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은 3월 3일 ‘국회선거위원회’를 군정장관 행정명령으로 설치했다. 5월 총선거의 관리 주체를 만든 것이다.

 

행정명령 제14호 국회선거위원회

 

제1조 국회선거위원회를 자에 설치하며 좌와 여히 동 위원회 위원을 임명함

위원 성명: 장면 김동성 최규동 이갑성 백인제 박승호 이승복 전규홍 김지환 노진설 윤기섭 현상윤 김법린 오상현 최두선

1947년 9월3일부 법률 제5호 (입법의원의원선거법) 규정에 의하여 이미 행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의 임명은 국회선거 위원회 위원의 임명으로써 인준함.

 

제2조 국회선거위원회 및 동 위원은 1947년 9월3일부 법률 제5호(입법의원선거법)에 의하여 중앙선거위원회 및 동 위원에 부여된 일체의 권한과 임무를 자에 부여함. 국회선거위원회는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이 1948년 3월1일에 발표한 바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에 의하여 1948년 5월9일에 거행될 선거에 있어서 전기 법률규정에 의한 권한과 의무를 수행함.

 

제3조 자에 설치하는 국회선거위원회는 군정장관의 인준 및 군정장관이 규정하는 규칙을 조건으로 하여 그 직능의 수행에 필요한 보급과 자금을 남조선 과도정부의 당해기관에서 획득하며 보조인원을 고용할 권한이 유함.

제4조 본령은 공포와 동시에 유효함.

 

1948년3월3일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윌리암 에프 딘 (<군정청관보 행정명령 제14호 1948년 3월 3일)

 

딘 군정장관은 3월 4일 국회선거위원 임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년 12월 비공식으로 제위에게 요청하여 선거규칙을 제정하였는데 금반 UN소총회 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게 됨에 있어서 UN조선위원단에서 다소 수정제의는 있을지라도 금반 총선거에 동 규칙을 사용케 됨은 본관으로서는 충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며 동시에 UN위원단의 승인을 얻어 귀하들을 선거위원으로 금일 정식 임명하는 바이다. 이 선거는 세인 주시리에 실시되는 만큼 우리의 총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 중요성에 감하여 제위는 애국적 견지에서 노력할 것을 믿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6일)

 

군정청이 반년 전 조직했던 ‘중앙선거위원회’(중선위) 구성을 그대로 두고 “UN위원단의 승인을 얻어” 선거 관리 역할을 계속해서 맡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승인”이란 말의 뜻이 애매하다. 위원 한 명 한 명의 임명을 승인받은 것일 수는 없다. 군정장관 행정명령에 의한 국회선거위원회(국선위) 설치에 대한 ‘양해’를 얻었다는 뜻일 것 같다.

 

15인 위원 중 중선위 위원장을 맡고 있던 윤기섭은 사퇴했다. 윤기섭은 최근 부의장을 맡고 있던 입법의원에서도 사퇴했다. 그는 사퇴 이유를 “해외에서 돌아와 그간 국내사정을 연구하였으나 아직도 정통치 못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으며 아울러 입법의원의 과거 1년간 업적과 금일의 현상을 생각할 때 선거최고기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사의를 표명하였다.”고 밝혔는데,(동아일보 1948년 3월 6일) 단독선거 추진세력의 횡포에 대한 불만을 뜻하는 것이다. 그가 입법의원에서 사퇴한 것도 단독선거 추진세력의 총선거 촉구 결의안(1948년 2월 19일) 강행에 대한 항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기섭이 사퇴한 사실이 아니라 나머지 14인 위원이 사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입법의원에서 김규식과 윤기섭의 사퇴에는 30여 의원이 동조했다. 그런데 15인 중앙선거위원 중에는 입법의원 부의장으로서 당연직처럼 들어간 윤기섭 외에 5월 총선거를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중선위는 미군정에 순종하거나 이승만-한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색깔’은 ‘특별선거구’에 대한 국선위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특별선거구 설정 문제, 국회선위에서도 당국에 건의”

 

재남 이북동포 4백60만을 대표할 수 있는 특별선거구 설정문제는 점차로 고조에 달하고 있으므로 16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이승만은 메논 의장을 방문하고 요담하였으며 20일에는 이북인민대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국회선거위원회에서도 16일 특별선거구 설치를 요청하여 하지사령관에게 건의문을 제출하였다 하는데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18일)

 

반공세력에서는 월남민의 수를 460만 명으로 과장하면서 이들에게도 인구비례로 의석을 할당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실제 월남민의 수는 100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 월남민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민주당 등 일각에서는 특별선거구가 획정되지 않을 경우 선거를 보이콧하겠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특별선거구 외에는 단독선거 추진세력을 대체로 만족시킬 만한 ‘국회의원선거법’이 3월 18일 군정장관 명의로 공포되었다. 법안 전문을 게재한 3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도입부를 옮겨놓는다.

