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4>

기사입력 2003-11-15 오전 11:29:30

  '미국인의 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존재해 왔으며 소련 붕괴 후 더 부각되었고, 지금의 부시 정권이 들어선 후 더욱 무겁게 느껴지고 있는 짐이다. 미국인에게만 무거운 짐이 아니다. 미국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더 부담이 되고 있는 짐이다. 우리도 지난 가을 이후의 북핵 위기 속에서 그 무게를 크게 느끼기 시작한 짐이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세계경찰’을 자임하며 ‘예방전쟁’을 주창하는 미국의 ‘전쟁광’ 측면에 모여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면에서 멀쩡한 나라가 전쟁 하나에만 광분하는 증세를 보일 수 있을까? 미국이라는 나라의 병리적 현상은 포괄적 고찰을 필요로 한다.
  
  미국은 문명 발전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좋은 측면이든 나쁜 측면이든. 이것이 바로 ‘미국인의 짐’이다. 미국이 개발하는 기술과 제도, 그리고 미국이 겪는 병리적 현상, 양쪽 다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다른 나라들에 전파된다. 그 시차는 전체적으로 계속 짧아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전파시차가 그중 짧은 나라의 하나다.
  
  깊이 따져보면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 별개의 것일 수도 없다. 양쪽 다 하나의 문명발전 방향에서 파생되는 것일 뿐이다. 좋은 것만 배우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취사선택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미국이 보이는 병리적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걸려가고 있는 질병을 앞장서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비판과 평화운동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명의 진행방향을 총체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미국인의 짐’에 감사해야겠다.
  
  19세기 당시에 ‘백인의 짐’은 하나의 숭고한 이념이었다. 유럽문명 발전의 열매 가운데 ‘힘’만으로 세계를 정복할 것이 아니라 ‘도덕’으로 세계를 감화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갸륵한 주장이었지만, 그로 인해 세계가 더 좋은 곳이 되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지금 별로 없다. 오히려 위선의 상징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백인의 짐’은 왜 실패했는가? 문명 진행방향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도주의자들은 유럽문명의 발전방향에 제국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를 그 문명의 ‘좋은 대표자’로 자임했을 뿐이다.
  
  19세기에 비해 지금은 문명 진행방향의 근본적 반성이 가능한 상황이다. 문명의 주체가 상당한 범위로 확산되어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 시혜자와 수혜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처럼 중간 수준의 산업화를 이룩한 나라는 여러 분야에서 여러 나라에 대해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가 하면, 시혜자가 되기도 하고 수혜자가 되기도 한다.
  
  ‘미국인의 짐’은 미국인이 앞장서서 지고 있는 것일 뿐, 지금의 문명세계 전체에 얹혀 있는 짐이다. 미국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 짐이 행복의 보따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 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짐이 왜 생긴 것인지 철저하게 따져보아, 피할 수 없는 짐이 확실하다면 가능한 한 나도 괴로움을 덜 겪고 남에게도 덜 끼치면서 함께 지고 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문명의 진행방향을 바꿔 이 짐을 아주 없앨 수는 없을까? 다른 방향을 잡더라도 그에 따른 짐이 어떤 것이든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1백여 년 전에 비해서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폭이 크게 넓어졌다. ‘문명의 짐’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더 나은 세상’을 찾는 길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일 것이다.
  
  지난 봄까지 신문에 쓴 글 일부를 모아 “미국인의 짐”이라는 책을 내면서 책머리에 붙이기 위해 쓴 글의 일부다. 그 후 북핵사태의 전개와 이라크 파병 문제 등을 통해 ‘미국인의 짐’이 더욱 절박하게 우리 사회를 짓눌러 온 변화를 보며 프레시안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옮겨놓는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3>

기사입력 2003-10-29 오후 1:57:46

  왜란과 호란 사이에 있던 광해군의 치세는 조선 왕조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대외관계를 비롯해 여러 면에서 종래의 정치틀에서 벗어난 개혁이 필요한 시기였고, 광해군은 이 시대적 수요에 부응하려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되지만 재위 15년만에 정변으로 축출되고 말았다. 정변 후 그의 개혁정책은 뒤집어져 조선 왕조는 이후의 정세 변화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안정이 개혁의 필수조건임을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이 정치 안정에 실패한 원인을 살피는 것은 그의 개혁성을 평가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왕으로서 광해군의 원초적 약점은 부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적장자 계승은 유교문화권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의 하나였다. 공자(孔子)가 주공(周公)을 성인(聖人)으로 받든 이유의 하나도 주공이 이 원리를 실천하여 확립했다는 데 있다.
  
