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까지 유럽의 유대인은 폐쇄적인 게토에 모여 살며 주변의 기독교인 사회와 최소한의 접촉만을 가졌다.인종과 종교의 이질성으로 인한 주변사회의 멸시를 회피하기 위한 자발적 격리였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들어 1천여 년간 지켜온 게토의 울타리를 뚫고 주변사회에 동화하는 유대인이 대거 나타난다. 유럽 기독교사회가 전에 없이 이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인 것은 계몽주의와 평등사상 덕분이었다.

 

동화를 시도한 유대인들은 특히 고급 직종에서 매우 뛰어난 성공률을 보였다. 19세기말까지 금융계, 학계, 의료계, 예술계에 이어 정계에서까지 유대인의 활약상은 인구에 비해 엄청난 비중을 갖게 되었다. 주변사회에는 유대인에 대한 종래의 경멸감에 더해 질투심과 두려움까지 일어나게 되었고,이를 바탕으로 반유대주의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배타적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당시 유럽의 분위기를 드러내 보여준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은 동화 유대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반유대주의는 일시적 현상이며 궁극적으로 동화만이 유대인의 살 길이라 믿어온 테오도어 헤르츨 같은 사람들이 방향을 뒤집어 유대인의 민족정체성을 추구하는 근대 시오니즘 운동을 일으켰다.

 

올해는 시오니즘 출범 1세기, 이스라엘 건국 반세기가 되는 해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관계는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분쟁의 소지로 남아 있다. 이 분쟁의 뿌리, 시오니즘의 본질을 밝힌 책이 제프리 휫크로프트의 <시온동산은 어디에>다.

 

휫크로프트는 영국 스펙테이터 지의 문학 담당 에디터를 지낸 저널리스트로 지금도 뉴욕타임스, 가디언, 월스트리트 저널 지 등에 기고하고 있다. 저자의 관점은 시오니즘의 몇 가지 모순을 지적하는 데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제일 먼저 지적하는 것은 구조의 모순이다. 시오니즘을 앞서 제창하고 이스라엘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공헌한 것은 주변사회에 동화한 서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에 실제 정착하러 간 것은 대부분 중부와 동부 유럽의 게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이었다.

 

두 그룹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시오니즘의 뜻을 갖고 있었다. 해외에서 지원한 유대인들은 각자 살고 있는 나라에 동화해 살면서도 팔레스타인에 자랑스러운 조국이 생기기 바란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 돌아간 유대인들은 자랑스러운 조국보다 힘있는 조국을 만드는 일이 더 급했다.

 

두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다. 시오니즘은 유럽 각국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응하면서 그 배타성을 물려받았다. 발포어선언(1917년) 이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정착지 내지 국가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현지 아랍인 주민의 입장은 식민지의 원주민 정도로밖에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진문명을 전달해 주는 우리를 환영할 것”이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 그대로다.

 

시오니즘 초창기 동화유대인들의 반대가 이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동화를 거부하고 격리를 추구하는 시오니즘의 기본노선이 반유대주의와 똑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실제로 시오니즘 극단주의자들은 유대인의 집단이주를 지지하는 각국 파시스트 정권과 유착관계를 맺기도 했다.

 

세 번째 모순은 상징성의 모순이다. 시오니즘이 유대인사회의 전폭적인 단결을 이루고 외부의 반대를 잠재운 것은 역설적으로 나치의 대학살 덕분이었다.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참상이 시오니즘을 정당화하는 상징이 된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에서 나치범죄의 본질을 '악마성'이 아닌 '비속성'으로 논한  것은 시오니스트들의 극단적인 분노를 샀다. 대학살의 상징성을 손상시킨 때문이다.

