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폭력(Giving offense)>을 쓴 코에체는 경찰국가로 악명 높던 남아프리카의 대표적 저항 작가. 그가 검열에 관한 책을 썼다면 검열을 통한 공권력의 남용에 초점을 맞출 것을 누구나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투사의 단순한 승전기록이 아니다. 검열의 현상보다 검열의 원리를 논한, 승리감보다 고민을 담은 문명비평이다.

 

따라서 코에체가 주목하는 것은 검열관의 횡포가 아니라 검열제도 자체의 파괴성이다. 정당한 언론이 탄압받는 사실보다 검열의 메커니즘 속에서 작가의 정신이 일그러지는 것을 그는 더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로 본다. 스탈리니즘의 박해를 받은 두 명의 러시아 작가를 논하는 대목에서 그의 관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시프 만델스탐은 권력에 굴복한 경우다 .스탈린을 비방한 혐의로 1934년 시베리아에 유형된 만델스탐은 2년 후 스탈린 찬가를 지었지만 석방되지 못한 채 1938년에 죽었다. 반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30년간의 핍박 속에 저항의 자세를 지키다가 74년 영광스러운 추방을 맞았다.

 

코에체의 눈에는 두 사람 모두 검열제도의 피해자다. 그중에도 오히려 패배자로 보이는 만델스탐 쪽이 스탈린 찬가를 지으면서도 시적(詩的) 자기소외를 통해 작가정신을 지킨 반면 승리자 솔제니친은 투쟁 과정에서 적의 독단을 닮아 버려 ‘또 하나의 스탈린’이 됐다고 승패의 통념을 뒤집어 놓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이 구분되는 상태에서 검열의 폐해는 한계가 있지만 검열의 정신이 사회 속에 녹아들어 작가 자신이 스스로의 검열관이 되는'상황에서 검열의 파괴성은 극한에 이른다고 코에체는 진단한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표현을 조정하는 작가의 노력이 장기간 축적되는 동안 그 창조성과 문제의식이 침식과 왜곡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검열은 완화되고 있다. 한편 자본주의 세계화의 추세 속에 음란한 광고와 영상매체가 쏟아져 나오고 검열이 완화된 틈을 타 인쇄매체에도 음란물이 늘어나고 있다. 정치적 검열에 반대해 온 많은 지식인들은 음란물의 범람에 직면해 최소한 도덕적 검열에는 수긍하는 태도로 돌아서고 있다.

 

그러나 코에체는 이런 손쉬운 흑백론을 배척한다. 체제에서 일탈하는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 어느 영역에서나 검열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같은 검열관들이 같은 원리에 따라 검열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발전을 위해 정치적 검열이 제한 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발전을 위해 도덕적 검열에도 제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색정적(erotic)문화현상 가운데 외설물(obscenity)과 포르노그라피를 구분해서 본다. 외설물은 사회의 도덕감각을 도발함으로써 그 반동력을 상품화하는 주변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도덕적 판단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반면 포르노그라피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기존의 터부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위다. 그 예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든다.

 

그러나 시장에 나온 포르노그라피는 단순한 외설물로 타락하는 경향을 가진다. 포르노그라피가 정치적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욕망의 충족을 약속해 주기만 해야지 욕망을 충족시키려 나서서는 안 된다고 코에체는 선을 긋는다.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것은 욕망의 성장이지 욕망의 소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코에체는 검열을 하나의 필요악으로 여긴다. 다만 검열의 기준이 일방적인 독단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이해집단의 관계를 절충하는 입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자신이 검열의 피해자이면서 80년대에 남아프리카 검열위원장을 맡아 상대론적 검열 기준을 도입한 형법학자 반 로옌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검열이 문제가 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로 정보유통이 대형화한 데 따른 일이다. 16세기 초 종교개혁 때 금서(禁書)문제가 크게 드러난 것은 그 몇 십 년 전 구텐베르크의 발명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서양보다 인쇄술이 앞서 발달한 동아시아에서는 검열문제가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래 수많은 문자의 옥(文字之獄)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검열의 지혜도 오래 쌓여왔다고 할 수 있을까? 1791년 서학(西學)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정약용 등 남인을 규탄하는 상소가 빗발칠 때 정조는 “사학이 창궐한다면 이는 정학(正學)의 침체 때문이니 그대들은 사학의 규탄보다 정학의 진흥에 힘을 쓰라”며 물리쳤다 한다. 물리적 규제가 어려워질 컴퓨터통신 시대를 내다보는 정보혁명의 길목에서 새삼 떠오르는 대목이다. 1996. 12. 24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