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로 받는 치료를 위해 일전에 전인한의원에 들렀을 때...

침 놔주던 황 의원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안 하던 일을 해봤네요."

외국인 환자가 혼자 왔는데, 통역 없이 그럭저럭 진료를 해냈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다. "영어에 웬만큼 익숙한 사람도 몸에 관한 대화를 하기는 쉽지 않은데?"

실물을 가리키면서 얘기하니까 충분히 소통이 되더라고 한다.

치료 끝난 후 카운터에서 약 탈 때 그 외국인과 마주쳤다. 차분한 인상의 아가씨였다.(새댁일지도?)

내 앞에서 약 받고 계산을 끝냈는데, 내 약이 나올 때까지도 볼일이 끝나지 않았다.

간호사 박 선생이 뭔가 사연이 있는데 풀리지가 않는 듯 쩔쩔매고 있다.

내가 "도와드릴까요?" 슬쩍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서 황 의원을 찾는 듯 안으로 뛰어간다.

내 약을 내주던 다른 간호사가 말해준다. "다음 예약을 잡으려고 그래요."

아! 그 정도야 내가 도와드릴 수 있지! 마리아나에게 내가 말했다.

"They want to know when you would come again."

마리아나가 반가운 기색으로 대답한다. "I thought they would tell me when."

이거 그대로 옮겨줄 필요 없다. 언제 와야 될지는 의사가 정해주는 것 아니냐고 의아해하는 뜻까지 뭐하러 전해주나?

그래서 간호사에게 말했다. "적당한 때를 정해주면 거기 맞춰서 오겠대요."

그러자 간호사가 예약장부를 보며 말한다. "화요일... 두 시면 좋겠는데요."

이건 즉각 옮겨줄 게 아니다. 간호사가 예약장부만 보고 날짜를 정해주면 너무 권위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간호사에게 필요없는 질문을 했다. "이분이 오늘 몇 번째 오신 거죠?"

차트를 들여다보며 몇 번째 오신 거라고 대답한 뒤에 다시 통역 일로 돌아왔다.

"Say, what about next Tuesday? Something like two o'clock?"

그 시간 좋다고, 그때 다시 오겠다고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옮겨줄 필요도 없었다.

 

해방공간 군정청의 '통역정치' 폐단을 비난해 왔지만, 원래 통역 일에 '정치성'이 얼마간 필요하다는 점은 감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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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제발 남북관계만은..."

 

부시 행정부는 북한 등 '악의 축'을 이용해 가공(架空)의 긴장 상태를 일으킴으로써 군사 정책을 편의적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외 신인도는 크게 훼손되었다. 클린턴도 탄핵 위험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라크 공습을 재개해 군사 정책을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지탄을 받은 일이 있지만, 부시가 벌인 짓에 비하면 약과 중의 약과다. 10년 전에 비해 미국의 '깡패국가(rogue state)' 이미지는 매우 선명해졌다.

 

그런 부시 행정부도 설거지 단계에 접어들어서는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 상식을 많이 되찾고 있다. 6자 회담 참가국 중 미국과 함께 가장 북한에게 편협한 태도를 보이던 일본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모두가 긴장 완화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이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홀로 경직된 태도를 지키고 있다. 긴장 지속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의 정부가 맞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뉴라이트가 남북관계의 긴장 상태의 지속 내지 격화를 바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펴는 미국이 세계의 군사적 긴장을 키우는 군사 정책을 취한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빈부 격차를 늘려 제로섬게임의 한계를 최대한 확장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위해 정치-사회적 자유를 제한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다.

 

미국이 이런 소모적 정책을 택한 것은 파탄의 순간까지 강자의 입장에서 단물을 뽑아먹을 수 있는 이점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약자의 입장에 가깝고 긴장 완화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부적절한 정책이다.

