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略) 15일 이래 경성에 모여든 전국 각지의 각층 각계 유지 3백여명은 7일 오후 세시부터 광화문통 전 동아일보사 강당에 집합하고 3천만의 총의를 한데 모을 국민대회를 소집할 준비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준비회는 金俊淵으로부터 국민대회에 관한 취지를 설명하는 개회사가 있었고 의장에 대구로부터 올라온 徐相日을 추대하였다. 宋鎭禹로부터 준비회 개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보고가 있고 곧 결의 사항으로 들어가

1) 在外 大韓民國臨時政府 지지에 관한 건을 상정하여 전원 총기립으로 찬동의 결의를 표명하고

2)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에 관한 건을 상정 협의한 결과 宋鎭禹 張澤相 尹致暎 金昌淑 崔潤東 白象圭 6씨를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되었다.

3) 당면의 제문제에 관한 건과 국민대회 소집에 대한 준비는 전국 각지 각층을 총망라한 백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3천만 민중의 총의와 총역량을 집결할 국민대회소집과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는 착착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委員長:宋鎭禹

副委員長:徐相日 元世勳

常任委員(無順):金性洙 金俊淵 金炳魯 金智煥 金東元 金秉奎 金勝文 李仁 白寬洙 張澤相 尹致暎 安東源 林正燁 姜炳順 韓南洙 宋必滿 朱基鎔 高羲東 梁源模 白南敎 李順鐸 金良瑕 李慶熙 崔允東 徐相國 高在旭 高光表 曹正煥 姜仁澤 張德秀 張龍瑞 姜樂遠 金時中 趙軫九 閔重植 李熙晟 林炳哲 吳基水 李容漢 李昇泰 梁會英 陳奉燮 沈川 金東煥 郭福山 蔡廷根 羅承圭 金晋燮 金□根 李允植 金三奎

매일신보 1945년 09월 08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송진우(1890~1945)가 표면에 나섰다. 회의 장소도 동아일보 사옥이었다. 송진우는 김성수(1891~1955)의 사람이었고 동아일보의 사람이었다. 1907년 김성수와 처음 만나고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났다. 메이지대학 졸업 후 1916년 귀국하자 바로 김성수의 중앙학교 일을 도와 학감과 교장을 맡았고, 1921년부터 동아일보를 사장, 고문, 주필 등의 직함으로 이끌었다. 1940년 폐간 후에도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와 그 뒤를 이은 동본사를 대표하고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4년 7월경 안재홍이 해방을 대비한 움직임을 권할 때 송진우가 거절한 이야기를 지난 8월 17일에 적었다. 그 때 송진우의 말을 다시 한 번 옮겨놓는다.


방금 미국은 전세계를 영도하고 있다. 소련은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이미 코민테른의 해체조차 단행하였다. 소련은 미국에 잘 협력할 것이다. 한편 중경의 임시정부는 이미 연합 열강의 정식 승인을 얻었고, 그 배하 10만의 독립군을 옹유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10억 불의 차관이 성립되어 이미 1억 불의 전도금을 받고 있는 터인즉, 일제가 붕괴되는 때에 10만 군을 거느리고 10억 불의 거금을 들고 조선에 돌아와 친일거두 몇 무리만 처단하고, 그로써 행호시령(行號施令)하기만 하면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를 잘 하니까 만사는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이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04쪽에서 재인용)


송진우는 미국의 실력과 중경 임시정부(임정)의 역량을 과장해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은 원래 출입우세를 잘하니까” 외부의 막강한 힘이 들어오면 그 힘에 따라 사태가 낙착될 것이니 안에서 미리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출입우세”란 말을 사전에서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감으로 봐서 별로 좋은 말 같지 않다.


송진우는 해방 직후에도 건준 참여를 거부했다. 서중석은 송진우가 여운형과 안재홍의 좌우합작 운동에 동조할 수 없었던 이유 몇 가지를 짚어보았다. (위 책 203-207쪽)


(1) 송진우 세력은 일제 말기에 민족해방운동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에 나설 경우 반민족행위자로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다.

(2) 일제시기에 동아일보가 자치운동-민족개량주의의 본산으로 지목되어 사회주의자들에게 혹독한 공격을 받은 것은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체제적 성격의 대립이었다.

(3) 송진우는 협동전선운동에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4) 송진우는 미국과 임정의 위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5) 기업, 학교, 언론 등 자파 세력 근거가 있으므로 독자적 진로를 찾을 자신이 있었다.

