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의 주간 북리뷰에는 신랄한 내용의 서평도 심심찮게 실린다. 하지만 찰스 라이히의 <이 체제를 고발한다>에 대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서평(11월26일자)처럼 철저하게 적대적인 비판은 흔치 않다. 그 책이 애초에 서평의 대상이 된 까닭조차 의아할 만큼 여지없는 혹평으로 일관했다.
문제의 책에서 라이히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저항정신을 집약한 <녹색의 미국을 위하여>(The Greening of America,1971)로 한 시대를 그었던 예일대 법대 교수가 20여 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대중을 향해 입을 연 데는 후쿠야마 같은 논객들의 근래 활약이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후쿠야마는 공산권의 몰락을 자본주의의 승리로 규정하고 이데올로기 투쟁이 사라진 후의 '탈역사시대'(Post-Historic Age)를 선언했다. 그 후 몇 년간 진보진영은 잠잠했다. 라이히의 책이 그동안 기다려 온 진보진영의 응답일까. 뉴욕타임스에 이어 워싱턴포스트도 주간 북월드(12월17일자)에 존 주디스(뉴리퍼블릭지 편집자)의 서평을 실었다. 라이히의 발언은 어떤 의미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온 것이다.
라이히가 고발하는 체제란 미국 경제체제다. 대기업의 실질적 시장통제력은 계속 강화돼 연방정부, 주정부 등 공조직을 능가하는 지배력을 사회에 미치게 되었음에도 '사기업'이라는 이름으로 공적 책임을 면제받는 체제. 소수의 관리자들이 이기적인 기준으로 경제를 운용하면서 '시장원리'의 이름 뒤에 숨어 사회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체제. 권력만 있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소재가 없는 이 체제의 책임을 추궁하려고 라이히는 나선 것이다.
라이히의 고발은 미국 민주주의정신을 지키자는 것이다. 모든 경제활동이 조직화돼 가는 현대세계에서 조직에서의 소외란 곧 생존권의 박탈을 뜻한다. 기업의 비민주적 지배로부터 피고용자의 권익을 사회가 지켜주지 못한다면 허울좋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시민들에게 보장해 주는 것은 '굶어죽을 자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윤추구라는 기업의 목적에는 민주주의정신과 꼭 맞지 않는 면이 있다. 상명하복의 권위체제가 능률의 극대화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사회의 정부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기업의 권위주의 성향을 절충시킬 필요가 있음을 라이히는 강조하며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자유방임주의에 반대한다.
그의 고발은 또한 시민의 생활권을 지키자는 것이다. 마약, 폭력, 결손가정, 환경파괴 등 미국사회가 시달려온 문제의 원인을 당사자들의 개별적, 도덕적 문제에서 찾기보다 체제가 빚어낸 전반적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라이히는 주장한다. 인간적인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는, 시장원리와 경제논리만을 내세우는 체제의 운용이 그 구성원과 소외된 자들 모두에게 불안감과 분노를 심어주는 데 문제의 근본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란 무엇인가?" 라이히는 묻는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나오고 미국 헌법이 작성된 18세기 말까지 경제는 인간의 모든 활동 속에 분화되지 않은 채 녹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 자유, 성취감 등 인간의 본질적인 제 가치와 유리된, 고삐 풀린 경제논리가 끝 모를 파국으로 사회를 끌어 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우리의 위치를 밝히는 지도(地圖)를 새로 만들자고 그는 청한다. 경제의 힘을 장악한 자들이 그동안 학계, 언론계, 관계, 정치계에 대한 영향력을 총동원해 국민들에게 만들어 보여준 지도는 미국사회를 함정으로 이끌어 왔다. 이제 미국의 건국정신,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이해에 입각해 현실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위치를 되찾자. 그리고 새로운 지도가 보여준 방향에 따라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자. 이것이 라이히의 주장이다.
미국사회의 전통적 이념인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이제 환상과 그림자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라이히는 새 지도에 적어 넣는다. 소수의 탈락자를 제외한 사회 전체의 승리를 구가하는 후쿠야마와 달리 그는 소수의 권력자를 제외한 사회 전체의 패배를 탄식한다. 소수의 탈락자도 소수의 권력자도 아닌 중간층이 지금의 상태를 승리의 상태로 보느냐, 패배의 상태로 보느냐에 따라 후쿠야마와 라이히, 어느 쪽에 귀 기울일지 정해질 것이다.
라이히는 후쿠야마의 '탈역사'와 달리 '탈경제'(Post-Economy)시대의 청사진을 그린다. 허구적인 시장원리와 경제논리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와 박애정신으로 움직여지는 새 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대기업의 힘을 직시해 사기업이 아닌 공기업으로서의 성격을 밝히고, 인간생활을 지배하는 경제의 힘을 직시해, 경제논리의 폭을 넓힐(환경파괴, 범죄증가, 근로자의 불만감 등 사회와 시민의 모든 손해를 원가에 포함시킬) 것을 그는 제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을 규정하고 시민들을 '번영 속의 비극'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 지성계의 진보주의가 어떤 무력감에 빠져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러나 5년 전에 비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한 미국인들의 믿음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1776~1990. 그 앞도 없고 그 뒤도 없는 역사. 미국인들이 후쿠야마의 꿈에서 깨어나며 던지는 비판의 목소리는 그 꿈의 변두리에 서있던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1995.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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