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천만동포에게 고함

친애하는 국내외 동포자매형제여 파시스트강도의 최후의 疊壁을 고수하던 일본제국주의는 9月 2日에 降書에 서명을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의 패망으로 인하여 擧世가 기뻐 뛰는 중에 있어서 조국의 해방을 안전에 목도하면서 3천만 한국민족이 欣喜 雀躍하는 중에 있어서 본정부가 근 30년간에 주야로 그리던 조국을 향하여 전진하려는 前夕에 있어서 일찍이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본 정부를 애호하고 독려하던 절대다수의 동포와 또 이것을 위하여 본정부와 流離轉輾하면서 공동분투하던 동포의 앞에 본정부의 포부를 고하려 할 때에 본주석은 비상한 감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일국의 흥망과 일민족의 성쇠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운이 단절되는 데 있어 수치심 因素가 허다하였다. 하면 금일의 조국이 해방되는데 있어 刻苦하고 壯絶한 노력이 있었을 것은 3척의 동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허다한 우리 선열의 고귀한 열혈의 대가와 中·美·蘇·英 등 동맹군의 英勇한 戰功이 없었으면 어찌 조국의 해방이 있을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우리가 조국의 독립을 眼前에 전망하고 있는 이때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선열의 업적을 추상하여 滿腔의 경의를 올릴 것이며 盟軍의 위업을 선양하여 열열한 사의를 표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현 계단은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계단이다. 다시 말하면 復國 任務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계단이다. 그러므로 현하 우리의 임무는 번다하고도 복잡하며 우리 책임은 중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조국의 독립을 완성함에는 우리의 一言 一句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다 영향을 주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매사를 임할 때에 먼저 치밀하게 분석하여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명확한 판단 위에서 용기 있게 처리하여야 한다.

본 정부는 이때에 당면정책을 如左히 제정 반포하였다. 이것으로써 현 계단에 처한 본 정부의 포부를 中外에 천명하고자 함이며 이것으로써 前進路線의 지침을 삼고자 함이다. 또한 이것으로써 동포제위의 당면노선의 지침까지 삼으려하는 것이다. 친애하는 우리 동포자매형제여 우리 조국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민주단결을 완성하며 국제간의 안전과 인류의 평화를 증진하기 위하여 본정부의 당면정책을 실행하기에 공동노력하자.


◊ 臨時政府 當面政策

1) 본 임시정부는 最速期間內에 곧 입국할 것.

2) 우리 민족의 해방 及 독립을 위하여 혈전한 中·美·蘇·英 등 우방민족으로 더불어 절실히 제휴하고 연합국헌장에 의하여 世界一家의 안전 及 평화를 실현함에 협조할 것.

3) 연합국 中에 주요한 국가인 中·美·蘇·英·佛 5强에 向하여 먼저 우호협정을 체결하고 外交途經을 別附할 것.

4) 盟軍駐在期內에 일체 필요한 事宜를 적극 협조할 것.

5) 평화회의 及 각종 국제집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應有한 발언권을 행사할 것.

6) 국외임무의 결속과 국내임무의 전개가 서로 접속되매 필수한 과도 조치를 집행하되 전국적 普選에 의한 정식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외 각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집단, 각 지방대표와 저명한 각 민주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

7)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된 즉시에 본정부의 임무는 완료된 것으로 認하고 본 정부의 일체 직능 及 소유물건은 과도정권에게 교환할 것.

8) 국내에서 건립된 정식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한 신 헌장에 依하여 조직할 것.

9) 국내의 과도정권이 성립되기 전에는 국내 一切 질서와 대외 一切 관계를 본 정부가 負責 유지할 것.

10) 교포의 안전 及 귀국과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구제를 신속 처리할 것.

11) 敵의 일체 법령의 무효와 신 법령의 유효를 선포하는 동시에 적의 통치하에 발생된 一切罰犯을 사면할 것.

