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역사를 위하여!"

 

 

아시아학회 소감 두 차례 잘 봤습니다. 읽으면서 절실하게 생각했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입장에 따라 말할 수 있는 범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도 말 막하는 편으로 살아온 사람이지만, 앞뒤를 얼마간 재지 않을 수 없어요. 내가 내키는 대로 하지 못하는 말을 이 선생이 할 수 있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나이 차이가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여 헛발질을 하더라도 바로잡을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지금 당장 논거가 충분치 못하더라도 보완할 시간이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할 일의 범위를 좁혀야겠다는 마음을 새삼 굳힙니다. 수십 년 동안 공부를 키워오기만 했어요. 더 넓게 더 크게 키우지 못한 것은 내 분수이지, 그럴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탓이 아닙니다. 몇 되든 몇 섬이든 모아놓은 구슬을 꿰는 일에 취미를 붙여야 할 때입니다.

 

좁히려면 기준이 필요하죠. 얼마 전부터 ‘건강’이란 키워드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상태를 놓고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를 구분하는 데는 어떤 가치기준이라도 적용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한 시점의 상태만을 놓고 정태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시간 좌표계 위에서 변화의 추이를 살피는 데서 더 많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풍요로움을 기준으로 삼을 때, 한 시점의 생산과 소비 양상만을 따지는 것보다 그 변화 추세를 인식하는 데서 그 사회의 상황에 대한 더 의미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역사 공부의 가치를 이 방향에서 찾으려 할 때, 가치기준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죠. 실제로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는 가치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의 유효성에 대한 엄밀한 생각이 일반적으로 모자라는 감이 있습니다. 나 자신은 분명히 모자랍니다.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의 발달 수준을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역사의 진행도 그 기준에서 음미하려는 노력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 내게는 취향에도 맞지 않고, 우리 시대가 다른 기준을 더 필요로 한다는 생각도 자꾸 들게 되었습니다. 근대적 관념에 지배되지 않는 기준을 검토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배운 도둑질인지라, 중국 역사에서 먼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근대적 관념에 지배되지 않는 가치기준을 인류의 경험 속에서 검토해 보려면 역시 중국문명을 바라볼 필요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겠죠.

 

중국 전통 역사관의 대표적 가치기준이 ‘치란(治亂)’ 아닙니까. 이것을 현대 상황에 맞춰 풀이한다면 ‘건강’ 같은 개념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은 근대적 관념에 대한 반성이 제일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서양의학이 규정해 온 건강의 기준에 수정의 필요가 널리 제기되고 있고, 인간의 복리를 직접 좌우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관습과 제도의 방어력이 강할 수 없는 분야죠. 동양의학의 건강 개념이 벌써 많이 복권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20세기를 되돌아볼 때, 식민지로 있던 전반부에 비해 독립국이 된 후반부에 건강은 더 악화되었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생산력 등 모든 근대적 지표에서 후반부가 월등하게 낫습니다. 그러나 백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의 고민,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현실 개선의 가능성이 막막하다는 좌절감 등 인간의 행복을 좌우하는 기본 지표는 더 나빠졌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건강’의 지표를 세워보고자 하는 동기를 설명했습니다. 여러 방면, 특히 의사들과 얘기를 나누며 그 전망을 더 다듬어보려 합니다.

 

이 생각을 갖고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인물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이 선생도 흥미를 느낄 만한 인물 같은데, 이미 파악하고 있는지? Ibn Khaldun(1332-1406).

 

위키에서 살펴보는 중 국가를 “스스로 저지르는 것 이외의 불의를 가로막는 제도”라고 정의한 것이 인상적이군요. 그리고 ‘social cohesion’으로 번역된다는 ‘asabiyya’를 중심개념으로 삼았다는 점에 흥미가 많이 끌리고요. 이슬람의 14세기를 다시 보게 하는 발언들이 있습니다.

 

When civilization [population] increases, the available labor again increases. In turn, luxury again increases in correspondence with the increasing profit, and the customs and needs of luxury increase. Crafts are created to obtain luxury products. The value realized from them increases, and, as a result, profits are again multiplied in the town. Production there is thriving even more than before. And so it goes with the second and third increase. All the additional labor serves luxury and wealth, in contrast to the original labor that served the necessity of life.

