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환이라는 “미친X” 때문에 또 한 차례 세상이 시끄럽다. 국회 회의장에서 특정한 국회의원을 놓고 “미친X”라고 했을 때도, 지방선거에서 야당 찍은 젊은 애들 북한 가라고 했을 때도 저거야말로 참 “미친X”구나 하는 생각을 거듭거듭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미친X”가 좀 억울할 것 같다. 아비가 딸자식 보살펴준 것뿐인데.


이번에 걱정할 일은 특정한 “미친X”의 정신상태가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문제다. 그 문제를 차분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 이 “미친X”보다 정상인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의 경우를 들여다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난 달 국회 청문회 장면이 하나 떠오른다. 미국 국적을 선택한 자녀들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의원의 “따님의 국적을 회복할 생각은 있느냐"는 질문에 "진행하고 있는 과정을 끝내고 돌아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이 복받치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나라를 위해 일할 아이라는 것은 확신을 갖고 말씀드리겠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후보자 본인 아닌 가족의 국적 회복 의사를 묻는 것부터 객쩍은 짓으로 느껴졌는데, 그 대답을 들으며 두 차례 닭살이 돋았다. 한 차례는 답변 앞부분에서 “당연히”란 말을 들을 때, 또 한 차례는 뒷부분에서 “우리나라를 위해”란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지금도 닭살이 새로 돋는다.


국적 회복이 왜 ‘당연한’ 일인가? 국적 회복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느 쪽으로도 합당한 이유는 각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 형 하나가 미국에 유학 갔다가 학업이 끝난 후 그곳에서 계속 일하게 되어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가 퇴직 후 한국으로 돌아오면 같이 놀기 좋겠다고 은근히 바라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동생 외에도 고려할 사항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진 장관 딸에게는 왜 국적 회복이 ‘당연한’ 일일까? 장관 딸이라서? 국회의원 딸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장관 딸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나? 그렇게 당연한 일을 꼭 하는 집안이라면, 지금은 학업을 위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인가?


“당연히”라는 말이 이런 이유로 귀에 거슬리지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픽” 실소를 유발하는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해”,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딸아이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우리나라를 위해”란 표현을 쓰는 사람은 그 표현이 무슨 뜻인지 자신 있게 알고 있다는 거다. 그 뜻을 알면서 당당히 쓰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산다고 믿고 있다는 거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하면 전에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해되는 일이 있다. 촛불 사태 때를 비롯해서 수시로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이 쏟아내던 말 같지 않은 소리들. 청문회에서 그에 대한 추궁이 있자, “그때는 국회의원이라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변명했다고.


진수희는 아마 자신이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고 자임하는 모양이다. 국민 대다수에 비해 자기가 훨씬 뛰어난 애국자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런 믿음이 있으니까 상황 판단에 따라 극단적 행동도 하고 극단적 표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과 장관 중에만이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우리나라를 위해” 애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좀 적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 착하지 못한 짓을 스스럼없이 잘하기 쉬운 것처럼 스스로 애국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나라 망치는 데 한 술 더 뜨는 일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대물림까지 하겠다니까 내가 ‘구조문제’라 하는 것이다. 미국 같은 고급 나라 국적을 가지고 그 고급 나라에서 고급 학력까지 쌓은 고급 인재가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은 엄청나게 착한 마음이다. 다른 나라 국적 선택할 능력도 형편도 안 되는 보통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주어진 나라와 애증이 엇갈린 관계를 평생 끌어안고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미국에서 출생해 국적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별로 “당연한” 것 같지 않은 선택을 미국 쪽으로 한 진 장관 따님,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고마운 마음 일으킬 것 없이 미국인으로 그냥 잘 살아주기 바란다. 우리나라에 고급 인재가 더 많으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개인의 행복까지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궁하지는 않다. 이빨이 모자라면 잇몸으로도 씹을 수 있다. 그리고 너무 착한 마음으로 한국을 대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히려 착하지 못한 짓을 하게 될 위험도 크다는 점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외무고시 2부 합격자 41%, 외교부 고위직 자녀”란 기사가 눈에 띈다. 아마 진 장관처럼 자식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려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을 대다수 국민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해방 후 한국에서 돌아가는 일본인 대열 속에 아사노 미치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는 현영섭이란 이름의 조선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어느 친일파보다 철저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는데, 끝내 일본 출신의 일본인다운 직업조차 가지지 못했다. 일본인으로서 그의 가치는 ‘조선인 출신의 일본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전 아사노가 한 일은 조선인들에게 ‘일시동인’을 받아들여 ‘내선일체’를 이루자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 하는 것이 조선인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 아닌 사람들, 또는 자신이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지나치게 착한 마음을 너무 많이 일으키지 않기 바란다. 마음도 착하고 능력도 뛰어난 그 고급 인재들의 도움 없이 경제의 고속 성장이 설령 어렵다 하더라도, 보통사람들끼리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문천

