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중장은 서울에 들어온 이틀 후인 11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었다. 군정을 시작하는 사령관의 관점과 입장을 폭넓게 보여준 회견이므로 미군정의 성격과 문제점을 상당 부분 여기에서 알아볼 수 있다. 회견 기사를 옮겨 싣고, 몇 가지 음미할 점에 간단한 생각을 붙인다.


11日 오후 2시 40분 존R.하지중장은 아놀드 소장과 헤이워드 중좌를 대동하고 시내 각 대표신문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제1성을 발하였는데 (略)사령관과의 회담은 2시간 40분에 亘하였으며 (略) 이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 부임한 이래 여러분을 만날 기회를 얻은 것은 참으로 반가웁다. 나는 이 기회에 소신을 몇 가지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내가 조선에 온 것은 연합군을 대표해서 온 것으로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 맥아더원수는 곧 나의 상사이다.


나는 군사방면의 일만을 맡은 만큼
이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의 사명을 말한다면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는데 그것을 勵行하는데 첫째 사명이 있고 둘째 사명은 조선인의 인권과 종교상의 권리를 확보하여 안녕질서를 유지함으로서 수립된 정부가 있으면 그 정부로 하여금 조선을 맡도록 하는데 있다.

(군정이란 군사적이면서 정치적인 사업이다. 군정 사령관은 군정 지역의 군사적 수장일 뿐 아니라 정치적 수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자리를 맡으면서 “군사방면의 일만을”, 즉 무력행사의 역할만을 맡았다고 하는 제1성에서 군정의 성격에 대한 하지의 이해에 근본적 한계가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포고를 銘記하라.


또한 여러분이 알고자 원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맥아더원수의 第1, 第2, 第3 각호의 포고문일 것이다. 만일 아직도 이것을 읽지 못한 분이 있다면 잘 읽어주기를 바란다. 따라서 이
포고문을 읽으므로서 여러분이 물으시려는 의문은 저절로 해명될 줄 안다.

(맥아더 포고문 내용 이외의 의문은 품어서 안 된다는 말 같다. 남한 군정 사령관이라면 남한의 일에 대해 독자적 책임을 가져야 할 입장이다. 그러나 하지는 연합군사령부 휘하 미 24군단 군단장으로서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체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카이로회담에서 작정한 것으로 말하면 조선의 자주독립은 곧 되는 것은 아니고 당분간 어느 정도의 시간을 거쳐 적당한 시기가 도래한 후래야 되리라고 했다.


이 적당한 시기라고 하면 곧 조선 안의 치안이 잘되고 못됨에 달렸다. 그 말은 곧 조선인이 치안을 잘 해나가고 못해 나가는 곳에 있고 잘 해나간다는 것은 각 개인이 맡은 직능에 따라 평온하게 일상대로 종사하는 것이다.


조선정부가 수립된다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로서 조선백성을 위하고 조선백성으로 되는 정부래야 할 것이다.

(하지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물론 미국식 민주주의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의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우익의 민족주의와 대칭되는 좌익의 구호로서, 미국식 형식적-정치적 민주주의와 다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였다. 풍토에 관계없이 미국식 민주주의가 무조건 최고라고 하는 순진하다면 순진하고 독선적이라면 독선적인 하지의 민주주의관보다 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한국 정책을 미국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것은 맥아더원수의 의사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연합군 의사에 의하여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잠정적 방편으로서 현존한 조선의 행정기관을 이용하려 한다. 지금의 현존기관은 지금 있는 사람이 운영해 간다는 것이 아니고 기계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단지 기계적인 역할만을 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승만 정권의 통치체제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체제를 많이 답습하게 되고, 이에는 미군정의 일제 통치체제 온존이 큰 역할을 했다. 군정 출범 당시에 맥아더 사령부나 미 국무부가 그런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더 살펴보려 하지만, 적어도 하지는 편의적인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여러분이 공장원이라면 단지 그 공장의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새 기계가 놓이기까지의 일을 방편적으로 맡아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태평양육군총사령부의 조선주민에 고한다는 포고 第1號, 第2號에 정부 공동단체 及 기타의 名譽職員 及 고용인 및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온갖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 고용인은 유급 又는 봉사의 別을 불문하고 또한 제반 중요한 직무에 종사하는 것은 별명 있을 때까지 그의 정상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하여야 한다라는 조목이 있다. 여러분은 특히 이 점에 유의하여 범사를 勵行해 나가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것을 잘 遵行한다는 것은 곧 신생조선의 첫 출발이 되고 다음 출발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잘 알아주어야 한다. 물론 조선인 여러분은 어떠한 방법으로 언제 조선정부가 수립될 것인가 가장 주목의 핵심일 것인데 그렇다면 그럴수록 그 시기의 齊來는 조선인의 행동 여하에 달렸다고 보겠다. 그 행동여하가 곧 정부수립을 좌우할 것으로 믿는다. 여러분이 동경하는 정부수립은 여러분의 단결 노력이 종래부터의 일에 충실히 종사하는데 있다고 본다. 즉 농사하는 농민은 농사에 상인은 상업에 또한 다른 생업을 가진 이는 그 생업을 계속하여 그 직능에 따라 전념한다는 것은 곧 조선독립과 정부수립을 위하고 노력하는 것이 된다. 그 반면에 조선사람 사이에 알력이라던가 반란이 생겨 치안을 교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곧 조선독립을 방해하는 자인 것이다.


