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 작업을 마무리짓게 된 것은 생각할수록 다행한 일이다. 구상도 세밀하지 않은 상태로 작업을 시작하며 완주를 확신할 수 없었다. 밀도 높은 3년간의 작업을 건강이 뒷받침해 줄지도 자신이 없었다. 3년 전보다 더 든든한 건강 상태로 연재 종료를 바라보며 많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있다. 해방일기 작업을 통해 다음에 할 일들에 대한 의욕을 많이 일으킬 수 있었다. 지난 연말부터 작업 구상을 떠올리고 구체적 계획을 세워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확실한 계획이 잘 세워지지 않고 있다.
조금은 초조해진 마음으로 되짚어 보니, 욕심이 너무 컸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작업은 "노무현의 대한민국"으로 여러 달째 구상을 다듬고 있다. 생각할수록 좋은 기획방향이다. 내 작업에 관심을 가진 분들 거의 모두가 이 구상을 반가워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업이 내 혼자 마음대로 실행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노무현재단과의 협력관계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을 한 달 전부터 하고 있다.
재단에서 이 작업을 지지해주지 않을 리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작업 진행에는 지지 이상의 협력이 필요하다. 개인의 경우에도 친구 일을 도와줄 마음을 갖고 있으나 형편 때문에 여의치 않을 수가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인 단체라면 그런 형편이 더 쉽게 발생할 수 있다.
마음이 바뀌지만 않는다면 당장의 진행이 조금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좋은 결과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내 나이가 생각된다. 밀도 높은 작업을 앞으로 몇 년이나 계속할 수 있을지 이제 장담하기 어렵다. 현직에 있어도 이제 퇴직할 나이가 아닌가? 욕심을 앞세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에 손대는 짓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어떤 형편에서도 계속할 수 있는 일, 남과 보조 맞출 필요가 없는 일, 꼭 종점을 정해놓지 않고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도 그만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보름 전부터 한 가지 구상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사 열전"이란 가제로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에 나타난 인물들을 뽑아 한 사람을 원고지 20~30매 크기의 에세이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 에세이의 집적 속에 대한민국사에 대한 내 관점을 담아 내는 것이다.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해방일기에 등장한 인물 가운데 읽을 만한 에세이로 담아낼 만한 사람이 한 200명 쯤은 될 것 같다. 해방일기를 좀 짧고 가벼운 읽을거리로 정리해 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내내 해왔는데, 그 목적도 포괄될 것이다. 에세이 200꼭지라면 책으로 네 권은 될 테니 크게 줄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내용이 해방공간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나타난 인물이라 하더라도 그에 관한 서술에는 그 이전과 이후가 모두 들어갈 것이니, 해방공간에 관한 내용은 그 3분의 1 정도로 봐도 될 것 같다.
200꼭지 가량 에세이 집필의 준비가 대개 되어 있고, 실제 집필하는 가운데 해방공간 이후 시기에 대한 공부를 넓혀가면서 새로 떠오르는 인물을 계속 잡아낼 수 있다. 아마 기간 10년 확장에 인물 100명 추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1년에 100꼭지 가량 생산으로 기준을 세우면 꽤 여러 해 작업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일 없이 그 정도 생산 기준이라면 휴가도 꽤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단골 독자들도 꽤 편안하게 내 글을 즐겨줄 수 있을 것 같다.
70세가 되기 전까지 5-6년 정도 이런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면 1987년까지 나타나는 인물을 대개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그 무렵 이후 나타난 사람들 중에는 아직 활동이 끝나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작업을 계속하기 힘들어질 것 같다. 일단 그 정도를 작업의 목표라면 목표라고 세워놓을 수 있겠다.
그런데 대충 이런 틀을 생각해 보면서도, 그 틀에 신축성이 크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 꼭지수가 600꼭지쯤 될까, 생각은 하지만 그것보다 적어도 괜찮고 많아도 괜찮다. 한 꼭지를 20-30매 크기로 생각하지만 더 짧든 더 길든 상관없다. 1987년보다 더 갈 수도 있고 덜 갈 수도 있다. 내 공부 계속하면서 좋은 읽을거리 만든다는 기본 목표 안에서 세세한 기준에 매일 필요가 별로 없다. '퇴직자'용 프로젝트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으니 생각을 떠올렸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들이 한 눈에 들어와서 참 좋다. 예전 같으면 스스로 게으름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먼저 들 텐데, 지금은 기력이 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서 좋고, 그만한 의욕이라도 일으키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덕분에 주제를 파악하니까 작업 구상을 좀 유연한 쪽으로 돌려볼 생각도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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