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100년> (2) "산업화형 근대화"


문명간 교섭이 근세에 들어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에 비교해 보면 근세 이전의 문명권들은 서로 격리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어느 정도의 교섭은 있었다. 한자문명권, 기독교문명권, 이슬람문명권, 힌두문명권 등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자리잡고 있던 사회들은 상당한 범위의 기술적 요소들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눠가지게 되었다. 아메리카와 오스트렐리아의 주민들이 격리되어 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조그만 지역 안에서 대부분의 소비재를 자급자족하던 중세적 경제체제에서 벗어날 필요도 여러 지역에서 나란히 나타났다. 어느 정도 시점과 형태의 차이는 물론 있었지만, 생산성 향상과 인구 증가를 위한 기본적 기술 조건을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체제에서 벗어나는 발전 방향은 여러 가지가 열려 있었다. 그 모두를 "근대화"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유럽에서 산업혁명을 계기로 촉발된 산업화 중심의 근대화가 현실에서는 전 세계 근대화의 중심축이 되었지만, 그것은 근대화의 모델 중 하나일 뿐이며, 근대화의 의미가 그 형태에 제한될 근본적 이유는 없다.

현실 역시 세밀히 살펴보면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나라들 사이에도 상당한 성격 차이가 있다. "산업화형 근대화"를 중심축으로 공유하기는 하지만 각자의 문화적 기반 위에서 나름대로 모색해 온 근대화 노선에 접목시킨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유의 특성들이 약화되고 하나의 표준에 수렴되는 경향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완벽한 수렴이란 없고 어느 정도의 접근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근대성을 넘어서는 "탈근대" 상황에서는 이 수렴 경향이 뒤집히면서 새로운 가능성들이 펼쳐지고 있다. 각 사회가 나름대로 지켜온 고유의 특성들은 이제 탈근대 노선의 열쇠 노릇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인구밀도가 중세 체제의 한계에 접근한 사회들은 모두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모색하고 있었다. 공통된 당면 과제는 시장의 확대였다. 지역별 전문화로 시장의 지역 범위가 넓어지고 상품의 종류가 늘어났다. 농민 1인당 식량 생산량 증가에 따라 상공업과 서비스업 등 직종과 종사자가 많아졌다. 새로운 직종들을 바탕으로 도시가 발전했고, 이에 따라 상품 유통량은 더욱 늘어났다. 중세 말기에 이른 모든 사회에서 펼쳐진 상황이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중세 체제를 벗어나는 시장 확대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국가 성격이 무력(武力)국가와 재정(財政)국가로 대비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송나라의 국가 기능은 경제 운용으로 중점을 옮긴 것이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 중국에는 중세의 오호십육국이나 오대십국 같은 긴 혼란기가 없었다. 황제의 조정이 천하를 통제하는 상태가 큰 단절 없이 계속되었다. 시장은 계속 확대되고 상업은 발달했지만 중앙정부의 존재가 그 확대와 발달의 배경조건으로 작용했다. 중앙정부는 부득이한 변화를 받아들이되, 기존 체제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요소들을 극력 통제했다. 화약 등 군사기술의 자유로운 민간 연구를 금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명나라 초까지 대부분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확보하고 있던 중국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있었던 셈이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중국인은 세계 어느 인구집단보다도 안온한 상황을 누렸다. 당시의 중국 정책이 발전을 억제하는 방향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안온한 상황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세기의 유럽은 훨씬 불안정한 상태였다. 유럽 주민의 3분의 1 이상을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14세기 후반의 흑사병은 인구의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유럽 질서의 본산이던 교황청의 권위와 권력은 쇠퇴해 갔고, 수십만 내지 수백만 인구 규모의 작은 정치조직들이 유럽 전역에 할거했다. 그리고 전성기에 이른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세계를 동쪽으로부터 압박하고 있었다.

15세기 말 이후 대항해활동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동방에서 전해받은 모든 기술을 활용해 함대를 조직했으나 터키 함대로부터 지중해 제해권을 빼앗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대서양으로 나갔다. 항해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큰 목적은 이슬람 세력에 막혀 있던 동방교역의 새 길을 뚫는 것이었고, 작은 목적은 뭐든 닥치는 대로 약탈해 오는 것이었다.