미군이 진주해 온 후인 현재 조선에는 문자 그대로의 절대한 언론자유가 있는 것이다. 미군은 조선사람의 사상과 의사발표에 간섭도 안하고 방해도 안할 것이며 출판에 대하여 검열 같은 것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언론과 신문의 자유는 여러분들을 위하여서 대중의 論을 제기하고 또한 여론을 소소하게 알리는데 그 직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미군은 언론자유에 대하여 취재를 방해하고 검열을 하려하지는 않으나 그것의 정당한 의미의 치안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이런 경우는 별도로 강구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필요까지는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조선에 온 뒤로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신문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나는 바라노니 부디 여러분은 이 기회를 조선신문사상의 일대 혁신전환단계로 삼아 주기를 바란다.

(하지는 정말로 솔직하고 정직한 ‘전형적 군인’이었던 것 같다. 조선에 오기 전에 조선에 관해 공부한 것이 있다는 거짓말은 못하지 않는가. 와서 사흘 만에 조선이 처해 있는 지경을 잘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되면서 과달카날 섬이 어떤 곳인지 공부하는 정도로 조선에 관한 공부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미국의 제 신문과 같이 신문의 역할을 다 하는데 있어서는 대중을 지도하고 여론을 일으키는 지대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껏 침체되고 은폐된 언론은 민중을 위하여 개방하라고 말하는 중장은 이때 의미 있는 듯 일동을 휘돌아보며 마도로스파이프에 담배를 한 대 담아 유유히 연기를 토하며 말을 계속한다. 다시 조선에 대한 가지가지의 신정책을 펼 기본 자료가 되는 수첩을 꺼내든 사령관은 화제를 돌려 구체적인 방면으로 진전시켜 행정방면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지금까지 하지의 이야기는 참모들의 손을 어떤 식으로든 거쳐서 준비되었을 것이므로, 하지 개인의 관점보다 하지 사령부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에 비해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하지 개인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기왕의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조선총독인 셈으로 특히 북위 38도 이남 조선에 있어서 여러 가지 시책을 펴기에 주력하겠다. 행정의 중점은 가급적 속히 조선정부가 수립되고 조선사람이 조선을 다스려 주기를 원하는데 있다.


나는 軍門의 武弁으로서 외교관도 아닌 동시에 외교관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조선에 대한 시정방침이 확립되면 그 때는 종래의 예와 같은 기만정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정당당히 일반에 널리 공개하고자 한다. 여러분이 대동단결해서 각 직능에 따라 충실히 종사하여 재산을 지키면 그것이 곧 여러분의 것이 되고 국가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의 눈에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군인과 외교관, 두 종류뿐인 모양이다. 바로 이어 “예와 같은 기만정책”을 안 쓰겠다고 한 데서 그것이 외교관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 같다. 미군정이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많이 일으키게 되는 것은 군인과 외교관 사이에 ‘정치가’의 입장을 설정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군제조직은 제한되어 있다. 나를 보조하는 사람들은 晝宵를 불문하고 조선의 과거 현재를 통해서 조선이 어떠한 것인가를 연구 조사하고 있다. 연구의 결과에 따라 조선의 현실을 잘 파악하여 여러 각도로 개정된 안이 나오게 될 줄 안다. 특히 나는 신문인을 통해서 도시뿐만 아니라 방방곡곡의 부락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정부수립을 위하여서 충실히 노력해 달라는 것을 부탁하는 바이다.


나는 아직 지방의 여러분들과 접촉이 없는 것을 크게 유감되게 생각하는 만큼 신문보도로서 상세히 진의를 깨달아 주기를 바란다.