(6) 자존심이 강하고 뱃심이 있고 인간관계에 편협한 송진우의 개인적 성격.


이 모두가 어느 정도 타당성 있는 요인이었겠지만, (4)와 관련해서는 좀 더 생각할 점이 있는 것 같다. (4)의 근거는 위에 옮겨놓은 안재홍과의 대화 내용인데, 해방 시점에서는 송진우가 보다 정확한 정보에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임정이 미국의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거나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미국의 위력에 대한 믿음은 결코 “과신”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송진우는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리라는 사실을 꽤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 같다. 서중석은 미군의 남한 진주가 8월 말에 알려졌다고 보았지만,(위 책 208-210쪽) 확신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이 정보는 8월 10일 밤에 생산되어 14일까지는 일본 정부에 확보되어 있었다. 유통경로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중요한 정보가 두 주일 동안 한국에 전혀 전파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총독부가 ‘자기 편’에게만 알려주고 있었으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다.


해방 후 송진우의 행보는 해방 전 자치운동-민족개량주의의 연장선 위에서 봐야 할 것이다. 자치운동-민족개량주의가 ‘반민족주의’처럼 인식되지만, 민족의 발전을 표방했다는 점에서는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에 포함될 수 있다. 굳이 민족주의와의 관계를 따지자면 자본주의적 가치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탈민족주의’ 성향 정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개량주의 비판을 위해서는 민족주의보다 사회경제적 기준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민족개량주의는 토지와 자본의 과도한 집중 등 식민통치의 구조적 문제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식민지체제에서 상대적 특권을 얻은 계층의 이익에 집착함으로써 계급 모순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점이 민족 모순을 호도한다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민족개량주의의 문제점이다.


식민지시대에 민족개량주의와 사회주의가 정면충돌한 것은 계급 모순에 대한 상반된 입장 때문이며, 서중석의 (2) 지적대로 체제적 성격의 대립이었다. 식민지시대에는 민족 모순 아래 계급 모순이 자라나고 있었고, 해방은 민족 모순의 해결이면서 계급 모순 해결을 위한 기회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중도파는 민족 모순 해결의 성과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계급 모순에 관해서는 ‘가진 자’와 ‘없는 자’ 양측이 양보하며 서서히 풀어갈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계급 모순 문제에 상황이 휘말려 해방의 당연한 소득으로 여겨졌던 민족 문제까지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꿈꾸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민족주의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분단을 꺼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익을 표방하던 해방 당시의 ‘가진 자’들 대부분은 민족이 갈라지고 식민지시대의 악질 경찰이 사회를 다시 주름잡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양보할 용의가 있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분단은 좌익보다 우익의 실패였다. 그래서 해방공간에서의 민족의 실패를 살펴봄에 있어서 나는 우익의 관점을 앞세워 보려고 한다.


Posted by 문천

유명환이라는 “미친X” 때문에 또 한 차례 세상이 시끄럽다. 국회 회의장에서 특정한 국회의원을 놓고 “미친X”라고 했을 때도, 지방선거에서 야당 찍은 젊은 애들 북한 가라고 했을 때도 저거야말로 참 “미친X”구나 하는 생각을 거듭거듭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미친X”가 좀 억울할 것 같다. 아비가 딸자식 보살펴준 것뿐인데.


이번에 걱정할 일은 특정한 “미친X”의 정신상태가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문제다. 그 문제를 차분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 이 “미친X”보다 정상인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의 경우를 들여다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난 달 국회 청문회 장면이 하나 떠오른다. 미국 국적을 선택한 자녀들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의원의 “따님의 국적을 회복할 생각은 있느냐"는 질문에 "진행하고 있는 과정을 끝내고 돌아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이 복받치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나라를 위해 일할 아이라는 것은 확신을 갖고 말씀드리겠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후보자 본인 아닌 가족의 국적 회복 의사를 묻는 것부터 객쩍은 짓으로 느껴졌는데, 그 대답을 들으며 두 차례 닭살이 돋았다. 한 차례는 답변 앞부분에서 “당연히”란 말을 들을 때, 또 한 차례는 뒷부분에서 “우리나라를 위해”란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지금도 닭살이 새로 돋는다.


