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부 全鮮職域自治組織本部에서는 26일 전선 각 회사, 공장 등 직역 종업원들에게 격을 발하여 직역별 자치회를 시급히 조직하여 자원 확보와 앞으로의 운영에 만전을 다할 것을 요망하는 한편 본부와의 연락을 구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총독부와의 협조관계와 지도자들의 성망을 발판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날자가 하루하루 지나감에 따라 “자원 확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당면한 질서 유지에서 시작해 정치의 불모지 위에 전국적 정치조직을 형성해 나간다는 건준의 목표 성취를 위해서는 방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필요했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건준에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공들인 상대가 송진우였다. 그들이 송진우를 중시한 까닭이 개인의 성망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대중에 어필하는 성망으로 보자면 조만식, 홍명희 등 송진우보다 더 그럴싸한 인물이 많이 있었다. 신문사 대표를 지내본 두 사람은 역시 신문사 대표로서 송진우의 영향력과 교섭력을 중시했을 것 같다. 그리고 김성수가 대표하는 자본가 그룹과의 유대관계를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


15일에서 25일 사이에 건준 지도부와 송진우, 그리고 자본가 그룹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어떤 채널을 통해 오고갔는지 밝혀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으로 봐서 긴장된 의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9월 이후 양측의 대립은 이 시기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둔 것이 분명하다. 이 뿌리를 더듬기 위해 오늘도 추측을 좀 많이 해야겠다.


자본가란 식민통치자와 아무런 협력관계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군국주의 정책에 앞장서는 적극적 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 자본’의 간판을 내걸고 통치자와 거리를 두는 입장이더라도 다년간 다방면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협력이 필요조건이었다.


식민통치 종식이라는 체제 변혁 앞에서 자본가 그룹은 갈림길에 섰다. 계급 모순의 해결을 앞세우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들은 무조건 타도의 대상이었다. 비교적 양심적이라고 자부하는 자본가들은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위협이 없었다면 자본가 그룹 속에서 분화 현상이 크게 일어났을지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나 사업가들 중에는 경제 논리에 따라 성실한 경영을 하는 정상적 사업가들과 정치 논리를 끌어들여 부당이득을 노리는 투기적 모리배들이 있다. 투기적 모리배들이 일제 말기 상황에서는 적극적 친일에 발 벗고 나서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정상적 사업가를 자임하는 자본가들은 그들과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다.


자본가 전체에 대한 공산주의의 무조건적 위협이 실재하는 것이었을까? 절대적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위협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자본가 그룹에서 과장해서 인식한 것이 아닐까 나는 추측한다. 원론적으로는 자본계급의 전면적 숙청 주장이 좌익에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 저항의 길이 막혀 있던 식민지배 상황에서는 이상주의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에 비중이 있었겠지만, 식민지배가 해소된 상황에서는 좌익에서도 보다 현실적인 주장이 힘을 얻게 되어 있었다.


여운형을 공격한 사람들은 그를 좌익으로 몰아붙였고, 그를 옹호한 사람들은 이것을 부인했다. 이것은 ‘좌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나는 본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좌익으로 볼 만한 사람이 아니지만, 군국주의 일본의 기준으로는 좌익일 수 있었다. 그를 좌익으로 몰아붙인 사람들은 군국주의 일본의 뒤를 따른 것일 뿐이다.


아무튼, 여운형이 송진우를 통해 자본가 그룹의 협조를 청한 것은 좌익과 자본가 그룹 사이에 타협의 길을 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업가들을 향한 이런 메시지가 들리는 것 같다.


“당신들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식민지배에 협조한 문제를 다소간 가지고 있소. 그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로 건준 사업에 협력하시오. 좌익에는 자본계급 전체를 타도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도 있지만, 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당신들이 민족사회에 자발적으로 공헌하는 책임지는 자세를 보인다면 좌익의 여론도 당신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일부 악질적 자본가들만이 공격의 대상이 될 것이요.”


송진우가 건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자본가 그룹이 이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가들은 건준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총독부만 하더라도 겉모양은 건준과 협력하면서도 속으로는 자본가 그룹과 더 긴밀한 협력을 꾀하면서 최고급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 합리적 사업가라면 체제 변혁이라는 큰 고비에서 안전한 타협의 길을 택하기 쉽다. 중국에서도 국공내전(1945~49)의 막바지에 이르면 대다수 자본가가 공산당에 귀의하고 일부만이 국민당을 따라갔다.