12) 敵産을 몰수하고 敵僑를 처리하되 盟軍과 협상을 진행할 것.

13) 敵軍에게 被迫 出戰한 韓籍軍人을 국군으로 편입하되 盟軍과 협상 진행할 것.

1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賣國賊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


大韓民國 27年 9月 3日

大韓民國臨時政府

國務委員會 主席 金九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일본인 통치의 종식이 목전에 다가온 상황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대표한 김구의 성명은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백성으로 교육받고 살아온 우리 눈에는 이 성명의 내용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당시에 칼자루를 쥐고 있던 미군 측에서는 군정의 통치권을 침해하는 월권으로 보일 내용도 있고, 당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주어진 상황을 순조롭게 풀어가는 길이 될지 의아하게 생각될 만한 내용이 있었다.


먼저 호소문 속에 밑줄 그은 부분을(필자가 그은 밑줄임) 보면 해방의 공로가 선열과 연합군의 양쪽에 있다. 임정의 공로라고 하기가 겸연쩍어서 “허다한 우리 선열”을 내세웠겠지만, 그 선열의 자격을 임정이 대표한다는 뜻은 드러내 표현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그래서 임정이 해방의 주체로 나서겠다는 것이니까. 선열의 뜻을 이어받은 임정이 대한민국의 주인 입장에서 도와준 연합군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선열이나 임정이 일본을 격파한 공로가 그리 크지 않았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아무 공로도 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임정이 이렇게 주인 행세 하고 나서는 것을 연합군 측, 특히 군정 관계자들이 본다면 재외 한국인의 집단 하나가 종전에 편승해서 한국을 집어먹으러 달려드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은 파렴치한 획책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연합군은 힘들여 전쟁을 끝내놓고, 일본의 통치 지역에 대한 점령 방침까지 발표해놓았다. 한국은 미국과 소련이 분할해서 관리하기로 해놓았다. 그런데 임정이 “아, 그 동안 수고 많았어요. 이제 도움이 더 필요 없으니까 잘 가세요. 고맙습니다.” 하는 것 아닌가. “당면정책” 중 3조, 5조, 9조, 11조 등을 보라. 완벽한 주권국가 노릇을 즉각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임정에게 그런 자격과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연합국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런 과정 없이 불쑥 나서서 주인 행세를 하니 “최소한의 예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임정 사정을 알 만큼 아는 사람이 보더라도 임정에게 큰 기대를 걸 모퉁이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자기 앞가림이나 제대로 할지 의심스러운 장개석 밑에서 놀던 조무래기들 아닌가.


물론 우리는 안다. 장개석 밑에 매여 있던 것이 어떤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는지. 겉으로 드러난 창대한 업적은 없더라도 어려운 세월 동안 그 깃발 하나 지켜온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위한 어떤 훌륭한 생각들이 임정을 중심으로 어떻게 펼쳐져 왔는지.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 한국인끼리나 알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폴란드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망명정부를 지키고 연합군에 백만 가까운 병력을 제공하고 국내의 독립운동도 치열했던 폴란드를. 그 폴란드가 패전국 일본보다 더 참혹한 대접을 받지 않았던가. 연합군은 힘이 뛰어난 존재였지, 덕이 뛰어난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 임정이 그들에게 폴란드보다 좋은 대접을 받을 밑천이 무엇이 있었는가?


이 성명서를 본 미국 관계자들 중에는 며칠 전 임정 요인들이 중경의 대사관을 찾아와 귀국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얘기가 떠돌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빨리 돌려보내주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으니 빨리 귀국시켜달라고 한 얘기. 미국의 도움으로 귀국한다면 미 점령군이나 혹은 국무성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망록을 남겼다는 얘기. 그러던 임정이 해방된 나라의 주인 입장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나선 것은 미국인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없는 행위였다.