 

그런 부적절한 정책을 '경제 살리기'라고 다수 유권자가 밀어주었으니, 경제는 살리든지 죽이든지 맘대로 하시라. 환율 시장 개입, 몰상식하게 해도 괜찮다. 시장화도 좋고 민영화도 좋고 대운하도 좋다. 그러나 제발 대북관계만은 근시안적인 장삿속으로 망쳐놓지 말기를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뉴라이트 비판> 163-164쪽)

 

2008년 가을에 쓴 글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몇 달 지나는 동안 온 국민이 걱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걱정은 대개 경제 분야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이 더 큰 걱정이었다.

 

역사를 공부하고 민족에 대한 생각을 유별나게 많이 하는 사람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미시적 지표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나지 않는 거시적 지표가 상황을 더 크게 좌우할 수 있다. 체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날 때 특히 그렇다. 위 글 쓸 당시의 금융위기가 그런 변화기의 표시였고, 그 변화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변화기에는 남북관계의 추이가 경제 분야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복리를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2010년 봄 천안함 침몰 후 이명박 정권이 확실한 근거도 없이 책임을 북한에 뒤집어씌우며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을 때 걱정이 더 깊어졌다. 정부가 이 나라를 심각한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위 글의 취지를 부연한 "경제는 말아먹어도 좋다. 제발 전쟁만은…"을 이 자리에 올렸다.

 

몇 달 후 연평도 포격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 전쟁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전쟁을 걱정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남북관계 악화가 얼마나 큰 손실을 우리 사회에 가져오고 있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 손실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이종석의 <통일을 보는 눈>(개마고원 펴냄)을 권한다.)

 

그런 걱정 속에서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 지도자 박근혜 의원이 제기한 ‘신뢰 프로세스’는 반가운 방향이었다. 남북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신뢰’였고, 복잡한 상황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일거에 해결을 보려는 성급함보다 차분히 나아가는 ‘프로세스’의 자세가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무렵까지 ‘경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대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뢰 프로세스’라는 그럴싸한 구호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부터 적어도 ‘안보’ 의식에 있어서는 전임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북한의 도발적 행동이 격화된 끝에 ‘전쟁’ 얘기까지 거침없이 나오고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북한이 왜 저럴까? 아무런 특별한 정보에 접하지 못하는 일개 서생이라도 상식 차원에서 짐작이 갈 듯 하다.

 

북한 당국자들도 박 대통령이 말해온 ‘신뢰 프로세스’에 기대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5년간 북한 당국자들에게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가 겨우 비켜선 이제, 남북관계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당연히 들 것이다.

 

과연 어떤 변화가 가능할지 그들은 살펴보고 있는 단계다. 박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가 진정한 ‘신뢰’를 향한 제대로 된 ‘프로세스’라면 그들은 그에 맞춰 남북관계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뢰 프로세스’가 그럴싸한 말로 꾸민 입에 발린 구호로만 보인다면 그들의 태도와 입장은 그에 따라 바뀔 것이다.

 

새 정부 출범 후 두 달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신뢰 프로세스’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외교-안보 라인의 면면은 전 정권과 크게 다른 인상을 보여주지 않고, 전 정권에서 엄청나게 키워놓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스텔스기가 날아왔느니 어쨌느니, 전보다 더 강화되었다는 선전이 요란하다. 그리고 국방장관 등 관계 요인들의 호전적 발언도 전 정권 때 그대로다.

 

진행 중인 군사훈련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검색해 보니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홈페이지의 “전쟁을 부르는 2013 키리졸브-독수리 훈련”(http://newssh.net/841)이 눈에 띈다. 그 단체의 목적에 따라 이 훈련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데 다소의 과장이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제시된 데이터는 조작된 것 같지 않다. “방어 위주의 정례적 연습”이라는 표방에 비해서는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성격의 훈련임이 분명해 보인다. “정례적”이라고 하는데, 지금 규모의 훈련이 정례적으로 된 것은 2008년 이후의 일이다.