자본가 그룹이 타협의 길을 거부하고 한민당 결성에 나선 것은 미 군정의 성격이 어떤 것이 될지에 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해 기존 체제를 가능한 한 온존시키려는 맥아더 사령부의 정책은 15일의 항복 선언이 나올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맥아더 사령부가 지휘하는 남한 군정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기존 체제 온존을 꾀하리라는 것도 총독부의 정보력으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26일에 이르러 건준에서 직역별 자치회 결성을 독려하고 나선 것은 자본가 그룹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망과 명분만으로는 사업 추진에 한계가 있었다.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필요했다. 산업 현장이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할 만한 조직력을 가진 대안이었고, 그곳은 좌익의 영향력이 큰 곳이었다.


인적-물적 자원을 산업 현장에서 찾게 되고서는 건준의 좌경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본가 그룹과 그 뒤의 보수층이 건준을 통해 체제 변혁에 나서는 길이 이로써 막히게 되었다.


Posted by 문천

보수를 자처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합리성 등 보수주의의 전통적 덕목을 보이지 않는 것을 놓고 “이 나라에 진정한 보수가 존재하는가?”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한탄에 공감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있다. 그러나 정치세력으로서 보수의 모습은 명확치 않다.


제대로 된 보수가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막상 생각해 보면 간단한 것이다.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정치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사회의 바람직한 진로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바람직한’ 진로에 대한 생각은 엄밀히 따지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인데, 국가사회의 수많은 구성원들이 각자 자기주장을 따로 내놓으면 현실적으로 절충해 나가기 어렵다. 정치가 제대로 이뤄지는 나라에서는 국민 요구의 평균점이 대략 파악되어 있다. 그 평균점을 기준으로 빠르고 큰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좌파, 느리고 작은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우파라 할 수 있다.


좌파 뒤쪽의 유난히 성질 급한 사람들이 극좌고, 우파 뒤쪽의 각별히 완고한 사람들이 극우다. 극좌와 극우는 자기 진영 내에서 정치 작용을 활성화하는 건전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교조주의, 모험주의, 패권주의 등의 성향으로 정상적 정치 작용을 저해하는 일이 많다. 이것은 반사회적 성향 인간들의 ‘반(反)정치’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정치의 목적에 역행하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에 많은 국민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비판은 대개 도덕성을 기준으로 행해진다. 합리성 기준의 비판이 보완될 필요를 나는 느낀다. 개별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는 도덕성이 기준이 되더라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합리성 기준의 비판이 필요하다.


65년 전 한국인이 국가 차원의 정치를 시작할 때의 상황에서부터 이 구조적 문제를 검토해 보자.


좌파건 우파건 이념으로서 경쟁하는 마당에서는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도그마를 최소화하고 합리성을 최대화해야 대중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가격을 최소화하고 품질을 최대화하려 노력하는 상품 시장과 같은 성격의 이념 시장이다.


그런데 상품 시장에도 시장 실패 상황이 있는 것처럼 이념 시장에도 시장 실패가 있다. 인프라가 미비하면 어느 시장에서든 합리적 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폭력적 전술에 시장이 좌우될 수 있다. 그런 상황의 이념 시장에서 극좌와 극우가, 아니, 극좌와 극우를 가장한 야심가와 모리배들이 판을 친다. 대중의 자발적 선택의 길을 차단하고 책략을 통해 현실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다.


65년 전의 한국 이념 시장에는 인프라가 참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식민 지배 수준이 저열했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라 해서 똑같이 야만스러운 것이 아니다. 20세기 전반 전 세계의 식민지 가운데 조선처럼 문화 수준이 높은 사회가 지방 차원의 자치 경험도 쌓지 못한 곳이 따로 없었다. 1920년대 ‘문화정책’이 나름대로 식민 지배의 세계적 수준을 따라가려는 노력이었으나 1930년대 일본의 군국화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갔다.


김병로, 이인과 함께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변호사 3인’으로 꼽히던 허헌은 1927년 1월 영국 지배 하의 아일랜드를 관광하고 그 ‘실질적 독립’ 상태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허헌 연구>(심지연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56-57쪽) 당시 세계에서 조선과 비교할 만한 문화 수준을 가진 식민지의 하나가 아일랜드였다.