 

시오니즘은 20세기의 가장 특이한 민족주의다. 유럽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대응책이면서 오히려 그를 답습한 것이 시오니즘의 모순이다. 민족주의의 숙제를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한 가르침을 주는 타산지석이다. 1997. 1. 28

 

 

Posted by 문천

 

이츠하크 라빈(1922~95)은 예루살렘 출생. 1967년의 7일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으로 명성을 날리고 현지출생자로서는 처음 이스라엘 총리가 됐다. 시오니즘을 지상명제로 받들면서도 점령지역에서의 철군을 주장하는 등 상대방을 인정하는 중도노선으로 노동당을 오랫동안 이끌었다. 1992년 선거에서 '9개월내의 평화'를 공약으로 15년만에 노동당 정권을 재건하고 총리가 됐다.

 

야세르 아라파트(1929~) 역시 예루살렘 출생. 이집트 유학시절부터 민족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해 테러조직 알-파타의 지도자가 된 아라파트는 1969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장에 취임해 20여년간 이 기구를 지도해 왔다.

 

1993년 9월 백악관 정원에서 만난 이 두 사람의 악수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적과의 포옹>을 쓴 메론 벤베니스티는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벤베니스티가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많은 중동문제 전문가들이 놀랐을 것이다. 하버드 출신으로 예루살렘 부시장을 지낸 벤베니스티는 1982년 이래 웨스트뱅크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를 창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냉철한 연구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충격받은 것은 분쟁의 양측이 악수할 만큼 여건이 성숙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충격을 소화하기 위해 상황을 재점검하며 쓴 것이 이 책이다.

 

저자는 이스라엘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분쟁의 한쪽에서 보는 시각이지만 제3자에게도 충분히 참고의 가치가 있는 것은 그가 실용주의의 입장을 엄격하게 지키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니 종교니 하는 배타적 이념에 현혹돼서는 분쟁의 양측이 포용되는 해결의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이 지역의 현실 문제를 직시할 것을 그는 주장한다.

 

그가 밝히고자 하는 현실의 핵심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사회적 측면에 있다. 분쟁당사자들은 양쪽 다 이 문제의 국제적 측면만 부각시키고 싶어했다. 서양문명의 일원을 자임하는 이스라엘 측은 서방국가, 특히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인도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문명국'으로 행세하고 싶다. 가혹행위의 대상인 점령지역 주민을 자국민이 아닌 적국인으로 본다면 변명은 쉽다.

 

한편 아랍 측에서는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명분 때문에 분쟁을 민족간의 대결로 볼 뿐 민권문제를 민권문제로서 제기할 의지가 없다. (잘린 내용 나중에 보충하겠습니다.) 1996. 3. 31

Posted by 문천

 

1.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일 뿐인가?

 

단재 신채호는 20세기 한국 민족주의를 대표한 인물이고 그 사상의 핵심 명제 하나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보는 것이었다. 이 명제는 당시의 시대조건에 의해 세워진 것이었으며, 21세기 상황에서는 그 의미를 새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제국주의시대의 세계적 사조는 역사를 투쟁의 관계로 보는 사회진화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의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끼친 유럽 근대민족주의 역시 유럽의 지역 간 경쟁 상황 속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인간관계의 협력 측면보다 경쟁 측면만을 중시하는 ‘근대적’ 인간관을 배우는 것이 ‘개화’의 목표였던 시대였다.

 

게다가 단재의 시대에는 한민족이 일본을 통하지 않고 외부세계와 교섭하는 길이 극히 좁은 상황이었다. 일본이 실질적으로 ‘비아’의 거의 전부였던 것이다. ‘아’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비아’였으니, 그 사이의 관계는 ‘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1945년 해방을 계기로 ‘신민족주의’ 논의가 일어났다. 연합국의 협력이 승리한 새 세상에서 독립민족 조선인의 민족주의가 식민지시대 민족주의와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신민족주의 논의가 결실을 맺기 전에 분단건국, 전쟁, 독재체제가 진행되면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사라졌다. ‘평화통일’ 수준의 민족주의 논의조차 남한에서 탄압받는 상황이 40년간 계속되었다. ‘관제’ 민족주의만이 정권에게 이용당하는 상황이었다.