 

“국회의원선거법”

 

민주건국의 초석인 국회의원선거법이 지난 18일 군정장관 딘 소장의 서명으로 공포되었다. 동 법안의 유엔조위 제3분과위원회에서 수 주일에 걸쳐서 초안하여 토의한 후 지난 3월 10일 유엔조위 전체회의에 상정 토의하여 동 12일 미군정 당국에 회부되었던바 미군정 당국에서는 이에 대한 전문가들과 다시 동 법안이 조선 실정에 적합한가를 검토하여 입법의원에서 통과된 선거법을 수정하여 공포하게 된 것인데 입의에서 문제가 되었던 선거연령 23세를 21세로 정하였고 일정 하에 고등계에서 사상 관계를 취급한 경찰관을 위시하여 고등관 3등급 이상의 관리, 판임관 이상의 경찰, 헌병, 헌병보, 중추원 참의, 도회 의원 등은 피선거권을 박탈하였으며 8장 57조로 구성된 동 선거법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투표 준비는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인적 조직만 하더라도 각급 선거위원회에 몇 만 명이 동원되어야 했다. 1947년 11월 중선위에서 작성했던 선거법 시행세칙에는 9도 1특별시, 15개 시-부, 134개 군-도(島), 428개 읍-면의 6천447개 투표구와 투표분구 선거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총 4만5천471명의 위원이 필요하다고 했다.(<조선일보> 1947년 11월 27일)

 

실제로는 특별시-도 단위 선거위원들이 3월 25일까지 위촉되었다. 각도 선거위원회는 11명 위원과 11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되었다.(<경향신문> 1948년 3월 25, 26일) 지방 선거위원의 위촉에 대한 지침은 이에 앞서 3월 19일 국선위 지령 제1호로 각 지방에 발송되었다.

 

“각급 선위에 동일 정당인 3분지1 초과 못한다”

 

국회의원선거법 제4장의 규정에 의하여 각 투표구마다 선거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국회선거위원회는 이 선거위원의 선정에 대하여 각급 선거위원장 각도 지방심리원장, 각도 지사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 제1호를 19일 발송하였다.

 

<선거위원회위원의 추천 또는 보고에 관한 건>

 

국회의원선거법 제4장의 규정에 의하여 각급선거위원을 선임할 때에는 좌의 사항을 준수하기를 지명(指命)함.

 

가. 어느 선거위원회든지 동일정당 소속자는 3분지1을 초과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1. 정당으로 명확히 이름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기타 단체도 차에 준하여 취급할 것.

2.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못하게 되었으나 선거위원회 위원이 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도 군 읍 면 등의 관공리도 선거위원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동일정당 소속자는 3분지1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입법정신에 비추어 관공리의 위원 수가 3분지1을 넘지 못하게 할 것.

 

나. 각급 선거위원회의 위원장 위원 후보위원장 및 후보위원을 추천하거나 임명 보고를 할 때에는 위원의 상세한 이력서를 각기 상급위원회 전부에 1부씩 존치할 수 있는 부수를 첨부할 것. (<경향신문> 1948년 3월 21일)

 

국선위의 총선거 일정표가 3월 28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선거 일정표, 30일부터 본격적 집무”

 

내 5월 9일 실시될 총선거를 앞두고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면밀한 사무일정표를 작성하여 집무하고 있는데 동 일정표에 의하여 선거등록 개시일인 3월 30일부터 선거일인 5월 9일까지의 순서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3월 30일: 선거인등록 개시 / 선거인명부 작성 개시 / 의원후보자등록 개시

* 4월 8일: 선거인등록 마감

* 4월 13일: 선거인명부 작성 완료

* 4월 14일: 선거인명부 종람(縱覽) 개시

* 4월 15일: 의원후보자등록 마감

* 4월 17일: 투표용지에 인쇄할 의원후보자 순위 및 기호 결정 / 투표용지 모형 공시

* 4월 20일: 선거인명부 종람 마감

* 5월 4일까지: 개표의 장소 공고

* 5월 6일까지: 투표 시에 참관할 의원후보자 대리인 신청 접수

* 5월 7일까지: 의원후보자의 사진 제출 마감 / 개표일의 입회인 신청 마감

* 5월 7일: 선거인명부 확정

* 5월 8일: 의원후보자용 게시판 설치

* 5월 9일: 투표

 

도 단위 선거위원회가 3월 25일에야 구성이 완료되었는데 3월 30일 선거인등록을 시작한다니, 등록소 준비는 누가 하고 있었단 말인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선거준비를 일반 행정기관에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겠다. 위에서 본 국선위 지령 제1호 ‘가’조 제2항으로 보아 많은 공무원이 선거위원회에 들어가 선거관리 작업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인등록이 시작되자 단독선거 추진세력은 등록률을 높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원칙적으로 등록 강요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실제 규제는 어려웠다. 민주독립당은 4월 6일 “하지 중장 및 군정청당국에서 선거반대의 자유가 있다고 누차 언명하였음에도 가진 수단으로 등록을 강요함은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민의를 강압 왜곡함으로써 강행되고 있다고 것을 실증하는 것”이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지만(<조선일보> 1948년 4월 7일) 선거 반대자들에게는 등록을 만류할 권한이 없었다. 민주독립당 대표 홍명희의 4월 10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답이 있었다.