국적 회복이 왜 ‘당연한’ 일인가? 국적 회복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느 쪽으로도 합당한 이유는 각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 형 하나가 미국에 유학 갔다가 학업이 끝난 후 그곳에서 계속 일하게 되어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가 퇴직 후 한국으로 돌아오면 같이 놀기 좋겠다고 은근히 바라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동생 외에도 고려할 사항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진 장관 딸에게는 왜 국적 회복이 ‘당연한’ 일일까? 장관 딸이라서? 국회의원 딸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장관 딸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나? 그렇게 당연한 일을 꼭 하는 집안이라면, 지금은 학업을 위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인가?


“당연히”라는 말이 이런 이유로 귀에 거슬리지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픽” 실소를 유발하는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해”,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딸아이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우리나라를 위해”란 표현을 쓰는 사람은 그 표현이 무슨 뜻인지 자신 있게 알고 있다는 거다. 그 뜻을 알면서 당당히 쓰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산다고 믿고 있다는 거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하면 전에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해되는 일이 있다. 촛불 사태 때를 비롯해서 수시로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이 쏟아내던 말 같지 않은 소리들. 청문회에서 그에 대한 추궁이 있자, “그때는 국회의원이라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변명했다고.


진수희는 아마 자신이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고 자임하는 모양이다. 국민 대다수에 비해 자기가 훨씬 뛰어난 애국자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런 믿음이 있으니까 상황 판단에 따라 극단적 행동도 하고 극단적 표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과 장관 중에만이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우리나라를 위해” 애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좀 적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 착하지 못한 짓을 스스럼없이 잘하기 쉬운 것처럼 스스로 애국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나라 망치는 데 한 술 더 뜨는 일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대물림까지 하겠다니까 내가 ‘구조문제’라 하는 것이다. 미국 같은 고급 나라 국적을 가지고 그 고급 나라에서 고급 학력까지 쌓은 고급 인재가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은 엄청나게 착한 마음이다. 다른 나라 국적 선택할 능력도 형편도 안 되는 보통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주어진 나라와 애증이 엇갈린 관계를 평생 끌어안고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미국에서 출생해 국적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별로 “당연한” 것 같지 않은 선택을 미국 쪽으로 한 진 장관 따님,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고마운 마음 일으킬 것 없이 미국인으로 그냥 잘 살아주기 바란다. 우리나라에 고급 인재가 더 많으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개인의 행복까지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궁하지는 않다. 이빨이 모자라면 잇몸으로도 씹을 수 있다. 그리고 너무 착한 마음으로 한국을 대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히려 착하지 못한 짓을 하게 될 위험도 크다는 점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외무고시 2부 합격자 41%, 외교부 고위직 자녀”란 기사가 눈에 띈다. 아마 진 장관처럼 자식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려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을 대다수 국민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해방 후 한국에서 돌아가는 일본인 대열 속에 아사노 미치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는 현영섭이란 이름의 조선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어느 친일파보다 철저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는데, 끝내 일본 출신의 일본인다운 직업조차 가지지 못했다. 일본인으로서 그의 가치는 ‘조선인 출신의 일본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전 아사노가 한 일은 조선인들에게 ‘일시동인’을 받아들여 ‘내선일체’를 이루자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 하는 것이 조선인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 아닌 사람들, 또는 자신이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지나치게 착한 마음을 너무 많이 일으키지 않기 바란다. 마음도 착하고 능력도 뛰어난 그 고급 인재들의 도움 없이 경제의 고속 성장이 설령 어렵다 하더라도, 보통사람들끼리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문천

 

建國大業을 公議에 付議코자 그동안 全國人民代表者大會를 준비하고 있던 朝鮮建國準備委員會에서는 9月 6日 오후 9시 京畿高女講堂에서 전국대표 1천여 명의 결합 아래 대회를 개최하였다.

벽두 建準 宣傳部 李如星의 개회선언이 있자 곧 의장 선출에 들어가 위원장 呂運亨 의장석에 등단하자 개회사를 한 다음 전원 기립하여 해방전선에서 희생한 선배동지들의 추도묵상이 있고 국가제창이 있은 후 부위원장 許憲 경과보고가 있고 이어 ‘朝鮮人民共和國’ 조직 기본법초안을 逐條朗讀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하여 이를 통과시킨 후 인민위원 선거에 들어가 위원장, 부위원장을 加한 5명의 전형위원을 선정하여 55명의 위원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으로 발표하였다.

