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대도시 휴스턴에서 바다로 나가면 멕시코만을 가로막는 긴 사주(沙洲) 섬이 있고 이 섬 위에 텍사스 최고의 휴양도시 갤베스턴이 있다. 갤베스턴의 자랑거리는 50㎞나 뻗어 있는 백사장과 19세기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듬뿍 풍기는 옛 시가지다.

 

백년 전에는 갤베스턴이 텍사스의 관문이자 최고의 도시였다. 휴스턴에는 철도가 놓이면서 겨우 도시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데 1900년 9월 어느 날, 한 차례 폭풍이 두 도시의 위치를 뒤집어 놓았다. 뉴욕타임스 과학부장 코넬리아 딘의 <파도에 맞서>는 갤베스턴 당시 인구의 20%를 하룻밤에 희생시킨 이 폭풍 이야기로 시작해 바다와 육지의 관계, 그리고 그 틈에 끼어들려는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현대판 '시시푸스 신화' 를 펼쳐보인다.

 

최고지점이 해발 3미터인 이 모래섬은 애당초 도시를 세울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편리한 위치 때문에 도시는 생겨났고 번성했다. 그러다 60년만의 큰 폭풍이 닥치자 온 도시가 파도에 휩쓸려 풍비박산 났다. 건물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6천명 이상이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잃었다.

 

폭풍이 지난 뒤 갤베스턴 시민들은 도시의 복구를 결정했다. 복구된 도시를 장차의 폭풍에서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가 벌어졌다. 토목공사의 핵심은 5미터 높이에 5㎞길이의 방파제였다. 방파제 뒤의 도시는 그 높이 이상으로 매립되고, 폭풍에 살아남은 건물들은 잭으로 들어올려 새 지면 위에 올려놓든지, 부수든지 건물주의 처분에 맡겨졌다. 2천여채의 건물이 2~3미터씩 공중으로 올라가고 그 밑에 기초가 채워졌다. 갤베스턴의 고풍스런 시가지는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다.

 

갤베스턴이 그 후 백 년간의 폭풍을 견뎌낸 것을 보면 이 공사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도시의 발전은 거기서 그쳐버렸다. 그리고 도시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방파제가 오히려 도시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방파제 밖의 모래가 계속해서 바다로 쓸려나가기 때문이다.

 

폭풍의 거센 파도는 해변의 모래를 물속으로 쓸고 간다. 모래밭 뒤의 모래언덕 일부가 무너지며 모래를 보태주기도 한다. 모래는 물속에서 모래톱이 되어 파도의 힘을 줄여준다. 폭풍이 지나간 뒤 모래는 오랜 시간에 걸쳐 해변으로, 그리고 모래언덕으로 돌아간다. 모래의 순환을 통해 해변이 폭풍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자연의 원리다.

 

모래밭과 모래언덕 사이에 들어선 방파제가 이 순환의 통로를 틀어막자 한 번 쓸려간 모래는 돌아오지 않게 되고 몇 년 안 가 방파제의 바닥이 물결 앞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는 방파제를 보호하기 위해 모래를 끝없이 퍼다붓고 추가공사를 거듭하지만 방파제 밖의 모래밭은 옛모습을 잃었다. 바다와 해변이 교섭하는 자연의 기능도 함께 사라진 것은 물론이다.

 

갤베스턴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산업사회 어디서나 해변의 호텔과 식당은 장사가 잘된다. 사람들은 자꾸 밀려들고 시설은 늘어난다. 이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해변에서의 향락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방파제를 만드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나서 시간이 갈수록 백사장이 줄어드는 것 역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모래 '사(沙 또는 砂)' 자를 물수변과 돌석변 양쪽으로 쓰는 것은 물의 성질과 돌의 성질을 함께 가졌기 때문이다. 해변의 백사장은 비록 육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다의 일부이기도 하다. 자연의 원리에 순응해 살던 옛사람들은 사상누각(沙上樓閣) 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토목건축기술을 발전시킨 오만한 현대인은 모래밭을 육지처럼 지배하려 해 왔다. 그러나 바다의 꾸준한 힘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이제 깨닫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1999. 7. 15

Posted by 문천

 

가난한 집에 시집가 집안을 일으킨 며느리 이야기는 여러가지 있다. 그중 어느 며느리는 식구들의 나들이 때마다 검불 한 오라기든 돌멩이 하나든 뭔가를 들고 들어오도록 규칙을 정했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물자(物資)를 활용해 집안을 부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옛날얘기 시대가 아니라 30년 전을 생각해도 물자를 대하는 우리 태도는 무척 많이 변했다. 그 시절에는 헝겊조각 하나, 나무토막 하나라도 언젠가는 쓸모있을 때가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들 모아뒀다. 쓸모가 있을지 모르는 물건을 버린다는 것은 죄악으로 생각했다. 배설물까지도 그랬다. 대도시 중심가로 '똥차' 가 다니며 오물을 모아 근교 농촌에 팔았다.