 

Businesses owned by responsible and organized merchants shall eventually surpass those owned by wealthy rulers.

 

 

Posted by 문천

 

3월 25일 평양방송에서 이북 측의 남북회담 제안이 발표된 후 4월 19일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릴 때까지 이남 신문에서는 “남북협상”, “남북회담”, “지도자회의”, “남북 요인회담” 등 용어가 쓰이고 ‘연석회의’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4월 19일의 회의 개막을 보도한 4월 23일자 신문에서 이 말이 처음 나타난 것 같다.

 

“공산파 주도 하 남북협상 개회”

 

남북협상에 참석할 남조선 요인들의 북행은 21일까지 끝마쳤는데 21일의 평양방송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구, 김규식 양 씨를 비롯한 남조선측의 한독, 민독, 민련 등 중간파 요인들이 참석치 않은 채 19일 모란봉 회장에서 김일성 장군의 사회로 제1차 남북요인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한 인사들은 북조선 측 요인들과 남조선 민전 계열이 주로 참석하였다 한다.

 

즉 동 회의에 참석한 정당사회단체는 회의장 왼편에 남로당, 인민공화당, 노동인민당, 민주한독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민중동맹, 전국노동조합평의회, 전국농민총연맹, 민주애국청년동맹, 민주여성동맹, 문화단체총연맹, 건민회, 건국청년회, 기독교민주동맹, 민주총연맹 등 남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자리를 잡고 회의장 오른편에는 북조선노동당, 민주당, 청우당, 전평, 농맹, 여맹, 민청, 민애청, 공업기술연맹 등 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리고 연단에는 김일성 장군을 선두로 북로당 김두봉, 남로당 허헌 박헌영, 북조선민주당 최용건, 북조선청우당 김달현, 인민공화당 김원훈, 남조선노동인민당 백남운 등이 참석하여 있었다 한다. 김일성 장군의 개회선언이 있은 다음 이상 연단에 앉은 제 씨의 축사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김구 김규식 양 씨가 평양에 도착치 않은 채 19일 회의를 개막한 것은 일반의 이목거리가 되어 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3일)

 

이북 측에서는 이 연석회의를 남북협상의 본 무대로 만들려 했다. 많은 정당-단체들이 참석한다는 점에서 ‘밀실회의’의 느낌을 주는 소수 지도자의 회담보다 넓은 대표성과 큰 공식성을 가질 수 있는 회의이기는 하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합의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군중대회 비슷한 이런 회의는 효율적 운영이 불가능하다. 21일의 참석자 자격심사 보고에 따르면 460개 정당-단체의 대표 545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회의가 끝날 때는 참가 대표가 695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김 박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초대소에서 쉬며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협상을 하러 온 것이지 연석회의를 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뒤늦기는 했지만 나는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여 참석해보았다. 회의는 참석자가 많아 진행상의 필요에 의해 사전에 발언내용이나 순서를 정하고 이에 따라 각 당별로 발언자를 신청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발언을 할 사람은 미리 원고지에 10장 정도로 발언요지를 써서 읽는 형식을 취했다. 발언이 끝나면 박수를 쳤는데, 이렇게 발언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결정서 기초위원들이 최종적으로 결정서 문안을 작성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06쪽)

 

결정서 기초위원들이 작성한 결정서를 놓고 채택 여부를 회의 마지막에 결정하는 진행 방식이다. 물론 채택 과정에서 다수의 요구가 있을 경우 가감과 수정이 행해질 수도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규모가 큰 회의는 진행 측 의도가 관철되기 쉽다. 그러지 못할 경우 ‘깽판’이 나 버린다.

 

이북 측은 이남의 ‘가능지역 총선거’ 반대세력을 자기네가 추진해 온 건국노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연석회의를 준비했다. 이남의 총선거 반대세력을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 볼 수 있다. 물론 대단히 엉성한 구분인데, 민전 계열을 좌익, 한독당과 민련 계열을 우익으로 보는 것이다. 좌익은 이북의 건국노선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고, 따라서 연석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면 김구와 김규식을 대표로 하는 우익은 연석회의를 회피했다.

