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8월을 넘기지 못하고 심각한 파탄을 드러냈다. 8월 31일 위원장 여운형이 사퇴했고, 뒤이어 부위원장 안재홍과 집행부 간부들도 내부 혼란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며칠 후 35인 간부회의에서 지도부의 재신임이 의결되었지만 다시 며칠 되지 않아 건준 일부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자 건준은 해산해 버리고 만다.


건준의 좌절을 놓고 좌익의 책임이니 우익의 책임이니 따지는 얘기가 많았던 모양인데, 나는 총독부에 근본적 책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총독부가 진심으로 협력할 생각 없이 건준을 이용하려 들기만 했기 때문에 건준의 입지가 없었던 것이다.


구체적 갈등의 사례야 수없이 많지만, 우발적 사건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근본적 문제는 총독부가 건준에게 ‘질서 유지 협력’을 바라는 대신 그에 상응한 보상을 거부한 데 있다.


총독부는 16일 안재홍의 방송 직후 그 내용 중에 ‘질서 유지’를 넘어서는 건국 사업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항의하며 건준 해산을 들먹였다. 20일에는 경기도 경찰부장이 모든 정당, 단체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건준도 이름에서 ‘건국’을 뺄 것을 요구했다. 그 동안 일본 군경과 건준 치안대 사이의 충돌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15일 아침 여운형이 엔도 정무총감과 만났을 때, 두 사람이 계약서 쓰고 도장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이 이러한데, 지나친 혼란은 우리에게나 당신네에게나 피차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니 함께 도와가며 혼란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는 원칙에 공감을 확인하고 약간의 구체적 방법을 의논했을 것이다. 8월 16일 휘문중학교 연설에서 여운형이 발표한 5개항은 의논한 내용 중 대중에게 발표하기 적합한 일부를 정리한 것이었을 것이다.


거래란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총독부는 ‘질서 유지 협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총독부가 아직 형식적 통치권과 실질적 무력을 갖고 있지만 정권 이양과 무장 해제 방침은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질서가 무너지면 총독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총독부가 여운형과 건준을 ‘질서 유지’만을 위해 월급 주고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운형과 건준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한국인에게 뭔가 도와주는 일이 있어야 했다.


도와줄 일이 뭐가 있었을까? 건국 준비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총독부와 일본군의 순조로운 퇴출을 도와주는 작업은 그 자체가 건국 준비의 뜻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잘 해내는 주체는 많은 한국인의 신뢰를 모으지 않을 수 없으니까. ‘질서 유지’를 적극적으로 하도록 건준에게 부탁하는 것이 바로 총독부가 건준과 한국인을 도와주는 길이었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작업을 맡는 것이 정치 주도권을 쥘 좋은 기회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도 어느 시점에서 누구에게 항복하느냐를 놓고 흥정 밑천을 삼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항복선언 시점에서 누구에게 협조를 청하느냐 하는 것이 총독부가 쥔 칼자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선택에는 현실적 제약이 있었다. 친일파의 딱지가 너무 선명한 사람에게 맡겨서는 한국인을 설득할 수 없었다. 명망 있는 거물이면서 친일파가 아니고, 그러면서도 총독부의 순조로운 퇴출에 동의할 만한 대국적 식견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과 건준의 성공을 도와주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건준이 한국인의 신뢰를 모으고 지키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예산 지원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건준이 요구하는 데 따라 총독부와 일본군이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질서 유지’를 넘어서는 ‘건국 사업’을 막으려고만 들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이 송진우를 건준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들인 데는 송진우와 연계된 자본가 그룹으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받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송진우가 움직이지 않자 민중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26일 전선직역자치조직본부의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좌익에게 건준을 맡기는 길이었다.


건준은 발족 직후부터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유지자대회를 열려고 노력했으나 어수선한 가운데 지연되고 있었다. 송남헌은 <해방 3년사 I>(까치 펴냄) 45쪽에서 박헌영 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이 지연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18일에 여운형이 괴한들의 피습을 받아 1주일간 활동을 못하게 되어 대회 개최가 계속 늦어졌다.