임정은 당시 한국민족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구체적 형태를 가진 조직으로서 물질적 자산이라기보다 힘겹게 지켜온 민족의 깃발로서 상징적 자산이고 정신적 자산이었다. 그 가치를 잘 살려내는 길은 조직의 힘을 키우는 데보다 민족의 뜻을 잘 대변하는 데 있었다. 대다수 민족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연합군 측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입장과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참으로 임정이 민족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임정이 참으로 ‘임시정부’ 역할을 해내는 길이었다.


8월 30일 임정 요인들의 미 대사관 방문과 오늘의 성명서를 보면 임정의 자세가 걱정스럽다.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자기네를 빨리 돌려보내줘야 한다는 것은 너무 현실주의적으로 보이고, 선열의 공로를 내세워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별로 해놓은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인들은 우리에게 큰 신뢰와 기대를 걸고 있으며, 우리가 그 기대에 전력으로 부응한다면 한국의 새 질서를 원만하게 형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일의 성공 여부는 점령군의 노력에도 크게 달려 있는 것이니, 우리는 점령군의 입장도 가능한 한 존중하겠다. 한국인과 점령군의 협력관계를 원활히 하는 것을 우리의 사명으로 삼겠다.”


이런 겸손하고 솔직한 태도가 임정의 성공을 바라볼 수 있는 자세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산주의자들을 들먹이는 것도, 선열의 공로를 과장하는 것도, 큰 변화를 겪고 있던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 잔꾀였다고 생각한다. 연합군은 덕이 없고 힘만 있는 존재였는데, 힘은 없어도 덕이 있는 존재로서 임정이 가치를 세워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힘이 있는 척 잔꾀를 부리는 것은 덕도 없고 힘도 없는 존재가 되는 길이었다.

Posted by 문천

 

일본과 연합국측과의 항복협정조인식은 2일 오전 9시 橫濱近海 40哩의 지점에 投錨한 美艦 ‘미조리’號上에서 거행되어 연합국군최고사령관 맥아더원수, 미군대표 니미츠원수, 영군대표 푸리이거대장, 소련대표 체레부양코중장, 중국대표 徐永昌 軍令部長, 호주대표 가게에미대장, 네덜란드대표 헬푸제독, 프랑스대표 룩렐크大將, 기타 각국대표와 일본대표 重光외상, 梅津참모총장, 兩 全權과의 사이에 거행되었으며 同 9시 15분 조인을 전부 완료하였다.

(...)

정각 9시 맥아더원수의 사회하에 조인식은 개시되었다. 1尺 5寸에 1尺 가량되는 항복문서 2통이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다. 日本全權은 각국 대표 맞은편에서 테이블로부터 5步가량 되는 위치에 重光, 梅津 兩全權을 最前列로하여 3열로 늘어섰다. 맥아더원수의 지시에 따라 먼저 重光외상이 문서 2통에 각각 서명하고 이어서 梅津 참모총장의 서명이 끝나자 연합국측의 서명으로 들어가 제일로 최고사령관 맥아더원수가 서명하였다.

맥아더원수의 뒤에는 웬라이이트美中將 파아시발英中將이 서 있다. 다음으로 미국대표 니미츠원수, 중국대표 徐永昌 軍令部長, 영국대표 프레사대장, 소련대표 제레비얀코중장, 호주대표 쁘레미대장, 캐나다대표 코스그레이브大佐, 佛國代表 쿠레르크대장, 네덜란드대표 헤루후릿히제독, 뉴질랜드대표 이싯공군중장의 순서로 순차 서명이 진행될 때 重光, 梅津 兩全權을 위시한 日本側隨員은 부동자세로 냉정히 서명하는 각 대표를 주시하였다.