 

21일의 2일차 회의 경과를 보도한 4월 24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545명의 대표가 “모든 점으로 봐서 남북조선의 각계각층을 망라한 진정한 애국자들로 구성되었다는” 자격심사 보고에 이어 오전에 김일성의 보고가 있었다. 오후에는 백남운과 박헌영의 보고에 이어 토의가 있었는데, “북조선의 현실과 남조선의 현실을 대조하고 전 조선 전체가 민주적 건설로 통일한 자주독립을 세워야겠다”는 주장과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파탄시키며 외국군대 동시철퇴하자는 소련군의 제안을 실현”시키기 위한 공동적 투쟁의 제안이 중요한 토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22일의 3일차 회의 경과를 보도한 4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오전과 오후에 모두 토의가 진행되었고 홍명희와 엄항섭을 결정서 기초위원으로 보선했다고 한다. 토의 내용으로는 유엔위원단의 철퇴, 단정 반대와 양군 철퇴 등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오후 7시 10분에 토의 종결을 거수가결하였다고 한다. 결정문은 이튿날(23일)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이어 ‘3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이 채택되었다. 결정문 내용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208-209쪽에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남조선 반동분자들의 협조 하에서 미국 대표가 쏘미공동위원회 사업을 결렬시키고 조선통일을 파탄시킨 이후 미국정부는 조선인민의 대표도 참가시킴이 없이 또는 조선인민의 의사에도 배치되게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유엔 총회에 상정하였던 것이다.

 

조선인민의 절대다수가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 자체를 단호 거부하고 그 활동을 절대 배격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유엔 소총회를 이용하여 남조선에 단독선거를 실시하고 괴뢰적인 소위 ‘전민족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우리 조국에서 남조선을 영원히 분리하여 미국 식민지로 변화시키려는 기도의 구현이다.

 

우리 조국에 가장 엄중한 위기가 임박한 이 시기에 남조선에서는 우리 조국을 분열하여 예속화하려는 미국의 반동정책을 지지하여 우리 민족과 조국을 팔아먹는 이승만, 김성수 등 매국노들이 발호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배족적(背族的) 망국노로 낙인함은 물론 그들에게 투항하여 그들과 타협하는 분자들도 단호히 단죄하며 배격한다. 그들의 배족적 망국적 책동으로써 남조선인민들은 초보적인 민주주의 자유까지도 박탈당하였으며, 생활을 향상시킬 아무런 희망과 조건도 갖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북조선에 주둔한 소련군이 북조선 인민들에게 광범한 창발적 자유를 준 결과 북조선에서는 인민들이 자기가 수립한 인민위원회를 확고히 하여 민주개혁을 실시하며 만족자립경제 노선을 구축하며 문화를 부활시키며 우리 조국의 민족주의적 독립자유국가로 발전될 모든 토대를 공고히 함에 거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우리는 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정책과 그들과 야합한 민족반역자 친일파의 매국적 기도에 반대하며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의 기만적 선거를 반대하여 궐기한 남-북조선인민의 반항을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투쟁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조국의 절반인 남조선을 미제국주의자에게 예속시키려는 것을 용허치 않기 위하여 우리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는 자기의 역량을 총집결하여 단선분쇄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남조선 단선 기도를 파탄시키고 조선인민의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하여 강력히 투쟁하여야 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협상’의 분위기를 조금도 풍기지 않는 단호한 내용이다. 맨 끝 문단에서 “소련의 제안”이라고 명기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조선인민의 손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얘기에 왜 꼭 소련이 나와야 하나? 이 결정문을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소련 찬양이 자주독립국가 수립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한독당과 민련은 참가했고, 그 단체명은 결정문의 서명에 들어가 있었다. 왜 그들이 찬성하지 않는 결정문에 한독당과 민련이 서명했을까? 서중석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 남북협상> 209-210쪽에서 연석회의 결정문을 둘러싼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결정서초안작성위원회는 북조선로동당의 주영하 김책 고혁 기석복, 남로당의 허헌 박헌영 조일명 박승원, 근민당의 백남운, 사민당의 여운홍, 민련의 권태양, 민독당의 홍명희, 한독당의 엄항섭 등 15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초안 작성을 주도한 사람은 김일성 백남운 박헌영 등 보고자와 고혁, 기석복 등이었다. 여운홍 등은 미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에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하였고 한독당 대표와 민련 대표 등도 반대의사를 표명하였으나, 같은 기초위원인 박헌영이 이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고 한다. (...) 김구는 왜 제 결정서가 통과되던 연석회의에 나오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당 대표가 서명한 만큼 결정서의 근본취지엔 나도 찬동한다”라고 답변하였다. 백범이 말한 근본취지란 남-북 단선-단정 반대, 외군철수, 자주독립국가의 실현으로 해석된다.

