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남부 작센 주의 빵집 아들 프리츠 켐페는 1927년 미국행 이민선에 올랐다. 18세의 켐페는 1차대전 후의 피폐한 독일을 탈출하려는 일가족의 선발대원이었다. 유타 주에 자리잡고 모르몬교로 개종한 그는 가족을 불러들이고 같은 독일 이민 출신 모르몬교도와 결혼한 다음 1988년 죽을 때까지 착실하게 빵집을 경영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 켐페는 동생과 자식들이 좋은 교육을 받도록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는 책임감과 자기희생의 한평생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 지 유럽판 편집인 프레드릭 켐프는 완벽한 미국인으로 자라난 이민 2세로서 다년간 독일특파원으로 지내는 동안 늘 제3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독일과 독일인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후 남겨진 서류상자들을 열어보며 자신이 독일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로부터 이어진 자기정체성의 검토를 정리한 것이 <조…국>이다.

 

프리츠 켐페가 남긴 '판도라의 상자'들에는 1930년 이래의 신문 - 잡지 스크랩이 가득가득 들어있었다. 그 중에는 나치 독일의 주장을 담은 기사들이 많았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쉽게 받아보기 위해 나치 선전기구 '피히테 연맹' 에 가입해 회비를 내기도 했다. 아버지가 심정적으로나마 나치 동조자였다는 사실은 '독일의 죄악'을 철저하게 남의 일로 여기던 켐프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독일병정' 같은 아버지의 책임감과 낭만적이고 지적인 외가 분위기를 독일인의 두 가지 대표적 성격으로 보고, 이 두 전통을 함께 이어받은 것을 고맙게 여겨 왔다. 그런데 바로 이 두 성격이 나치즘의 토양이 되었다는 사실, 낭만적 성격이 민족우월주의 선전의 표적이 되고 성실한 성격이 잔혹한 정책집행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독일에 남아있던 큰아버지가 수용소 감시원으로 가혹행위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켐프의 충격에 중압감을 더했다.

 

일본이 전쟁의 죄악을 인정하는 데 인색함을 지적할 때 나치즘의 범죄를 철저히 반성하는 독일인의 자세를 우리는 흔히 대비시킨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를 앞장서서 악마로 규정하는 '양심적' 독일인들은 그 범죄를 객체화함으로써 자신과 절연시키는 무책임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50여 년의 거리를 두고 나치즘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적 동조를 돌아보는 한 미국 언론인은 이 절연의 심리 때문에 아직도 독일인의 과거청산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이 절연 심리의 비합리성을 지적한 바 있다. 나치의 범죄는 인간의 약점이 어우러져 빚어낸 더럽고 비속한 범죄였을 뿐이며 이것을 악마적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신의 약점에서 눈길을 돌리려는 비겁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범죄에 연루된 자신의 뿌리를 느닷없이 되찾은 켐프는 죄의식의 부당한 상속이 이 비겁함 때문이라고 동의한다.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기며 패전의 멍에에서 벗어나고 있는 독일이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역사의식 문제를 독일을 '조…국' 이라고 이제 더듬더듬 불러보기 시작하는 한 해외동포가 섬세하게 짚어낸 책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살피는 데도 하나의 거울이 될 뿐 아니라, 이제야 '제2의 반민특위'로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도 '역사청산' 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게 해줄 만한 책이다. 1999. 8. 26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