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國大業을 公議에 付議코자 그동안 全國人民代表者大會를 준비하고 있던 朝鮮建國準備委員會에서는 9月 6日 오후 9시 京畿高女講堂에서 전국대표 1천여 명의 결합 아래 대회를 개최하였다.

벽두 建準 宣傳部 李如星의 개회선언이 있자 곧 의장 선출에 들어가 위원장 呂運亨 의장석에 등단하자 개회사를 한 다음 전원 기립하여 해방전선에서 희생한 선배동지들의 추도묵상이 있고 국가제창이 있은 후 부위원장 許憲 경과보고가 있고 이어 ‘朝鮮人民共和國’ 조직 기본법초안을 逐條朗讀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하여 이를 통과시킨 후 인민위원 선거에 들어가 위원장, 부위원장을 加한 5명의 전형위원을 선정하여 55명의 위원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으로 발표하였다.

◊ 全國人民委員

李承晩 呂運亨 許憲 金奎植 李觀述 金九 金性洙 金元鳳 李容卨 洪南杓 金炳魯 申翼熙 安在鴻 李胄相 曺晩植 金起田 崔益翰 崔容達 李康國 金龍岩 姜近 河弼源 金桂林 朴洛鍾 金台俊 李萬珪 李如星 金日成 鄭栢 金炯善 李廷允 金正權 韓明燦 柳丑運 李承燁 康基德 趙斗元 李基錫 金綴洙 金相赫 鄭泰極 鄭鍾根 趙東祐 徐重錫 朴文圭 朴光熙 金世鎔 姜炳度 李舜根 金武亭 張基郁 鄭鎭泰 李順今 李相勳(以上 55名)

◊ 候補

崔昌益 黃泰成 洪德裕 李淸源 崔謹愚 金俊淵 韓彬 梁明 崔元澤 安基成 鄭在達 金斗星 權五稷 金斗洙 張順明 李珖 崔星煥 李林洙 玄俊赫 金德泳(以上 20名)

◊ 顧問

吳世昌 權東鎭 金昌淑 鄭雲水 李始榮 洪命憙 金恒奎 金相殷 張道斌 金容起 金觀植 李英(以上 12名)

매일신보 1945년 09월 07일


大韓民主黨과 韓國國民黨에서는 같은 목적과 같은 정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단체가 분립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양 기관의 대표자가 모여 합동문제를 협의하여 오던 중 6일 오후 4시 부내 협성실업학교 강당에서 약 7백 명이 모여 韓國民主黨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발기회를 열었다.

이로써 민족적 대동단결을 목표로 하는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었는데 그 강령 정책위원 진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지난 8일 오전 11시에 긴급상무위원회를 열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국민주당의 사무소는 임시로 전 종로구역소 자리인 협성실업학교 안에 두었다.

役員(○票는 責任者)

總務部:○金炳魯 白寬洙 元世勳 金度演 李仁 許政 李雲 白南薰 李起鵬 徐基俊 趙孝源 尹致暎 李丁奎 尹潽善 李炳憲

計劃部:○張德秀 趙炳玉 李順鐸 金孝錫 兪鎭熙 洪性夏 申允局 趙憲泳 成樂薰 羅景錫

組織部:○金若水 朴明煥 玄相允 李遂榮 李寬求 崔允東 金時中 姜樂遠 徐相天 韓軫熙 梁源橫 金山 金法麟 張勃 金寂音

地方部:○鄭魯湜 崔泰旭 李增林 李炳洪 李源赫

財政部:○朴容喜 張震燮 韓學洙 元翊燮 高光表 劉興山 金永喆 鄭世權 李錫柱 劉錫昶

宣傳部:○咸尙勳 韓南洙 柳子厚 徐相日 宋南憲 韓聖斌 李憲 郭尙勳 李春昊 白涇洙

情報部:○朴瓚熙 張子一 白樂濬 洪燦 林誠鎬 兪億兼 李敏弘 朱鍾勳 李吉龍 鄭光時

調査部:○李重華 李克魯 羅容均 朴容羲 李源喆

審査部:○金用茂 崔承萬 金基坤 洪鍾肅 金良洙 李榮俊 尹弘燮 具滋玉 明濟世 玄東完

매일신보 1945년 09월 0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균열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좌익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고 우익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만들었다.


이 시점에 균열이 드러난 것은 미군 진주를 앞두고 좌익에서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1928년 이후 좌익의 공식 활동이 일제 통치 아래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방을 맞은 이제 좌익은 대중운동을 시작할 여건을 가지게 되었지만 공식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우익에서 회사, 학교, 언론, 종교단체 등의 근거를 가지고 있던 것과 대비되는 형편이었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좌익은 세력을, 우익은 실리를 가진 상황이었다.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총독부의 배척을 받고 우익 주류의 외면을 받는 상황에서(여기서 “우익 주류”라 함은 특권의식을 가진 고학력 실력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좌익은 건준 장악에 노력을 집중했다. 9월 들어 안재홍이 물러난 것은 건준의 중도적 입장이 무너진 사실을 보여준다.


