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2. 21:01

음식을 입으로 잡숫기 시작한 지 이제 넉 달 돼 간다. 처음 잡숫기 시작하실 때 오랫만에 새로 즐기는 음식을 맛보실 때마다 넋을 잃으실 정도로 감동하시던 충격은 이제 가라앉았지만, 먹는다는 행위는 여전히 큰 즐거움이시다. 틀니 없이 잡수실 수 있는 음식 범위가 그리 넓지 않지만, 한 가지 한 가지를 다 알뜰하게 즐기신다. 식사시간은 기쁨의 시간이고 음식을 권하면 사양하시는 일이 없다.

그래도 근래에는 많이 절제가 되신다. 처음에는 드리는 사람이 그치지 않으면 끝없이 받아 잡수려 하셨고, 어떤 때는 그만 드리려 한다고 화를 내시기도 했다. 요즘은 드리는 사람에게 "너도 먹어라." 권하기도 하시고, 드실 만큼 드신 뒤엔 "이제 됐다." 하기도 하신다.

식사 후에 과자와 과일을 드릴 때, 나는 아직 식전이기 때문에 "너도 먹어라." 하고 너무 많이 권해 주시는 것이 벅찰 때도 있다. 엊그제는 웨하스를 드리는데, 한 쪽 잡수실 때마다 잊지 않고 내게도 권하신다. 그대로 따라 먹을 수도 없어 나는 한 쪽을 입에 문 채로 어머니께 권해 드리고 내게 권하실 때마다 조금씩 먹고 있었다. 한참 드시다가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웨하스 반쪽이 입 밖으로 나와 있는 꼴이 눈에 거슬리셨던지 잡아챌 듯이 손을 내미신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과자를 낼름 입 안으로 집어넣었더니 내 표정을 흉내내시며 하시는 말씀, "너 지금 무슨 지랄을 한 거냐?"

욕설을 많이 쓰지는 않으셔도 쓰실 때는 참 힘도 안 들이고 경쾌하게 쓰신다. 지금의 당신 생활에서 욕설이 주성분은 아니라도 주요 첨가물 노릇을 하고 있다. 음식에서 조미료의 역할이랄까? 많이 접하는 사람들은 모두 욕설 대상이다. 제일 만만한 건 물론 여사님들. 욕창이나 근육의 굳어짐을 막기 위해 수시로 자세를 바꿔 드리는데, 그럴 때 통증을 느끼면서 욕설을 내뱉으시는 일이 많다. "아이구, 아파라! 에이, 쌍년!" 새 자세가 안정되신 다음 여사님이 짐짓 "할머니 편안하시라고 고쳐 눕혀 드리는데 왜 욕을 하세요?" 하면 "욕을? 내가?" 시치미떼시는 건지 진짜 잊어버리신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연덕스러우시다.

그런데 비교적 뜸하게 보이는 사람들, 예를 들어 간호사나 의사에게는 그런 욕설이 나오실 일도 어차피 없지만, 좋은 인상을 주시려는 노력이 거의 본능적으로 일어나시는 것 같다. 식사 중에도 눈길이 내 뒤쪽을 향하고 입가에 애교스러운 미소가 떠오를 때는 누군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남의 눈'에 대한 의식은 거의 천성이 되어 버리신 것 같다. 내 신체와 정신 상태가 지금의 어머니처럼 된다 해도 '남'에게 잘 보이려는 습성이 그만큼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다. 타고난 천성은 그분과 나 사이에 큰 차이가 없겠지만 살아온 환경의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욕설은 상대방 마음을 해치려는 굳센 의지 없는 취미생활의 일부로 보인다. 지난 달 물리치료를 며칠 받으실 때 아내가 참관하던 날 치료사에게 보이신 태도 이야기를 들으면 증오심도 묻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특별한 상황에서 예외적인 일일 것이다. 1년 전 기력이 떨어지시기 전까지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드러내시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지내 놓고 생각하면 상대방의 사람됨에 대한 직관이 상당히 예민하셨던 같다. 간병인 한 사람은 일하는 태도가 썩 좋아 보였는데 어머니는 그 사람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자주 보이셔서 당혹감을 느낀 일이 있는데, 겉과 속이 매우 다른 사람이었음을 다른 일로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같이 지내 보신 동료 환자 십여 분 중에 혐오감을 보이신 상대가 한두 분에 불과했으니 마음이 아주 어두우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이 분노나 심술 모드로 접어들면 심신이 그 기분에 온통 휘말리시는 경향이 꽤 보였는데, 금년 회복 후에는 그런 마음의 고통이 별로 안 보인다. 신체조건이나 환경의 차이에도 얼마간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역시 마음 상태가 달라지신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노래를 대하시는 태도에서도 마음이 밝아지신 것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의 나라로>, <꿈길>, <섬아기> 세 곡을 몇 주일 전부터 즐기기 시작하셨는데, 며칠 전에 가사를 적어달라고 하셨다. 그 후 내가 불러드릴 때 가사를 보면서 조금씩 따라 부르시다가 이제 가사는 거의 외우셨다. 기억력이 쇠퇴하셨다고 하지만 정서적 공감이 따르는 대상은 기억이 잘 되시는 것 같다.

그런데 노랫말에 대한 느낌이 뚜렷하신 것이 놀라울 정도다. <섬아기>에 대해서는 "참 쉬우면서도 좋구나." 하는 말씀이 여러 번 있었고, <꿈길>을 부른 뒤에는 "거 참... 아주 좋은 말이면서도..." 하고 말씀을 잇지 못하신다. 절절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을 못하시겠다는 듯이.

<행복의 나라로>에 대한 반응이 제일 활달하시다. "햐, 정말 좋다." "아니 어쩌면..." "어떻게 이런 노래를 지을 수가 있을까?" 한 번 부를 때마다 이런 표현 중 하나가 뒤따르지 않는 일이 거의 없다. 여러 번 그런 반응을 뵌 후에 한대수 씨와 몇 번 '뭉쳐' 본 일을 근거로 "어머니, 그 노래 만든 게 제 친군데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보니까 만든 노래도 참 좋네요." 했더니 반색을 하시고 어떤 친구냐, 뭐하는 친구냐, 한참 시시콜콜이 캐물으신다.

이 노래들에 대한 반응에서 어머니의 정서가 매우 순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슬픈 느낌, 포근한 느낌, 간절한 느낌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떠오르고 흘러가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대하시는 태도 역시 이런 순화된 정서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것 같다.

세 곡에 대한 몰입 때문에 다른 곡은 시도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 근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이 곡 정도면 하고 새 노래를 꺼내도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런데 가사를 거의 외우시는 단계에 오니 어머니가 곡조보다 가사에 집중하시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앞서 부르지 않고 혼자 외워서 부르실 때 완전히 작곡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국어학자로 평생을 지내 오신 습성 때문일지?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5. 9  (0) 2009.12.22
09. 4. 28  (0) 2009.12.22
09. 4. 16  (0) 2009.12.21
09. 4. 10  (0) 2009.12.21
09. 4. 9  (0) 2009.12.21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