  주(周)나라에 앞선 상(商)나라에서는 형제 계승이 일반적이었다. 형제 계승은 나이어린 조카보다 힘있는 숙부가 앞서 왕위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왕의 개인적 능력이 중요시되는 조그만 나라에서는 능률적인 계승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 왕의 개인적 능력보다 시스템의 안정성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계승의 가능성이 너무 넓게 열려 있으면 충성의 대상에 혼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주공은 중국에 이 변화가 필요하게 된 시점에서 조카인 성왕(成王)을 지성으로 보좌, 적장자 계승의 원리를 확립한 인물이었다.
  
  적자(嫡子)도 아니고 장자(長子)도 아닌 광해군이 세자로 정해진 것은 왜란의 발발로 황급한 상황 덕분이었다. 당시 선조에게는 적자 없이 서자(庶子)만 열셋이었는데, 광해군은 그중 둘째였다. 비상시국에 대처하기 위해 세자를 부랴부랴 정하는데, 맏아들인 임해군은 평판이 워낙 시원찮았던 모양이라, 광해군으로 세자를 정하는 데 아무 반대가 없었다고 한다.
  
  실제 광해군은 전란기간을 통해 세자 노릇을 잘했다. 오히려 너무 잘해서 말썽이 생길 정도였다. 명나라 황제가 선조 아닌 광해군에게 칙서를 보내 격려해 준 일까지 있다니, 선조가 유별난 이상성격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속이 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칙서로 격려까지 해 준 광해군을 세자 된 지 16년이 지나 선조가 죽을 때까지 명 황제는 공식적으로 책봉해 주지 않았다. 선조는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몇 차례 보내다가 뒤늦게 적자로 영창군을 얻은 뒤에는 뜸해졌으니,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랄까, 선조가 세자를 바꿀 마음이 있지 않냐는 의혹까지 일어 광해군의 정치적 부담을 늘려 주었다.
  
  이 의혹을 대표한 것이 선조 말년에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이었다. 그는 선조가 병석에 누운 후 광해군에게 섭정을 맡기려는 것을 막았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유영경은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부왕이 아끼던 대신을 함부로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정신으로 선조의 정권이 광해군에게 계승되었다면 광해군의 정치적 부담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창군을 바라보며 광해군을 가로막은 유영경의 행적은 새 정권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머지 않아 그는 과거의 행적으로 탄핵받아 함경도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게 된다.
  
  광해군 최대의 죄악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흐름도 유영경의 탄핵에서 시작된다. 광해군의 즉위식 직전에 광해군의 손아래 계모 인목대비는 선조가 유영경 등 일곱 대신에게 영창군을 잘 보호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이른바 ‘유교(遺敎)’를 공개했다. 선조가 죽은 후 자기 모자의 안위를 걱정해 병상의 선조를 졸라 받아낸 것이었을까? 새 임금에게 핍박받을 것을 두려워해 죽은 임금에게 의지하려 한 것은 아녀자의 여린 마음이라 이해한다 하더라도, 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다른 아들의 보호를 몇몇 신하게게 부탁했다는 것은 임금이 아니라 경영자로서 선조의 자질을 의심할 만한 일이다.
  
  유교를 받았다는 일곱 신하 중 유영경만이 당장 탄핵을 당한 것은 선조가 죽기 전 그의 행적에 두드러진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이런 갈등을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대동법 시행 등 민생정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5년 후 인목대비와 영창군을 둘러싼 이른바 ‘역모사건’을 계기로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조정에서 축출되기에 이른다. 광해군 나름의 ‘탕평정치’가 1613년의 계축옥사(癸丑獄事)를 계기로 마감되고 마는 것이다.
  