항해활동을 통해 늘어난 유럽의 부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빈부의 극심한 격차가 온갖 새로운 활동을 위한 동력이 되었고, 급격한 변화를 억제하는 중앙정부가 유럽에는 없었다. 작은 규모의 국가들은 날로 격화되는 경쟁의 주체로서 변화를 억제하기보다 오히려 촉진하는 역할을 맡았다.

기술의 전면적 발전 가운데 시대적 필요에 부합해 날이 갈수록 집중적으로 발전한 것이 산업기술과 군사기술이었다. 생산력 발전이 전쟁의 대형화를 불러오고 전쟁의 대형화가 대량생산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피드백 현상이 일어났다. '부국강병'이란 이름이 붙은 이 피드백 현상 속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중세체제를 넘어서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었고, 각 사회는 각자의 조건에 따라 적합한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유럽 한 모퉁이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도 그런 모색의 한 갈래였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다른 지역에서 모색된 진로들보다 강한 공격성을 보였다. 대량생산 체제의 확장이 필요로 하는 급격한 시장 확대가 외부를 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1인당 생산량의 증대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다른 진로들에 대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궤도에 오르자 인접한 지역에서는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르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경쟁을 견뎌낼 수 없었다. 영국에서 시작해 서유럽을 거쳐 중부유럽으로 산업혁명은 마치 암세포가 번지듯이 퍼져나갔다. 19세기 중엽까지 산업화를 이룩한 유럽국가들은 근대화의 선진국으로서 국제무대의 열강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미국, 러시아와 일본이 그 대열의 꽁무니에 붙었다.

19세기 말까지의 산업화는 지역적 착취-피착취 관계를 형성했다. 피착취 지역을 식민지로 확보하는 산업화 선진국들 사이의 경쟁이 제국주의로 나타났다. 산업화의 확장이 자발적 경쟁보다 무력에 의한 강제로 진행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식민지가 된 사회들에게는 산업화의 종속적 위치가 강요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세계체제'였다.

자발적 경쟁을 통해 산업화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산업화를 근대화의 중심축으로 채택하면서도 그 이전에 각자 나름대로 모색해 온 근대화의 의미를 얼마간 병행시킬 수 있었다. 전통이 통째로 무너지지 않고 점진적 변화를 겪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식민지가 된 피착취 지역의 사회에서는 전통이 근대화의 장애물로만 여겨져 파괴 대상이 되었다. 그 보존 가치를 통치국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사회에 적합한 길을 찾을 기회를 잃고 산업화 구조 속의 불리한 위치만을 떠맡게 되었다. 그것이 식민지의 불행이었다.


1945년 8월 15일에 한민족이 식민지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족에게 적합한 발전 방향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식민지의 불행에서 제대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없고 해방도 명목상의 해방일 뿐이다. 분단국가 건설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거니와, 그 한 쪽인 남한의 발전 방향이라도 이 사회에 적합한 방향을 잘 찾아낸 것일까?

남한이 걸어온 길이 잘된 길이다, 못된 길이다, 이 단계에서 서둘러 단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잘된 길 찾아왔다고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한 가지 점은 지적해 둔다. 우리 사회에, 우리 민족에게 적합한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가치기준에만 매달리는 추세가 식민지 시대와 별 다름이 없었다.

조선 후기를 통해 중세 체제를 넘어서는 길을 모색한 노력의 흐름이 있었다. 전통 속에서의 발전을 추구한 흐름이었다. 그 흐름은 개항기에 이르러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열강의 위세 앞에 움츠러들었고,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이 흐름이 잘못된 흐름이었다고 묵살한 식민통치자들의 주장을 넘어서지 못하고는 우리 사회에 맞는 길을 찾을 희망이 없다.

산업화를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인 사회라도 전통을 다소나마 지켜낸 사회들은 탈 산업화, 탈 근대 시대를 내다보는 지금도 자기 자세를 갖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산업화에 매몰되어 전통을 잃어버린 사회는 어느 시대가 되어도 남의 꽁무니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지난 150년 동안 외세의 위력 앞에 넋을 잃고 잊어버리고 말았던 우리의 전통 속에 되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는 노력이 우리 사회에 너무 적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