 

그런데 지금은 농촌까지 수세식변기가 보급돼 예전엔 값진 비료로 쓰이던 오물이 환경의 부담만 되고 있다. 음식찌꺼기도 마찬가지다. 상태가 괜찮으면 거지에게 주기도 하고 좀 못하면 사료로 쓰고 영 못쓰게 된 것은 두엄에 넣곤 하던 음식찌꺼기가 지금은 도시의 애물단지 정도가 아니라 재앙이 되고 있다.

 

수전 스트라서의 <쓰레기 사회사>는 물자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가 두 세기 동안 변해 온 자취를 더듬은 책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먼저 '풍요의 나라' 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모으면 자원' 이던 것이 '버리면 쓰레기' 로 변했다. 미국이 1차대전 후에 겪은 이 변화를 다른 나라들은 2차대전 후 뒤쫓아 겪기 시작했고, 그 대열의 뒤쪽 저만큼에 우리나라도 끼어 있다.

 

'모으기 시대' 에서 '버리기 시대' 로 넘어가는 변화의 상징물로 스트라서는 생리대를 꼽는다. 킴벌리클라크사가 1920년 최초의 상품화된 생리대 '코텍스' 를 출시한 것은 1차대전 군수물자에서 재고로 남은 붕대를 소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전에는 누구나 못쓰게 된 무명옷을 잘라 생리대를 만들었고, 생리대에 새 무명을 쓰는 것은 낭비로 죄악시됐다. 그런데 코텍스는 새로 보급된 세균학 지식에 기대 '위생냅킨' 이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죄의식을 타고넘었다. '위생' 은 새로 열리는 공장제품시대의 강력한 구호였다. 1921년부터 2년간 미국 가정의 욕조 수가 곱절로 늘어난 사실도 스트라서는 지적한다.

 

자연에 대한 문명의 승리를 믿는 마음이 절정에 달해 있던 시절이었다. 질병을 비롯한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은 문명인의 기본권으로 여겨졌고 과학, 기술, 공장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가로막아주는 믿음직한 호위대 노릇을 했다.

 

중산층의 향상심도 이 변화에 힘을 보탰다. 똑같은 공장제품을 쓰는 품목이 늘어남에 따라 상류층과 중산층 사이의 경계선은 전보다 흐려졌다. 편리한 가전제품의 보급은 하인을 두고 사는 상류층의 특권도 빛을 바래게 했다.

 

스트라서는 변화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당시의 광고문을 많이 활용한다. "당신의 토스트를 구워줄 하인, 월급도 필요없고 부리기도 쉽습니다" 같은 전형적인 예에서 당시 중산층이 느끼던 신분상승의 쾌감을 살필 수 있다.

 

광고문과 함께 스트라서가 많이 활용한 자료는 가정잡지 기사들이다. '생활의 지혜' 를 전파하는 기사들은 물자를 둘러싼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물자의 가내재활용방법을 가르쳐주던 기사들이 1880년대부터 잉여물자를 모아 재활용공장에 파는 방향으로 바뀌고, 1930년대부터는 싸고 실속있는 상품선택으로 '알뜰주부' 의 길을 열어준다. 음식찌꺼기로 집안에서 가축을 키우던 단계로부터 모아서 소규모 비누공장이나 돼지 사육장에 파는 단계를 거쳐 찌꺼기분쇄기를 사 쓰레기수거비를 절약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세태변화가 이 기사들에 비쳐지는 것이다.

 

대량생산체제와 상품경제의 발달은 현대인의 생산활동과 소비활동을 격리시켜 왔다. 이에 따라 쓰레기는 쓰레기고 자원은 자원일 뿐, 소비의 여분이 생산의 원료로 돌아가는 물자의 리사이클링은 구조적으로 봉쇄돼 온 것이다.