  양반가의 서자로 평시 재주를 자랑하며 어울리던 몇 사람이 1613년 4월 문경 새재에서 왜관을 왕래하는 상인을 습격하여 은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났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강도사건이지만 범인들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아 각별히 엄중한 조사를 진행하다 보니 일부 범인들의 자백을 통해 인목대비를 둘러싼 역모사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광해군 비판자들은 이 사건이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광해군 측근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이첨 등은 그 전 해에도 ‘역모’라는 이름이 붙은 조그만 사건 하나를 계기로 4년 전에 죽은 유영경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하여 관철하는 등 정국을 흑백론의 분위기로 끌고 가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축옥사를 통해 경쟁자들을 배제하고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북파의 독단에 자극받아서라도 광해군에 대한 불만세력이 영창군을 바라보고 모이는 움직임이 있었을 법한 상황이니 계축옥사가 완전히 조작된 것이고 인목대비 측에 아무런 잘못이 없었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사실 이이첨의 눈으로 본다면 새 임금 즉위를 앞두고 영창군을 옹호하는 전 임금의 ‘유교’를 내세우는 것부터가 새 임금의 권위를 부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제한하려는 행위로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계축옥사의 조작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었다는 정치적 부담을 광해군이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태도 문제였다. 즉위 후 몇 년간 그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대신 민생정치에 전념하며 임금으로서의 권위가 저절로 자라나기를 기다리려는 자세였다. 그러나 대표적 개혁정책인 대동법마저 경기도의 시범적 시행에서 확장되기는커녕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무성하고 역점사업인 궁궐 조영에도 반대 의견이 빗발치니, “이렇게 임금 대접을 안 해 줘서는 임금노릇도 못해 먹겠다”는 마음도 들고 정면돌파를 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국가에 충성하기보다 정권에 충성하기 위해 없는 역모사건은 만들어내고 있는 역모사건은 키워내려는 소인배들의 유혹도 그에 따라 거세졌을 것이다.
  
  연하의 계모지만 인목대비는 부왕의 정비로서 광해군보다 한 항렬 위, 대궐의 어른으로서 독자적 귄위를 가지고 있었고, 영창군은 부왕의 유일한 적자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존재가 모든 정치적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광해군을 설득하고 그들을 제거함으로써 왕의 권위가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례 없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례 없는 ‘폐모살제(廢母殺弟)’라도 해야 한다고 광해군은 믿었던 것일까? 이 과격한 조치가 단기적으로는 신하들이 왕을 두려워하게 하는 효과를 일으켰을지 모르지만, 광해군의 탕평정치를 뿌리뽑고 그에게 패륜(悖倫)의 딱지를 붙였다.
  
  1619년 조명(朝明)연합군이 후금군에 격파당한 후 광해군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또 긴박한 시국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당시까지의 대북파 일변도 조정으로 미흡하다고 생각해서 계축옥사 이래 내쳤던 서인과 남인 계열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정권의 독점이 풀리는 것을 꺼린 대북파에서 반대하고 나서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김제남(인목대비의 아버지)이 너희들의 덕이 된 지 오래되었다. 무릇 사람을 모함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김제남을 함정으로 삼아 왔다. 너희들의 말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고, 듣기에도 피곤하니 이젠 그만둘 때가 된 듯하다.”(한명기, “광해군”에서 재인용)
  
  1619년 이후 탕평정치를 다시 시도한 것을 보면 광해군이 궁극적으로 ‘권력을 위한 권력’을 위해 공포정치를 추구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믿음이란 깨뜨리기는 쉽되 쌓기가 어려운 것이다. 계축옥사로 깨어진 믿음을 되살려 힘 있는 조정을 만들기 전에 일부 반대자들이 그를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에 대해 놀랄 만큼 저항이 없었다는 데서 광해군의 정치적 실패는 확인된다.
  
  광해군의 정치적 실패는 그가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정인홍(鄭仁弘)의 정치적 성향에서 원인을 더듬어볼 수 있다. 광해군이 즉위할 때 74세의 정인홍은 귀양길에 올라 있었다. 남명(南溟) 조식(曹植)의 수제자로, 왜란중 가장 명망높은 의병장으로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던 정인홍은 선조가 죽기 직전 유영경을 탄핵하며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라는 상소문을 올렸던 것이다. 학식과 명망, 강직과 청렴을 두루 갖춘 높은 선비가 자신을 뒷받침해 주는 데 광해군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어느 누가 뭐라 해도 정인홍 같은 인물이 이해하고 지지해 준다면 떳떳하게 왕 노릇 할 수 있으리라 느꼈을 것이다.
  