25일에 건준 지도부와 우익 인사들이 만나 전국유지자대회 대신 확대위원회를 열기로 하고 62명 확대위원 명단을 작성했다. 그런데 그 날 밤 건준 측에서 일방적으로 73명을 추가해 발표하는 바람에 건준에 협력하려던 우익 인사들까지 배신감을 느끼고 돌아서게 되었다. 여운형이 퇴원하던 25일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이 건준의 요충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붙이는 9월 1일자 <매일신보> 기사의 명단이 25일에 작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일에 열려던 이 회의도 결국 열리지 못하고 말았다.


建國準備委員會에서는 2일 오후 5시부터 京城府 安國町 徽文小學校 준비위원회사무실에서 同會 위원선정 後 제1회 위원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1일 그 안내장을 발송하였다. 이날 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정세의 성숙과 사업발전에 따라 널리 각계 각층으로부터 진보적인 의사를 대표할 만한 인물을 망라하여 한층 더 강력한 지도부를 확립할 터이며 따라서 이 준비위원회 중앙집행부 전원은 지난 8月 31日 총사직장을 呂위원장에게 제출하였으므로 呂위원장 통솔하에 신중앙집행위원 선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당면한 요구를 협의하게 될 터인데 안내장을 받은 이는 다음의 135名이다.

吳世昌 權東鎭 呂運亨 許憲 安在鴻 洪命憙 曹晩植 金性洙 明濟世 金恒圭 權泰錫 李仁 鄭栢 趙炳玉 李斗烈 李增林 崔奎東 白寬洙 金度演 李克魯 崔鉉培 趙東祐 李英 鄭在達 崔善益 尹洪烈 趙漢用 都宥浩 李萬珪 金重華 金丙淑 元世勳 朴瓚熙 吳鳳善 李裕弼 李康國 崔容達 具滋玉 金敎英 李英學 金銘洙 方應謨 兪億兼 孫在基 李奎甲 金俊淵 李如星 鄭寅普 白南雲 崔益翰 徐世忠 崔益煥 李珖 李昇馥 劉錫鉉 咸明燦 李鍾洙 金若水 鄭求忠 咸尙勳 宋鎭禹 張德秀 梁在厦 洪起文 鄭烈模 尹亨植 李容卨 高景欽 洪增植 梁柱三 洪永傳 李寬求 金良瑕 徐光卨 李義植 朴文圭 金觀植 康基德 鄭世容 鄭雲永 玄東完 李源赫 許永鎬 朴明煥 金振國 羅泰彙 金光鎭 崔謹愚 張埈 吳夏英 崔容馥 李圭鳳 鄭雲海 朴衡秉 洪南杓 金成壽 吳德淵 全永澤 金法麟 李□洙 尹炳浩 李鍾翊 金世鎔 李丙學 鄭宜植 張權 鄭珍容 李觀述 金台俊 金炳燦 李瑄根 金利龍 崔允東 白南薰 金錫璜 金良洙 朴儀陽 朱義國 李佑植 李鏞 鄭一亨 徐相日 具汝順 李鳳洙 蔡奎恒 高志英 朱鍾宜 金弘鎭 朴秉源 韓林 金性業 韓雪野 崔星煥 李相薰 李東華 鄭和濬 以上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겉보기로는 여운형이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된 꼴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만들어놓은 것이 총독부의 협조 거부를 넘어서는 건준 박해였다. 건준이 총독부의 적극적 협조를 받고 있었다면 한국민주당으로 나타날 송진우 일파가 그토록 냉담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건준이 무기력하게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대신 좌우익 간의 공개적 경쟁의 장이 되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협조를 부탁하면서도 실제로는 건준의 협조를 요긴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맥아더는 항복선언 후 두 주일이 지난 29일에야 일본에 상륙했지만, 그 두 주일 동안 일본 정부와 맥아더 사령부 사이에 온갖 의논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본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맥아더 취향의 통치노선까지도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정보의 일부는 조선총독부에도 계속 전파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건준의 협력에 대한 총독부의 필요는 계속 줄어들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