 

1987년 남한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회복되었을 때는 ‘민족’의 존재 양식이 40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 변화에 맞춰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도 조정할 필요가 있다. 과연 민족주의라는 것이 앞으로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일 지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2. 한민족 민족국가의 특성

 

근대민족주의만이 민족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남녀평등 신분철폐 등 근대적 조건이 갖춰지기 전에는 ‘민족’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한다. 그렇다면 2차대전 후에야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프랑스에도 그때까지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주장은 민족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를 강역으로 하고 그 주민을 국민으로 하는 단일국가가 10세기에서 19세기까지 존재했다. 이 민족국가의 존재 덕분에 한민족은 다른 곳 주민들에 비해 전쟁에 덜 시달리면서 수준 높은 경제생활과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1천 년간 존재한 이 민족국가가 근대적 기준으로는 완전한 독립국이 아니었다. 중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천하체제’ 속에서 ‘사대-자소’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천하체제 속에서 한민족 민족국가의 존재 양식은 ‘화이부동’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르고 중국의 기술과 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핵심 영역에서 개별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중국문명을 거부한 주변세력은 모두 정복당하고, 무절제하게 받아들인 주변사회가 모두 동화되어 버린 데 비춰보면 독립성을 오래 지키는 길이 화이부동의 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근대화는 정말로 유럽에서 시작된 것인가?

 

근대화의 본질적 의미는 중세체제가 한계에 도달해 새로운 체제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중세체제는 농업사회 단계에서 안정성을 가진 체제였다. 그렇다면 근대체제는 산업사회 단계에서 안정성을 가진 체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안정된 중세체제 아래 생산성이 향상되고 인구가 늘어났다. 그 발전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생산양식과 사회조직 방법에 유동성 증가 등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게 된다. 유동성 증가를 위해 자본이 용매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근대화의 기본 요소가 된다.

 

10-11세기 중국과 12-13세기 중동 지역에서 상당한 수준의 자본주의 발달이 확인되고 있다. 유럽 자본주의가 14세기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중동 교역의 창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 자본주의가 특별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산업혁명의 대량생산체제와 결합하면서부터였다. 이 결합의 부국강병 효과가 19세기 들어와 ‘서세동점’의 태풍을 일으켰다. 비교적 완만한 방식의 근대화 노선을 걷던 중국과 중동 지역 사회는 이 태풍에 휩쓸리게 되었다.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를 지향하는 유럽식 근대화는 자체적 지속가능성이 적은 과격한 노선이다. 이 노선이 지속되는 동안 인류사회는 전례 없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런데도 이 노선이 3백 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모순을 전가할 수 있는 미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21세기 들어와서는 그런 여유가 더 이상 없다.

 

 

4. 유기론적 세계관과 원자론적 세계관

 

유럽식 근대화의 모순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보는 관점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간을 자연에서 격리시키고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객체화한 것이다. 이 관점은 19세기 초 발표되어 1백 년간 사상계를 풍미한 원자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자연에 대한 모든 것을 인간이 파악하고 남김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세상을 휩쓸었다.

 

원자론 관점은 인간사회의 조직방법에도 적용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열강이 중국에게 강요한 만국공법 체제는 국가들의 관계를 원자처럼 독립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보는 것이었다. 국가 간 강약의 차이를 인정하고 유기적 관계를 지향하는 천하체제와 달리 만국공법 체제는 강자의 도덕적 책임과 약자의 보호 필요를 모두 부정하기 때문에 ‘후진’ 사회의 각개격파에 편리했다. 일본이 조선 침략 초기에 ‘조선 독립’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원자론 관점을 적용한 자유주의와 인권사상도 마찬가지로 강자의 지배를 쉽게 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관념상의 평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가려놓음으로써 개인을 파편화시켜 조직적 저항을 가로막은 것이다. 근년의 신자유주의는 그런 의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1973년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과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를 계기로 자원과 환경 문제가 부각되면서 원자론적 세계관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그 후의 노력이 확실한 성과를 바라보지 못하는 가운데 가치관과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탈근대(postmodern)’ 담론이 성행하게 된 것인데, 원자론 관점을 반성하고 유기론 관점을 도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본다.