해방 시점 한국 이념 시장에서 절대적 마력을 가진 상품은 ‘민족’과 ‘민주주의’였다.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 외의 가치를 돌아보지 못하듯, 일제의 억압 아래 굶주렸던 두 가지 이념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두 이념은 너무 절대화되어 그 본질이 오히려 퇴화할 지경이었다. 어떤 고상한 이념도 비판적 검토 없이는 그 실질적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마녀사냥 따위에 이용되기 쉽다.


비민주적인 반동분자들을 배제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는 주장이 스스럼없이 사회를 휩쓸었다. 민주주의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반동분자라도 빠짐없이 참여시킨 다음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반동분자든 뭐든 판별해야 하지 않느냐는 원론적 주장은 투철하지 못한 회색분자로 몰렸다. 만인이 민주적 권리를 가지지만 비민주적 인간은 예외라는 이 민주주의관은 만인이 평등하지만 ‘더 평등한’ 자가 있다는 동물농장 수준이었다.


좌익과 우익이 대립했다고 하지만, 사회주의 노선과 자본주의 노선이 대중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합리적으로 경쟁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압도적 힘을 가진 상표 ‘민족’과 ‘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건 뒤에서 책략과 폭력을 통해 정파적 투쟁이 펼쳐졌다. 이런 풍토에서 노선을 액면대로 밝히는 순진한 중도파는 이용 대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 ‘반탁’처럼 합리성 없는 구호라도 ‘민족’에 겹쳐지기만 하면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제대로 작동되는 이념 시장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대중의 수요를 향해 수렴해 들어가 미세한 폭의 진동(oscillation) 상태로 안정을 취한다. 그런데 해방 정국에서는 대중의 수요가 무시되거나 쉽게 조작되어(쉽게 조작되는 것은 무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각 진영의 극단적 요소들이 진영 논리를 통해 득세하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이뤄졌고, 그 결과는 이념의 양극화였다. 겉보기로는 양극화지만 실제로는 이념의 증발이었다. 경쟁 없는 이념에는 이념의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


각각의 진영 속에서 중도파가 몰락하고 극단파가 득세하는 과정을 이제부터 살펴보며 진영 간 대결이라는 위장막 속에서 어떤 현실적 투쟁이 벌어졌는지 검토할 것이다.


이와 나란히 검토할 또 하나의 변수는 미국과 소련의 역할이다. 냉전 개시를 앞둔 시점에서 두 나라의 대립과 그에 따른 이기적 점령정책이 해방 한국의 이념 시장을 더욱 황폐하게 만든 측면이 크다.


Posted by 문천

 

경성 120만 부민의 치안유지에 대하여 긴급히 협의하고자 19일 오후 1시부터 대륙극장에서 부내 전 총대대회를 개최한다. 아직 통지를 받지 못했더라도 총대는 반드시 시작 전까지 집합하기를 발기인측에서는 바라고 있다. (매일신보, 1945. 8. 18)


경성부내 각 정회에서는 자주적으로 연합하고 부민의 자치 강화와 자위를 담당하기로 되어 全京城町總代聯合會를 조직하였다.

이 연합회는 본부와 각 區에 지부 정회의 조직으로 되어 본부는 총무, 경제, 자위, 위생의 4부로 나누었는데 위원장은 蘇完奎로 결정되었다. 본부사무소는 서대문 2정목 皮魚善성경학원이다. (매일신보, 1945. 8. 24)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8월 24일자 기사의 더 상세한 내용이 김영미의 <동원과 저항>(푸른역사 펴냄) 210쪽에 인용되어 있다.


훌륭한 국체는 국민들의 뿔뿔이 흐터진 영웅적인 행동이나 진부한 이론으로 만드러지는 것이 아니라 반석과 가치 확고한 민중의 일상생활을 토대로 하야 싹이 터나는 것이니 백만 경성시민은 일상생활의 질서를 혼란시키는 일이 업시 오직 조선사람의 하나로서 마껴진 바 직책과 가사에 정진하자고 소완규 외 유지들의 협력으로 결성된 것......


요즘은 “주민 센터”란 간판이 붙어 있지만 대개 “동사무소”라 부른다. 그리고 나이든 분들에게는 “동회”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1955년 4월 동 설치조례 시행을 계기로 공식적 명칭으로서 자치조직 ‘동회’는 행정기구 ‘동’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정회(町會)’라고도 부르던 것이다.