현재 조선 안에는 여러 종류의 단체와 조직체가 있으며 이들 중에는 나에게 면회를 청하는 사람도 많은데 이들의 의견은 거의 다
위대한 조선 건설을 바란다는 一點에 귀착되고 있다. 만일 이와 같이 여러 단체가 다 훌륭한 조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 지도자들은 하루바삐 대동단결하여 알력을 芟途하고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小我를 버리고 大我에 從하여 나와 협력하고 나의 뜻에 쫓아 주기를 바란다. 나는 통일된 의견과 방책을 듣고자 12日 오후 2시 반에 부민관에서 각계 각 조직체의 대표 2人 式을 만나 나의 일에 협조할 것을 希願하고자 한다.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마 “great Korea”란 표현이었을 것 같다. “위대한 조선”보다 “통일 조선”으로 해석해야 할 말이 아닐지. 분할 점령으로 인한 민족 분단의 위험이 이미 떠올라 있었던 사실은 이 밑의 질문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경성지구와 경기도지구는 제24군단 제7보병사단장 아놀드 소장이 책임지고 치안에 관한 문제와 다른 제반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다른 지방은 앞으로 미군이 더 상륙해옴에 따라서 점차로 행정을 펴고자 한다. 한편 나는 매일 각 지방으로 부하 先遣隊를 파견하여 실정이 어떠한가를 조사시키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미군이 가는 곳마다 반가히 맞이하고 잘 협조하여 줄 줄 알고 잘 협조가 됨에 따라 지방행정도 잘 될 줄로 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동안 나에게 들어온 몇 가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고자 한다.


1) 제1문제는 일본재주의 조선동포 구제문제이다. 일본에 있는 조선동포는 매우 비참한 경우에 빠져있다는 정황을 듣고 나는 곧 맥아더최고지휘관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조선동포를 고국으로 돌아오도록 해 달라고 依願하는 전보를 쳤다.


그러나 今明日間에 이것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비단 조선사람뿐이 아니라 각기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므로 운송상 속히 안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의 선박은 동양에 있어 제한을 받고 있을뿐더러 아직도 海面에 기뢰 등의 장애물이 많이 游浮하고 있는 관계상 선박이 민첩한 행동을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함대는 전력을 다하여 장애물을 제거하고 항만을 열고자 노력하며 수송에 있어서는 음식물 의료기관을 우선적으로 실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이러한 긴급한 수송을 마친 다음 많은 사람을 수송하려 하므로 단기일에는 다 되지 않을 줄로 안다.


2) 제2문제는 학교 재개에 관한 것이다. 조선인을 위한 교육기관은 될 수 있는 한 속히 개교시킬 예정이다. 우선 초등학교를 개학하고 잠정적으로 중등, 전문, 대학을 개교할 터이다. 그러나 제일 큰 문제가 조선의 국어교육이고 이에 대한 교재편찬과 이밖에 다른 교재선택 과목결정 등의 제 문제로 인하여 어느 정도 기간이 필요할 줄 안다.


3) 제3문제로는 통화 등 경제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포고 제3호를 보면 잘 알 것이나 조선은행발행의 圓 紙弊로 통용하게 된다.


그리고 未久에 공정한 물가와 노임을 정하여 경제면의 정상을 도모하고자 한다. 나는 조선 내 물가가 없는 실정에 비추어 부하장병들에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사지 말도록 명하고 있다. 즉 미군이 물건을 사면 통화가 새로 생기고 물자는 부족하게 되므로 조선민중의 생활에 위협을 주어서는 안 되겠으므로 미군은 미군의 것을 가지고 자급하려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쓰고 남는 것은 정당한 값을 치루어 쓰겠다. 또한 미군은 앞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많이 사용하려 하는데 이에 임금은 지방의 軍 政府에서 책임지고 지불할 터이다. 일본인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조선사람을 사용하여 임금을 지불하면 조선노동계급의 생활이 윤택해 지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중장은 대략 叙上과 같은 요지의 소신을 말한 다음 일동에게 담배 피우기를 권해 가며 국제외교 즉 워싱턴 國務院에서 결정된 사항에 들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조선이 언제 독립되느냐의 문제는 여러분 자신의 문제이므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두고 무엇이고 물으라고 말하며 조선 력사를 통해서 자기는 조선인의 위대한 것도 잘 알고 민족을 찬양하느니 만치 조선에 머지않아 자유로운 날이 있을 것을 확신하노라고 말하며 일문일답의 질문으로 들어갔다.


(問) 軍制에 있어 현존 행정기관을 이용하는 所以는?


