 보이시는 거 아닐까요?"

묵직한 분위기로 따라오신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래, 내 마음이 편하니까 네가 이뻐 보이고 고마운 마음도 드는 거겠지."

시간이 세 시였다. 점심과 저녁 식사의 딱 중간. 과자를 드리기 적당한 시간 같아서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어머니, 어머니께 글도 읽어드리고 싶고 과자도 드리고 싶은데, 어느 쪽을 먼저 할가요?"

'과자' 소리에 모드가 확 바뀌셨다. "야, 뭐 먹을 거 없니? 배가 고파 죽겠다."

서랍을 열어 보니 드시던 홈런바와 웨하스가 반 봉지 가량씩 남아 있었다. 한 차례에 다 드리기엔 좀 많아 보였다. 그런데 드린 것을 입에 넣으시자마자 더 달라고 손을 휘저으시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이만하면 충분하시겠지 하고 홈런바를 몇 알 남긴 채 서랍을 닫았더니 아직 입을 우물거리시면서 손만 휘저으시는 게 아니라 눈알까지 굴리며 몹시 별르는 기색이시다. 꿀떡! 삼키시자마자 예상대로 호통 모드다. "더 줘!!!" 얼른 응하지 않으니까 표현이 자꾸 거세지신다. "더 달란 말이야!!!" "먹을 거 내놔!!!" 복도에서 간호사까지 들여다볼 정도로 맹렬한 호통이었다.

두유를 입에 대 드리며 얼러드렸다. "어머니, 그만큼 잡수신 것도 대단히 훌륭하신 일이예요. 더 드시지 않아도 저는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두유를 삼키신 다음에는 구걸 모드로 돌아와 계셨다. "기협아, 내가 점심을 못 먹었어. 너무너무 배가 고파." 표정도 말씨도 그렇게 애절하실 수가 없다.

곁을 지나가던 채 여사가 이 말을 듣고 발길을 멈췄다. "할머니, 그렇게 잘 잡숫고 못 먹었다 그러시면 저희는 뭐가 돼요?" 내게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오늘은 좀 유별나세요. 아까는 아침도 안 드셨다고 잡아떼시더니."

채 여사가 내게 말하고 있는 동안 벌써 어머니의 호통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야! 내 점심 내가 못 먹었다는데 네가 뭘 아는 척하냐!"

채 여사가 킥킥거리며 물러간 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여쭸다. "어머니, 정말로 점심을 못 드셨어요?"

"못 먹었어! 넌 네 에미 말도 못 믿냐?"

"어머니, 아침도 못 드셨어요?"

호통기가 완연히 누그러지신다. "아침? 아침이야 먹었겠지, 뭐."

"어머니, 여태 점심을 못 드셨으면 많이 시장하시겠어요. 여기 과자가 여섯 알 있는데 어머니 다 드세요." 하며 한 알을 손에 집으니까 입을 짝 벌리신다. 통제가 효과적으로 되려면 공세를 유지하는 편이 좋다. "어머니, 점잖지 못하게 입으로 받으시려 하세요? 손으로 받으세요."

손을 내밀어 받아들면서 뭔가 불평하고 싶은 기분이신가보다. "야, 째째하게 한 개씩 주냐? 이런 건 한 번에 두 개씩 주는 거야."

"네, 어머니. 어머니는 역시 위대하십니다." '위대'하다는 건 어렸을 때 형제간에 '밥통 큰' 놈이라고 놀릴 때 쓰던 말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다.

"그래, 나는 위가 대하다. 그래서!"

두 개씩 두 개씩 해서 다 드렸는데도 탐욕스러운 눈길을 거두시지 않는다. 빈 곽을 뒤집어 보이며 달래드리고 있는데 성격이 쾌활한 강 여사가 지나다가 한 마디 잘못 건드렸다. "할머니, 점심도 제가 얼마나 많이 먹여 드렸는데, 그 과자를 다 드시고 또 달라 그러세요?"

대뜸 '년'자가 쏟아져나온다. 옮겨 적을 만큼 조리 있는 얘기도 아니고 향기로운 얘기도 아니다. 강 여사가 "할머니, 잘못했어요." 하고 깔깔대며 달아난 후 나를 향해 손을 내미시는데, 3초 안에 새 봉투를 따서 과자를 쥐어 드리지 못했으니 그 다음 말씀은 내가 들어 싼 말씀이다. "이 쌍놈아! 먹을 거 줘!"

