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휘문중학 교정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장 여운형의 연설이 있었다. 이튿날 <매일신보>에 이렇게 보도되었다.


16日 오후 1시 부내 계동 휘문중학 운동장에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수반인 呂運亨이 나타나 5천여 군중 앞에서 해방의 제일성을 힘있게 외쳤다. (略)연설은 약 20분간의 짧은 동안이었으나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조선민족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遠藤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을 하였다. 즉


1) 전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인만치 식량이 제일문제이니 8, 9, 10의 3개월간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 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 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말라.

5) 전조선 각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오후 3시 10분부터는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의 약 20분 연설이 방송되었다. 여운형의 휘문중학 연설과 대략 같은 취지였다.


연설도 방송도 총독부 당국의 협조로 이뤄진 일이 분명하다. 총독부는 나름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10일에 항복 의사를 연합국에 알린 사실을 조선총독부에는 공식적으로 통보하지 않았지만 총독부에서는 단파방송을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운형도 단파방송을 들은 사람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방적 항복 의사 표명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통보가 없었던 것이지, 엄중한 기밀로 취급하지는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운형과 안재홍, 그리고 총독부에서 비슷한 부탁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송진우, 세 사람은 신문사 대표를 지낸 조선 언론계의 거물로서 일제 막바지의 전쟁노력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거물이면서 협력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총독부의 선의를 이해하고 북돋워줄 만한 식견과 도량을 가진 사람, 그것이 이 시점에서 총독부가 내세우고 싶은 사람이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를 내보낼 자리가 아니었다.


송진우에게 총독부의 부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증언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정황을 볼 때 부탁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당시의 증언 중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굴절된 것이 많이 있어서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여운형과 안재홍도 연설에서 14일 이전에 항복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15일 정오에야 이 기쁜 소식을 처음 들은 대다수 청중과 일체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악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효과를 위해 표현을 조절한 일이다.


‘정치경제범 석방 요구’는 표현 조절을 넘은 ‘조작’의 냄새가 난다. 정치경제범 석방은 누구의 요구를 받기 전에 총독부에서 준비해 온 일이었다. 14일 밤 여운형을 초청하러 엔도 정무총감이 보낸 사람이 총독부의 입장을 브리핑해 줄 때 그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것을 건준이 요청하고 총독부가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 건준의 권위를 세우고 총독부의 선의를 과시하는 데 좋지 않겠냐는 합의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도 악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이 이런 기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해해야겠다.


여, 안, 송, 세 사람이 변절하지 않은 민족주의자로 성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 사람의 지조가 꼭 같은 수준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세 사람은 언론계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전향 압력도 비교적 적었고, ‘먹고 살기 위해’ 협력에 나설 필요도 없는 입장이었다. 이를 악물고 지조를 지켜야 했던 일반인에 비하면 냉정한 판단에 따라 태도를 취할 여유를 가진 위치였다.


여운형과 송진우에 비해 안재홍은 후세 사람들에게 행적이 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일기 작업에서 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나는 하나의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 덜 알려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의 지도자로서의 뛰어난 미덕 때문이라고 보이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송건호,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에 이 날 휘문중학에 갔던 이야기가 나오는데, 라디오 연설을 마치고 그리로 온 안재홍을 보았다고 한다. 그 묘사를 보면 적어도 안재홍에게만은 민족주의자의 길이 냉정한 판단이나 편안한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늦게 종로 계동 휘문중학 교정에 운집한 시민들 앞에서 말할 수 없이 초라한, 어떻게 보면 걸인 같은 모습의 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해방된 민족의 앞날에 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얼굴이 영양실조와 고생으로 윤기 없이 까맣게 탄 이 노신사야말로 민중이 존경해 마지않는 민족지도자 안재홍이었다. 삼엄한 일제의 총검 치하에서, 그들의 온갖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끝내 조선민족의 양심을 지킨 민족지도자 민세 안재홍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