정회-동회를 중심으로 “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사회사”를 탐구한 <동원과 저항>은 흥미로운 시각을 새로 열어주는 면이 많다. 주민의 일상생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추적하는 통상적 연구와 달리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가는 사실들을 역사의 맥락에 맞춰 제시해주는 장점이 있다. 읽어 나가면서 서문의 아래 대목에 실감을 느낀다.


해방은 결코 없던 세상이 새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기존 체제 하의 작은 변화들이 뒤엉켜 해방공간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상의 반란조차 기존의 시스템을 타고 나타났으며 의외로 형태적인 변화는 적었다. 해방 직후 사회상에 대한 조명은 식민지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도달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22-23쪽)


조선의 백성이 식민지 백성이 된 것이고 식민지 백성이 독립된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 실체의 연속성을 제일 분명히 확인해 주는 제도가 백성들의 생활에 가장 밀착해 있던 동회 제도였다. 조선 후기에 동수(洞首)를 대표로 하는 동이 형성된 것도 주민의 자치 욕구와 국가의 통제 필요가 절충된 결과였다. 식민지시대의 정회와 총대(總代)도 양쪽 측면이 비슷한 방식으로 합쳐진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된 사회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동회의 역할이 제기된 것이다.


질서 유지를 1차 과제로, 신국가 건설을 궁극적 과제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지방 조직을 갖춰 나가는 데 인프라로서 큰 잠재적 가치를 가진 것이 도시 지역의 동회-총대와 같은 주민 조직이었다. 자경단, 보안대 등 해방 직후의 질서 유지 조직은 이런 인프라로부터 제일 먼저 도출되었다. 전경성정총대연합회는 이런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고 9월 27일 부산에서 부산부정총대연합회가 결성된 것도 같은 목적이었다.


그런데 9월 초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출범하고 건준이 물러나자 서울시인민위원회 최원택 위원장은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시정 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정회를 부정하고 정 인민위원회를 새로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화요파 출신 공산주의자인 최원택은 기존 정회 조직의 성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위에 옮겨 놓은 8월 24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전경성정총대연합회의 보도 자료에 따라 작성된 것일 텐데, “뿔뿔이 흩어진 영웅적인 행동이나 진부한 이론”보다 “확고한 민중의 일상생활”을 중시한 자세가 공산주의자에게 만족스럽게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원장으로 뽑힌 소완규 변호사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소완규(1902~ ? )는 1932년 변호사 개업 이후 정치범 변호를 많이 맡았고,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동원총진회 등을 통한 친일 행위가 밝혀져 있지만 악질 친일파에 해당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해방 후 전경성정총대연합회를 비롯해 몇 가지 민족사업 조직에서 활동하고 헌법위원으로 있다가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친일인명사전>의 기록에서 떠오르는 모습은 나름대로 양심적인 개량주의자의 인상이다.


생활과 밀착된 주민 조직인 동회(정회)에서는 비교적 보수적인 인물들이 총대로 뽑히는 경향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소의 편향성을 감안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조직과 인물들이 인민의 실제 취향과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는 효과적인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자치 성격을 띤 이런 밑바닥 조직마저 친일 잔재로 규정해 거부한 것은 지나친 교조주의라고 생각된다.


해방 당시에 일반 인민이 바란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수십 년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자결의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군국주의의 폭력성을 벗어나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 전쟁 말기의 궁핍에서 벗어나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더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행복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장치로 민주주의가 시행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강한 정치적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 인민의 이런 소박한 욕망을 일부러 짓밟으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민이 바라는 것보다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모두 “인민의 정치”, “인민을 위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 열심히 궁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민에 의한 정치”에 대해서는 생각이 아쉽게 느껴진다.


풀뿌리 주민 조직을 활용하려 한 건준의 노력은 적절한 것이었다. 총독부 정무총감의 협조 요청은 건준 활동의 최소한의 근거였고, 여운형, 안재홍 등 건준 인사들의 명망은 인민에게 거부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 근거와 조건 위에서 건준 소기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지방 주민 조직과의 접촉면을 꾸준히 지키고 키우는 것이 사업의 기반조건 확충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9월 초 인공 설립을 계기로 그 접촉면이 위축되면서 인민 대중의 모습이 정치 현장에서 흐려지고 말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