 

북한 입장에 좀 서서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하는 것 자체를 ‘종북주의’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2007년까지 북한이 보다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추구한 자세는 분명하다. 그런데 2008년부터 해마다 근 두 달에 걸친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이 자기네를 겨냥하고 벌어져 왔다. 거기서 받는 실제적 위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기분 나쁠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자기네를 위협하고 있는 상대에게 대화 상대로서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이런 위협 아래서는 합작사업인 개성공단 운영에도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교통이나 통신 조건에 약간의 제약을 가한 것은 ‘경고’의 의미다. 그런데 그 경고에 대해 남한 국방장관이 “인질” 운운 하며 ‘전쟁 불사’의 결의를 보인 것은 적반하장이었다. 전 정권에서 물려받은 장관이 새 정권 분위기를 파악 못해서 한 소리일까, 아니면 새 정권도 마찬가지 분위기라서 자연스럽게 나온 소리일까, 헷갈리는 상황이다.

 

개성공단 폐쇄는 이걸 분명히 해달라는 요구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합작 사업을 놓고 남한 국방장관이 마치 인질용 사업인 것처럼 말하니, “그건 오해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인질 될 위험 있다는 분들을 모두 돌려보내겠습니다.” 하는 셈이다. 남한에서 국방장관보다 더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이 “그건 국방장관 개인의 오해였습니다. 오해를 좋아하는 그 사람은 집에 돌려보냈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이 공단 도로 엽시다. 그런 헛소리가 우리 정부 일각에서 나온 것을 사과합니다.” 하는 것이 공단 재개를 위한 바른 길 아닐까?

 

어떤 프로세스든 프로세스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실마리가 필요하다. 대통령 교체는 실마리 잡아내기에 좋은 기회다. 평소 같으면 크게 생색 안 날 조그만 제스처라도 이런 기회에 보여주면 ‘신뢰 프로세스’를 작동시킬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전 정권에서 계획해 놓은 군사훈련을 계획대로 실시하더라도, 규모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성의를 보여준다면 상대방이 그 의미를 크게 받아들이고 관계개선의 희망을 키울 수 있다.

 

기회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놓치면 손해가 되는 것이다. 북한을 괜히 적대시하는 인물들이 요직에 그대로 포진해 있고, 그들이 도발적 발언을 멋대로 하는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전 정권에서 키워놓은 군사훈련이 똑같이 시행될 뿐 아니라 오히려 전보다 훈련 강도가 높아진 것을 자랑해 댄다면, 새 대통령 취임 초의 좋은 기회는 지나가버릴 것이다. 그 뒤 어느 때고 ‘신뢰 프로세스’를 느닷없이 시작하자고 한다면 생뚱맞아 할 것이다. “저 사람들 말로만 ‘신뢰’, ‘신뢰’ 하는데, 진짜 믿을 수 있나?”

 

 

Posted by 문천

 

3월 25일 평양방송은 북조선 당국이 “남조선 각 정당 단체에 대하여 4월 14일 평양에서 회담할 것을 초청”하였다고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 날짜를 붙인 편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 단체에게 고함”이 여러 정당과 단체에 전달되었다. 발송자는 김두봉과 김일성을 위시한 북조선 주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었고, “남조선 단독선거는 흉악한 기만에 불과”한 것이라며 이를 분쇄하기 위해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 투쟁하는 남-북조선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열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이 회의가 4월 19일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연석회의)란 이름으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2월 중순 김구와 김규식이 김두봉과 김일성에게 부친 편지는 4인 지도자회의를 제안한 것인데 평양 측은 더 큰 범위의 회담을 역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연석회의를 보완하는 의미의 “소규모의 지도자회의”를 붙여 제안했는데, 소규모라도 25인으로 구성하는, 남측 제안보다 훨씬 대규모의 회의였다.