◊ 全國人民委員

李承晩 呂運亨 許憲 金奎植 李觀述 金九 金性洙 金元鳳 李容卨 洪南杓 金炳魯 申翼熙 安在鴻 李胄相 曺晩植 金起田 崔益翰 崔容達 李康國 金龍岩 姜近 河弼源 金桂林 朴洛鍾 金台俊 李萬珪 李如星 金日成 鄭栢 金炯善 李廷允 金正權 韓明燦 柳丑運 李承燁 康基德 趙斗元 李基錫 金綴洙 金相赫 鄭泰極 鄭鍾根 趙東祐 徐重錫 朴文圭 朴光熙 金世鎔 姜炳度 李舜根 金武亭 張基郁 鄭鎭泰 李順今 李相勳(以上 55名)

◊ 候補

崔昌益 黃泰成 洪德裕 李淸源 崔謹愚 金俊淵 韓彬 梁明 崔元澤 安基成 鄭在達 金斗星 權五稷 金斗洙 張順明 李珖 崔星煥 李林洙 玄俊赫 金德泳(以上 20名)

◊ 顧問

吳世昌 權東鎭 金昌淑 鄭雲水 李始榮 洪命憙 金恒奎 金相殷 張道斌 金容起 金觀植 李英(以上 12名)

매일신보 1945년 09월 07일


大韓民主黨과 韓國國民黨에서는 같은 목적과 같은 정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단체가 분립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양 기관의 대표자가 모여 합동문제를 협의하여 오던 중 6일 오후 4시 부내 협성실업학교 강당에서 약 7백 명이 모여 韓國民主黨이라는 명칭으로 합동 발기회를 열었다.

이로써 민족적 대동단결을 목표로 하는 한국민주당이 결성되었는데 그 강령 정책위원 진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지난 8일 오전 11시에 긴급상무위원회를 열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국민주당의 사무소는 임시로 전 종로구역소 자리인 협성실업학교 안에 두었다.

役員(○票는 責任者)

總務部:○金炳魯 白寬洙 元世勳 金度演 李仁 許政 李雲 白南薰 李起鵬 徐基俊 趙孝源 尹致暎 李丁奎 尹潽善 李炳憲

計劃部:○張德秀 趙炳玉 李順鐸 金孝錫 兪鎭熙 洪性夏 申允局 趙憲泳 成樂薰 羅景錫

組織部:○金若水 朴明煥 玄相允 李遂榮 李寬求 崔允東 金時中 姜樂遠 徐相天 韓軫熙 梁源橫 金山 金法麟 張勃 金寂音

地方部:○鄭魯湜 崔泰旭 李增林 李炳洪 李源赫

財政部:○朴容喜 張震燮 韓學洙 元翊燮 高光表 劉興山 金永喆 鄭世權 李錫柱 劉錫昶

宣傳部:○咸尙勳 韓南洙 柳子厚 徐相日 宋南憲 韓聖斌 李憲 郭尙勳 李春昊 白涇洙

情報部:○朴瓚熙 張子一 白樂濬 洪燦 林誠鎬 兪億兼 李敏弘 朱鍾勳 李吉龍 鄭光時

調査部:○李重華 李克魯 羅容均 朴容羲 李源喆

審査部:○金用茂 崔承萬 金基坤 洪鍾肅 金良洙 李榮俊 尹弘燮 具滋玉 明濟世 玄東完

매일신보 1945년 09월 09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균열이 드디어 드러나기 시작했다. 좌익은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고 우익은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만들었다.


이 시점에 균열이 드러난 것은 미군 진주를 앞두고 좌익에서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1928년 이후 좌익의 공식 활동이 일제 통치 아래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해방을 맞은 이제 좌익은 대중운동을 시작할 여건을 가지게 되었지만 공식적 근거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우익에서 회사, 학교, 언론, 종교단체 등의 근거를 가지고 있던 것과 대비되는 형편이었다. 바둑에 비유하자면 좌익은 세력을, 우익은 실리를 가진 상황이었다.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총독부의 배척을 받고 우익 주류의 외면을 받는 상황에서(여기서 “우익 주류”라 함은 특권의식을 가진 고학력 실력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좌익은 건준 장악에 노력을 집중했다. 9월 들어 안재홍이 물러난 것은 건준의 중도적 입장이 무너진 사실을 보여준다.


9월 4일에 허헌이 부위원장으로 건준에 합류했는데, 해방 이전의 경력으로 봐서는 중도적 입장을 기대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9월 이후 허헌은 모든 일에서 박헌영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로 나서게 된다. 안재홍이 퇴진을 고집할 때 여운형은 안재홍을 대신할 파트너로 허헌을 받아들이면서 허헌이 그토록 강경한 좌익 노선으로 나갈 줄은 몰랐을 것 같다.