 

결정서를 읽었을 때 홍명희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벽초는 북행을 하기 전까지 소련과 미국을 동렬에 놓고 비판하였다. 그 점은 4월 21일에 있었던 그와 김두봉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명희: 당신들은 유엔에 조선사람들의 참여가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법이며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도 조선인의 참여가 없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신들은 모스크바회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왜 소련정부의 철군제안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미국에 비해 소련을 더 유리한 입장에 놓으려 하는가?

김두봉: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주둔군 철수문제를 제의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다.

홍명희: 물론 그게 사실이다. 그러나 강조할 필요는 없다. (대화 내용은 <레베데프 비망록>에서)

 

민련이나 한독당의 대표가 서명한 것은 다음의 요인회담을 생각하였을 터이고 회의장의 분위기가 압박한 것이 요인일 수 있지만, 그것을 요식행위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낭독한 사람은 서명과 같을 수 없다. 벽초는 이 결정서를 읽었을 때 어떠한 정신적 쇼크를 받지 않았을까? 23일 격문을 읽은 이극로도 남녘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필자는 종종 왜 홍명희가 돌아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는데, 이때 받은 정신적 ‘변화’ 또는 의식의 전이현상이 김일성 특유의 ‘극진한 대접’ 등과 함께 북에 남게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5명의 작성위원 중 확고한 우익은 엄항섭 1인뿐이고, 백남운, 홍명희, 여운홍, 권태양 4인을 중간파로 볼 수 있다. (그중 권태양은 좌익의 프락치였다고 동료 송남헌이 회고했다.) 연석회의건 작성위원회건 남로당-민전의 지지를 받는 주최 측 의지가 관철되었고, 그에 대한 강경한 반대는 잡음에 지나지 않았다. 중간파와 우익은 ‘근본취지’에 반대하지 않는 결정문에 들러리를 서줌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지도자회의’의 대가를 지불한 셈이다.

 

그런데 서중석에게는 홍명희의 입장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홍명희는 결정문을 채택한 23일 회의에서 결정문 낭독을 맡았다. 서중석은 홍명희를 “허튼 소리 한번 안 하고 평생 자신이 한 말대로 살고자 했던 점에서 존경받던 선비 중의 선비”로 그리며(같은 책 210-211쪽) 그런 그가 나서서 결정문을 낭독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지 “정신적 쇼크”까지 들먹인다.

 

나 역시 잘 납득이 가지 않지만 정신적 쇼크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극로가 우리말사전 편찬의 목적을 위해 북으로 와달라는 김두봉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사정을 정재환이 <한글의 시대를 열다>(경인문화사 펴냄) 47-61쪽에서 밝혀놓았는데,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문화정책 측면에서 이북의 전망이 이남보다 나았던 사정을 알아볼 수 있다. 홍명희 역시 문화정책 수립과 시행에 공헌한다는 구체적 목적을 위해 이북에 정착할 결심을 연석회의 전에 굳혀놓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자회의의 대가로 연석회의 결정문에 반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북 정착의 대가로 결정문 낭독에 나설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결정문에서 미국 책임을 강조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홍명희가 김두봉에게 말했다지만, 미국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 홍명희의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23일 회의에서 홍명희와 이극로, 투철한 민족주의자이면서 이북에 눌러앉아 이북 문화정책에 큰 역할을 맡을 두 사람이 결정문과 격문 낭독에 나란히 나선 것이 그냥 우연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Posted by 문천

 

4월 19일 북으로 떠난 김구의 뒤를 이어 김규식도 21일 평양으로 향했다. 지난 13일 경교장 회의 때 김규식이 북행 보류의 입장을 보인 것이(4월 15일 일기) 정말로 안 가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중석은 김규식의 속내를 이렇게 풀이했다.