이리하여 오전 9시 15분 쌍방의 서명을 종료하고 항복문서의 1통은 맥아더원수로부터 일본측에 수교되어 重光, 梅津 兩全權 이하 日本側隨員은 미조리호를 退艦하여 玆에 항복문서조인식은 종료한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02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미주리 함상의 항복 조인식. 잘 알려진 장면이다. 나도 학생 시절부터 눈앞에 보듯 잘 알고 있던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의 어색한 점 하나를 근년에 와서야 알아보게 되었다. 항복하는 자가 ‘일본국’도 아니고 ‘일본 천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항복의 주체는 일본 정부와 일본 군부였다. 위 기사에도 ‘일본대표’, ‘전권대표’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시게미츠 외상은 정부 대표였고 우메즈 참모총장은 군부 대표였다. 두 사람은 천황의 ‘항복 명령’에 따라 항복한 것이고, 연합군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전쟁 책임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 있을 뿐, 일본국과 일본 천황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항복 조인식에서도 천황은 초연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8월 4일에 적은 것처럼 연합국들은 독일에 대해 가혹한 점령정책을 펴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전쟁 책임이 독일 국민 전체에게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1947년 여름, 냉전이 공식화된 뒤에야 독일을 ‘살리는’ 마셜 플랜이 도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더 오래 버틴 일본에게 이리도 너그러웠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래 버틴 만큼 원한도 더 쌓였을 텐데.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미국의 의도는 널리 알려져 있고 나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 의도가 다른 연합국이나 미국 내 여론의 견제를 받지 않고 관철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


연합국 중 일본에 대한 원한이 가장 강한 것은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약자의 입장에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도 공산당의 도전 앞에서 미국에 의존하는 입장에 있었다. 중국은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발언권이 크고 일본에 대해 큰 이해관계를 가진 연합국은 소련이었다. 미국도 소련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일본 처리의 가장 큰 기준이었다. 소련이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까닭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원자폭탄의 존재가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내 여론이 그리 예민하지 않았던 것은 동양인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이었다. 가해자도 동양인이고 피해자도 거의 다 동양인인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백인 사이의 범죄였던 독일의 경우와 관심 수준이 달랐다.


이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마닐라 학살’의 전범재판이었다. 1945년 2월 미군의 진격 앞에서 주필리핀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대장은 휘하 전 부대에 마닐라 철수를 명했는데 이와부치 해군중장이 이에 불복, 해병대 1만 명을 이끌고 마닐라 사수에 나서며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와부치는 함락 직전에 자살했는데, 직접 책임이 없던 야마시타가 전범재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아 큰 논란을 일으켰다. 서양화되어 있던 필리핀에 대한 전범재판소의 시각이 다른 ‘동양’ 지역에 대한 것과 달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더 심한 가혹행위의 책임자인 731부대의 재판 면제에 대해서는 당시 여론의 항의가 거의 없었다.


1945년 8월 시점에서 미국의 소련에 대한 태도는 경쟁과 적대 사이의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이 애매한 상태로 인해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맥아더는 이례적으로 큰 재량권을 누렸다. 맥아더는 한 개인으로서 전후 일본과 한국의 진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매우 독특한 개성으로 일화도 많이 남긴 사람이고 그 특성도 여러 가지가 지적되어 왔다. 그 경력을 더듬어보면서 일본과 한국의 상황에 그가 영향을 끼치는 데 크게 작용했을 만한 특성을 생각하니, 전쟁을 좋아했다는 점이 가장 크게 보인다. 그는 전술에 뛰어난 재능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그의 전쟁광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경적(輕敵)’ 경향이다. 그는 적세를 실제보다 크게 평가한 일이 없었다. 참모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묵살하면서 작전을 벌인 일이 수없이 많았다. 참모들도 그의 취향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44년 말 필리핀 탈환작전에 나설 때 맥아더의 참모진은 루손 섬의 일본 병력을 137,000명으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287,000명이었다.


경적으로 인해 실패한 작전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치열한 전투가 유발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그의 화려한 전공이 늘어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경적’ 쪽으로 치우쳐 주장함으로써 ‘확전(擴戰)’의 계기를 만드는 책략을 쓴 것 같다.