 

(略)중국, 일본, 만주 등 각 처에서 거리에 방황을 하며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겪고 있는 동포들이 수백만이나 되는 형편이므로 이들 곤경에 빠져 있는 동포들을 구원하고자 8月 31日 오후 1시 경성부 壽松町 中東學校 대강당에서 유지 다수 참석하여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에서는 돈이고 물건이고 힘 닿는대로 유지들의 기부금을 거두기로 되었는데 사무소는 경성부 太平通 전 조선일보사 일층이며 이 회의 역원은 다음과 같다.


委員長
兪億兼

副委員長 蘇完奎 金相毅

總務部長 趙基琹

救恤部長 李容卨

宣傳部長 鄭泰熙

財政部長 金競浩

幹事:李海珪 洪鍾憲 李鳳業 元容毁 崔周容

顧問:金性洙 金活蘭 金炳魯 金觀植 金應珣 曺晩植* 都容浩 李鍾麟 呂運亨 李鍾萬 白寬洙 方應模 宋鎭禹 徐相日 安在鴻 梁柱三 尹河英 尹希重 尹洪烈 尹相殷 崔錫模 許憲 洪命憙

評議員:金俊淵 金度演 高凰京 鄭寅普 李淑鍾 劉錫鉉 李相殷 吳漢泳 尹潽善 楊潤植 兪珏卿 崔承萬 黃信德

매일신보 1945년 09월 02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눈치만 살피고 있던 ‘실력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사전에 등재된 사람들은 대개 종교(특히 개신교)-교육-여성계 인사들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상류층 사람들이다. 친일파라도 친일을 통해 출세한 것이 아니고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 출세한 뒤에 일제의 포섭을 받은 사람들이다. 식민지 엘리트층이다.


식민지 엘리트층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교육수준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재산도 중요한 지표이고, 교육수준과 큰 상관관계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명전환을 겪고 있던 당시에는 새 문명체계를 어느 층위에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평상시보다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식민지시대 초기에 일본 명문대학에 유학한 사람들은 다른 배경 없이도 20대 나이에 언론사와 학교의 간부로 발탁되어 기자와 교사들의 몇 배 되는 봉급을 받는 일이 예사였다. 서양에 유학한 소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만으로 명사로 대접받았다. 이승만이 인품에 비해 지도자로서 과도한 명성을 누린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미국 박사’였다. 서양 유학은 거의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는 것이었다.


식민지시대 후기가 되어 국내의 중등교육도 확충되고 일본 거주 조선인도 늘어나면 본인의 능력만으로 유학하는 고학생도 늘어나지만, 초기에는 유학 자체가 상당한 배경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유학생 수도 적고 그 대부분이 식민지 특권층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회도 일종의 특권층이었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84~290쪽에 “국내 인맥의 기원”을 밝힌 절이 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899~1904년간 옥중 생활 중 기독교로 끌어들인 수감자 집단이 눈길을 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선교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이승만은 1902년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이후 열성적으로 죄수들에게 전도해 40여 명의 죄수와 심지어 옥리까지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승만이 인도한 동료 죄수 중에는 이상재-이승인 부자, 유성준(유길준의 동생), 이원긍, 홍재기, 신흥우 등 고위층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출옥 후 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때까지 비교적 낮은 계층에 치중해 있던 조선 기독교회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승만의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다. 또한 식민지시대 엘리트층 가운데 교회와 연결된 미국유학파의 초석이 되었다.


이승만이 개종시킨 감방 동료들 중 대부분은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이승만과 접촉을 가졌던 개화파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이 1902~04년의 기간 중 옥중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이승만의 지지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중 이상재(1850~1927) 같은 사람은 초년의 미국 공사관 근무를 비롯해 고위 관직을 지내고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인데, 개종 이후 20여 세 연하의 이승만을 오히려 지도자로 받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극진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이 그룹의 개종에 새로운 정체성 모색의 뜻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과 대한제국 양쪽에 환멸을 느낀 독립협회의 민족주의자들이 제3의 길을 찾은 것이라고. 국가가 국가 노릇을 못하는 상황에서 침략자에게 투항하지 않는 길로 기독교를 택한 것이 아닐까?