인공 건설을 서두른 것은 원래 여운형의 계획이 아니라 허헌이 위원장단에 들어오면서 그 동안 좌익이 준비해 둔 프로그램을 전격적으로 작동시킨 것 같다. 그렇게 보는 까닭을 다시 바둑에 비유하자면, 세력바둑을 구사하던 선수가 중반전 적당한 시기에 세력을 실리로 현금화하는 작전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다. 좌익은 제도적 근거의 확충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좌익에서 인공 건설의 이유를 “이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전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였고 남한에 있어서도 당연히 이것이 이양되어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이에 순응키 위한 혁명 정부였다.”고 한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 편 <조선해방연보> 1946년판 136쪽, <해방3년사 I>(송남헌 지음, 까치 펴냄) 178쪽에서 재인용) 좌익은 건준 장악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미군 진주 전에 서둘러 인공을 만든 것이다.


1946년 10월에 나왔던 <조선해방연보>를 재발간한 <해방조선 I>(과학과 사상 펴냄)에도 좌익의 이런 의도가 나타나 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층 등 광범한 근로대중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써, 과거에 조선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과감히 항쟁하여 왔고 현재에도 진정한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가장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세력이 그것을 영도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95쪽)


“인민위원회는 조선인민의 손으로, 조선인민의 이익을 위한, 조선인민 자신의 주권을 세우려는 혁명적 정부기관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조직된 일이었다. 그래서 각지의 인민위원회는 치안을 유지하고, 물자를 확보하였으며, 교통의 복구 및 일제 잔재의 척결에 노력하는 등, 실로 불면불휴의 활동을 벌였다.” (99쪽)


민중의 대일 항쟁과 건준의 업적을 모두 묶어 “미군이 진주하기 전”의 기정사실로 내세움으로써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위치를 독점하겠다는 의도였다. 공산주의에는 상황이 불확실할 때 모험주의가 득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한다.


중도파는 ‘독점’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를 대하는 태도에서 여운형과 안재홍 사이에 이견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도의 차이였다. 안재홍은 임정을 앞세우고 건준이 보조적 역할을 맡는다는 주장이고 여운형은 임정과 건준이 대등한 입장에서 협력한다는 주장이었다. 인공의 대표권 독점 주장은 중도파의 입장을 벗어난 것이었고, 결국 여운형도 11월에 가서 조선인민당을 만들게 된다. 9월 초에 조선국민당을 만든 안재홍의 뒤를 이어 건준을 통한 ‘공중전’을 포기한 것이다.


한민당 결성은 좌익의 인공 건설에 대항한 것이었다. 한민당의 첫 긴급상무위원회의 결정사항이 “임정 절대 지지”였다. 당시 한민당 당원 중에 임정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임정의 주도적 역할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좌익에 대항해 인공을 저격하는 데 임정을 이용하려는 동기도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무엇보다 한민당의 결성 시점에서 알아볼 수 있다.


9월 8일에 한민당이 600여 발기인 명의로 발표한 첫 성명서에는 임정을 이용하려는 한민당 일각의 동기가 드러나 있는 것 같다. 노골적인 비난과 신랄한 표현이 개방적 정치토론이 아니라 정략적 선전전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름이 올려진 발기인 모두의 동의를 받은 내용이 아니었으리라고 믿는다. 오늘 이야기가 이미 길어졌지만, 성명서 내용을 참고로 붙여놓는다.


◊ 決議

우리 독립운동의 결정체이오 현하 국제적으로 승인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소위 정권을 참칭하는 一切의 단체 及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 배격함을 右 결의함.

