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16. 12:56

분단건국의 길이 뚜렷해져 가고 있는데...

 

 

‘정통성’ 주장으로 맞서는 남한과 북한

 

남한과 북한은 1948년 8-9월 분단건국 이후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괴뢰’로 규정했다. 자기네가 올바른 정부고 상대방은 일개 반역집단일 뿐이니 상대방을 쳐부수고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91년 가을 유엔 동시가입으로 공식적인 정통성 논쟁은 무대를 내려왔지만, 장외에서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쪽 주장이 옳으냐에 앞서 이 ‘정통성’이란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봐야겠다. 영어에서는 ‘legitimacy’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말이 실제 쓰이는 것을 보면 ‘정통성’보다는 ‘정당성’의 뜻에 더 가깝다. 안으로는 국민에게 국가 노릇을 제대로 해주느냐, 밖으로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이 ‘legitimacy’의 기준이다.

 

서양에서도 이 말이 ‘정통성’에 가까운 뜻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 군주제에서 혈통에 따라 계승자를 정할 때 ‘legitimacy’를 따진 것은 ‘정통성’의 뜻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념적인 정통성보다 기능적인 정당성이 국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전통적인 정통성 개념이 가장 늦게까지 문제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프랑스였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1940년 6월 독일군에게 항복하고 독일이 패퇴할 때까지 그 통제를 받았다.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프랑스는 비시로 수도를 옮긴 국내의 정부를 괴뢰로 규정하고 망명정부를 선포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이 망명정부를 승인했지만,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프랑스 국내의 정부가 정상적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이므로 자유프랑스는 일개 항쟁단체일 뿐이라며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5년 봄 루스벨트가 죽고 뒤를 이은 트루먼이 자유프랑스를 승인했다. 그래서 프랑스가 패전국이 아닌 연합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legitimacy’가 이념적 의미보다 기능적 의미로 굳어지는 데 이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기능적 의미의 정당성은 실적을 통해 평가받는다. 아직 실적이 쌓이지 않은 건국단계에서 다툼의 대상은 정통성이다. 건국 방법이 올바른 것이라 하여 정통성이 인정되면 국민의 신뢰와 협조를 얻기 위한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런데 건국 방법의 올바름을 판별하는 데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남한과 북한이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의 정통성을 부정한 일차적 이유가 이 기준의 차이에 있다.

 

 

‘유엔 승인’에 의지해 온 대한민국의 정통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큰 근거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유엔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국호를 그대로 쓰고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계승을 표시하는 등 임시정부의 법통을 겉으로 강조하는 데 비해 그 실질적 의미는 크지 않다. 임정 요인들이 대한민국 건국과 운영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다. 주석 김구는 분단건국에 반대하다가 건국 주도세력에게 암살당했고, 임시정부를 대표해 부통령을 맡은 이시영은 분노와 좌절 속에 사임하기에 이른다. 부주석 김규식을 비롯한 다수 임정 요인은 전쟁 발발 때 정부의 버림을 받고 북한군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갔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주장을 임시정부의 법통보다 더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 것이 유엔 승인이었다.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의 독립 승인안이 유엔총회에서 찬성 48, 반대 6, 기권 1로 가결된 것이다. 이 승인안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에 대해 교화적인 지배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이며, 한국에서 유엔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지역 선거인의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에 의한 선거로 수립된 유일한 정부”로 인정했다.

 

전통시대 한국의 왕조는 중국 황제의 승인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았다. 천명을 받은 중국 황제가 제후로 승인함으로써 천명의 일부를 나눠주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유엔총회의 이 결정을 마치 중국 황제의 조선 국왕 승인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국민에게 선전했다.

 

그런데 20세기 중엽의 유엔은 전통시대 중국 황제와 성격이 다른 존재였다. 천명을 대표하던 이념적 구심점으로서의 중국 황제와 달리 유엔은 국제관계의 조정을 기능으로 하는 실용적 기구였다.