 

建國大業을 公議에 付議코자 그동안 全國人民代表者大會를 준비하고 있던 朝鮮建國準備委員會에서는 9月 6日 오후 9시 京畿高女講堂에서 전국대표 1천여 명의 결합 아래 대회를 개최하였다.

벽두 建準 宣傳部 李如星의 개회선언이 있자 곧 의장 선출에 들어가 위원장 呂運亨 의장석에 등단하자 개회사를 한 다음 전원 기립하여 해방전선에서 희생한 선배동지들의 추도묵상이 있고 국가제창이 있은 후 부위원장 許憲 경과보고가 있고 이어 ‘朝鮮人民共和國’ 조직 기본법초안을 逐條朗讀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하여 이를 통과시킨 후 인민위원 선거에 들어가 위원장, 부위원장을 加한 5명의 전형위원을 선정하여 55명의 위원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으로 발표하였다.

◊ 全國人民委員

李承晩 呂運亨 許憲 金奎植 李觀述 金九 金性洙 金元鳳 李容卨 洪南杓 金炳魯 申翼熙 安在鴻 李胄相 曺晩植 金起田 崔益翰 崔容達 李康國 金龍岩 姜近 河弼源 金桂林 朴洛鍾 金台俊 李萬珪 李如星 金日成 鄭栢 金炯善 李廷允 金正權 韓明燦 柳丑運 李承燁 康基德 趙斗元 李基錫 金綴洙 金相赫 鄭泰極 鄭鍾根 趙東祐 徐重錫 朴文圭 朴光熙 金世鎔 姜炳度 李舜根 金武亭 張基郁 鄭鎭泰 李順今 李相勳(以上 55名)

◊ 候補

崔昌益 黃泰成 洪德裕 李淸源 崔謹愚 金俊淵 韓彬 梁明 崔元澤 安基成 鄭在達 金斗星 權五稷 金斗洙 張順明 李珖 崔星煥 李林洙 玄俊赫 金德泳(以上 20名)

◊ 顧問

吳世昌 權東鎭 金昌淑 鄭雲水 李始榮 洪命憙 金恒奎 金相殷 張道斌 金容起 金觀植 李英(以上 12名)

매일신보 1945년 09월 07일


大韓民主黨과 韓國國民黨에서는 같은 목적과 같은 정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단체가 분립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양 기관의 대표자가 모여 합동문제를 협의하여 오던 중 6일 오후 4시 부내 협성실업학교 강당에서 약 7백 명이 모여 韓國民主黨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발기회를 열었다.

이로써 민족적 대동단결을 목표로 하는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었는데 그 강령 정책위원 진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지난 8일 오전 11시에 긴급상무위원회를 열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국민주당의 사무소는 임시로 전 종로구역소 자리인 협성실업학교 안에 두었다.

役員(○票는 責任者)

總務部:○金炳魯 白寬洙 元世勳 金度演 李仁 許政 李雲 白南薰 李起鵬 徐基俊 趙孝源 尹致暎 李丁奎 尹潽善 李炳憲

計劃部:○張德秀 趙炳玉 李順鐸 金孝錫 兪鎭熙 洪性夏 申允局 趙憲泳 成樂薰 羅景錫

組織部:○金若水 朴明煥 玄相允 李遂榮 李寬求 崔允東 金時中 姜樂遠 徐相天 韓軫熙 梁源橫 金山 金法麟 張勃 金寂音

地方部:○鄭魯湜 崔泰旭 李增林 李炳洪 李源赫

財政部:○朴容喜 張震燮 韓學洙 元翊燮 高光表 劉興山 金永喆 鄭世權 李錫柱 劉錫昶

宣傳部:○咸尙勳 韓南洙 柳子厚 徐相日 宋南憲 韓聖斌 李憲 郭尙勳 李春昊 白涇洙

情報部:○朴瓚熙 張子一 白樂濬 洪燦 林誠鎬 兪億兼 李敏弘 朱鍾勳 李吉龍 鄭光時

調査部:○李重華 李克魯 羅容均 朴容羲 李源喆

審査部:○金用茂 崔承萬 金基坤 洪鍾肅 金良洙 李榮俊 尹弘燮 具滋玉 明濟世 玄東完

매일신보 1945년 09월 0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균열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좌익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고 우익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만들었다.