 

천연자원의 채취를 가속적으로 늘어나게 만드는 이 구조적 문제를 언제까지 지탱해 나갈 수 있을지, 현대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심각한 질문의 하나다. 1999. 10. 7

 

Posted by 문천

 

<언어의 폭력(Giving offense)>을 쓴 코에체는 경찰국가로 악명 높던 남아프리카의 대표적 저항 작가. 그가 검열에 관한 책을 썼다면 검열을 통한 공권력의 남용에 초점을 맞출 것을 누구나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투사의 단순한 승전기록이 아니다. 검열의 현상보다 검열의 원리를 논한, 승리감보다 고민을 담은 문명비평이다.

 

따라서 코에체가 주목하는 것은 검열관의 횡포가 아니라 검열제도 자체의 파괴성이다. 정당한 언론이 탄압받는 사실보다 검열의 메커니즘 속에서 작가의 정신이 일그러지는 것을 그는 더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로 본다. 스탈리니즘의 박해를 받은 두 명의 러시아 작가를 논하는 대목에서 그의 관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시프 만델스탐은 권력에 굴복한 경우다 .스탈린을 비방한 혐의로 1934년 시베리아에 유형된 만델스탐은 2년 후 스탈린 찬가를 지었지만 석방되지 못한 채 1938년에 죽었다. 반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30년간의 핍박 속에 저항의 자세를 지키다가 74년 영광스러운 추방을 맞았다.

 

코에체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검열제도의 피해자다. 그중에도 오히려 패배자로 보이는 만델스탐 쪽이 스탈린 찬가를 지으면서도 시적(詩的) 자기소외를 통해 작가정신을 지킨 반면 승리자 솔제니친은 투쟁 과정에서 적의 독단을 닮아 버려 ‘또 하나의 스탈린’이 됐다고 승패의 통념을 뒤집어 놓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상태에서 검열의 폐해는 한계가 있지만 검열의 정신이 사회 속에 녹아들어 작가 자신이 스스로의 검열관이 되는'상황에서 검열의 파괴성은 극한에 이른다고 코에체는 진단한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표현을 조정하는 작가의 노력이 장기간 축적되는 동안 그 창조성과 문제의식이 침식과 왜곡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검열은 완화되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 세계화의 추세 속에 음란한 광고와 영상매체가 쏟아져 나오고 검열이 완화된 틈을 타 인쇄매체에도 음란물이 늘어나고 있다. 정치적 검열에 반대해 온 많은 지식인들은 음란물의 범람에 직면해 최소한 도덕적 검열에는 수긍하는 태도로 돌아서고 있다.

 

그러나 코에체는 이런 손쉬운 흑백론을 배척한다. 체제에서 일탈하는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 어느 영역에서나 검열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같은 검열관들이 같은 원리에 따라 검열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발전을 위해 정치적 검열이 제한 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발전을 위해 도덕적 검열에도 제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색정적(erotic)문화현상 가운데 외설물(obscenity)과 포르노그라피를 구분해서 본다. 외설물은 사회의 도덕감각을 도발함으로써 그 반동력을 상품화하는 주변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도덕적 판단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반면 포르노그라피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기존의 터부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위다. 그 예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든다.

 

그러나 시장에 나온 포르노그라피는 단순한 외설물로 타락하는 경향을 가진다. 포르노그라피가 정치적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욕망의 충족을 약속해 주기만 해야지 욕망을 충족시키려 나서서는 안 된다고 코에체는 선을 긋는다.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것은 욕망의 성장이지 욕망의 소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코에체는 검열을 하나의 필요악으로 여긴다. 다만 검열의 기준이 일방적인 독단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이해집단의 관계를 절충하는 입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자신이 검열의 피해자이면서 80년대에 남아프리카 검열위원장을 맡아 상대론적 검열 기준을 도입한 형법학자 반 로옌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검열이 문제가 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로 정보유통이 대형화한 데 따른 일이다. 16세기 초 종교개혁 때 금서(禁書)문제가 크게 드러난 것은 그 몇 십 년 전 구텐베르크의 발명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서양보다 인쇄술이 앞서 발달한 동아시아에서는 검열문제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래 수많은 문자의 옥(文字之獄)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검열의 지혜도 오래 쌓여왔다고 할 수 있을까? 1791년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정약용 등 남인을 규탄하는 상소가 빗발칠 때 정조는 “사학이 창궐한다면 이는 정학(正學)의 침체 때문이니 그대들은 사학의 규탄보다 정학의 진흥에 힘을 쓰라”며 물리쳤다 한다. 물리적 규제가 어려워질 컴퓨터통신 시대를 내다보는 정보혁명의 길목에서 새삼 떠오르는 대목이다. 1996. 12. 24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