 

1948년 12월의 총회 결정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규정했다고 남한 정부가 국민들에게 주장했지만, 실제 그 결정의 내용은 그 시점까지 유엔이 인정하는 방법으로 수립된 것이 확인된 유일한 정부라는 것이었다. 북한까지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라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 유엔이 인정하는 방법으로 수립되는 또 하나의 정부를 승인할 길을 없애는 결정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도 1991년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엔이 독립국으로 인정했다면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이 마땅하다. 유엔의 승인이라면 회원 가입이 진정한 승인이다. 그런데 남한은 1991년에야 북한과 함께 유엔 회원국이 된다. 그때까지는 남한, 북한 어느 쪽도 회원국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안보리 아닌 총회에서 승인이 이뤄진 이유

 

한국을 승인했다는 유엔 결정이 총회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회원 가입은 안보리를 거쳐야 한다. 유엔의 첫 번째 목표가 세계평화 유지에 있는데, 국가 수립은 세계평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승인받을 조건을 갖춘 국가가 승인을 못 받거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국가가 승인받는 일이 있다면 전쟁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래서 회원 가입은 안보리를 거쳐야만 한다. 1948년 남한 건국이 안보리를 거치지 않고 총회 승인을 받은 것은 변칙적인 일이었다.

 

왜 이런 변칙적인 일이 일어났는가? 갓 설립된 유엔의 운영방법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소 대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미국은 총회에서 거의 어떤 의안에 대해서도 유리한 결정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안보리에서는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거부권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1947년 봄 그리스 사태 이후 안보리 소관이어야 할 일을 총회로 바로 가져가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었다.

 

어릴 때 소련의 거부권이 부당하고 무도한 것이라고 배우며 거부권 제도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강대국 하나가 유엔의 결정을 가로막을 수 있다니, 비민주적인 제도 아닌가? 어째서 세계 최고의 정치기구인 유엔이 그런 비민주적 제도를 쓸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해하게 되었다. 유엔은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서가 아니라 현실의 기준에 맞춰 운영되는 기구라는 사실을. 인구 몇 십만의 나라들이 인구 몇 억의 나라들과 같은 한 표씩 가지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맞는가? 아니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온갖 형태의 국가들을 모두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인 조직의 길이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의 정말 중요한 일들은 중요한 나라들로 구성되는 안보리에서 다루고 총회는 이것을 추인하는 형식적 역할을 맡는 것이 유엔의 실상이다. 안보리에서 특히 중요한 나라들은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가지는 것도 현실적 기준에서 필요한 일이다. 주요 강대국 하나라도 원치 않는 방침을 채택한다면 불안을 없앨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에서는 거부권의 존재가 바람직하다. 만장일치를 이루지 못한다면 국제기구가 개입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면 분쟁이 국지적 규모에 그친다. 완전한 합의가 되지 않은 채로 국제기구가 개입하면 오히려 분쟁이 확대되기 쉽다. 제2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연맹에서는 군사적 결정에 관해 (분쟁 당사국을 제외한) 모든 회원국에 거부권을 주기도 했다.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 어떤 국가가 들어서느냐 하는 것은 대전 후 세계평화를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이런 전후처리 과제는 아직 유엔이 궤도에 오르기 전에 연합국의 합의를 통해 방침이 정해졌다. 한국 문제도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연합국 외상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처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세계적 미-소 대립이 심화된 끝에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러 나선 것이다.

 

유엔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면 당연히 안보리에서 논의해서 적어도 5대 강국은 모두 동의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1947년 가을, 미국은 안보리가 아닌 총회에 한국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1948년 12월에 이르기까지 안보리를 배제한 유엔의 한국 개입은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진 것이었고, 전쟁의 위험을 만들어낸 조치였다.

 

 

극좌도 극우도 분단건국을 원했다.

 

미소공위도 배제하고 안보리마저 회피하며 수적 우세를 자신할 수 있는 유엔총회로 조선 문제를 가져간 것은 미국이 소련의 동의 없이 한국의 정부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일방적 조치는 분단건국과 내전의 위험을 품은 것이었다. 이 위험에 대해 조선의 정치세력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민족국가 건설을 바라는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분단건국을 반대했다. 그런데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이 있었다. 친일파였다. 제대로 된 민족국가가 세워지면 처단의 대상이 되거나 적어도 특권을 내놓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한민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모여 겉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1947년 봄부터 미-소 대립이 뚜렷해지자 정부 수립을 서두르고 나섰다. 일단 이남에서라도 국가를 세워놓은 다음 이북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 주장이었는데, 분단건국과 내전을 말만 그럴싸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들 친일파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이 형성되었다. ‘반탁’을 내걸고 미소공동위원회 반대투쟁을 해온 그들은 미국이 드디어 미소공동위원회를 버리고 유엔으로 가자, 분단건국의 마지막 수순에 접어들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정부 수립안이 43대 0(기권 6)으로 가결됨으로써 유엔의 한국문제 개입이 시작되었다. 명목상 ‘남북총선거’를 규정했지만, 소련이 이북 지역을 점령한 상태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이 상태에서 이남 지역에서 먼저 선거를 시행하도록 군정청을 재촉했다. 선거 감시를 위한 유엔위원단이 오기 전에 최대한 기정사실로 만들어놓으려는 속셈이었다.