(答) 軍制나 軍政은 사실에 있어서 퍽 엄격한 것이므로 이 제도를 쓰지 않고 우선 행정기관을 이용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존 행정기관에 있어 일본인이 계급에 있어 상위에 있고 조선인이 그 밑에 있게 되었지만 이때 다시 한 번 자중하여 조선인은 조선인을 위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제반 일을 살피고 실행하면 곧 조선을 위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 방편적이므로 곧 새로운 기구를 정하게 될 것이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있어서도 군정을 펴지 않고 있는 것은 민본주의를 일본인 대중에 철저하게 하려는데 그 본의가 있는 것이다.


(問) 북위 38도 이남이라지만 그 경계는 어디며 경성은 미소가 공동 관리를 하게 되는가?


(答) 38도의 경계를 조사하고자 12일 조사대가 출발한다. 경성을 공동 관리한다는 말은 들은 일이 없다.


(問) 조선은 남북으로 양단되고 미소의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조선통일에 지장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가?


(答)
분할점령은 한 방편으로 앞으로 조선정부가 생길 때까지이다. 미국은 역사상으로 본다면 여러 나라가 점령하였었지만 그 중에서도 連綿한 民本主義는 기어코 오늘날과 같이 통일된 것을 나는 역사상에서 보았다. 조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분할점령의 ‘방편주의설’은 미국이 내내 주장해 온 것인데 많은 연구자들이 이와 다른 견해를 제시해 왔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1>(한길사 펴냄)에 수록된 진덕규의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 본인은 방편주의설을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問) 종전의 경찰은 매우 강압적이었다. 8月 15日 이후는 무정부적 상태로 되어 있는데 치안수습의 방책 如何?


(答) 일본경찰이 악질적인 것은 나도 잘 알고 그 경찰대책을 연구 중에 있다. 이에도 일반의 협력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자치를 해 나가는 사람은 경찰력이 불필요하다. 각자가 신중하고 조선의 장래를 생각하는 태도로서 단속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면 경찰은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다. 기왕의 경찰은 압제와 악정의 표본이었으므로 우리는 곧 이것을 개편하려 한다.

(이 회견에 배석했던 공보관 헤이워드 중령이 사흘 후인 9월 14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일제 경찰의 존속과 자율적 치안조직의 금지 방침을 밝혔다. 내가 하지의 유일한 미덕으로 보는 정직성마저 의심할 일인지, 아니면 그의 우둔함을 더 크게 봐야 할 일인지 판단은 보류한다.)


미국에서는 국민들이 관용성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많이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그들의 동경하는 일본 고국으로 귀환시키었다. 관용성은 남의 권리 남의 재산을 존중하며 미 국민은 육혈포 한 발도 발사하지 않았다. 나는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탄환 하나라도 쓰지 않고 우의적으로 체류하다가 朝·日 양 민족이 헤어지기를 바란다.


(問) 미군과 소군사이에 조선통치에 대한 협동기관은 두지 않는가?


(答) 미군은 평양으로 가서 소군대표와 여러 가지 방책을 협의하려 한다. 곧 협의를 진척 못한 것은 蘇陟대표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이었다. 협의는 순조로울 것으로 믿는다.


(問) 치안이 잘되면 완전한 나라가 된다고 하지만 먼저 완전한 나라가 되면 치안도 확보될 줄 아는데?


(答)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나 개인으로는 조선 정치에 관한 문제는 말할 수 없다. 미국뿐 아니라 연합군 의사에 달렸다고 본다. 따라서 현재 여러분이 치안을 잘 해나간다면 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줄 생각한다.


문 일본인은 우리를 착취하던 민족인데 당분간이라도 관리로서 그대로 쓰는 이유와 일본인의 재산은 어찌 하려는가?


재산은 조선인의 것


(答) (ㄱ) 그 점 나는 조선사람 여러분께 진실로 동정하여 마지않는다. 총독부가 어떠한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 졸지에 이용할 만한 기관이 없어 부득이 행정기관과 그곳에 있는 일본인을 이용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인민은 선량하고 신사적이라는 것도 잘 아는 만큼 조선의 실정에 맞는 방책과 아울러 모든 실정을 최고사령관에 具申하고자 한다. 이로서 최고사령부에서도 諸位가 만족할 만한 적합한 지시의 선물이 오리라고 믿는다.


(ㄴ) 한국의 독립은 경제적 독립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조선이 독립되면 조선안의 재산은 조선의 것이다. 카이로회담에서도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과 모든 권리를 제거하도록 하였고 나도 앞으로 더욱 이 방면에 대하여 연구하겠다.


