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본질적 요소인 불은 곧 에너지 활용이다. 문명 발전을 통해 모닥불로부터 아궁이를 거쳐 엔진에 이르기까지 에너지 활용방법은 놀라운 변화를 겪어 왔지만 그 주종은 변함없이 불, 즉 연소현상에서 얻는 화학에너지에 있어 왔다. 전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가 근세에 개발되었지만 그 역시 대부분은 불의 열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수력, 풍력, 태양열대체에너지가 관심을 끌지만 불을 실제로 대체할 전망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대체에너지로 가장 큰 성공작은 핵에너지다. 우라늄235나 플루토늄239처럼 원자량이 크고 불안정한 물질의 원자핵이 분열할 때, 또는 수소의 원자핵이 결합해 헬륨으로 변할 때 약간의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E = mc2의 공식에 따라 아무리 작은 질량이라도 광속의 제곱이 곱해지는 만큼의 에너지로 전환되기 때문에 화학에너지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에너지를 얻는다.
  
  에너지는 언제나 양쪽의 날을 가진 칼이었다. 생산력을 키워주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한편 파괴의 잠재력을 가진 존재다. 문명의 발전에 따라 에너지 활용이 집중화하면서 그 칼날은 더욱 예리해졌다. 산업화 이전에 에너지의 위험은 화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에너지 활용이 대규모화한 산업사회에서는 화재의 규모도 커졌을 뿐 아니라 생산현장과 교통수단의 사고가 새로운 위협으로 부각되었다.
  
  전세계의 산업화가 고비를 넘겨 석탄 석유 등 연료자원의 부존량이 한계를 보이게 된 시점에서 핵에너지의 등장은 필연의 길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에너지는 그 첫 활용이 생산적 활동이 아니라 파괴적 행위에 있었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보다 먼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한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탄이 터진 11년 후의 일이었다.
  
  무기 역시 문명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다. 인류가 원시상태를 벗어나 문명을 쌓은 것은 사냥용 무기와 농기구를 써서 얻은 잉여생산 덕분이었다. 그리고 문명이 일단 생기자 부와 권력을 위한 싸움이 일어나고 사냥에 쓰던 무기로부터 전쟁용 무기가 발전되어 나왔다.
  
  문명사회의 규모와 전쟁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냥 수준을 넘어서는 뛰어난 살상능력의 무기가 계속 개발되었다. 무기를 쓰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에 상대방보다 더 뛰어난 무기를 확보하려는 에스컬레이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중세까지의 무기는 사냥용 무기의 원리를 대략 지킨 것이었는데 근세에 나타난 폭탄은 전혀 다른 원리에 입각한 새로운 개념의 무기였다. 폭탄의 등장이 전쟁을 더욱 참혹하게 만든 것은 폭탄의 ‘맹목성’ 때문이다. 폭탄은 적병을 겨냥하지 않고 하나의 공간을 겨냥하기 때문에 그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투원 여부는커녕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상능력을 발휘한다.
  
  핵폭탄은 재래식 폭탄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맹목성을 가진 무기다. 지금은 전술핵무기로 격하된 원자폭탄 한 방만 터뜨려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본 인류는 핵무기가 전쟁에 다시 사용되지 않기 바라는 공통의 염원을 가지게 되었다.
  
  핵무기를 놓고도 무기 개발의 에스컬레이션 현상은 다시 일어났다. 미국과 소련의 뒤를 따라 프랑스, 영국과 중국이 핵무기를 확보하고 1960년대 말까지 인도, 파키스탄과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이 무르익어 가자 핵무기 확산에 대한 걱정이 크게 일어났다. 핵무기의 특성상 어디서든 한 방만 터지면 보복 핵 공격이 연쇄적으로 이뤄져 전면 핵전쟁의 위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체결되었다. 이미 확인된 5개 보유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핵무기 추가보유를 막는 것이 이 협정의 기본목적이다. 미보유국에 불리한 조약이다. 미보유국의 손해를 보전해 주기 위해 몇 가지 보장이 규정되었다. 핵무기 보유국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미보유국에 핵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과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을 위한 기술을 적극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보장이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 NPT 원리를 무너뜨리는 선제 핵 공격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지금까지 핵전쟁을 억제해 온 것이 NPT의 구속력이 아니라 소련의 견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련이 붕괴된 후 10년, 소련이 보유하던 핵무기의 ‘안전성’을 확인한 이제 미국에 대한 견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핵무기 보유량을 모두 합쳐도 붕괴 당시 소련 보유량의 백 분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다.
  