 

남측 협상파가 작은 범위의 회담을 제안한 것은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작은 돌파구나마 만들어 통일건국 과업의 출발점으로 삼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북측에서 큰 규모의 회담을 역제안한 것은 자기네가 추진해 온 건국 방략에 자신감을 갖고 여기에 이남의 지지자들까지 끌어들이겠다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실을 거두겠다는 자세였다. 남측 협상파에게 남북협상이 유일한 활로였던 것과 달리 북측에게는 배부른 흥정이었다. 북조선에 안정된 체제를 구축해 놓았으니 남북협상이 어떤 성과를 거두건 자기네 갈 길을 가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북측의 오만한 태도는 양자택일의 강요에서 나타난다. 김두봉과 김일성 공동 명의로 보낸 편지에는 김구와 김규식의 그 동안 행적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이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쏘미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 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무관심한 태도로 묵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에 대한 유엔 총회의 결정과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당신들은 환영하였습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159쪽에서 재인용)

 

유엔위원단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대안은? 북측에서 해온 것처럼 소련 방침을 따르자는 것밖에 없다. 며칠 전(4월 15일) 일기에서 인용한 4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지난 13일 하오 1시부터 경교장에서 개최된 회합에서 김규식 박사는 금번의 평양회담은 예비회담으로 하고 본회의는 서울서 개최할 것과 유엔조위의 북조선입경을 허용하여 남북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토록 북조선 측과 교섭할 것 등 4개 조건을 제시하였던바 김구 씨는 이에 반대하고 유엔조위와의 관계는 일체 포기할 것을 주장하여 양김 씨 간에 약간의 의견대립이 있었다 하며 김 박사는 동 회합에서 불참할 것을 표명한 바 있었다 한다.

 

김규식은 유엔위원단을 거부하라는 북측 제안에 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김규식을 ‘현실주의자’로 규정한 일이 있는데(1946년 11월 7일), 이 대목에서도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여실히 나타난다.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진로를 좌우하는 힘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 둘 중 어느 한 쪽이라도 반대하는 길로는 조선의 통일건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소련을 무시하는 유엔 방침에 따르는 것도, 유엔을 거부하며 소련 방침에 따르는 것도 분단건국의 길이라고 그는 인식했다. 남북 지도자들이 민족주의 정신으로 뭉쳐 소련과 유엔, 양쪽을 모두 설득하는 것만이 통일건국의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것은 김규식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부 요인 북향 단념 - 남북협상 난항”

 

남북협상의 참석을 앞두고 김구·김규식 양씨를 비롯한 중간파 요인들은 북조선측의 초청을 받은 이래 연일 회합하여 양김 씨의 참석여부와 남북요인회담에 제시할 조건 등을 토의하여 오던 바 양김 씨의 참석과 4개 제안 등을 결정하고 다만 출발 일정이 미정이었는데 과반래 금번 회담에 기어코 참가하겠다는 결의를 표시하여 오던 요인들이 북행을 목전에 둔 금일에 이르러서는 참가를 주저하는 요인들도 있으며 또 확정적으로 북행을 단념한 인사도 있다 한다. 그리고 배성룡·권태양 양씨는 지난 18일 양김 씨의 선발대로 북행하였다 한다. 그런데 김구 일행과 김규식 일행의 태도를 구별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한다.

 

“김구 씨 일행의 동향”

 

한독당을 위시한 김구의 측근자들은 금번 회담에는 김구를 대변할만한 대표를 보내고 제2차 회담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왔으나 김구 씨는 종시일관 자신이 참석해서 회담을 성공시키겠다는 주장을 하여왔다 한다.

 

이리하여 출발준비를 마치고 19일 아침 숙소 경교장을 떠나려고 할 때 약 5, 60여 명의 모 학생단체가 모여들어 김구 씨의 이번 북행을 체념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출발을 방해하여 결국 동일은 출발치 못하였는데 앞으로 그 출발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과반래 북행을 선창하던 엄항섭은 돌연 태도를 변경하여 북행을 단념하였으므로 김구 씨 영식 김신 씨와의 대립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남북요인회담을 선창하던 한독당 조소앙 씨 외 수 명은 북행 여부에 대한 확정적 태도가 없어 일반은 북행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 박사 일행의 동향”

 

금번의 남북협상의 기안자의 일인인 김규식 박사의 북행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일반의 특별한 주목거리가 되어 오던 바 14일에 이르러 북행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최근 신병이 심하여져서 병원치료를 요하게 되었으므로 북행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김붕준씨는 북행을 단념하였다 하며 기외 수인도 북행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다.