민주주의국가의 부라는 것은 각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지런히 두뇌를 쓰는 사람은 그에 알맞은 부를 얻고 있다. 미국에는 부자도 있고 나와 같이 빈한한 군인도 있다. 부의 소유 여하로 사람의 인권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부의 차는 있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같다. 독립을 한다고 누구나 다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른 것이다. 또한 일본인의 재산을 제거하는 것은 곧 부녀자를 쫓아내고 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일이 진행됨에 따라 순조로히 조선에 남게 될 줄 안다. 재산문제에 있어 구체안이 설 때까지 파괴 又는 소모될 염려가 있는 것에 대하여는 조선사람이 관리 보존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밖에 공공의 소유물을 점유하는 일은 모두 우리 최고사령관의 명에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問) 일본인들은 그간 식량을 고의로 소각하고 강물에 집어넣는 등 금후 식량사정은 매우 逼迫한데 이에 대한 방책은?


(答) 일본인이 식량을 낭비 又는 소실시킨 사실은 잘 알고 있으며 식량이 얼마나 필요한 가도 잘 알고 있으므로 이에 대책과 신 방책을 연구 중이다.
만일 최선을 다 해도 식량이 부족하다면 외국에서라도 수입시켜 식량만은 불안이 없도록 확보하겠다.

(8월 15일 여운형이 엔도 정무총감과의 회담에서도 “3개월 식량 확보”를 기본 사항으로 요구했던 것처럼, 식량 확보는 치안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의 기본이다. 몇 달 후 미군정이 대책 없는 배급제 폐지로 일으킨 ‘식량 공황’ 사태는 좌익 약진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問) 日本은 8月 15日 이후 미군에 대하여 조선인에 대한 좋지 못한 모략을 하는데 어찌 생각하는가?


(答)
일본인이 무어라고 하는지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내 눈으로 본 연후에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 아직 시일 관계로 미처 다 못 본 것은 유감이다.

(하지 사령부는 진주 전부터 조선 주둔 일본군 17방면군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얻은 왜곡된 정보가 점령 직후의 어리석은 정책에 많이 작용했다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보고 있다.)


(問) 일본인이 인천과 경성에서 발포하여 10여명의 부상자를 내었는데 이에 관하여서는


(答) 방금 경찰을 재편하고 있으며 그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 점에 제7사단장이 맡아볼 것이니 잠시 기다리면 된다.


(問) 조선내의 신문은 이제껏 특수사정에 놓였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어찌하려는가?


(答) 무엇보다도 먼저 시급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조선인의 언론은 자유이니 제위들은 훌륭한 언론을 구사하여 국민의 여론을 계발지도하기에 전력을 다 하기 바란다. 따라서 현재의 기구 안에서는 그 직원이 직장을 지켜 소임을 다 해주기 바란다. 이 외에 다른 일이 있다면 결국 나와 협력지 않는 것이다. 일본인과의 관계가 있는 것 또 곧 새로운 안이 되면 곧 해결될 줄 안다. 모든 점에 있어 포고에 의하여 遵行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附記:이날 회견은 코리아타임스의 主幹 李卯黙 氏의 通辯으로서 시종 여일하게 충분한 의사를 통할 수 있는 것을 국민에게 深謝한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12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Posted by 문천
2010. 9. 11. 21:52


오늘은 내 얼굴을 보자 빙긋이 웃으면서 양손을 뻗어 내 얼굴부터 만져보신다. (요즘은 가기 전에 꼭 면도를 한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작별' 말씀을 하신다. "이제 작별할 때가 되었구나." 별로 엄숙한 표정도 짓지 않으신 채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이제 떠나신다는 것이다. 말씀 중에 간병인 여사님이 들어왔다가 듣고 "난 데 없이 어딜 떠나신다는 거예요?" 하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사람이란 다 떠나는 거야."

"어머니, 떠나시는 게 별로 서운하지가 않은 기색이시네요?" 했더니, "고마운 일이지. 이만큼 있다가 떠나면서 서운해 하면 도둑놈이지." 유머 감각은 한창 시절 못지 않으시다. "어머니, 말씀하시는 걸 봐도 금세 떠나실 것 같지 않은데요?" 하니까 한껏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그래? 뭐 좀 더 있을 수도 있지.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나중에 나오는 길에 원장님께 여쭤봤다. 작별, 떠남, 그런 말씀 요새 하실 때가 있더냐고. 얼마 전에 얼핏 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확인이 된다. 어머니 머리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을 대할 때 상대에 따라 그중에서 적당한 생각을 꺼내 말씀하시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작별' 말씀을 하시면 펄쩍 뛰며 말리겠지. 내가 그런 화제 꺼리지 않고 받아줄 놈으로 인식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 얼굴 보일 때 그 생각을 끄집어내시는 것이다.

