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사의 스티브 잡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컴퓨터산업계에서 신화적인 울림을 가지고 떠돈지 오래된 이름들이다. 짐 클라크는 그들만큼 돈을 벌지도 못했고 그들만큼 명성을 떨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대 재계의 신화를 추적하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전속필자 마이클 루이스가 보기에 클라크의 행적이야말로 신화 중의 신화다. 클라크에게는 돈버는 것도 명성 떨치는 것도 목적이 아니요, 그저 신화를 쌓아나가는 것만이 그의 본능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첨단 밖의 첨단>에서 루이스는 클라크의 위치를 이렇게 요약한다.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미국이라면 미국의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실리콘밸리요, 실리콘밸리의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클라크라는 것이다.

 

스무 살 남짓에 사업에 착수한 다른 컴퓨터 영웅들과 달리 클라크는 38세에야 사업을 시작했다. 고등학교에서 퇴학맞고 해군에 지원하던 출발점에 비하면 스탠퍼드대학 컴퓨터공학 교수직에 자리잡기까지의 과정도 '인간 승리'로 봐줄 만한 이야기지만, 38세의 클라크는 벌써 두 차례 결혼에 실패하고 학문적 야심도 없이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심기일전의 길을 찾던 클라크는 1981년 빠릿빠릿한 대학원생들을 모아 새 컴퓨터그래픽 상품을 개발했다. 이 팀이 만든 최초의 3차원 그래픽 칩이 대성공을 거둬 실리콘그래픽스라는 큼직한 회사가 하나 생기고 클라크는 대주주로 회장이 되었다. 클라크는 백만장자가 되었지만 회사경영에는 뜻이 없었다. 전문경영인으로 영입된 사장은 회장을 미치광이로 여기고 회장은 사장을 천치로 여기는 사이였다.

 

1990년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개념 '텔레컴퓨터' 개발사업을 계기로 클라크는 새 길로 나선다. 각 가정의 텔레비전을 대형 중앙컴퓨터와 케이블로 연결시켜 컴퓨터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텔레컴퓨터는 결국 컴퓨터그래픽스에서 개발됐지만 상품화에는 실패했다. 컴퓨터시장의 발전방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고비에서 클라크는 자신이 제안하는 개념 조정을 회사가 거부하자 박차고 나가 방향을 조금 바꾼 새 상품을 개발했다. 넷스케이프였다. 넷스케이프의 성공으로 클라크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빌 게이츠가 소프트웨어 하나를 출발점으로 컴퓨터업계를 석권해 온 것과 같은 전략을 취할 만한 근거를 클라크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군단 체질이 아니라 특공대 체질이었다. 그의 욕심은 첨단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첨단분야 저 밖에 날아가 새로운 첨단분야를 만드는 것이었다.

 

실리콘그래픽스, 넷스케이프에 이어 클라크가 세번째 착수한 사업이 헬시언이었다. 단순한 착상이었다. 미국의 의료시장 규모는 연간 1조 달러다. 그중 25% 가량이 환자기록부 등 정보관리에 쓰인다. 이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집중관리할 경우 효율을 대폭 향상시키면서 경비를 대폭 절감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이 클라크의 아이디어였다.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란 말대로 얼른 프로그램을 준비해 70만 의사의 대다수를 가입시키면 이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헬시언은 착수된 지 3년 만인 금년초 상장됐다. 대성공이었다. 클라크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개발작업을 기획했을 뿐, 헬시언의 경영에도 책임지지 않는 입장에서 수십억 달러를 벌었다.

 

클라크는 첫 사업에서 하드웨어를 팔았다. 두번째 사업에서는 소프트웨어를 팔았다. 이제 세번째 사업에서 판 것은 '가능성' 뿐이었음을 지적하며 루이스는 클라크가 사업가가 아닌 '관념예술가'라고 말한다. 클라크 같은 예술가가 사업에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특성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상계와 예술계에서 가치관의 전환을 몰고 오고 있다. 이런 변화가 경제계에도 닥치고 있는 것일까? '자산'에서 '수익성'으로 가치기준의 초점을 옮겨 온 증권시장이 이제 인터넷 선풍 앞에서는 더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넘어오고 있다. 기업분석인지 예술평론인지 알 수 없는 루이스의 책은 이 변화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1999. 11. 4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