 

이 분단건국 추진세력을 종래 ‘반공’이나 ‘극우’로 표현해 왔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그들의 정치적 동기는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있었다. 이 세력의 주축이 된 친일파집단은 해방 전에 확보해 놓은 기득권을 지키고, 나아가 미국의 비호 아래 더 키워나가려는 속셈이었다. 이승만 등 기회주의적 정상배들이 그들과 손을 잡았다. ‘반공’은 핑계일 뿐이었다.

 

좌파에서 중간파까지 다른 모든 정파들이 분단건국의 획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좌파와 중간파가 바라보는 방향에 차이가 있었다. 좌파에게는 분단건국이 이뤄질 경우 이북에 ‘혁명기지’를 세워 극우파의 ‘반공통일’에 ‘국토완정’으로 맞선다는 복안이 있었다. 그래서 분단건국의 책임을 미국과 극우파에게 씌우면서 실제로는 분단건국의 결과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순수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중간파에게는 그런 대안이 없었다. 중간파에게는 좌우합작을 통한 분단건국 저지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좌파와 중간파를 맺어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여운형이 1947년 7월에 암살당했다. 분단건국 추진의 본격화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암살당했다는 사실에서 분단건국 추진세력이 그를 암살한 동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구

 

중도 좌익의 영수 여운형이 사라지자 중도 우익 성향 중간파의 분단건국 저지세력 형성 노력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막강한 공권력과 자금(테러자금 포함)을 장악한 극우파의 반공 공세에 위축된 중간파는 1947년 연말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면서도 좌익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 대신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이 분단건국 저지 노력에 참여할 기색을 보임에 따라 ‘좌우합작’ 아닌 ‘우익연합’으로 중간파의 노선이 돌아서게 된다.

 

김구는 이승만, 한민당 등 분단건국 추진세력과 반탁운동을 함께했다. 그런데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에 이르고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뚜렷해지자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민족주의 입장을 초지일관 지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달리 보면 분단건국 방안이 구체화함에 따라 ‘임정 봉대(奉戴)’ 주장이 분단건국 추진세력 내에서 외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47년 가을 중 김구의 행보 중에는 그가 민족주의 이념보다 전략적 득실에 따라 분단건국에 대한 입장을 선택했다고 보는 후자의 의심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다. 한독당의 2인자였던 조소앙이 10월 이후 중도파와 손잡고 각정당협의회 활동에 나선 것은 김구의 양해 아래 조소앙 자신의 소신에 따라 설정한 노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11월말 김구가 이승만과 ‘빅딜’을 성사시키고 태도를 표변함에 따라 사정이 달라졌다. 각정당협의회에 대표로 나섰던 사람들이 한독당에서 제명당하고 조소앙은 은퇴를 선언했다.

 

12월 들어 김구가 태도를 바꾸자 중간파는 한독당과의 우익연합 가능성을 바라보는 동안 보류하고 있던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나섰다. 1946년 7월 이래 중간파 활동의 보루 노릇을 해온 좌우합작위원회가 12월 15일 해체되고 12월 20일 민족자주연맹이 출범했다. 민족자주연맹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사회를 아울러 배격하고 “조선의 현실이 지시하는 조선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건립”을 지향한다고 표방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정치단체 대표자회의 개최를 제창했다.

 

그런데 김구가 이승만과의 재결합을 공표하던 바로 그 시점, 12월 2일에 장덕수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한민당의 책사로 알려진 장덕수의 위치로 보아 김구에게 의심이 돌아갔다. 장덕수를 무척 예뻐하던 군정청 지도부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강한 압력을 김구에게 쏟기 시작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11월말 빅딜은 김구의 국민의회와 이승만의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합함으로써 김구의 조직 기반을 넓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군정청의 탄압 때문에 이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도착이 임박한 1947년 연말, 극우세력은 분단건국 추진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평양의 집권세력은 겉으로 분단건국에 반대하면서 속으로는 독자적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평양에 의존하는 입장에 가 있었고, 걸출한 지도자를 잃은 중도 좌익은 행방을 잃고 있었다. 극우세력 중 민족주의를 앞세우던 김구의 한독당은 이해득실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중도 우익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는 중간파의 민족자주연맹만이 분단건국에 확고히 반대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