기억력이 엄청나게 좋아지신 것이다. 10년쯤 전에 기억력이 크게 퇴화하신 후로는 생각을 이렇게 마음대로 넣어뒀다 꺼냈다를 못하셨다. 속으로 굴리는 생각만이 아니라 소리내어 말씀하시던 이야기도 한 번 끊기면 되찾아내기가 힘드셨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한 범위의 생각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조금만 자극이 있어도 술술 풀려나오고, 또, 말씀하시는 중에 더 펼쳐지기도 한다. 지난 주 이문숙 선생이 뵙고 "이야기를 자가발전하신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신체 상태도 아주 좋으시다. 근력도 느시는 모양이다. 간병인에게도 듣고, 원장님께도 나중에 따로 들었는데, 며칠 전 간병인이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일어나 앉아 계시더란다. 기운이 좋아지신 것이 반가우면서도, 예상 외의 움직임으로 혹시 다치시는 일이라도 있을까봐 걱정이 된다고 한다.

주변의 의견도 듣고 생각을 좀 해봐야 할 일이다. 우선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놓고. 지난 겨울 회복이 좋으신 것을 보며 생각했던 일이 있다. 날씨가 풀린 뒤에 회복이 좋으시면 걸음마를 다시 배우실 수 없을지 알아봐야겠다고. 막상 봄이 되었을 때 보니 그 정도까지 바라볼 만큼은 안 된다 생각해서 그냥 접어놓았는데, 지금은 봄과도 또 다르시다. 혼자서 일어나 앉으신다지 않는가.

작년 초 입으로 식사를 근 1년 만에 시작하실 때 틀니를 놓고 잠깐 고민한 일이 있다. 전에 쓰시던 틀니를 넣어드리려 하니까 너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새로 맞춰드릴까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이 말렸다. 이제 틀니가 맞고 안 맞고가 아니라 쓰신다는 것이 너무 힘드실 거라고. 그래서 생각하니, 틀니 없이도 식생활이 충분히 만족스러우시다면 그것을 어머니의 표준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지, 젊은 사람 표준으로 강요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틀니를 포기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걸음마는 틀니와 다른 것 같다. 지금도 큰 고통이나 불만 없이 지내시지만, 몸을 조금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면 거기서 얻는 기쁨은 틀니가 식생활을 보태드리는 것과 다른 차원일 것 같다. 지금은 목소리와 말씀으로 한 몫 하며 살아가시는 것인데, 몸놀림을 조금이라도 구사하실 수 있다면... 오늘은 치료사 김 선생이 없었는데, 다음에는 김 선생도 만날 수 있는 날 가봐야겠다. 사실 저 정도 마음이 활발하시다면 몸 움직임과의 균형이란 면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작년 여름 이곳에 오신 후 얼마동안은 색다른 태도와 반응으로 주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인기를 끄셨던 셈인데, 지금은 생각이 원활하시니까 사람들의 개성을 상당 수준 파악해서 그에 맞춰 응대하시는 것 같다. 모시고 있는 동안 지나치는 분들 한 분 한 분 응대하시는 데 책략이라면 책략, 배려라면 배려가 나름대로 곁들여진다. 슬랩스틱 코메디언에서 토크쇼 수준으로 격상되셨다고 할까?

식탁에 앉으신 뒤 떠날 때, 한 차례 크게 당했다. "어머니, 저도 이제 집에 가서 밥 먹을게요." "왜? 너도 여기서 먹지 그러니?" "집에 가서 먹어야 바로 일을 또 하죠, 어머니."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진행이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말씀을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담담히 하시는 게 아닌가. "기협이 네가 가버리면 내가 허전해." 의자를 당겨 옆에 앉을 수밖에. "어머니 허전하시지 않도록 제가 밥을 굶더라도 곁을 지켜드려야죠."

시치미 떼신 표정에서 미미한 회심의 미소를 읽은 것은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음을 옆 할머니와의 수작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옆 할머니가 (늘 봐도 순진한 인상이시다.) "아드님 이제 보내주셔야죠. 가서 일도 해야 할 텐데..." 하시니까 당당하게 "내가 가지 말라고 안 그랬어요." 하시는 것 아닌가! 그렇지! 너 가면 나 허전하다고 하셨지, 너 가지 말라고 하신 건 아니니까. 한창 시절에 장난치시던 솜씨 그대로다!