이 시점에 균열이 드러난 것은 미군 진주를 앞두고 좌익에서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1928년 이후 좌익의 공식 활동이 일제 통치 아래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방을 맞은 이제 좌익은 대중운동을 시작할 여건을 가지게 되었지만 공식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우익에서 회사, 학교, 언론, 종교단체 등의 근거를 가지고 있던 것과 대비되는 형편이었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좌익은 세력을, 우익은 실리를 가진 상황이었다.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총독부의 배척을 받고 우익 주류의 외면을 받는 상황에서(여기서 “우익 주류”라 함은 특권의식을 가진 고학력 실력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좌익은 건준 장악에 노력을 집중했다. 9월 들어 안재홍이 물러난 것은 건준의 중도적 입장이 무너진 사실을 보여준다.


9월 4일에 허헌이 부위원장으로 건준에 합류했는데, 해방 이전의 경력으로 봐서는 중도적 입장을 기대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9월 이후 허헌은 모든 일에서 박헌영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로 나서게 된다. 안재홍이 퇴진을 고집할 때 여운형은 안재홍을 대신할 파트너로 허헌을 받아들이면서 허헌이 그토록 강경한 좌익 노선으로 나갈 줄은 몰랐을 것 같다.


인공 건설을 서두른 것은 원래 여운형의 계획이 아니라 허헌이 위원장단에 들어오면서 그 동안 좌익이 준비해 둔 프로그램을 전격적으로 작동시킨 것 같다. 그렇게 보는 까닭을 다시 바둑에 비유하자면, 세력바둑을 구사하던 선수가 중반전 적당한 시기에 세력을 실리로 현금화하는 작전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다. 좌익은 제도적 근거의 확충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좌익에서 인공 건설의 이유를 “이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전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였고 남한에 있어서도 당연히 이것이 이양되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이에 순응키 위한 혁명 정부였다.”고 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편 <조선해방연보> 1946년판 136쪽, <해방3년사 I>(송남헌 지음, 까치 펴냄) 178쪽에서 재인용) 좌익은 건준 장악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미군 진주 전에 서둘러 인공을 만든 것이다.


1946년 10월에 나왔던 <조선해방연보>를 재발간한 <해방조선 I>(과학과 사상 펴냄)에도 좌익의 이런 의도가 나타나 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층 등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써, 과거에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과감히 항쟁하여 왔고 현재에도 진정한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가장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세력이 그것을 영도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95쪽)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의 손으로, 조선인민의 이익을 위한, 조선인민 자신의 주권을 세우려는 혁명적 정부기관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조직된 일이었다. 그래서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치안을 유지하고, 물자를 확보하였으며, 교통의 복구 및 일제 잔재의 척결에 노력하는 등, 실로 불면불휴의 활동을 벌였다.” (99쪽)


민중의 대일 항쟁과 건준의 업적을 모두 묶어 “미군이 진주하기 전”의 기정사실로 내세움으로써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위치를 독점하겠다는 의도였다. 공산주의에는 상황이 불확실할 때 모험주의가 득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중도파는 ‘독점’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대하는 태도에서 여운형과 안재홍 사이에 이견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였다. 안재홍은 임정을 앞세우고 건준이 보조적 역할을 맡는다는 주장이고 여운형은 임정과 건준이 대등한 입장에서 협력한다는 주장이었다. 인공의 대표권 독점 주장은 중도파의 입장을 벗어난 것이었고, 결국 여운형도 11월에 가서 조선인민당을 만들게 된다. 9월 초에 조선국민당을 만든 안재홍의 뒤를 이어 건준을 통한 ‘공중전’을 포기한 것이다.


한민당 결성은 좌익의 인공 건설에 대항한 것이었다. 한민당의 첫 긴급상무위원회의 결정사항이 “임정 절대 지지”였다. 당시 한민당 당원 중에 임정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임정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좌익에 대항해 인공을 저격하는 데 임정을 이용하려는 동기도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한민당의 결성 시점에서 알아볼 수 있다.