그는 참으로 전투를 확대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42년 4월 남서태평양관구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태평양전쟁에 뛰어든 그가 주도한 대표적 작전인 ‘카트휠 작전’에서도 그 재능을 알아볼 수 있다. 1943년 3월 태평양군사회의에서 채택된 이 작전에서 그는 종래의 ‘섬 건너뛰기(hopping islands)’ 전략을 ‘재래식’으로 격하하면서 전략적 요충에 공격을 집중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단시간 내에 전선을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전략이었다.


맥아더가 일본과 한국을 통치하면서 내세운 ‘반공’이 얼마만큼 그의 진정한 정치사상에 입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동아시아 지역에 군사적 긴장을 일으키고 전쟁의 기회를 늘리는 길로 그가 생각했을 것은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그의 ‘전쟁광’ 성향을 언급했는데, 통상적 용례에 비춰보면 ‘전쟁광’ 규정은 적절치 않다. ‘군사적 모험주의자’ 정도 표현이 더 적당할까?


전쟁영웅의 이미지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맥아더의 약점 하나가 1979년에 드러났다. 1935년 커먼웰스로 준독립국이 된 필리핀에 초빙되어 ‘필리핀 건군의 아버지’ 노릇을 하던 맥아더가 1942년 초 일본군의 침공을 앞둔 시점에서 케손 대통령에게 “그 동안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50만 달러를(<Wikipedia>에 의하면 지금 돈 740만 달러의 가치라 한다.) 받은 사실을 한 역사학자가 밝힌 것이다.


압도적인 적군의 침공을 코앞에 두고 이런 돈을 주고받는 장면, 과연 필리핀에서만 벌어진 것이었을까?


Posted by 문천
2010. 8. 31. 23:09


이번에는 다녀온 지 열흘만에 쓴다. 보통 그 날이나 늦어도 다음날 아침까지 쓰는데, 이번에 많이 늦춘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 한꺼번에 작용한 게 아니라 한 가지씩 차례로 원인이 떠올랐다.

우선, 다녀와서 <해방일기> 준비 때문에 경황이 없었다. 한 달을 넘겨 틀이 겨우 잡힌 셈인데, 이제 1주일 정도는 로드맵을 만들어 가며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녀온 후 이틀 동안 인사불성으로 매달렸다. 그래서 사진만 먼저 올려놨다.

이틀이 지나 이제 쓸까? 생각하니, 이번 방문에서 이문숙 선생 역할이 두드러졌던 생각이 난다. 친구분이나 친척분 모시고 갈 때는 내가 어느 정도 통역 노릇을 맡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선생과 어머니 사이의 교감이 하도 원활해서 아내와 나는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잘 쉬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이 선생께 "이번 방문기는 이 선생께서 쓰시죠." 농담처럼 말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이 선생께 양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버텨보기로 했다.

아니나다를까, 한 이틀 더 기다리니 이 선생께서 메일을 보내왔다. 왜 방문기 안 쓰시냐고 채근하면서 간략하게나마 자기 관점과 소감을 보내줬다.

마지막으로 찾은 핑계는 이번엔 기왕 늦은 김에 다른 식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늘 뵙고 오자마자 많이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쓰자고 허겁지겁했는데, 한 번 최대한 늦춰서,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가라앉아서 남는 생각을 적어보기로. 그래서 내일 가 뵙기 전에 이제 앉아서 쓴다.

이 선생과는 근 열흘 전부터 날자를 잡아 약속해 놓았고, 마침 아내도 쉴 수 있어서 셋이 갔다. 이천 시내에서 점심을 하고 1시쯤 도착했다. 두 사람을 먼저 올려보내고 사무실에 들렀다가 5분쯤 후에 올라가 보니 벌써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편안하게 앉아 계시다.