내가 곁에 없다고 진짜로 크게 허전하실 것 같지는 않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웃이라면 이웃이고 장난감이라면 장난감인데! 내가 아들이라면 아들이고 장난감이라면 장난감인 것처럼. 그래도 곁에서 더 많은 시간 가지지 못해 아쉬운 것은 내가 그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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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국립도서관에서는 그 동안 海印寺와 開城 등지에 소개시켰던 서적을 다시 가져다가 정리하는 한편 현재의 장서를 가지고 일반에게 공개 중인데 매일 4·5백 명의 열람자가 쇄도하고 있다. 그런데 8·15 이후에 서적 열람경향은 정세의 변동을 따라 재미스러운 추이를 보여주고 있는 터인데 9월 10일 현재까지의 독서 경향은 의연히 문학부문이 제일이고 그 중에도 영어회화와 露語 등 어학방면의 서적 대출이 많은 것은 38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진주한 미소군의 영향의 하나로 추측된다. 다음 부문은 理學, 의학, 철학, 종교, 산업, 예술 등으로 나누어 건실한 독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개개의 서적으로 보면 河上肇의 ≪資本論入門≫, 崔鉉培의 ≪우리말본≫, ≪헤겔의 변증법≫, ≪국가사회주의원리≫ 등이 독서자의 압도적인 환영을 받아 우리가 당면한 정치상 문화상 문제가 그대로 독서계에 반영되고 있다.

중앙신문 1945년 12월 15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게재는 12월 15일이지만 취재는 9월 10일로 되어 있는 기사다. (<중앙신문>은 김형수, 황대벽, 이상호 등이 <조선상공신문>의 사옥과 시설을 넘겨받아 1945년 11월 1일 창간한 신문으로, 김용환의 만화와 박종화의 소설을 연재하는 등 큰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듬해 5월 이후 좌익계라는 이유로 우익 청년들의 습격을 몇 차례 받았고, 9월 6일 간부진이 미 군정에 구속당하면서 정간처분을 받았다. 1947년 봄에서 여름 사이에 폐간되었다.)


“국립도서관”이라 한 것은 소공동에 있던 조선총독부 도서관이 이름을 바꾼 것인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립중앙도서관” 조에는 1945년 9월에 바뀐 것이라 하였고,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연혁”에는 1945년 10월 15일로 되어 있다. 어느 쪽이든 취재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도서관’이었을 텐데, 게재 시점의 명칭으로 바꾼 듯하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지속적 통계를 제시한 기사가 아니라서 매일 4-5백 명의 열람자라는 것이 해방 전에 비해 얼마나 늘어난 것인지, 대출 경향의 변화가 얼마나 큰 것인지, 정확한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취재자가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있다.


해방을 계기로 독서열이 크게 늘어났으리라는 것은 대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억압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다는 전망 앞에서 지식과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추세였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방향이다. 그 후 대한민국에서는 금서가 되었을 만한 책들이 “압도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했다. 작성자의 사상 성향이 반영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일반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사실이었을 것 같다.


안재홍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다시 냈다. 8월 31일에 부위원장 직을 사퇴했고, 9월 4일에 재신임을 받았지만 사퇴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9월 8일에 한국민주당(한민당) 발기인 명의의 건준 비난 성명이 나오자 자신의 입장을 더 분명히 밝힐 필요를 느낀 것이다.


聲明書

朝鮮建國準備委員會와 余의 處地

朝鮮建國準備委員會는 8月 15日로써 발족하였다. 탄압과 혼란과의 교착하는 도중에서 강고한 독립적인 목적의식으로 그 사명의 완수에 매진하여 온 것은 부인할 바 못된다. 余는 최초부터 이 신조에서 행동하였다. 현하 조선의 정치적 단계에서 余의 신봉하는 정견은 각계각층의 士女들이 초계급적 또는 초당파적인 처지를 견지하면서 하루 바삐 우리 3천만 민족대중에게 부과된 일민족 국가건설의 대업을 완수하기에 총의 총력을 집결하는데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을 이 목표에서 출발 발전귀결시켜야 할 것이다.

즉 建準은 정강을 가진 정당도 아니요 그 운영자 자신들 때문에의 조각본부도 아니요 따라서 다년간 해외에서 해방운동에 진췌하여 오던 혁명전사들의 지도적 집결체인 해외정권과 대립되는 存在도 아닌 것이다. 또 그 일시 당면한 임무로써 국내질서의 자주적 유지와 대중생활의 확보와 및 신국가 건설의 기술적인 주비로서 각 방면의 전문적인 대책과 연구와 자료자재의 보관관리에 관한 공작 등등이다. 즉 사상 기술 방면에 걸치어 엄숙과감한 실천을 요하는 것이다. 余는 이 굳은 일념에서 총총 20일간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余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결과로 됨에서 余는 단연히 引責 免退 부위원장의 자리를 떠났다.