  핵에너지의 비밀이 밝혀진 이상 핵무기의 존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냉전기 수십 년간 핵전쟁을 막은 것은 상호파괴능력에 의한 견제였다. 소련의 견제를 벗어난 미국은 일체의 견제를 원천적으로 벗어나려고 미사일방어망 구축을 꾀하고 있다.
  
  미국이 핵 견제를 벗어나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많은 미국인들은 믿는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국가들은 핵무기를 함부로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국가’ 이외의 핵무기 보유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미국의 비호를 받는 이스라엘 같은 나라가 있다. 팔레스타인 자살폭탄에 대한 이스라엘의 끔찍한 과잉대응을 미국은 못 본 체한다. 자살폭탄보다 더 강한 위협을 받게 되면 2백 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스라엘은 미국의 보복 걱정 없이 핵무기를 쓸 수도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스스로 이런저런 방법으로 풍기고 있는 위협이다.
  

국제테러조직의 핵무기 입수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도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보복능력은 영토를 가진 국가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영토 없이 조직만 가진 상대에게 미국이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알 카에다의 경우 드러난 사실이다.
  
  무엇보다 위험한 보유자는 미국 자신이 된다. 지금도 이라크나 북한에 핵 공격을 가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보복에 나설 상대가 없으니 전면 핵전쟁의 위험은 없다고 이들은 믿는다. 이 믿음이 바로 핵전쟁의 위험을 키워주고 있다. 핵무기 사용과 같은 파괴적 행위가 재래식의 핵 보복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보복의 에스컬레이션을 몰고 올 것을 어째서 그들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핵무기의 장래는 지금 핵무기를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에 일차적으로 달려 있다. 이것은 미국의 국익 차원보다 인류평화의 차원에서 판단해야 할 일이며, 국익을 살피더라도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취할 필요가 있다. 미국 정부가 근시안적이고 배타적인 국익에만 집착하려 들 경우 세계는 분열과 혼란의 길을 피할 수 없다.
  
  핵무기를 써서 실제로 인명을 살상한 유일한 나라 미국이 5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핵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1945년 8월의 원자폭탄 투하가 정말로 부득이한 일이었는지 미국인들이 진정한 반성을 한 다음에 세계평화를 생각해 주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1830년 7월 혁명의 성격에는 별로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나폴레옹 몰락 후 복위한 부르봉 왕정이 너무 극단적 반동이어서 15년 만에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온 것이었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루이18세(1814~1824년)와 샤를10세(1824~1830년)는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의지를 꽤 많이 보였다. 그러나 부르봉 왕조는 연합국(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등)의 힘으로 왕조를 되찾은 것이었고, 연합국의 '비엔나 체제'에 묶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혁명 이후의 모든 변화를 부정하는 정책 틀을 벗어날 수 없었고, 1830년에 이르러 한계에 봉착한 것이었다.

나폴레옹 몰락 당시에는 나폴레옹 체제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이 힘을 모아 부르봉 왕조를 복위시켰다. 그중에는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법통파(légitimistes)도 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부르주아 계층이 대혁명 당시보다도 크게 자라나 있었다.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잃으면서 법통파에만 의지하게 되었고, 결국 법통파의 극단적 반동성에 불만을 가진 모든 세력의 연합이 1830년 7월 혁명을 가져왔다.

7월 혁명은 여러 모로 한국의 1987년 6월 혁명과 방불하다. 보수와 진보의 타협이었다. 시가전에 나선 파리 시민은 급진적 공화주의자가 주류였지만,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 보수파가 방향타를 쥐게 되었다.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인민 권력의 과격과 군주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똑같은 거리를 두고 올바른 중도(juste milieu)를 지키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루이 필리프는 자신의 왕위를 '프랑스의 왕' 아닌 '프랑스 인민의 왕(Roi des Français)'으로 규정했다. 대혁명 이래의 인민 주권을 인정하는 이 관점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인민의 황제'를 표방한 뒤를 따른 것이다. (루이16세도 혁명 후 1891년 헌법에 따라 '프랑스 인민의 왕'을 칭한 바 있다. 그때까지 프랑스 왕의 정식 호칭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이었다.)

