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8. 12:38

 

2009년 <역사 앞에서> 증보판이 나온 뒤 창비사에 들르는 일이 없게 됐다. 고세현 선생이 대표를 맡고 있을 때는 출판도시 가는 길에 더러 얼굴 보러 들르기도 했었는데...

 

그런 중에 한 가지 마음속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역사 앞에서> 인세 지불이 없는 것이다.

 

2002년 초였던가, 아버지 50주기를 막 지났을 때 창비에서 연락이 왔었다. 저자 사후 50년이 지나면 저작권법상 판권이 소멸하게 되어 있으나 창비사에서는 <역사 앞에서> 인세 지급을 계속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것이다.

 

고맙다고 응답했다. 법적으로 어떻든 보내준다면 어머니를 위해 잘 쓰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후에 인세를 받지 못했지만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온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매출이 별로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보판 나온 후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따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지냈다. 고 선생이 대표로 계속 있었다면 언제든 들러서 방침이 바뀐 건지 스스럼없이 물어봤을 텐데.

 

그러다가 며칠 전 창비사에서 편지가 왔는데, 600부 더 찍었다며 인세 지급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에 적힌 통장번호가... 10년 너머 쓰지 않고 있는 XX은행 통장이었다. 어제 그 은행에 들러 통장 재발급을 받아 보니... 일곱 자리 금액이 쌓여 있었다.

 

착실히 보내 준 인세를 몰아 받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인세 지급 방침을 일방적으로 바꾸고 알려주지도 않는 게 아닌가 의심했던 일이. 그러면서 이걸 계속 받아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12년 전에는 어머니를 위해 쓴다고 마음속으로도 이유를 댔던 건데, 이제 어머니도 안 계신 걸...

 

잠깐 생각하는 시늉만 하다가 그냥 받아먹기로 마음을 정해버렸다. 법률 관계는 잘 모르지만, 사후 50년으로 판권을 제한한 저작권법의 취지에 비춰 보더라도 사후 40년이 지나 발행된 글이라면 발행 시점부터 보호 기간을 적용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책 인세 수입이 시원찮은 판에 아버지 책 아니라 할아버지 책이라도 인세가 들어온다면 마다할 주제인가!

 

하지만 만약 창비사에서 인세 지급을 중단하기로 언제고 결정한다면 다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비사에서 '법 없이' 살 길을 열어줬는데, 내가 '법대로' 하자고 달려들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마음속으로 의아하면서도 그 동안 건드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법 없이 상대할 수 있는 회사의 존재가 참 고맙다.

 

모처럼 조상 음덕이 통장에 나타나니 마음이 느긋하다. 해밑에 가까운 친구들 불러 고기나 한 번 구워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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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