 

우사가 4월 13일 북행을 보류한다고 밝힌 것은 계산 또는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미군정이나 북행 만류 인사들에 대한 ‘인사치레’일 수도 있었고, 극우에 대한 보호막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우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북행을 보류한다고 발표하고 곧 6개항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강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음날인 4월 14일 민련의 수정안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북과 교섭할 5개항을 마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사는 ‘특사’를 바로 보내지 않고 4월 18일 또는 4월 19일에야 보냈다. (...)

 

남북회담은 민족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것으로, 속이거나 이용당하는 차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 회담은 민족자주의 정신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어야 했다. 그것은 차려놓은 잔치상인 연석회의가 아니라, 요인회담을 통해서 5개항을 살리는 방향에서 가능하였다. 요인회담에서는 김규식의 ‘5원칙’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그 뒤에 어느 쪽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에 대한 매서운 준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병마를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고, ‘무기력’을 의미하기도 하는 ‘학자형’이라는 얘기를 들어온 우사는 북측과 소군의 의도를 넘어서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한울 펴냄) 197-198쪽)

 

평양 지도자들은 2월 중순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를 받은 뒤 두 사람을 평양으로 부르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바라볼 길이 남북협상 밖에 없었으니까. 자기네 좋을 대로 회의 방식과 내용을 다 정해 놓고 자기네 편리한 시점에서 초청장을 보낸 것도 그 까닭일 것이다.

 

예컨대 김구와 김규식에게 보내는 김두봉과 김일성의 편지에서 유엔위원단을 당연히 거부해야 할 것처럼 주장했다. 자기네 건국 노선에 따라오라는 것이 담긴 주장이다. 유엔이 그 시점에서 결정해 놓고 있던 ‘가능지역 선거’에 대한 반대가 남북협상의 공통분모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유엔의 전면 거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유엔도 동의할 만한 통일건국의 길을 찾기를 그는 원했다. 그런데 이북 측은 가능지역 선거를 반대하려면 유엔을 전면 거부하는 자기네 입장에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북행의 ‘거부’가 아니라 ‘보류’라는 완곡한 표현을 쓰면서 이북 측의 요구에 무조건 따르지 않을 뜻을 밝힌 것이다. 가능지역 선거 반대라는 공통분모 외의 서로 다른 생각은 모두 서로 존중하며 협의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북 측에서 일방적으로 참가 범위와 의제를 정해놓은 ‘연석회의’는 협상의 본 무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했다. 그는 북행 보류 의사표시와 함께 참여 조건 6개항을 내놓았다.

 

1. 북조선이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인상을 줄이기 위하여 스탈린의 초상화를 공공기관에서 제거할 것.

2. 평양회담을 예비회담으로 하고 첫 공식회담은 서울에서 열 것. 회담에는 관심 있는 모든 정당이 참여할 것.

3. 북조선지역에서는 100명의 대표를 선출하여서 200인의 대표를 선출한 남한의 대표들과 회합할 것.

4. 북조선은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의 최소한 1인 정도를 선거 감독을 위해 초청할 것.

5. 평양 혹은 서울회담은 독립실현의 방법만을 토의하며, 헌법의 채택, 국가의 명칭, 국기의 선정 등이 토의되어서는 안 됨.

6. 미-소 양군의 공동철병에 관한 선전이 중지되어야 함. 군대철수의 조건에 관하여 미-소간에 회합을 갖도록 소련 측에 요구함.

 

제3항을 보면 남조선에서 200인의 의원 선출을 목표로 유엔위원단이 추진하고 있던 ‘가능지역 총선거’를 그대로 추진하게 하면서 그 의미를 ‘정부 수립’이 아니라 독립 실현 방법의 토의를 위한 남북회담 대표 선출로 후퇴시키자는 것이다. 유엔위원단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남북협상 방향으로 끌어들이려는 뜻이다. 제4항에서 이북 대표를 뽑는 데 유엔위원단이 참여하게 한다는 것도 같은 뜻이다.

 

4월 14일 민련 정치-상무 연석회의는 이 6개항을 검토하고 4개항으로 수정했다. 김규식이 21일 출발에 앞서 발표한 ‘협상 5원칙’은 이 4개항에 끝의 한 조항을 보탠 것이었다.