▲ 루이 필리프. ⓒwikipedia.org
루이 필리프의 배경과 경력을 보면 과연 1830년 대타협의 대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부르봉가의 방계 오를레앙가 출신인데 그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은 혁명을 적극 지지한 최고위 귀족으로서 '평등의 필리프(Philippe Égalité)'란 별명까지 얻은 인물이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1793년 1월 루이16세 재판에서 처형에 찬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공포 정치의 시작이 루이 필리프 부자의 혁명에 대한 믿음을 흔들었다. 북방군의 뒤무리에 사령관 아래 사단장으로 복무하고 있던 루이 필리프는 과격파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군의 도움을 얻어 파리로 진격하자는 사령관의 제안에 따라 1793년 4월 오스트리아군 진지로 넘어갔다가 그대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오를레앙 공작은 아들의 망명에 연루된 혐의로 그 해 말 단두대에 올랐다.

많은 프랑스 왕족과 귀족이 대혁명 이후 망명길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의 망명은 진짜 고생스러운 망명이었다. 대혁명을 지지했던 경력, 특히 아버지가 루이16세 처형에 찬성한 사실 때문에 그는 망명자 집단까지도 피해 다녀야 했고, 다른 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해외 재산을 활용할 길도 없었기 때문에 생계부터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1800년 영국에서 안정된 망명 생활에 접어들 때까지 여간 아닌 고생이 계속되었다.

영국에 자리 잡기 전에 미국에서 3년을 지낸 루이 필리프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판단에 있어서 미국 생활 중 얻은 것이 많았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대혁명 전부터 자유주의 사상에 기울어 있던 그가 조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턴 등 미국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진보적 정치관을 굳혔던 것이다.

<Wikipedia>에는 1830~1848년 루이 필리프 치세의 성격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루이 필리프는 앞선 부르봉 군주들의 허세와 사치를 삼가며 소박한 방식으로 왕 노릇을 했다. 겉보기에는 이렇게 검소한 모습이었지만,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의 후원을 받았다. 즉위 초에는 국민의 사랑을 받아 '시민의 왕', '부르주아 군주'라 불렸고, 나폴레옹 유해의 귀환 조치로 인기를 모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수록 보수적이고 제왕적인 통치 성격이 드러나면서 인기를 잃었다. 그의 통치 아래 노동 계층의 생활수준은 퇴화하고 소득 격차가 크게 늘어났다. 1847년의 경제 위기가 1848년 혁명과 그의 퇴위로 이어졌다.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과 1987년 한국의 6월 혁명의 공통점이 여기서 다시 드러난다. 두 혁명 모두 극단적 억압 체제를 극복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충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광범위한 인민의 염원을 실현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유력 계층의 선택에 따른 '엘리트 연합'을 이루는 데 그쳤다. 그 앞 단계보다는 발전했지만 국민 대다수를 지속적으로 만족시키는 안정된 체제를 세우지는 못한 것이다.

루이 필리프의 실패를 가져온 직접 원인은 온건 우파를 만족시키지 못한 데 있었다. 당시의 우파는 왕정 지지자였다. 우파 중 과격파인 법통파는 귀족과 교회 중심이었고, 부르주아지 중심의 '오를레앙파'가 온건 우파였다. 그런데 루이 필리프의 정책은 부르주아지 중에서 재벌 성격의 금융 부르주아지에게만 유리한 쪽으로 펼쳐졌고, 중산층 성격의 산업 부르주아지를 외면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강남 좌파' 비슷한 온건 우파가 반정부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48년 2월 혁명의 도화선은 1946년 이래의 경제 불황이었다. 정부의 불황 대책이 금융 부르주아지의 보호에 치중하면서 산업 부르주아지와 프티부르주아지가 박탈감에 빠져 거리의 좌파와 손을 잡게 되었다. 좌파는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였다.

특권층을 대변하던 왕정이 물러나자 혼란이 벌어졌고, 혼란 속에서 두 개의 중요한 급진적 정책이 탄생했다. 보통선거권과 '노동할 수 있는 권리' 선언이다.