9월 8일에 한민당이 600여 발기인 명의로 발표한 첫 성명서에는 임정을 이용하려는 한민당 일각의 동기가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노골적인 비난과 신랄한 표현이 개방적 정치토론이 아니라 정략적 선전전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름이 올려진 발기인 모두의 동의를 받은 내용이 아니었으리라고 믿는다. 오늘 이야기가 이미 길어졌지만, 성명서 내용을 참고로 붙여놓는다.


◊ 決議

우리 독립운동의 결정체이오 현하 국제적으로 승인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소위 정권을 참칭하는 一切의 단체 及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 배격함을 右 결의함.

◊ 聲明書

1

日本의 포츠담선언 수락에 의하여 우리 조선은 未久에 자유 且 독립한 국가가 될 국제적 약속하에 놓여 있다. 3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鐵蹄 下에 압박받고 신음하던 3천만 민중이 이 광명과 자유의 날을 맞이할 때 그 환희와 열광이 어떠하랴. 우리는 연합국 특히 美, 中, 蘇, 英 4개 우방과 庚戌 이래 해외에 망명하여 혹은 砲烟彈雨의 전장에서 혹은 음산냉혹한 철창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애쓰다가 쓰러진 무수한 同胞諸英靈 及 先輩諸公에게 감사를 들이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국내적으로 사상을 통일하고 결속을 공고히 하여 해외로부터 돌아오는 우리 大韓民國臨時政府를 맞이하고 이 정부로 하여금 하루바삐 4國 공동관리의 군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독립정부가 되도록 지지 육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

그런데 이 민족적 大義務 大公道가 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인이 당파를 지어 건국이니 ‘人民共和國’ 정부를 참칭하여 己未以來의 독립운동의 결정이요 국제적으로 승인된 在外 우리 臨時政府를 부인하는 도배가 있다면 어찌 3천만 민중이 容許할 바이랴. 지난 8月 15日 일본항복의 報를 듣자 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치안유지에 대한 협력의 의뢰를 받은 呂運亨은 마치 독립정권 수립의 특권이나 맡은 듯이 4·5人으로써 所謂 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고 혹은 신문사를 접수하며 혹은 방송국을 점령하여 국가건설에 착수한 뜻을 천하에 공포하였을 뿐 아니라 경찰서, 재판소 내지 은행, 회사까지 접수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같은 중대한 시기에 1·2소수인으로서 방대한 치안문제가 해결되며 행정기구가 운행될 것으로 생각함은 망상이다. 과연 處處에서 약탈 폭행이 일어나고 무질서 무통제가 연출되었다. 軍憲은 권력을 발동하여 시민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건준의 一派는 신문사, 방송국으로부터 축출되고 가두로부터 遁入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그 후의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면초가중의 呂·安은 소위 위원을 확대한다하여 소수의 知名人士를 그 建國準備委員會의 좁은 기구에 끌어 집어넣기에 광분하였다. 그러나 建準을 비난하는 자가 獵官運動者가 아닌 이상 그 위원중의 하나로 임명된다고 옳다할 자는 없었다. 인심은 이탈하고 비난은 가중하매 그들은 각계 각층을 망라한 450인의 인사를 초청하여 一堂에서 시국대책을 협의할 것을 사회에 약속하였다. 그럼에 同 建準 내에도 분열이 발생하여 간부반대론이 대두하였다. 이에 그 간부들 전원은 사표를 제출하고 소위 각계 각층의 150명에게 초청장을 띄웠다고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同 간부들 35명이 그대로 집합하여 呂·安 사표수리안은 18표 대 17표의 1표의 차로 겨우 유임되게 되었다.

