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그 움직임을 따라다니기에 앞서 8월 15일의 상황에 대한 생각을 더 정리해 놓아야겠다. 무엇보다, 사태의 진행에 관한 정보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었을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상황을 판단할 증거가 적은데,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부터 논리와 상식에 따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정리해 놓아야 이후 사람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일 일본 정부의 포츠담선언 수용 의사 표명 이후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 때까지 핵심 정보의 생산자는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 둘이었다. 최종 결정권은 미국의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일본도 담판에 나서면서 어느 범위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실제 진행된 상황은 그중 유력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총독부를 비롯해 한국에 있던 어느 누구도 미국 측 정보를 제대로 공급받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최고급 정보는 일본 정부가 제공한 것이었다.
10일의 항복 의사 표명을 일본 정부가 조선총독부에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아서 단파방송 청취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항복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열심히 최선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조선 총독에게 최소한의 정보 제공도 없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뒀을 리가 없다. 가치가 큰 정보는 어떤 상황에서도 활용되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알렸을 것이다. 정보를 받은 수뇌부는 일부 정보를 하급자들에게 알리고 대책을 준비하게 하면서 “단파방송으로 청취한 것”이라고 둘러댔을 것이다. 정보 접수 사실을 비밀로 한 것은 그에 따른 책임 문제가 제기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인 거주자가 “항복한다는 사실을 총독부가 알면서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관계자의 책임을 추궁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문장이 계속 추측의 형태로 나가고 있다.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 안 그랬다는 증거도 없다. 상식과 논리에 따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진행되고 있는 종전 협상 내용을 일본 정부가 조선 총독에게 전혀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분은 내 글 읽을 필요 없다. 그런 분에게는 내가 설명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별것 없다.
이제 나갈 분들 나갔으니, 10일 이후 총독부가 상당 수준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믿는 우리끼리 이야기를 계속하자. 없앨 문서 없애는 것을 비롯해서 총독부가 할 일도 많았겠지만, 이 정보를 누구에게 어떻게 나눠주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큰일이었다.
어느 범위의 일본인 거주민과 친일파 조선인들에게는 “공식 정보는 아니지만...” 하면서 대비를 하도록 튕겨줬을 것이다. 그 동안 협력해준 사람들이 아무 대비 없이 세상 뒤집히는 일 당하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라면 “머지않아 손을 들게 될 수도 있는 것 같다.”는 귀띔 정도로 충분했을 것이다.
좁은 범위의 일본인 간부와 중요한 조선인 협력자들에게는 더 많은 정보를 솔직하게 제공했을 것이다. 항복 후의 수습 과정에서 협력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그 동안 일제에 협력해 온 자세 그대로 계속 협력할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운형, 안재홍처럼 지금까지는 협력을 하지 않았으나 파국과 혼란의 극복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위해 협력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었다.
총독부 당국자들이 원한 협력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여운형과 안재홍의 건준을 통해 일본인들의 희망 중 일부가 나타났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일본 항복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한국 민중을 위해서도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점에 입각해 불필요한 갈등을 최대한 피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희망 중 “일부”라고 했다. 건준 인사들에게 털어놓지 않은 다른 희망사항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추측들에 비해 다소 미약한 추측이지만, 총독부 당국자들이 좌익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고 있었을 것 같다. 제국주의에 대한 가장 극렬한 반대자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본 본국에서도 군국주의 정부가 좌익 탄압에 매진해 왔다. 14일까지 미국과의 항복 흥정 과정에서도 ‘반공’ 정책이 중요한 거래 품목이었을 것 같다. 전쟁 책임의 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은 일본 지도층에 물론 유리한 일이었는데, 이것이 미국에게는 무엇보다 ‘반공’ 전선 구축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었다.
10일에 총독부가 송진우에게 ‘정권 인수’를 교섭했고 송이 이에 불응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이를 부정하는 증언도 있지만, 나는 그럴싸한 일로 생각한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도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좌익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에 동조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송진우는 그들과 달리 ‘좌익 배제’ 방침을 거리낌 없이 의논할 수 있는 상대였다.
식민지시대 사람들의 정치적 태도를 친일과 반일의 2분법으로 봐서는 현실 이해에 한계가 있다. 반일과 친일은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반민족주의’라는 것은 ‘반공주의’나 마찬가지로 정책이나 노선을 가리키는 말일 수는 있어도, 하나의 이념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반민족주의’보다는 ‘탈민족주의’가 더 적절한 개념 같다. 서양문명의 침투가 넓고 깊어지면서 민족 이외의 여러 가지 정체성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기독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표적인 통로였다.
새로운 이념에 입각한 대안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민족 정체성을 절대시하지 않았다. 그중에는 민족주의 극복을 필수적 과제로 여긴 사람들도 있고, 민족주의와의 화합을 추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인의 한국인 통치라는 민족 모순이 식민지시대를 뒤덮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념적 모순들이 그 밑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송진우는 여운형, 안재홍과 달리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입장이 강했고, 그 때문에 좌우합작을 꺼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을 앞으로 더 천착하겠지만, 1944년 어느 때 안재홍이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권했을 때 대답한 말에서 송진우의 생각 방향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것 같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04쪽에서 재인용)
방금 미국은 전세계를 영도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의 해체조차 단행하였다. 소련은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미 연합 열강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배하 10만의 독립군을 옹유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불의 차관이 성립되어 이미 1억 불의 전도금을 받고 있는 터인즉, 일제가 붕괴되는 때에 10만 군을 거느리고 10억 불의 거금을 들고 조선에 돌아와 친일거두 몇 무리만 처단하고, 그로써 행호시령(行號施令)하기만 하면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를 잘 하니까 만사는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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