1830년 7월 혁명을 촉발한 조치의 하나가 선거권 축소였다. 지위가 향상되고 있던 부르주아지를 상대로 선거권 확대가 당시 유럽의 추세였는데, 이것을 거꾸로 줄이려 한 것은 전형적 '반동' 정책이었다. 1830년 당시 인구 1800만 명의 프랑스에서 선거권자는 겨우 10만 명 남짓이었다. 1832년 영국의 선거법 개혁으로 인구 1400만 명의 잉글랜드-웨일스에서 선거권자가 50만 명으로부터 80여만 명으로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루이 필리프 치하에서 선거권이 적어도 영국 수준까지는 늘어날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1848년까지 프랑스 선거권은 20만 명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루이 필리프의 지지 기반이던 부르주아지가 돌아서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따라서 선거권 확장은 2월 혁명의 당연한 과제였는데, 이것을 일거에 900만 명으로 확장한 그야말로 '혁명적' 조치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프랑스에 펼쳐놓았다.

한편, 좌파는 루이 필리프의 퇴위 직후 국민의 노동권을 선언하고 그 실천을 위해 임시 정부를 통해 국영 공장(국민작업장) 제도를 추진했다. 그러나 많은 일자리를 갑자기 만들어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땅파기 같은 쓸 데 없는 일거리도 더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자 지원자에게 일당 2프랑의 절반을 지불하는 사회보장제도처럼 되어버렸다. 그 1프랑이라도 받겠다고 지방의 실업자와 영세농민들이 파리로 모여들어 거대한 룸펜 집단을 만들었고, 국영 공장 운영을 위해 불가피했던 증세 정책으로 인해 대다수 인민, 특히 지방민들이 임시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4월 26일 제헌의원 선거 때까지 인민 대다수가 지나치게 과격한 개혁과 그에 따른 혼란에 불안감을 품게 되었기 때문에 보수파를 규합한 질서당(Parti de l'Ordre)이 53% 득표로 임시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질서당 정부가 6월 23일 국영 공장 폐지를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는 '혁명군'과 정부군 사이에 3일간의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태를 계기로 제2공화국은 일체의 혁명적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6월 봉기(les journées de Juin) 진압으로 혁명의 기세가 꺾인 가운데 대통령 선거 준비가 진행되었다. 약 900만 명의 선거권자 앞에 여섯 명의 후보가 나섰다. 6월 봉기 진압을 지휘한 질서당 후보 카베냐크 장군의 당선이 일찍부터 확실시되었다. 직접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가 없으면 질서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뽑게 되어 있었고, 카베냐크가 설령 과반수 득표는 못하더라도 압도적 최다표를 얻을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물며 다른 후보가 과반수 득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런데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74.44%의 표를 쓸어 담았다.

여섯 명 후보 가운데 네 명이 유의미한 득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우파 후보로 카베냐크와 보나파르트 그리고 좌파 후보로 온건파의 레드뤼-롤랭과 과격파의 라스파유였다. 개표 결과는 카베냐크 19.65%, 레드뤼-롤랭 5.08% 득표였고, 혁명의 깃발을 선명하게 내건 라스파유는 참혹한 0.49% 득표에 그쳤다.

선거를 앞두고 루이 나폴레옹은 "나는 누구에게나 뭔가 줄 게 있는 후보"라고 장담했다. 우파에게는 질서와 프랑스의 영광을, 좌파에게는 개혁의 추진을 약속해 주는 위치라는 것이다. 선거 결과를 보면 우파와 좌파가 모두 그에게 흡인되었고, 특히 좌파, 특히 과격파가 많이 흡인된 것으로 보인다.

루이 나폴레옹 자신은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정치 노선으로서 보나파르티즘의 애매성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황후는 법통파고 모르니 공작(루이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같은 동생)은 오를레앙파, 그리고 나폴레옹 황태자는 공화파인데, 나 자신은 사회주의자야. 진짜 보나파르티스트는 페르시니 공작(내무장관과 런던 대사를 오래 지냄) 하나뿐이야. 미친놈이지!"

루이 나폴레옹의 압도적 승리는 당시 프랑스에 만연한 정치 혐오증의 결과였다고 볼프강 몸젠은 설명했다.