  정인홍은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편협했다. 선조 초년 정인홍이 조정에 출사했을 때 이이(李珥)는 이렇게 평했다. “정인홍은 누구를 한번 미워하면 원수같이 미워한다. 기개는 있으나 학식과 포용력이 부족하여 용병으로 치자면 돌격대장에나 합당하다.”(한명기, “광해군”에서 재인용)
  
  임금의 전폭적 신임을 받아 그의 가르침이 나라의 앞길을 좌우하게 된 시점에 와서도 그는 포용력보다 기개만을 보여주었다. 우선 임해군 처리에 강경한 태도를 보여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등 광해군의 초기 조정에 무게를 잡아 주던 온건한 대신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조(國朝) 다섯 현인(賢人)의 위패를 문묘(文廟)에 모시는 일을 놓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자격에 시비를 건 일이 당파의 대립을 격화시킨 일로 지목된다. 이이첨이 앞장선 계축옥사에는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이이첨이 광해군을 과격한 길로 설득할 때 늘 정인홍의 의견을 인용하였다고 한다. 정인홍의 인품을 아끼는 사람들은 그가 이이첨에게 이용당했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편협하고 과격한 노선에 이용당할 빌미는 그 자신이 넉넉히 만들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폭넓은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왕이 된 광해군이 정통성 문제에 정치적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만이 아닐 것이다. 급박한 상황이 그런 부담을 가진 인물을 그런 자리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결국 그 부담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정면돌파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패륜’이라는 더욱 치명적인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정인홍은 당시의 시대적 수요를 상당부분 반영하여 광해군이 갈 길을 밝혀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시각이 편협한 탓으로 작은 문제를 없애면서 더 큰 문제를 만들어준 결과다. 어지러운 시기의 지도자가 겉으로 나타나는 여론에 너무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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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2>

기사입력 2003-10-27 오후 1:41:12

  1618년(광해군 10년) 명나라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 만주족의 후금(後金) 정벌에 군대를 보내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긴다고는 하지만 실질적 독립성은 피차 인정하는 것이었고, 파병 요청은 두 나라 사이 역사를 통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런 이례적 요청이 나오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20년 전까지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전해 조선이 일본 물리치는 것을 도왔다. 이것도 두 나라 사이 역사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멸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되살려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기 위해 명나라에 어떤 도움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명나라의 요구만이 아니라 조선 지배층에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이 요구에 응하는 데 매우 신중했다. 한명기 교수는 연전에 펴낸 저서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에서 이것이 치밀한 정보수집과 형세판단의 결과라고 평했다. 임진왜란 때 북방을 주유하며 전쟁의 실체를 깊이 경험하고, 또 만주족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요점을 파악한 광해군이 당시 후금 정벌의 무모함을 정확하게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로 파병을 거절하려 했으나 명나라의 단호한 요구와 신료 대부분의 확고한 명분론을 이기지 못해 이듬해 2월 1만의 병력을 강홍립(姜弘立)의 인솔하에 파병했다. 그러나 불과 십여 일 후 후금군과의 첫 전투에서 명군이 참패를 당할 때 조선군 부대는 후금군에게 전면 투항하고 말았다.
  
  출병에 앞서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적극적으로 싸우지 말고 기회를 보아 후금군에게 투항하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대개 광해군이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광해군 축출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측에서 광해군 축출 후 꺼낸 것이므로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광해군이 “목숨 걸고 싸워 명나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도원수로 뽑힌 강홍립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런 짐작을 뒷받침한다. 그는 역관 출신이었다. 명군을 도와 후금군과 싸우려면 역관이 필요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총지휘관을 역관으로 한다는 것은 전투를 지상목적으로 하는 출병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강홍립이 항복한 후 광해군은 그 가족을 처벌하라는 많은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오히려 후금 진중에 있는 강홍립과 연락을 유지했다. 강홍립의 연락 중에는 후금에 관한 요긴한 정보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를 포로로 잡고 있던 후금측이 이 연락을 허용한 것은 자기네에게 유리한 측면이 더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주족 지도자 누르하치는 1580년대에 세력을 키워 1589년까지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왕을 칭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2년 9월과 1598년 1월 사자를 보내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 제의는 물론 명나라와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조선측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던 만주족의 위상을 드러낸 일이었다.
  