 

“북행 앞서 김 박사 성명”

 

김규식 박사는 북행 당일인 21일 북행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 민족은 지금 불행히도 국토 양단과 동족 분열의 위기에 임박하였다. 우리의 힘으로써 얻는 해방만이 진정한 해방이요, 우리의 손으로써 이루는 통일만이 영원한 통일이라는 데서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북조선 동지들은 우리의 제안을 접수하였다. 그러한 견지에서 남북 정치협상에 대하여 과분의 기대도 조계(早計)이나 비관적 우려도 불필요한 것이다. 나는 오직 남북 정치지도자가 한 자리에 앉아서 성의껏 협상 토의하는 것만이 통일단결의 기본공작이라는 신념에서 북행을 결정하였다. 남북협상은 연합국 간, 특히 미-소 양국의 협조 위에서 통일건국을 완수할 방안을 찾을 것이요, 친미반소 혹은 친소반미의 착오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 나는 5개 원칙을 주장하였다.”

 

“협상 5원칙”

 

우리는 안으로 민족의 통일을 성취시키고 밖으로 연합국의 협조를 통하여 우리의 자주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함.

 

1. 여하한 형태의 독재정치라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건립할 것.

2.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하는 국가를 건립할 것.

3. 전국적 총선거를 통하여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4. 여하한 외국에도 군사기지를 제공치 말 것.

5. 미-소 양군 조속 철퇴에 관하여서는 먼저 양국 당국이 철퇴 조건 및 기일 등을 협정하여 공포할 것을 주장할 것. (<경향신문> 1948년 4월 22일)

 

애초 김규식이 제안한 6개항이나 민련 회의에서 수정한 4개항이나 기본 취지는 같은 것인데 표현에 있어서 ‘최대주의’와 ‘최소주의’의 차이를 가진 것이다. 애초의 6개항은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것이었다. 김규식은 6개항의 적극적 표현을 이미 내보낸 이상 공식적으로는 표현을 극도로 완화한 수정 4개항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주둔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는 원래의 주장을 최종적인 ‘5원칙’에 끼워 넣었다.

 

4월 14일 개회로 애초에 제안되었던 연석회의는 4월 19일로 연기되어 열렸다. 이북 측에서는 이것이 남북협상의 주 무대로 기획된 것이었기 때문에 김구와 김규식의 도착을 더 기다릴 수 없었고, 따라서 이남 측에서는 거의 민전 계열 대표만이 참석했다. 김구가 19일 오후에야 출발한 사실이 알려지자 김일성의 제안으로 20일은 휴회하고 21일에 제2일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17-18일에 김규식이 보낸 연락원(권태양과 배성룡)이 알려준 대로 ‘5원칙’을 수락한다는 뜻의 암호방송을 19일 밤 평양방송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김규식은 “모든 준비는 다 되었으니 빨리 오시기 바랍니다.” 하는 이 방송을 듣고 나서 20일 민련 간부회의를 소집, 21일 출발 방침을 확정했다고 한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 200쪽)

 

이북 측은 김구의 참석을 종용하기 위해 20일 연석회의를 휴회까지 했다. 그러나 20일 오후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2일에야 회의장에 인사차 들르기만 했다. 서중석은 <레베데프 비망록>의 이 장면 서술을 위 책 204-205쪽에 인용해 놓았다.

 

김구: 나는 김일성과 단독회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김일성: 근본과업은 독립에 대한 위협이다. 당수는 회의에 꼭 참가해야 한다.

김구: 나는 주석단에 들어가지 않겠다. 그런 곳에 참석하는 것은 습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당신들 계획대로 회의를 계속하라. 나는 단지 김일성을 만나러 왔다. 단독회담에서 우리가 당면한 긴박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김규식이 제안한 전제조건을 작성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김규식이 한 것이다.

 

다음날(4월 21일) 김구는 김일성과 다시 얘기할 기회를 가졌다.

 

김일성: 만일 당신이 연석회의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김구: 나는 정치범 석방, 38선 철폐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다. 내가 어떻게 총선거를 실시하는 데 동의하는 서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 당은 비합법적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다.