선거 결과는 사실상 농민, 소부르주아지, 일부 노동자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대중이 2월 혁명을 이끌었던 이제까지의 정치계급에 대해 보여준 불신임 투표였다. 최초의 프랑스 혁명을 종식시키고 동시에 나라를 유럽의 빛나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나폴레옹의 신화가 합리적 논증에 대한 나라 안의 요구, 즉 파리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혁명 노선 변경에 피로를 느낀 나머지 다시 안정과 질서를 희구하던 목소리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입증되었다. 보통선거권이 꼭 좌파적인 정치적 다수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는 초보수적인 결과들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원치 않은 혁명, 1948>(최호근 옮김, 푸른역사 펴냄), 309쪽)

몸젠의 설명으로도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좌파, 특히 극좌파가 우파보다도 더 철저하게 루이 나폴레옹에게 흡인되었다는 사실이다. 혁명을 꿈꾸는 극좌파가 '보나파르트'의 이름에 더 쉽게 넘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대혁명이 빚어놓은 상황 위에 군사 독재 제국을 세웠던 나폴레옹은 혁명과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는가?

1848년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 그리고 그가 대통령과 황제로서 프랑스를 다스리는 동안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폴레옹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 다음 회에 살펴보겠다. (계속)
 

Posted by 문천

 

며칠 전 박동천의 글 "'유혈의 메리'와 박근혜"를 약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었다. 현실 속의 인물을 역사 속의 인물과 비교하는 얘기가 역사 공부하는 사람에겐 늘 조마조마하다. 배경과 맥락의 차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그 비교가 현실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한두 가지 특성을 일방적으로 강조, 과장하는 데 그치기 쉽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 섬나라의 근 500년 전 여왕과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 사이의 유의미한 비교가 짤막한 글 한 꼭지 안에서 가능할까? 게다가 '유혈의 메리'(나는 'Bloody Mary'를 옮길 때 '피투성이 메리'라고 한다.)란 험한 이름이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박동천의 부정적 관점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런 걱정을 갖고 그 글을 읽었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박동천의 글은 박근혜를 엘리자베스1세에 비교하는 일각의 얘기에 대한 반박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메리의 대립 지향적 종교 정책과 엘리자베스1세의 관용적 정책의 차이만을 지적한 것이다. 한 꼭지 글에 충분히 담을 수 있는 논점이다. 제목의 약간 뾰족한 느낌은 필자의 몫인지 편집자의 몫인지 잘 모르겠다. (☞관련 기사 : '유혈의 메리'와 박근혜)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적 인물과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다. 상대는 프랑스 제2제정(1852~1870년)의 주인공 나폴레옹3세다.
▲ 나폴레옹3세. ⓒwikipedia.org

'12월의 사나이(l'homme de décembre)',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8~1873년)의 별명이다. 1848년 12월 10일 프랑스의 첫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1851년 12월 2일 친위 쿠데타로 종신 대통령이 되고, 1년 후 같은 날 나폴레옹3세로 황제에 즉위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대통령 선거 날짜는 그가 정한 것이 아니지만 쿠데타와 황제 즉위 날짜는 그가 정한 것이었다. 왜 그는 12월 2일을 길일로 여겼을까?

12월 2일은 1804년에 루이 나폴레옹의 아저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년)가 나폴레옹1세로 즉위한 대관식 날짜였다. 그가 나폴레옹1세의 계승에 얼마나 큰 의미를 두었는지, 이 날짜를 택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나폴레옹1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쥐었던 인물이다. 인류 전 역사를 통해서도 그만큼 큰 권력을 쥔 인물이 몇 되지 않는다. 그처럼 큰 권력이 한 인물에게 집중되는 일은 1815년 그의 몰락 이후 200년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나폴레옹1세의 몰락에서 그 조카의 대통령 취임까지 기간과 박정희 대통령 저격에서 그 딸의 대통령 당선까지 기간이 똑같이 33년이라는 것은 물론 우연한 일이다.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면 100%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강력한 통치자의 후광을 업은 후계자가 시대의 흐름을 헤치고 표면에 떠오르는 데 30여 년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두 경우의 공통점이다.

이 공통점에서 음미할 만한 뜻을 찾을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근 200년 전의 프랑스 상황과 오늘의 한국 상황 사이에 통하는 측면을 드러내야 한다. 당연히 짤막한 글 한 꼭지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나폴레옹3세와 박근혜가 공유한 문제들이 적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나폴레옹 숙질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라도 풀어보고 싶다. 박근혜가 나폴레옹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오늘은 우선 1848년 집권에 이르기까지 루이 나폴레옹의 행적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밝혀둔다.