 

 

5. ‘세계정부’를 향한 정치적 세계화의 필요성

 

인간사회는 접촉이 활발한 범위 내에서 조직화를 진행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국가를 만들어 온 것이고 시장이 대형화되어 온 것이다. 현대의 교통-통신-수송 조건은 전 세계적 조직화를 불러오고 있다.

 

조직화의 목적은 능률과 질서 두 가지다. 시장의 확대는 경제적 능률을 추구한 것이고 국가의 성장은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난 20여 년간 ‘세계화’의 바람에 휩쓸려 있다. 그런데 이 세계화는 시장 확대를 위한 ‘경제적 세계화’일 뿐, 세계 차원의 질서 확립을 위한 ‘정치적 세계화’는 각광받지 못하고 있다.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 원자탄 개발에 책임감을 느낀 아인슈타인이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말한 일이 있다. 인류문명이 자멸을 피하고 존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전 인류를 구성원으로 하고 구성원의 책임과 의무를 규정-보장하는 세계정부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유엔이 만들어지는 데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인식이 작용했다. 유엔 헌장과 조직은 그런 인식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러나 유엔은 만들어지자마자 강대국, 특히 미국의 정략에 이용되면서 현대세계는 무정부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자기네에게 유리하다고 미국이 판단하는 단적인 이유를 에너지 소비량에서 볼 수 있다. 2011년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11.2kw)은 세계 평균(2.1kw)의 다섯 배가 넘었다.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턱없이 높은 자원소비 수준을 어떤 세계정부라도 존재한다면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체제 모순을 전가할 미개발지역과 저개발지역이 있을 때 이런 방종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어 13억 중국인과 11억 인도인이 착취당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미국인과 같은 소비수준을 누리겠다고 나선다면 지구가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다른 무엇보다 소비수준의 통제를 위해서라도 세계정부 수립은 더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되어 있다.

 

 

6. 정치적 세계화에서 전통과 민족주의의 역할

 

앞으로 만들어질 세계정부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근대국가와 크게 다를 것이다. 정치적 세계화를 추구하는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도 ‘세계정부’보다 ‘세계연방’이란 말을 많이 쓴다. 기존 국가주권을 철폐하기보다는 축소-조정하는 길을 생각하는 것이다.

 

저항을 걱정해서 온건한 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국가 형태의 전 세계적 확장은 좋은 효과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정부가 모든 구성원을 개인으로 상대하는 근대국가 형태가 아니라 기존 국가 등 자율성을 가진 집단들이 협력을 통해 운영해 나가는 체제를 구상하는 것이다. 원자론적 원리가 아니라 유기론적 원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중세체제는 농업사회 단계에서 안정성 있는 체제였다. 앞으로 인류가 필요로 하는 세계체제는 산업사회 단계에서 안정성 있는 체제다. 우리가 ‘근대’라고 인식해 온 산업혁명 이후 3백 년은 성숙한 산업사회 시대, 즉 ‘본근대’를 모색하는 과도기, 즉 ‘가근대’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중세체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겪은 전국시대의 혼란이 과도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원자론적 사고방식이 풍미한 시대였다. 농업사회 단계든 산업사회 단계든 안정성 있는 체제는 원자론적 원리보다 유기론적 원리에 치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보편적 원리에 따르지 않고 개별적 관계를 존중하는 중세체제의 유기론적 요소들을 근대인은 흔히 ‘봉건적’인 것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런데 앞으로 유기론적 원리에 따르는 세계체제가 형성된다면 세계 여러 지역의 중세체제가 모두 학습 대상이 될 것이다. 그중에도 동아시아 천하체제가 중요한 교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선발국이 후발국을 침략하는 일이 반복적-중첩적으로 일어났다. 피침략자는 침략자의 부국강병에 압도되어 자신의 전통에 자부심을 잃었고, 침략자는 정복을 쉽게 하기 위해 피침략자의 전통 파괴에 주력했다. 한민족은 19세기 말에 시작해 20세기 내내 그런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제 정치적 세계화의 단계에서는 중세체제 전통의 가치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고, 그중 중요한 전통이 민족국가의 전통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