4

일이 여기까지 이르면 발악밖에 남은 것은 없다. 그들은 이제 반역적인 소위 인민대회란 것을 개최하고 ‘朝鮮人民共和國’ 政府란 것을 조직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가소타 하기에는 너무도 사태가 중대하다. 출석도 않고 동의도 않은 國內 知名人士의 名을 도용한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해외 우리 정부의 엄연한 주석, 부주석, 영수되는 諸 英雄의 令名을 자기의 어깨에다 같이 놓아 某某委員 운운한 것은 인심을 현혹하고 질서를 교란하는 죄 실로 萬事에 當한다. 그들의 언명을 들으면 해외의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것도 아니오 또 하등 국민의 토대가 없이 수립된 것이니 이것을 시인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호라 邪徒여. 君等은 현 大韓臨時政府의 요인이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며 그후 상해사변, 支那事變, 대동아전쟁발발 후 중국 국민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重慶, 워싱턴, 싸이판, 沖繩 等地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실을 모르느냐. 同政府가 카이로 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고 桑港會議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君等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는가. 大韓臨時政府는 大韓獨立黨의 토대위에 섰고 국내 3천만 민중의 환호리에 입경하려 한다. 知名人士의 令名을 빌어다 자기위세를 보이려는 도배야. 일찍이 汝等은 小磯總督官邸에서 합법운동을 이르키려다 囈笑를 당한 도배이며 해운대온천에서 日人 眞鍋某와 朝鮮의 라우렐이 될 것을 꿈꾸던 도배이며 일본의 압박이 消渙되자 政務總監 京畿道警察部長으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의 위촉을 받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 走狗들이다.

5

吾等은 長久히 君等의 傍若無人한 民心惑亂의 狂態를 묵인할 수는 없다. 정부를 참칭하고 광복의 영웅을 오욕하는 君等의 행동은 좌시할 수 없다. 吾等의 正義의 快刀는 破邪顯正의 大義擧를 단행할 것이다. 3천만 민중이여 諸君은 이같은 도배들의 반역적 언동에 현혹치 말고 민중의 진정한 의사를 대표한 吾等의 주의에 공명하여 민족적 일대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려는가.

1945年 9月 8日 韓國民主黨發起人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Posted by 문천

 

“지난 1일 종로 영보빌딩에서 결성된 朝鮮國民黨에 관하여 내가 그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므로 나의 公人으로서의 성명을 하여 두기로 한다. 나는 방금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한 사람이면서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므로 거기에 대하여서도 즉시 태도를 표명할 필요가 있거니와 나로서의 政見은 정치적 현 단계에서 가장 긴급한 사항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하는 사상문제를 정치공작의 최상층에 올려놓고 마찰을 일으킴과 같은 것은 절대로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이 양대 주의가 대중사이에 병립 쌍행할 것은 필연한 형세라 하고 목하 건국준비의 처음에서는 절대로 공고한 협동정신을 맺어 통일민족국가를 완성하는 데에 전 민족의 총 역량을 집결하는 것이 결정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통일민족국가를 하루 바삐 완성한다는 것은 통일된 중앙정부로서 하루 바삐 조선국가 내부에서의 그 통치력을 발휘하는데 있고 그리하여야 조선에 막대한 호의를 가지는 연합국에 대한 의리상 문제로도 만사가 파란 없이 결말될 것이라고 본다.

정당결성문제에 있어서도 이상으로서는 전 민족 단일당에 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민족주의 진영은 반드시 대동단결하여 그 방면의 총 역량을 집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한 것은 두말할 바 아니다. 나와 평시부터 신뢰 깊은 동지들이 국민당 결성문제로써 가끔 모이어 토의하는 중인데 그도 멀지 않어 구현될 줄 믿거니와 서로 연락하면서 신민족주의에 의한 결당을 협의하고 나에게 그 지도자가 되라고 하는데 나는 워낙 지도자의 자격도 없고 그 의사도 없으나 상당한 다수의 인사들이 모처럼 일심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 주장과 태도인즉 나의 그것과 잘 합치되는 터이므로 그대로 중지할 바도 아니고 또 나의 말로 지금 각 방면의 유력한 분들이 국민당을 결성하려고 모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니 그들과 합류하여 민족주의 정당으로서 대동단결할 용의를 하자고 하였더니 그편의 여러분도 전원 일치로 그 용의 있음을 표명하므로 나도 우선 그 위원장의 자리를 맡어두게 된 것이다.