◊ 聲明書

1

日本의 포츠담선언 수락에 의하여 우리 조선은 未久에 자유 且 독립한 국가가 될 국제적 약속하에 놓여 있다. 36년간 일본제국주의의 鐵蹄 下에 압박받고 신음하던 3천만 민중이 이 광명과 자유의 날을 맞이할 때 그 환희와 열광이 어떠하랴. 우리는 연합국 특히 美, 中, 蘇, 英 4개 우방과 庚戌 이래 해외에 망명하여 혹은 砲烟彈雨의 전장에서 혹은 음산냉혹한 철창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애쓰다가 쓰러진 무수한 同胞諸英靈 及 先輩諸公에게 감사를 들이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국내적으로 사상을 통일하고 결속을 공고히 하여 해외로부터 돌아오는 우리 大韓民國臨時政府를 맞이하고 이 정부로 하여금 하루바삐 4國 공동관리의 군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독립정부가 되도록 지지 육성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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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민족적 大義務 大公道가 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인이 당파를 지어 건국이니 ‘人民共和國’ 정부를 참칭하여 己未以來의 독립운동의 결정이요 국제적으로 승인된 在外 우리 臨時政府를 부인하는 도배가 있다면 어찌 3천만 민중이 容許할 바이랴. 지난 8月 15日 일본항복의 報를 듣자 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치안유지에 대한 협력의 의뢰를 받은 呂運亨은 마치 독립정권 수립의 특권이나 맡은 듯이 4·5人으로써 所謂 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고 혹은 신문사를 접수하며 혹은 방송국을 점령하여 국가건설에 착수한 뜻을 천하에 공포하였을 뿐 아니라 경찰서, 재판소 내지 은행, 회사까지 접수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같은 중대한 시기에 1·2소수인으로서 방대한 치안문제가 해결되며 행정기구가 운행될 것으로 생각함은 망상이다. 과연 處處에서 약탈 폭행이 일어나고 무질서 무통제가 연출되었다. 軍憲은 권력을 발동하여 시민에게 위협을 가하였다. 건준의 一派는 신문사, 방송국으로부터 축출되고 가두로부터 遁入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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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의 하는 일은 무엇인가. 사면초가중의 呂·安은 소위 위원을 확대한다하여 소수의 知名人士를 그 建國準備委員會의 좁은 기구에 끌어 집어넣기에 광분하였다. 그러나 建準을 비난하는 자가 獵官運動者가 아닌 이상 그 위원중의 하나로 임명된다고 옳다할 자는 없었다. 인심은 이탈하고 비난은 가중하매 그들은 각계 각층을 망라한 450인의 인사를 초청하여 一堂에서 시국대책을 협의할 것을 사회에 약속하였다. 그럼에 同 建準 내에도 분열이 발생하여 간부반대론이 대두하였다. 이에 그 간부들 전원은 사표를 제출하고 소위 각계 각층의 150명에게 초청장을 띄웠다고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同 간부들 35명이 그대로 집합하여 呂·安 사표수리안은 18표 대 17표의 1표의 차로 겨우 유임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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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여기까지 이르면 발악밖에 남은 것은 없다. 그들은 이제 반역적인 소위 인민대회란 것을 개최하고 ‘朝鮮人民共和國’ 政府란 것을 조직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가소타 하기에는 너무도 사태가 중대하다. 출석도 않고 동의도 않은 國內 知名人士의 名을 도용한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해외 우리 정부의 엄연한 주석, 부주석, 영수되는 諸 英雄의 令名을 자기의 어깨에다 같이 놓아 某某委員 운운한 것은 인심을 현혹하고 질서를 교란하는 죄 실로 萬事에 當한다. 그들의 언명을 들으면 해외의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것도 아니오 또 하등 국민의 토대가 없이 수립된 것이니 이것을 시인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호라 邪徒여. 君等은 현 大韓臨時政府의 요인이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며 그후 상해사변, 支那事變, 대동아전쟁발발 후 중국 국민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重慶, 워싱턴, 싸이판, 沖繩 等地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실을 모르느냐. 同政府가 카이로 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고 桑港會議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君等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는가. 大韓臨時政府는 大韓獨立黨의 토대위에 섰고 국내 3천만 민중의 환호리에 입경하려 한다. 知名人士의 令名을 빌어다 자기위세를 보이려는 도배야. 일찍이 汝等은 小磯總督官邸에서 합법운동을 이르키려다 囈笑를 당한 도배이며 해운대온천에서 日人 眞鍋某와 朝鮮의 라우렐이 될 것을 꿈꾸던 도배이며 일본의 압박이 消渙되자 政務總監 京畿道警察部長으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의 위촉을 받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 走狗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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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等은 長久히 君等의 傍若無人한 民心惑亂의 狂態를 묵인할 수는 없다. 정부를 참칭하고 광복의 영웅을 오욕하는 君等의 행동은 좌시할 수 없다. 吾等의 正義의 快刀는 破邪顯正의 大義擧를 단행할 것이다. 3천만 민중이여 諸君은 이같은 도배들의 반역적 언동에 현혹치 말고 민중의 진정한 의사를 대표한 吾等의 주의에 공명하여 민족적 일대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려는가.

1945年 9月 8日 韓國民主黨發起人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