3-1운동에 대해 이 그룹 인사들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개신교회가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은 데 비해 이 그룹과 연결된 교회 엘리트층은 참여를 거부하거나 드러나지 않는 위치를 지켰다. 민족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더 중시한 이 그룹의 성향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두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아서 만세운동에 전심전력으로 임한 낮은 신분의 교인들과 차이가 있었을 것 같다.


유억겸이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이하 ‘구제회’) 위원장을 맡은 것을 보며 이 그룹 생각이 난다. 연희전문 교장이던 유억겸(1895~1947)은 유길준의 아들로서 옥중 개종 그룹 멤버였던 유성준의 조카다. 이 그룹을 이어받은 기독교파 엘리트층의 대표적 인사였다. 부위원장인 경성정총대연합회 위원장 소완규는 약간의 친일 행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성망을 유지하고 있던 변호사였다.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면서 대중의 호감을 모을 수 있는 인물들을 앞세워 인도적으로 타당성 있는 사업을 내세운 것이 이 ‘구제회’였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귀환하는 동포들의 수용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들을 ‘구제’하는 것도 중요한 인도적 과제였고, 또한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서 잠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도움을 줄 ‘실력’을 가진 집단이 존재를 드러낸 첫 움직임이 이 ‘구제회’였다.


고문단을 비롯한 ‘구제회’ 인적 구성을 보면 상당한 흠을 가진 친일파 집단에서 투철한 민족주의자까지 망라되어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실력을 가진 집단이 이런 명분 있는 사업을 통해 경미한 친일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면서 민족주의의 길에 합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호응했을 것이다. 한편 실력자 집단은 자기네 실력을 과시하면서 가급적 유리한 타협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민족주의자와 실력자 집단의 타협은 동상이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타협의 모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력자 집단은 민족 정체성보다 엘리트의 정체성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엘리트로서의 특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민족주의와 타협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 특권을 철저히 부정하는 좌익이 그들에게는 기피 대상이었고, 좌익의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타협할 동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민족주의와 타협하고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 좌익과 경쟁할 것을 거부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며칠 후 그들이 한민당을 결성하고 건준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서는 상황을 면밀히 살펴봐야겠다.


Posted by 문천

 

1919년 봄 한국 임시정부를 칭하는 조직 7개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전단만 뿌렸을 뿐,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것도 몇 있었지만,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와 연해주에서 조직된 노령임시정부, 그리고 상해임시정부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세 조직은 그 해 9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임시정부 수립에 나선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임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선전되면서 독립의 희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세운동이 예상 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희망은 더욱 고무되었다.


그 해 초 고종이 죽은 것도 계기가 되었다. 그 얼마 전까지도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고종을 조선에서 탈출시켜 ‘망명정부’를 만들 구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임시정부나 망명정부나 실제 통치권이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망명정부는 호의적인 나라들에게 실체를 인정받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지도하는 데도 역시 유리한 조건이다. 명분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없이도 독립운동은 가능하고, 실제로 해외 독립운동의 상당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와 아무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라는 이름이 있으면 더 많은 독립운동을 이끌어내는 데도, 그리고 독립운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조율하는 데도, 또 독립운동에 대한 다른 나라의 도움을 청하는 데도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소수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표성을 갖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이념이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각기 임시정부를 칭하며 난립한다면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간판의 가치가 없다. 그래서 1919년 중에 큰 조직들이 통합해서 단일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1945년까지 단일 임시정부가 유지된 것은 ‘임시정부’의 한계 내에서는 최대한의 대표성을 일궈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1919년에서 1932년까지 상해에 있었고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중경에 있었다. 1932년에서 1940년 사이에는 항주, 진강, 장사, 광동, 유주, 기강 등지를 옮겨 다녔는데, 그 기간에는 활동이 저조했으므로 임시정부 소재지로 중요한 곳은 상해와 중경이었다. 그중 중경은 중일전쟁의 상황으로 부득이하게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간 것이고, 임시정부가 선택한 장소로서 의미 있는 것은 상해였다.