9월 4일에 허헌이 부위원장으로 건준에 합류했는데, 해방 이전의 경력으로 봐서는 중도적 입장을 기대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9월 이후 허헌은 모든 일에서 박헌영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로 나서게 된다. 안재홍이 퇴진을 고집할 때 여운형은 안재홍을 대신할 파트너로 허헌을 받아들이면서 허헌이 그토록 강경한 좌익 노선으로 나갈 줄은 몰랐을 것 같다.


인공 건설을 서두른 것은 원래 여운형의 계획이 아니라 허헌이 위원장단에 들어오면서 그 동안 좌익이 준비해 둔 프로그램을 전격적으로 작동시킨 것 같다. 그렇게 보는 까닭을 다시 바둑에 비유하자면, 세력바둑을 구사하던 선수가 중반전 적당한 시기에 세력을 실리로 현금화하는 작전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다. 좌익은 제도적 근거의 확충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좌익에서 인공 건설의 이유를 “이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전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였고 남한에 있어서도 당연히 이것이 이양되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이에 순응키 위한 혁명 정부였다.”고 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편 <조선해방연보> 1946년판 136쪽, <해방3년사 I>(송남헌 지음, 까치 펴냄) 178쪽에서 재인용) 좌익은 건준 장악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미군 진주 전에 서둘러 인공을 만든 것이다.


1946년 10월에 나왔던 <조선해방연보>를 재발간한 <해방조선 I>(과학과 사상 펴냄)에도 좌익의 이런 의도가 나타나 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층 등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써, 과거에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과감히 항쟁하여 왔고 현재에도 진정한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가장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세력이 그것을 영도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95쪽)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의 손으로, 조선인민의 이익을 위한, 조선인민 자신의 주권을 세우려는 혁명적 정부기관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조직된 일이었다. 그래서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치안을 유지하고, 물자를 확보하였으며, 교통의 복구 및 일제 잔재의 척결에 노력하는 등, 실로 불면불휴의 활동을 벌였다.” (99쪽)


민중의 대일 항쟁과 건준의 업적을 모두 묶어 “미군이 진주하기 전”의 기정사실로 내세움으로써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위치를 독점하겠다는 의도였다. 공산주의에는 상황이 불확실할 때 모험주의가 득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중도파는 ‘독점’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대하는 태도에서 여운형과 안재홍 사이에 이견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였다. 안재홍은 임정을 앞세우고 건준이 보조적 역할을 맡는다는 주장이고 여운형은 임정과 건준이 대등한 입장에서 협력한다는 주장이었다. 인공의 대표권 독점 주장은 중도파의 입장을 벗어난 것이었고, 결국 여운형도 11월에 가서 조선인민당을 만들게 된다. 9월 초에 조선국민당을 만든 안재홍의 뒤를 이어 건준을 통한 ‘공중전’을 포기한 것이다.


한민당 결성은 좌익의 인공 건설에 대항한 것이었다. 한민당의 첫 긴급상무위원회의 결정사항이 “임정 절대 지지”였다. 당시 한민당 당원 중에 임정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임정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좌익에 대항해 인공을 저격하는 데 임정을 이용하려는 동기도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한민당의 결성 시점에서 알아볼 수 있다.


9월 8일에 한민당이 600여 발기인 명의로 발표한 첫 성명서에는 임정을 이용하려는 한민당 일각의 동기가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노골적인 비난과 신랄한 표현이 개방적 정치토론이 아니라 정략적 선전전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름이 올려진 발기인 모두의 동의를 받은 내용이 아니었으리라고 믿는다. 오늘 이야기가 이미 길어졌지만, 성명서 내용을 참고로 붙여놓는다.


◊ 決議

우리 독립운동의 결정체이오 현하 국제적으로 승인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소위 정권을 참칭하는 一切의 단체 及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 배격함을 右 결의함.