한동안 小黨分立은 필연한 현세이나 하루 바삐 집중통일함을 요하는 터이오 통일도정에서 상호의 지장이 안 되도록 각각 선입적인 주견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동단결을 완성하는 날에는 나는 한 개의 卒伍로 나가겠고 협동통일을 항상 신조로 삼아 나가려고 한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04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앞서 한 차례 얘기한 적 있지만, 나는 이번 작업에서 안재홍의 모습을 밝히는 데 상당한 역점을 두고자 한다. 첫째로 나 자신 그의 당시 생각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의 눈을 빌리는 것이 지금 독자들에게도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신민족주의’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우리 민족주의의 거품을 걷어내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해방 시점에서 안재홍이 제안한 신민족주의는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와 독립국가의 민족주의는 달라야 한다는 전제 아래 구조조정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구조조정이라는 틀에서 신민족주의의 의미를 깊이 검토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눈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야심이나 편견의 색안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성명에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워낙 지도자의 자격도 없고 그 의사도 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급격한 변화의 상황 속에, 지도자의 반열에 드는 사람들은 설령 본인에게 숨겨진 야심이 따로 없더라도,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뭔가 획책을 해야 하고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기 어려운 사정이 많이 있었다. 안재홍은 이례적으로 그런 부담이 적었던 사람 같다.


해방 시점부터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여운형과 함께 건준을 이끌어온 안재홍이 9월 1일 결성된 조선국민당(국민당) 위원장으로 나선 것은 건준에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전날 건준 부위원장 직을 사퇴했고, 4일 간부회의에서 재신임을 받고도 부위원장 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건준 자체가 지리멸렬하게 된 이 시점의 상태를 생각하면 안재홍이 한계를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결정적인 한계는 여운형과의 관계에서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애초의 건준 참여도 여운형에 대한 신뢰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도자로 나서기 싫어하던 그는 지도자 역할을 여운형이 잘 맡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곁에서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운형에 대한 안재홍의 신뢰가 뒤집혔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약해지고 불안해진 정도였을 것 같다. 신뢰 약화의 원인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임시정부(임정)에 대한 태도의 차이다.


안재홍은 임정의 절대 지지를 주장했다. 며칠 후면 한국민주당(한민당)도 임정 절대 지지를 표방하고 나선다. 그러나 같은 ‘절대 지지’라도 해방 순간부터 밝힌 안재홍의 지지와 9월 들어 들고 나온 한민당의 지지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안재홍의 지지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곧바로 내놓은 지지였고, 한민당의 지지는 자기네 입장과 이리저리 맞춰본 뒤에 선택한 카드였다. 한민당의 지지는 결코 ‘절대’ 지지가 아니었다.


안재홍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양대 주의”로 파악하고 있었다. 해방이 민족 모순 해결과 계급 모순 해결 두 가지 과제를 가져온 것으로 본 것이다. 계급 모순 해결의 과제를 그는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우선적 과제로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민족주의자를 자임했던 것이다.


통일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우선적 과제 앞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양보해야 하고, 그 과제가 성취된 뒤에 공산주의 주장이 나올 수 있다고 안재홍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임정에 대한 그의 지지도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임정 측에서 공산주의를 배제하는 것을 그는 반대했다. 공산주의자까지 포괄하는 전 민족을 대표한다는 전제 하에 임정을 ‘절대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견해를 발표하고 있었다. 임정도 여러 독립운동 세력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것은 좌익의 일반적 관점이었다. 좌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밀착되어 있던 임정이 극우로 흐를 개연성이 크다고 보았을 것이다. 8월 30일 임정 요인들이 중경 미 대사관에 가서 했다는 말을 보면 타당성이 있는 관점이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지분을 키우기 위해 임정을 깎아내리고 싶은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여운형이 임정에 대한 좌익의 관점을 섣불리 받아들인 것이 건준 몰락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의 좌익 중에서 민족의 입장을 무시하고 소련에 종속해야 한다는 극단적 공산주의자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좌익은 계급 모순 해결의 과제와 함께 민족 모순 해결의 과제도 인정하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민족주의 진영이 좌익을 원천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통일민족국가 수립 때까지는 민족주의 깃발을 앞세우자는 안재홍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좌익의 주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관점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임정의 권위나마 세워주지 않는다면 대안이 무엇이었는가? 여운형이 건준의 권위를 임정보다 높여 그를 발판으로 권력을 획득하려는 천박한 야심을 가졌다고는 상상되지 않는다. 총독부도 건준을 박대하고 고학력 실력자 집단도 건준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인민의 힘에 의지한 정면 돌파의 의지를 다진 것일까?


안재홍은 여운형과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자 건준을 통한 ‘공중전’을 포기하고 ‘지상전’으로 방향을 돌려 정당을 만든 것이었다. 우익에 속하면서 좌익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중도 우파의 길을 안재홍은 택하고 좌익과 함께 하면서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겠다는 중도 좌파의 길을 여운형은 택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