여사님들에게도, 며느리에게도 "쌍년"은 입에 달고 계시는 말씀이지만 그것을 변형해서 내게 적용시키시는 건 모처럼의 일이다. 잘 않던 짓을 하셨으니 분위기 전환을 위해 좋은 빌미다.

"어머니, 지금 제게 '쌍놈'이라고 하셨어요?" 정중히 묻는다.

"그랬다, 이 쌍놈아!" 조금 어리둥절하신 듯, 욕에서 독기가 빠져 있다.

"어머니, 제가 쌍놈이면 쌍놈 어머니인 어머니는 뭐가 되세요?"

"쌍놈 어머니면 그야... 쌍년이지, 뭐." 그 말씀이 스스로 생각해도 재미있으신 듯, 누그러진 기분으로 "쌍놈"과 "쌍년"이 든 말을 만들어 이러저리 경쾌하게 해 보신다. 그 동안 웨하스 한 봉지를 새로 따서 한 개 잡숫고 있는데 주 여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주 여사는 11월부터 2월까지 이 방에서 일했으니 어머니의 초기 회복 과정을 살펴봐 준 분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일에 열심이면서도 처신이 반듯하고 조심성도 있어서 겪어본 여사님들 중 자유로병원의 조 여사와 함께 가장 믿음직한 분이다. 한 달쯤 다니러 간다고 고향 갔다가 여태 안 와서, 그런 분 말씀도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건가, 의아해 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돌아와 다른 층에서 일하고 있으면서 틈날 때마다 어머니께 들러 뵙는데, 나랑은 오늘에야 마주친 것이다. 잠깐 어머니를 상대해 드리는데, 역시 아주 능란하고 편안하다. 어머니도 뚜렷이 기억은 못하시지만 믿을 만한 상대라는 정도 기억은 어렴풋이 깔려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의식이 아주 미약하실 때부터 의지하셨던 상대니까.

주 여사가 상대해 드리는 동안 멋을 것에 대한 집착도 풀어지셨다. 쥐어 드린 과자를 주 여사 먹으라고 권하신다. 주 여사가 사양하다가 절반을 잘라 먹으니 흐뭇한 표정으로 나머지 반쪽을 입에 넣으신다. 주 여사가 간 뒤 또 한 쪽을 드리니까 내게 권하신다. 절반으로 잘라 드리니 반쪽을 드시고는 먹을 것 타령이 끝나셨다.

노래 네 곡을 함께 불렀는데, 갈수록 가닥이 잘 잡히신다. <섬아기> 2절을 부르는 동안 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길을 그리 돌리고도 가사를 외워 계속 부르신다. 생각보다 진도가 빠르시다. 반야심경을 함께 외운 다음 금강경은 내가 읽어 드리는데, 들으시는 표정을 보니 내용이 대개 기억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수필은 <지구는 하나 (1)>를 읽어드렸는데, 당신이 쓰신 글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 정도 복잡한 얘기를 어렵지 않게 이해하시는 걸 보면 기억에는 깔려있으신 건데.

한 시간 반이면 좀 길게 모시고 앉았던 편이다. 요즘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앉았다가 일어날 때 별로 힘드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칭얼 모드를 보여주신다. "기~협~아~ 네가 가면 난 어떡하니?" 눈썹을 찌푸리고 목소리도 간드러지게 맞추셨지만, 절박감이 별로 없다. 나 이런 모드도 보여줄 수 있어, 하고 재미로 해보시는 것 같다.

"어~머~니~ 떠나가는 제 마음도 아파요~"하고 일단 호응해 드린 다음 차분한 진압작전이다. 반박하실 수 없는 그럴싸한 말씀을 길게 늘어놓아 칭얼 모드가 풀릴 시간을 버는 것이다. "어머니, 제가 곁에 있으면 어머니가 더 기쁘시다니까 어머니 곁에 늘 있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일도 해야 하거든요. 그래도 어머니가 제가 곁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행복하시다는 사실이 제게는 큰 위안이예요. 혼자 앉아 일하다가도 어머니 생각이 떠오르면, 아, 지금 아들이 곁에 없어도 어머니는 행복하고 편안하게 계시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놓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일이예요. 어머니,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제가 곁에 없으면 좀 심심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일하고 있으면서도 어머니께 고맙다는 생각 하고 있는 줄 아시고 편안히 계세요." 이 정도 쏟아부으면 에구, 잘못 건드렸구나, 하는 표정으로 "그럼 뽀뽀나 하고 가려무나." 하고 뺨을 내미신다. 오늘도 그렇게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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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