  1617년까지는 명나라의 외곽에서만 세력을 결집하던 만주족이 1618년 초 명의 변방 요충지 무순(撫順)을 공격, 명에 정면 도발함으로써 이 방면의 긴장상태가 전면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천하제국을 구가하던 명은 이 무엄한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만주족의 근거지까지 쫓아들어가 그 뿌리를 뽑겠다고 달려들었다.
  
  1619년 명의 후금 원정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하고 참패한 결과에서 나타나듯 무리한 것이었다. 부패한 정치구조가 ‘천하제국’의 오만을 부추겨 이 무리한 정책을 이끌어낸 것으로 이해된다. 광해군은 참전을 요청하는 명의 국서에 대해 경솔한 출병보다 방어에 만전을 기하도록 건의하는 답변을 보내려 하였으나 제후로서 주제넘은 짓이라는 신하들의 만류로 접어두고 말았다. 전쟁 논의가 터져나올 때 전쟁을 피하자는 주장은 언제 어디서나 꺼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2월 23일 강홍립의 본진이 압록강을 건너 명군과 합류한 뒤 3월 4일 후금군의 공격을 받을 때까지 조선군은 무리한 행군에 허덕이느라 전투태세를 갖추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병 위주의 명군을 위한 작전 일정에 보병 위주의 조선군을 억지로 끼워넣은 탓이었다. 애초부터 무리한 원정에 행군일정까지 무리하게 강요한 결과 조선군 부대는 후금의 악명높은 ‘철기(鐵騎)’의 밥으로 내던져진 셈이었다.
  
  동행하던 명군이 궤멸된 후 후금군의 공격에 좌우영이 꺾인 후 조선군 본영은 전투 없이 항복했다. 항복 과정의 묘사도 자료에 따라 다소 엇갈려, 후금군과 사전 내통이 있었는지 여부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무튼 후금측은 조선군의 항복을 명군에 비해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항복한 조선군의 일부는 후금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농경에 종사하였다고 하는데, 항복 후 몇 달 동안 탈출해 귀국한 포로가 1,400명에 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강제적 통제가 아주 극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금으로서는 명과의 대결에 전력을 집중해야 할 형편이었으므로 조선과의 사이를 원만하게 끌어가고 싶었다. 강홍립은 포로가 된 후 광해군 폐위까지 4년 동안 광해군과 후금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위된 후 조선과 후금 사이가 악화되어 결국 정묘호란을 맞았을 때는 강화를 주선하고 후금군의 조선 백성 침탈을 규제하도록 애쓰기도 한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었을 때 반정주체들은 인목대비의 교서를 빌려 광해군의 죄악 세 가지를 지적했다. 그 첫째는 폐모살제(廢母殺弟)로 인륜을 등진 것이며, 둘째는 무리한 토목공사로 백성을 괴롭힌 것이며, 셋째는 명의 재조지은을 배신하고 오랑캐와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광해군이 1618년 명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 할 때 많은 신하들은 명분을 내세워 파병을 주장했다. 안팎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군대를 보내면서도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것을 막도록 만전을 기했고, 그 결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최선의 결과를 끌어냈다. 그러나 그가 명에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는 비난은 그의 반대파 속에서 사그러지지 않아 결국 쿠데타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광해군을 쫓아낸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은 겨우 1천, 그나마 대다수가 오합지졸이었다. 훈련도감의 1만여 정예병력이 반정을 막지 못한 것은 광해군 정권을 수호할 의지를 가진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몰락은 반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지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여론과 상황에 몰린 파병에서 광해군은 나름의 지혜를 썼고 그 지혜가 제대로 효과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반대를 줄이지도 못하고 지지를 늘이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평화에 대한 미국의 도발로 지목되는 이라크사태에 미국을 돕기 위한 파병을 우리 정부가 결정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평화의 파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국민에게도 불행한 일이거니와 노무현 정권에게는 더더욱 불행한 일이다. 이 불행을 북핵사태 해결로조차 보상받지 못한다면 광해군보다 나은 대접을 바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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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