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4. 11:46

아내의 휴일은 추석 전날(21)과 당일(22). 21일 아침, 비가 좀 거셌지만 이튿날도 어차피 비가 오실 거라기에 나섰다. 아무래도 22일은 돌아오는 길이 많이 막힐 테니까. 가는 길이 차로 막히는 게 아니라 비로 막혔다. 정말 심했다. 세 시간 반, 평소보다 갑절 시간이 걸렸다.
날씨 때문인지 휴일인데도 방문객이 적었다. 현관에 인상적인 크기의 남자구두 한 켤레만 보였다. 올라가 어머니 방에 들어서니 그 구두의 주인공이 어머니 곁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영규 형님이었다.
참 고마운 형님. 자주 보지는 않지만 근년에 올수록 가까이 느껴지는 분이다. 고종사촌 형님들 중에 아버지(그분들껜 외삼촌) 그늘 누린 것을 잊지 못해 어머니를 극진히 받들어온 분들이 여럿이지만, 대개 80 넘은 분들이다. 영규 형님보다 열 살 위의 대규 형님이 그중 한 분이다. 영규 형님은 외삼촌 혜택을 직접 입은 또래가 아닌데도 대규 형님 기운이 떨어지자 그를 대신해서 우리 집을 보살펴줘 왔다.
세종너싱홈에 모시게 된 것도 참 생각지 못한 인연이다. 여기 이사장님이 영규 형님과 다년간 같은 업계에서 자별한 사이로 지내 온 분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게 모셔놓고 두어 달 됐을 때였나? 내가 박영규 씨 외사촌이란 걸 알고 이사장님이 얼마나 놀라고 반가워하던지! 전화로 그 얘기를 들은 영규 형님도. 그 후로 형님은 틈날 때마다 친구도 볼 겸 외숙모님도 뵐 겸 찾아온다. 언제 간다고 내게 알리는 일도 없는데, 여기 와서 마주치는 게 두 번째다. 아니, 세 번째구나.
형님이 모시고 앉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머니는 한껏 편안하고 즐거운 기색이시다. 형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식되지는 않으시지만, 어떤 범주의 인물인지, 당신과 어떤 관계인지, 대충 느껴지시는 것 같다. 원래 얼렁뚱땅 시치미 솜씨가 좋기도 하시지만, 적당히 때려잡고 적당히 응대하시다 보면 옛날 대하시던 태도가 저절로 되살아나곤 하시는 것 같다. 형님과 수작하시는 태도가 수십 년간 생질들 대해 오신 태도 그대로다.
워낙 큰비가 와서인지 날씨가 갑자기 무척 선선해졌다. 창문 닫은 실내에서 벗어나 현관 앞 테라스로 모시고 나오니 기분이 마냥 좋으시다. 방안에서도 전혀 불편이나 불쾌의 기미가 없으셨지만, 밖에 모시고 나오니 또 다르시다. 따뜻하게 덮어드리기는 했어도 30분이 넘어가니 좀 조심스러워서 이따금씩 들어갈 것을 권해드렸지만 그냥 여기가 좋으시단다. 형님이 먼저 떠난 뒤에도 한참 테라스에 앉았다가 식사시간이 다 되어서 모시고 들어갔다. 다른 날에 비해 말씀이 끊기는 여백이 꽤 많았다. 싱싱한 바깥바람을 즐기는 데 집중하시는 기색이었다.
오늘도 떠나실 일에 관한 말씀이 꽤 있었다. 그런데 몇 주일 전과도 말씀하시는 태도에 차이가 있었다. 지난 번 뵐 때만 해도 화제를 그리 돌릴 때는 뭔가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시는 기색이 있었는데, 오늘은 이런 일 저런 일 말씀하시다가 그런 일 얘기도 그냥 무심결에 따라나온다. 특별히 긴장할 필요가 없는 주제가 된 것이다.
지난 번 원장님과 함께 모시고 있다가 떠날 일 말씀 꺼내셨을 때, 원장님이 먼저 "왜 그런 말씀을!"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는, 그 뒤에 내가 천연덕스럽게 '떠남'에 대한 토론에 나서는 것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린 일이 있다. 아무래도 크리스천보다 불교도들이 그런 주제를 토론하는 데 익숙한 편일 것이다. 어머니가 '떠남' 얘기를 전보다 쉽게 하시는 걸 보면 아마 그 사이에 원장님과 편안한 토론을 해 오신 게 아닐까 싶다.
반야심경 외우시는 것을 보고 영규 형님이 너무 놀랐다. 사실은 함께 외우는 나도 근래에는 거듭 놀라고 있다. 한창때보다도 더 멋지게 외우시는 것 같다. 강약완급에 뜻이 다 비쳐지면서 곡조 자체의 힘과 균형이 더 바랄 것 없는 경지로 느껴진다. 내가 함께 소리 내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늘 외우시냐고 형님이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이신다. 맞다. 내가 와서 청하지 않을 때, 혼자 계실 때도 속으로 웅얼거리기도 하고 소리내 외우기도 하시겠지. 그러지 않고야 수백 자 경문을 저 수준으로 체화하실 수가 없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난다. 운동신경이 둔해서 놀아주는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때 속으로 뭔가를 외우며 내 마음을 가지고 놀던,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혼자 누워 반야심경을 외우시는 걸까? 나는 참 쓰잘 데 없는 걸 즐겨 외웠었다. 이, 사, 팔, 십육, 삼십이, 육십사, 백이십팔, 이백오십육, 오백십이, 천이십사, 이천사십팔, 사천구십육, 팔천백구십이, 만육천삼백팔십사, 삼만이천칠백육십팔, 육만오천오백삽십육, 십삼만천... 그 대신 반야심경을 외웠더라면 지금 어머니랑 낭송이 잘 어울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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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