一. 초계급적 초당파적 견지에서 각계세력을 총하는 목표로 余로서의 최선을 다 하였다. 余로써의 만족할 성과는 아직 불가능에 가까운 사태이라 余의 인퇴는 당연하다.

一. 전술 기술적인 제 방면에 있어서도 余로서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치 조사 연구 입안 기획 등 제점에서 아직 다분의 미비가 있다. 余의 인퇴는 당연하다.

一. 해외정권은 그 지역 및 사상체계에 있어 아직 歸一되지 아니하였고 그 혁명전사로써의 功烈에는 각각 일률적인 존경과 우의를 가질 바이지만 余는 重慶 臨時政府에 최대한 임무를 허용하는 것이 당면필수의 정책이라고 믿는다. 重慶臨時政府를 전적으로 승인하느냐? 만일 이의 개조를 要하느냐? 는 今後의 사실문제로 밀어두고 重慶臨時政府를 기준으로 하루 바삐 신국가 건설정권으로 하여 급속히 국내질서를 확립하고서 통일민족국가 건설도정에서 些毫의 碍滯 없도록 함을 要함은 多言을 要치 않는 바이니 이 긴급당면한 정치적 요청에서 이를 지지하여야 할 것이요 현실 당면한 국제정국에의 具眼者로써 누구나 일치할 바이다. 모든 華美한 이론도 실천에서 국민대중에게 선악을 미치는 한 그는 지대한 과오인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余의 처지는 建準에서 전면적으로는 허여되지 않는다. 余는 인퇴를 요한다.

상술 제점에서 첫째 인책의 의미로 둘째 主見相異로 인한 모순의 소각을 위하여 建準副委員長의 任을 떠났고 사정에 의하여는 전면적 인퇴까지도 用意하고 있다. 余는 建準을 떠날 때 있어 그곳 동지제씨에게 석별의 정이 깊고 특히 외경하는 呂運亨氏에게는 정에서 不忍할 수 있고 呂運亨 또한 公人으로써 競하신 바 있을 줄 확신한다.

追記

余는 建準을 사실상 퇴각한지 이미 4日 以來의 일이다. 例의 朝鮮國民黨은 이미 합동위원을 뽑고 外地 各系統과 합동준비중이므로 그 위원장의 責을 해제하였고 일절 政治干與를 끊었다는 余는 방금 각방면과 아주 무관계한 야인에 돌아갔다. 世間無根한 풍설과 오보에 현혹 없도록 늦으나마 一言한 것이다.

9月 10日 安在鴻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주장을 담은 성명서가 아니다. “세간의 무근한 풍설과 오보”를 막기 위한 해명이다. 안재홍(1891~1965)은 식민지시대에 기독교계, 교육계, 언론계에서 활동했고, 상해 임시정부 관련으로 3년간(1919-22)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신간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민족개량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알려진 물산장려운동에도 관여했다. 40대 중반 이후에는 민족주의 역사학에 노력을 쏟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1942-44) 옥고를 치렀다.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운동 모든 분야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8월 16일에 송건호가 그린 안재홍의 “걸인 같은 모습”을 소개했는데, 무슨 뛰어난 일을 할 ‘능력’에 대한 기대감보다 민족주의를 벗어나는 짓을 어떤 것도 할 리가 없는 ‘지조’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인물로서 당시 사람들의 안재홍에 대한 인식을 알아볼 수 있다. 건준을 이끄는 입장에서도 건준이 기능적 임무만을 맡음으로써 중경 임시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대립하지 않고 보완관계를 맺기 바란 것은 힘보다 신뢰를 중히 여기는 그의 개인적 태도가 연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전부터 나는 보수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데, 보수주의의 스승으로서 안재홍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깊어진다. 나는 보수주의자의 첫 번째 조건이 ‘지나친 욕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만족이 안분자족(安分自足)의 겸손이 아니라 지속불가능한 특권구조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보수의 이념이 아니라 수구의 책략일 뿐이다.


한편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진보적 노력도 현실을 무시하는 오만에 빠진다면 ‘사람 사는 세상’의 기반조건을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안재홍과 같은 중도 노선이 입지를 잃은 것이 1945년 이후 비극적 역사 전개의 출발점이라고 나는 본다. 극좌와 극우의 ‘적대적 공생’은 당시의 대다수 사람도 원치 않았고 지금의 대다수 사람도 슬프게 여기는 비극의 씨앗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파탄의 과정을 더듬어보는 것이 이번 작업의 큰 줄기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