 

김구는 22일 연석회의장에 인사하러 들렀다가 홍명희, 조소앙, 조완구와 함께 주석단에 추가로 선임되었다. 한편 22일 새벽 평양에 도착한 김규식은 연석회의가 끝날 때까지 회의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생각과 스타일에 큰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 입장을 평양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데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행보 방식이 어울려 효과적인 ‘콤비’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중경에서 몇 해 동안 주석과 부주석으로 어울리던 가닥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지난 1월 말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으로 나서자 그를 영수로 모시던 극우파가 극한적 비난으로 표변했다. 2월 1일부터 5일까지 5회에 걸쳐 ‘김희경’이란 이름으로 <동아일보>가 연재한 글 “김구 선생님에게 올리는 글월”이 대표적 사례다. 이 글에 김구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역사에 남은 비장한 글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2월 10일) 중에서 “xxxx는 xxx란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고 분통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1월 28일자와 2월 11일자 일기)

 

4월 19일 김구의 경교장 출발 때 학생들이 몰려들어 가로막은 장면에서도 학생들이 김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왔는데, 막상 그 장면에 대한 보도 내용을 찾아보니 김구를 존경하는 학생들의 분위기가 분명했다. 지금까지 반탁운동에서 ‘극우’ 성향을 보여 온 세력 중 일부만이 이승만-한민당의 단독건국 추진 노선을 따라가고 일부는 김구를 따라 민족주의 입장을 지킨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청년층에서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4월 20일 노농학생총연맹의 남북협상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 두드러진 것이 4월 23일 서북학생총연맹(서북학련)의 지지 성명이었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21일, <조선일보> 1948년 4월 25일)

 

서북학련은 서북청년회(서청)와 연계된 학생조직으로 ‘이북학련’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1947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에는 서북학생총연맹 결성 기사가 실렸는데 제목이 “이북학련을 결성”으로 되어 있다. <8-15의 기억>(문제안 외 39명 지음, 한길사 펴냄) 350-359쪽의 채병률 회고 “왜 빨갱이가 사람 죽인 얘기는 안 합니까”가 서북학련 활동을 서술한 것이다. 애초에는 단체등록을 안한 채로 ‘서북학련’, 또는 ‘이북학련’으로 불리는 이북 출신 학생들의 조직이 있다가 이 시점에서 결성식을 갖고 등록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여름 이청천의 대동청년단으로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하는 움직임에서 서청은 합동파와 독립파로 갈라졌는데, 서북학련은 독립파 입장이었던 모양이다. 대동청년단은 김구가 남북협상 노선을 발표할 때 이승만에게 줄을 섰다.

 

“이청천 장군 이 박사 방문 - 대청, 남조선 선거 지지”

 

대동청년단에서는 지난 27일 상오 11시부터 본회 회의실에서 27일의 유엔 소총회의 가결에 대하여 긴급 상무회의를 개최하고 신중히 토의한 결과 이청천 단장 이하 참석 전원이 소총회 결의안을 지지할 것을 표명하였다 하는데 앞으로 그 준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금 29일 다시 상임위원회를 개최하고 선거 실시에 대한 구체안을 토의 결정하리라 한다.

 

그리고 작 28일 상오 11시 이청천 장군은 이화장으로 이승만 박사를 방문하고 유엔 소총회의 결의안대로 남조선 총선거 실시에 대하여 장시간 요담하였다 한다. 그런데 종래 동 청년단은 김구 씨의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오던 것인데 금반 이러한 태도로 이청천 단장 이하 단원들이 김구 씨의 노선과 상위되는 취하게 된 것은 일반의 이목을 끌고 있는데 동단 부단장 이성주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종래 김구 선생의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왔는데 현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남북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므로 우선 남조선만이라도 선거하여야 할 것을 주장한다.” (<동아일보> 1948년 2월 29일)

 

이청천은 며칠 후 독촉국민회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동아일보> 1948년 3월 4일) 다시 보름 후에는 부위원장으로 뽑혔다.(<동아일보> 1948년 3월 27일) 그리고 5-10 선거에서는 성동구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1년 전 이승만의 귀국 길에 같은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면서부터 그의 진로는 결정되어 있었던 것일까? 한편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은 정치적 움직임을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분단건국 노선은 아직 극우파를 석권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구의 지도력은 아직 살아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