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쿠바와 필리핀에 진출하면서 미국은 유럽국가들이 독차지해 온 제국주의 무대에 한 단역을 맡았다. 독립 백여년만에 처음으로 본토를 벗어나 세계를 횡행하는 열강의 하나가 된 것이다.

 

백년이 지난 오늘 미국은 세계경찰을 자임하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고 있다. 미국세력의 성장은 20세기 세계사 전개의 중심축이다. 변두리 신흥열강으로 세기를 시작한 미국은 1차대전을 통해 일류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2차대전을 통해서는 최강대국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50년의 냉전을 통해서는 유일한 슈퍼파워의 자리에 와 있다.

 

'인류 역사상 최강국' 이란 평가까지 받는 미국이 코소보에서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는 것은 자기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혼자서만 힘을 독점한 역사상 초유의 상황에 와 있으니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어떻게 세울지 역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힘과 도덕성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두 측면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건국 당시부터 이 두 측면을 자랑스럽게 여겨 왔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광대한 신대륙은 힘의 잠재적 원천이었으며,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조직은 도덕적 우월감의 근거가 되었다.

 

20세기 국제무대에서 거둔 승리와 성공도 모두 이 두 가지 조건 덕분이라고 미국인들은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막상 정책의 선택에 있어 두 조건 중 어느쪽을 중시하느냐가 긴요한 문제가 된다.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투철하게 추구함으로써 전세계의 모범이 되자는 도덕주의와 국익을 앞세워 더욱더 힘을 키움으로써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계를 바꿔나가자는 현실주의는 20세기 내내 미국의 정책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계속했다.

 

뉴욕대 역사학 교수 도널드 화이트는 도덕주의와 현실주의가 엇갈리는 모습을 통해 20세기 미국정치사를 조감한다. 2차대전 이전에는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되는 도덕주의가 정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2차대전 후 냉전상황에서는 현실주의가 정치의 주류가 되고 도덕주의는 비판세력의 몫이 되었다. 카터의 짧은 집권기가 예외라면 예외다.

 

냉전기를 지배한 현실주의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로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소련문제 전문가였던 조지 케넌을 화이트는 꼽는다. 케넌이 1946년 모스크바에서 전보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는 소련의 국가적 속성을 꿰뚫어보고 미국의 냉전체제 기조를 세운 역사적 문서로 평가된다. 도덕주의에 입각한 국제정책은 그 비현실성 때문에 역효과를 내기 쉬우며 현실적 역학관계만이 국제정책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케넌은 주장했다.

 

케넌의 관점이 널리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의 존재 덕분이다. 소련이 사라진 이제 미국은 다시 도덕성과 힘 사이의 저울질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화이트는 90년대의 상황을 설명한다. 20세기를 통해 싸워 온 적들 - 빈곤,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모두 물리친 미국에는 더 이상 적이 없다는 허탈감이 오히려 최대의 적일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미국정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도덕성으로 쏠리고 있는 지금 개인적으로 도덕적 파산상태의 대통령이 이라크 공습과 코소보 개입을 지휘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사실이다. 50년간 맹목적으로 힘만을 추구해 온 결과 힘의 경쟁을 벗어나 버린 미국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는 대신 누구의 믿음도 받지 못하는 나라가 되고 있다. 인간의 자연상태라 할 '힘의 균형' 을 깨뜨려버린 죄 때문일까. 1999. 4. 1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