 

(문) 일부에서 현 정세 하에서 남북협상을 추진시키는 것은 남조선선거를 반대하여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본다는데 귀 견해 여하?

(답) 남북협상을 추진시키는 인물이 남조선선거를 반대하는 사람은 틀림없으나 선거를 방해하려는 의도는 전연 없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11일)

 

중간파는 선거 시행에 반대하더라도 선거 진행을 방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합법투쟁의 한계였다. 남로당의 지하투쟁은 별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지난 2월의 ‘구국투쟁’ 때 역량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4월 14일 국선위는 유권자의 91.7퍼센트인 805만5798명이 등록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15일. 합계가 맞지 않지만 그대로 옮겨놓았다.) 항쟁 사태가 발발한 제주도의 64.9퍼센트와 경남의 75.3퍼센트 외에 모든 지역이 85퍼센트를 넘었다.

 

서울 769,568(92.3)

경기 1,131,329(95.9)

충북 460,021(96.6)

충남 791,663(90.3)

전북 791,499(86.4)

전남 1,229,200(88.9)

경북 1,210,264(90.6)

경남 1,314,440(75.3)

강원 474,723(96.5)

제주 82,812(64.9)

계 8,055,798(91.7)

 

자유로운 선거 실시의 궁극적 책임은 군정청 아닌 유엔조선위원단에 있었다. 등록기간 중 유엔위원단은 3개 감시단을 구성했는데 그 일정은 이런 것이었다.

 

4월 3일 조위(朝委)에서는 오전 11시부터 전체회의를 열고 선거일자 문제와 현지 선거감시단에 관한 문제를 토의한 결과 각각 다음과 같은 결정을 보았다. 선거일자에 관하여서는 미군당국의 요청에 의하여 1일 연기하여 5월 10일로 확정되었으며 현지감시단의 인원구성과 감시일자는 다음과 같다.

 

제1감시단은 경기도 강원도 및 제주도를 감시하는 동시에 주요위원회의 업무를 겸행하게 되었으며 구성원은 호주대표 잭슨 중국대표 유어만 필리핀대표 루나 프랑스대표 마네 인도대표 바레 및 사무국원 6인이며 감시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5일-서울시 / 4월 6일-개성 / 4월 7일-인천 / 4월 8일-춘천 / 4월 9일-제주도

제주도는 숙소관계로 남자 9인이 파견되리라 한다.

 

제2감시단은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를 감시할 것이며 구성원은 시리아대표 무길 캐나다대표 패터슨 및 사무국원 4인이며 감시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5일-청주 / 4월 6일-대전 / 4월 7일-전주 / 4월 8일-광주

 

제3감시단은 경상남북도를 감시할 것이며 구성원 엘사바도르부대표 린도 프랑스대표 폴봉쿠르 중국부대표 왕공행 및 사무국장 5인이며 감시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5일-6일-대전 / 4월 7일-8일-부산 (...) (<조선일보> 1948년 04월 3일)

 

3개 감시단은 예정대로 움직였다. 유엔위원단이 발표한 공보 제55호를 보면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걱정할 만한 아무것도 감시단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저렇게 번개같이 움직이는 감시단의 눈에 띄려면 무슨 짓을 해야 했을까? 등록 단계에서 유엔위원단의 감시는 실질적으로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공보 55호

 

감시단 제1·제2·제3반은 4월 5일부터 각각 업무를 개시하여 4월 10일에 제1주의 감시를 끝마치었다. 각 반은 등록행동을 감시하였고 자유분위기에 관한 상황을 조사하였다.

 

호주·중국·엘사바도르·프랑스·인도 및 필리핀 대표로써 구성된 제1반은 서울·개성·인천·춘천 및 제주도를 방문하였으며 제주도에서는 3개 투표구 중에서 2개소를 방문하여 선거위원회의 대표들과 면회하였다. 또한 동반은 4월 3일에 시작된 소요사건에 관하여 제주도지사 동 경찰최고책임자 및 미군당국과 회담하였다.

 

캐나다·시리아 대표로 구성된 제2반은 청주·대전·이리·전주·광주 등을 방문하였다.

 

중국·엘살바도르 및 프랑스 대표로 구성된 제3반은 대구와 부산을 방문하였다.

 

제2반과 제3반은 촌락에 있어서의 유권자등록상황을 확인하는 동시에 조-미 당국과의 회담을 통하여 도청, 소재지의 상황을 감시할 목적으로 지방에 여행할 수가 있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5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