내 얼굴 보일 때마다 얼굴이 확! 피어나시던 것이 요즘은 덜하시다. 힐끗 쳐다보고 "응, 너도 왔냐?" 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까딱 하신다. 참 많이 크셨다. 오늘처럼 선발대가 있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혼자 갈 때도 원장님이 일러드려 놓기 때문에 예상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무리 미리 말씀드려 놓아도 잊어먹고 있다가 새롭게 기뻐하시는 맛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생활의 주체로 자리가 든든히 잡히셔서 의존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시는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없을 때 하신 말씀 한 가지를 이 선생이 메일로 일러준 것을 봐도 나를 상당히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비키신 사이엔 저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서 역사를 했다, 두 사람 다 공부 한 가지밖에 모르는데 제대로 잡았다..그렇지 않냐? 역사가 공부의 제일 중심이잖냐, 그걸 해야 ..하시고 더 말씀을 하실 것 같았는데 김선생님이 나타나시자 선생님 들으시라고 저놈이 미련해서...로 넘어가셨죠."

다른 분 모시고 올 때, 모처럼 오신 분과 가급적 접촉을 많이 가지시도록 최대한 꽁무니를 빼는데, 이 선생 앞에서는 굳이 꽁무니를 뺄 필요도 없었다. 겨울에 나랑 함께 왔었고, 봄에 혼자 한 번 왔었는데, 관련된 기억이 많이 활성화되신 것 같다. 구체적인 일들이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많지 않아도, 어떤 태도로 대하던 사람인지 분위기는 거의 되살아나신 것 같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교수 모드'로 돌입하셔서, 각별히 가까이 하시던 제자와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이 선생도 메일에서 이야기를 자가발전하시고, 한 주제를 길게 이어가시는 것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는데, 다 생각나지 않고, 역시 이 선생이 메일에서 짚어준 이야기가 나도 또렷이 생각난다. 이화여전 다니실 때 말씀을 하다가 불쑥 김옥길 선생님 이야기가 나오셨다. "이 천지 모르는 여자애가 이전에 다니겠다고 갔는데, 딱 옆에 앉은 게 김옥길이더란 말이야!"

함경도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중학 과정을 통신강의로 때우고 동급생들보다 두어살 많게 이화여전에 들어가신 어머니, 갑자기 서울의 양가집 교수들 틈에 끼어들어 이질감을 많이 느끼신 이야기는 익히 들은 바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이질감에도 등급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고녀를 막 나온 부잣집 여식들이 대다수였는데, 그들과의 이질감은 2등급이고, 1등급 이질감의 대상은 알짜 예수쟁이들이었던 모양이다. 그 이질감이 당시에도 충격적이었고, 그 후 교수생활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김옥길 선생님과의 '충돌'이 아직까지도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경성제대로 옮겨 희귀한 '조선어문학과 여학생' 노릇도 편안한 학생 노릇이 아니었겠지만, 이화여전 학생 노릇도 어머니께는 그리 편안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학교에 나가기 시작해서 숙대에 몇 해 계시다가 58년엔가 59년엔가 이대로 옮기실 때 '친정'으로 돌아가는 편안함은 별로 안 느끼셨을 것 같다. 옮기고 얼마 되지도 않아 4-19 때 개혁파 쪽으로 목소리를 좀 내다가 헛발질로 끝나고 말았을 때,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김옥길 선생님이 아마 어머니와 이화의 관계를 단적으로 대표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혁파가 찌그러지고 이대의 앙샹레짐이 복원될 때 김 선생님이 총장을 맡았다. 김 총장님처럼 자신만만한 분이 동기동창으로서 학교 책임을 맡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학교 떨려날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다. 보호막 노릇도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 스타일을 용납하지 않는 질곡이기도 하고. 어머니의 교수생활에는 김 총장님에 대한 고마움과 답답함이 엇갈려 깔려 있었다.

내일은 혼자 갈 참이다. 1940년대 전반 이화여전-경성제대 다니실 때 얘기를 좀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9. 21  (2) 2010.09.24
10. 9. 11  (0) 2010.09.11
10. 8. 14  (0) 2010.08.15
10. 8. 4  (2) 2010.08.05
10. 7. 20  (5) 2010.07.21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