루이 나폴레옹의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1세(이하 '나폴레옹')의 동생으로 나폴레옹제국의 괴뢰국으로 세운 홀란드왕국의 왕이었다. 어머니 오르탕스는 조세핀 황후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이므로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불임증의 조세핀이 나폴레옹의 후계자를 얻기 위해 딸을 시동생과 결혼시킨 것이라 하며, 그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의 실제 아버지가 나폴레옹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7세 때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 보나파르트 일족은 망명자의 신세가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스위스에서 자라고 독일에서 얼마동안 지냈다.

나폴레옹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1814년 나폴레옹의 첫 번째 퇴위 때 황제 자리에 앉았다가 며칠 만에 물러났고, 비엔나에 감금되어 살다가 1832년에 죽었다. 나폴레옹 추종자들은 이것을 나폴레옹2세로 보기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은 3세가 된 것이다. 1831년 루이 나폴레옹의 형이 죽고 이듬해 나폴레옹2세가 죽을 때 루이 나폴레옹의 백부 조셉과 아버지 루이는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숭배 운동인 보나파르티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조로 되돌아간 것은 연합국의 강요 때문이었다. 많은 프랑스인이 이것을 억울하게 여기고 나폴레옹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한 것은 1814년 한 차례 퇴위했던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바로 황제 자리를 되찾았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워털루 패전으로 나폴레옹은 다시 쫓겨났지만 많은 그에 대한 프랑스인의 인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보나파르티즘은 1830년 7월 혁명 이후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 기세에 힘입어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 진입을 시도했으나 웃음거리에 그치고 말았다. 1836년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 때처럼) 지역 주둔군의 봉기를 촉구했으나 (나폴레옹의 탈출 때와는 달리) 주둔군은 그를 즉각 체포해서 추방했고, 1840년에는 50명의 용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들어왔지만 역시 바로 체포되어 이번에는 종신형을 받았다.

1846년 5월 유폐되어 있던 요새에 일하러 들어온 석공과 옷을 바꿔 입고 탈출한 루이 나폴레옹은 영국에 망명해 있다가 2년 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파리로 돌아왔다. 1848년 4월 그가 제헌의회에 의석을 얻을 때까지 제2공화국 지도부는 그를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8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약 560만 표를 얻어(75% 득표율) 압승을 거두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압승의 중요한 원인이 왕정 복고파의 지지에 있었던 것으로 설명된다. 질서 회복, 강한 정부, 사회 통합과 국가의 영광을 내건 루이 나폴레옹을 공화파의 기세를 꺾을 보수 후보로 왕정 복고파가 인정한 것이다. 왕정 복고파는 부르봉 왕조와 오를레앙 왕조(1830~1848년 재위한 루이 필립 1세의 가문) 지지자로 갈려 있어서 강력한 독자 후보를 내지 못하고 루이 나폴레옹 정부가 왕정 복고를 위한 과도기가 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선거 결과에 더 직접적이고 강한 작용을 한 것은 '보나파르트'란 이름이었다. 1848년 12월 선거는 프랑스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여성은 아직 해당되지 않는다. 프랑스 여성은 아직 10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1830년 7월 혁명 시점의 프랑스 유권자는 10만 명이 안 되었고, 1848년 2월 혁명 시점에도 겨우 20만 명이었다. 그런데 10개월 후의 선거에서는 유권자가 40배로 늘어났다.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새로 투표권을 얻은 서민 대중에게 어떤 힘을 발휘할지, 제대로 예측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이 되는 데 힘이 된 최대의 정치적 자산은 보나파르티즘이었다. 1848년 이전의 보나파르티즘은 하나의 바람일 뿐, 확실한 정치 세력이 아니었다. 연합국에 빼앗긴 프랑스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과 왕정 복고로 강화된 기득권에 대한 반감, 그리고 짓밟힌 혁명 정신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나폴레옹 숭배를 확산시켰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이 바람이 근대 최초의 '대중 정치' 무대를 휩쓸고 루이-나폴레옹을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오늘 얘기 중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을 언급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 상황을 이해하는 데 이 두 차례 혁명이 초점이 된다. 다음 회에는 두 혁명의 성격을 설명함으로써 나폴레옹3세를 권력으로 이끌어준 보나파르티즘의 성격을 밝히도록 하겠다. (계속)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