◊ 聲明書

1

日本의 포츠담선언 수락에 의하여 우리 조선은 未久에 자유 且 독립한 국가가 될 국제적 약속하에 놓여 있다. 3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鐵蹄 下에 압박받고 신음하던 3천만 민중이 이 광명과 자유의 날을 맞이할 때 그 환희와 열광이 어떠하랴. 우리는 연합국 특히 美, 中, 蘇, 英 4개 우방과 庚戌 이래 해외에 망명하여 혹은 砲烟彈雨의 전장에서 혹은 음산냉혹한 철창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애쓰다가 쓰러진 무수한 同胞諸英靈 及 先輩諸公에게 감사를 들이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국내적으로 사상을 통일하고 결속을 공고히 하여 해외로부터 돌아오는 우리 大韓民國臨時政府를 맞이하고 이 정부로 하여금 하루바삐 4國 공동관리의 군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독립정부가 되도록 지지 육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2

그런데 이 민족적 大義務 大公道가 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인이 당파를 지어 건국이니 ‘人民共和國’ 정부를 참칭하여 己未以來의 독립운동의 결정이요 국제적으로 승인된 在外 우리 臨時政府를 부인하는 도배가 있다면 어찌 3천만 민중이 容許할 바이랴. 지난 8月 15日 일본항복의 報를 듣자 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치안유지에 대한 협력의 의뢰를 받은 呂運亨은 마치 독립정권 수립의 특권이나 맡은 듯이 4·5人으로써 所謂 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고 혹은 신문사를 접수하며 혹은 방송국을 점령하여 국가건설에 착수한 뜻을 천하에 공포하였을 뿐 아니라 경찰서, 재판소 내지 은행, 회사까지 접수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같은 중대한 시기에 1·2소수인으로서 방대한 치안문제가 해결되며 행정기구가 운행될 것으로 생각함은 망상이다. 과연 處處에서 약탈 폭행이 일어나고 무질서 무통제가 연출되었다. 軍憲은 권력을 발동하여 시민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건준의 一派는 신문사, 방송국으로부터 축출되고 가두로부터 遁入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그 후의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면초가중의 呂·安은 소위 위원을 확대한다하여 소수의 知名人士를 그 建國準備委員會의 좁은 기구에 끌어 집어넣기에 광분하였다. 그러나 建準을 비난하는 자가 獵官運動者가 아닌 이상 그 위원중의 하나로 임명된다고 옳다할 자는 없었다. 인심은 이탈하고 비난은 가중하매 그들은 각계 각층을 망라한 450인의 인사를 초청하여 一堂에서 시국대책을 협의할 것을 사회에 약속하였다. 그럼에 同 建準 내에도 분열이 발생하여 간부반대론이 대두하였다. 이에 그 간부들 전원은 사표를 제출하고 소위 각계 각층의 150명에게 초청장을 띄웠다고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同 간부들 35명이 그대로 집합하여 呂·安 사표수리안은 18표 대 17표의 1표의 차로 겨우 유임되게 되었다.

4

일이 여기까지 이르면 발악밖에 남은 것은 없다. 그들은 이제 반역적인 소위 인민대회란 것을 개최하고 ‘朝鮮人民共和國’ 政府란 것을 조직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가소타 하기에는 너무도 사태가 중대하다. 출석도 않고 동의도 않은 國內 知名人士의 名을 도용한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해외 우리 정부의 엄연한 주석, 부주석, 영수되는 諸 英雄의 令名을 자기의 어깨에다 같이 놓아 某某委員 운운한 것은 인심을 현혹하고 질서를 교란하는 죄 실로 萬事에 當한다. 그들의 언명을 들으면 해외의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것도 아니오 또 하등 국민의 토대가 없이 수립된 것이니 이것을 시인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호라 邪徒여. 君等은 현 大韓臨時政府의 요인이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며 그후 상해사변, 支那事變, 대동아전쟁발발 후 중국 국민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重慶, 워싱턴, 싸이판, 沖繩 等地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실을 모르느냐. 同政府가 카이로 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고 桑港會議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君等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는가. 大韓臨時政府는 大韓獨立黨의 토대위에 섰고 국내 3천만 민중의 환호리에 입경하려 한다. 知名人士의 令名을 빌어다 자기위세를 보이려는 도배야. 일찍이 汝等은 小磯總督官邸에서 합법운동을 이르키려다 囈笑를 당한 도배이며 해운대온천에서 日人 眞鍋某와 朝鮮의 라우렐이 될 것을 꿈꾸던 도배이며 일본의 압박이 消渙되자 政務總監 京畿道警察部長으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의 위촉을 받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 走狗들이다.

5

吾等은 長久히 君等의 傍若無人한 民心惑亂의 狂態를 묵인할 수는 없다. 정부를 참칭하고 광복의 영웅을 오욕하는 君等의 행동은 좌시할 수 없다. 吾等의 正義의 快刀는 破邪顯正의 大義擧를 단행할 것이다. 3천만 민중이여 諸君은 이같은 도배들의 반역적 언동에 현혹치 말고 민중의 진정한 의사를 대표한 吾等의 주의에 공명하여 민족적 일대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려는가.

1945年 9月 8日 韓國民主黨發起人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