상해는 임시정부의 대내적 기능과 대외적 기능이 겹쳐지는 곳이었다. 대외적 기능은 여러 외국과의 교섭인데, 당시 상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였다. 대내적 기능은 재외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것인데, 중국은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살고 있던 나라였다. 중국 정부의 태도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외적 요인이었다.


1919년 파리 강화회담 참석 좌절로 임시정부의 대외적 기능이 막히자 임시정부의 기능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것은 임시정부의 목적이 외교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는데,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에 집중하면서는 민족주의에 투철하지 못한 이승만을 축출했다.


무장투쟁의 현장인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상해에서는 독립운동을 이끄는 데도 제약이 있었고, 중국의 혼란한 상황 때문에 이 제약이 더 심했다. 초기에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통해 만주 지역 독립군과 연결을 가졌으나 일본이 만주 지역에 진출하면서 이 연결이 끊어졌다.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관할 지역에 있었는데 국민당 정부가 일본의 만주 진출에 순응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협조를 얻을 수 없었다.


독립군 활동이 중국 공산당과 소련을 기대고 펼쳐지는 동안 임시정부는 외교적인 돌파구도 찾지 못하고 독립군 활동에도 연결되지 못하면서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마침 일본의 만주 침략에 분개하고 있던 중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이 촉진되었다. 장개석의 예산 지원을 받고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짐으로써 임시정부가 표류상태를 벗어나 지속적인 사업을 가지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장개석의 김구에 대한 개인적 지원이 국민당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적 지원으로 바뀌고 외부 연락도 두절되다시피 하면서 임시정부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의존이 예속에 가깝게 되었다. 한편 북중국과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공산당과의 연계가 깊어졌고, 이에 따라 임시정부와 북부 독립운동 세력과의 관계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합작 관계에 좌우되는 양상이 펼쳐졌다.


1945년 들어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진 뒤에야 광복군의 작전권을 임시정부가 중국으로부터 넘겨받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서의 역할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해방된 나라의 대접이 전쟁에서의 역할에 비례한다는 국제적 관례를 먼저 해방된 유럽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종전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들에게 해방된 한국의 관리를 맡길 만큼 믿음직한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뚜렷한 역할도 없었고, 국내에 조직된 지지 세력도 없었다. 임시정부를 지지한 유일한 연합국인 중국은 다른 연합국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중국마저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연합국들, 특히 미국의 한반도 정책 관계자들이 실상을 더 잘 알았더라면 임시정부의 가치를 알아볼 만한 것이 있었다. 26년 동안 민족주의 입장을 지켜온 임시정부의 일관성은 신뢰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가진 한민족의 자산이었다. 반민족적인 짓은 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무슨 뛰어난 일을 할 수 있다는 능력보다도 갑자기 해방된 한국에서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1948년 들어 김규식과 김구가 단정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나섰을 때 국민의 뜨거운 호응이 바로 이 자산의 가치가 드러난 것이다. 그 2년 전, 좌익 진영이 아직 굳어지기 전에, 이승만-한민당의 단정노선이 형성되기 전에, 극한적인 반탁 대신 그런 협상의 자세를 보여줬다면 얼마나 큰 효과를 일으켰을까.


해방 시점에서 임시정부라는 민족의 자산은 완성된 건축물이 아니었다. 한 덩이 좋은 목재였다. 대들보로 삼을 수도 있고 기둥으로 쓸 수도 있는 목재였다. 해방은 임시정부에게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점의 의미가 더 큰 기회였다.


국내의 지도적 인사들 중에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를 받들겠다, 임시정부에 주도권을 맡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임시정부의 가치를 진심으로 아끼고 그 가치가 잘 살아나기 바란 사람들도 있었지만, 임시정부를 내세워 다른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략적 태도도 있었던 것 같다. 9월이 되면 그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