 

대략 이상과 같은 현상에 있다는데 만약 양김 씨 이하 요인들이 보조를 같이 못하게 된다면 이미 북행한 요인들은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이며 남아있는 인사들의 금후 태도가 크게 주목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0일)

 

연락원 두 사람이 4월 7~10일간 평양에 다녀왔지만 3월 하순의 북측 제안이 가진 문제점이 불식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총선거 추진세력에서는 양김 씨의 평양행이 협상이 아니라 ‘투항’이라고 비방하고 있었는데, 만약 평양행이 ‘유엔위원단 거부’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투항’이란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김구 주변에서 이번 평양회담에는 대리인을 보내 예비회담 수준으로 임하고 그 후에 서울에서 제대로 된 회담을 열자는 의견이 나온 것도 북측이 준비한 회담에 대해 문제점을 많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4월 19일 아침 경교장에 몰려들어 김구의 북행을 저지하려 한 학생 대표 안기석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남북협상을 절대 지지하지만 김구 선생의 직접 출마를 반대하고 대리 파견을 종용할 목적으로 모인 것이다. 이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우리는 앞으로 조직을 확대할 것이며 평양회담이 끝날 때까지 이대로 못 가시도록 하겠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20일)

 

그 날 아침 학생들의 분위기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나오자 그때까지 그를 영수로 떠받들던 극우단체들이 표변해서 그에게 극한적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 사례들이 있다. 그래서 경교장에 몰려든 이북학련과 전국학련 학생들도 김구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학생들은 김구를 존경하고 아끼는 모습을 지켰고, 위에 인용한 발언에서는 남북협상을 지지하면서도 경솔한 평양행에 반대한다는 뜻이 진심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간절히 염원하면서도 막상 평양에 갈 것을 주저했다. 북측의 오만한 태도로 보아 진정한 협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구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규식의 성실한 자세와 비교하여 김구의 모험주의 성향을 비판하는 생각도 든다. 귀국 한 달 후부터 극한적 반탁투쟁에 달려들어 미소공위를 실패로 몰고 간 것은 통일건국을 어렵게 만든 죄악이었다. 해방공간을 테러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데는 그의 책임도 컸다. 그의 진심이 무엇이었든 그의 행위에는 민족의 비극을 불러온 책임이 적지 않다.

 

그러나 1948년 4월 시점으로 다시 눈을 돌려보면, 그의 북행을 탓할 이유는 없다. 김규식과도 달리, 그는 반탁운동의 이력 때문에 이북 지도자들에게 불신의 대상이었다. 지금 그들이 그를 대화상대로 인정해 주는 것은 오직 민족주의 하나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성패를 저울질하며 행동의 완급을 조절할 여유가 없었다. 상대방이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만나서 최선을 다해 호소하는 길밖에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그의 목소리는 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일 아침 경교장 마당에서 만류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의 북행을 만류하는 것을 감격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현 정세는 최후 단계에 다다랐다. 분열이냐 통일이냐 자주냐 예속이냐 이러한 중대시기에 있어서 내가 남조선에 주저앉아서 일신의 안일을 원하여 주저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정의와 통일을 위하여서는 전 남조선 2천만 동포가 억제하여도 나의 결의대로 가겠다. 나는 21세 때부터 나라를 위하여 싸운 한 사람이니 오늘이나 내일이나 당신들 젊은이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20일)

 

그는 오후 3시경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과 함께 경교장을 빠져나와 뒷담 밖에 대기시킨 차를 타고 북으로 달렸다. 저녁 무렵 개성을 지나 여현에서 38선을 넘었다. 미리 준비했던 성명서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나를 애호해주는 수많은 동지 동포 중에는 나의 실패를 위하여 과도히 염려하는 분도 있고 나의 성공을 위하여 또한 과도히 기대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이번 길에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전 민족의 실패일 것이요, 성공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전 민족의 성공일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20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