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연합국측과의 항복협정조인식은 2일 오전 9시 橫濱近海 40哩의 지점에 投錨한 美艦 ‘미조리’號上에서 거행되어 연합국군최고사령관 맥아더원수, 미군대표 니미츠원수, 영군대표 푸리이거대장, 소련대표 체레부양코중장, 중국대표 徐永昌 軍令部長, 호주대표 가게에미대장, 네덜란드대표 헬푸제독, 프랑스대표 룩렐크大將, 기타 각국대표와 일본대표 重光외상, 梅津참모총장, 兩 全權과의 사이에 거행되었으며 同 9시 15분 조인을 전부 완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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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 9시 맥아더원수의 사회하에 조인식은 개시되었다. 1尺 5寸에 1尺 가량되는 항복문서 2통이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다. 日本全權은 각국 대표 맞은편에서 테이블로부터 5步가량 되는 위치에 重光, 梅津 兩全權을 最前列로하여 3열로 늘어섰다. 맥아더원수의 지시에 따라 먼저 重光외상이 문서 2통에 각각 서명하고 이어서 梅津 참모총장의 서명이 끝나자 연합국측의 서명으로 들어가 제일로 최고사령관 맥아더원수가 서명하였다.

맥아더원수의 뒤에는 웬라이이트美中將 파아시발英中將이 서 있다. 다음으로 미국대표 니미츠원수, 중국대표 徐永昌 軍令部長, 영국대표 프레사대장, 소련대표 제레비얀코중장, 호주대표 쁘레미대장, 캐나다대표 코스그레이브大佐, 佛國代表 쿠레르크대장, 네덜란드대표 헤루후릿히제독, 뉴질랜드대표 이싯공군중장의 순서로 순차 서명이 진행될 때 重光, 梅津 兩全權을 위시한 日本側隨員은 부동자세로 냉정히 서명하는 각 대표를 주시하였다.

이리하여 오전 9시 15분 쌍방의 서명을 종료하고 항복문서의 1통은 맥아더원수로부터 일본측에 수교되어 重光, 梅津 兩全權 이하 日本側隨員은 미조리호를 退艦하여 玆에 항복문서조인식은 종료한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02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미주리 함상의 항복 조인식. 잘 알려진 장면이다. 나도 학생 시절부터 눈앞에 보듯 잘 알고 있던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의 어색한 점 하나를 근년에 와서야 알아보게 되었다. 항복하는 자가 ‘일본국’도 아니고 ‘일본 천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항복의 주체는 일본 정부와 일본 군부였다. 위 기사에도 ‘일본대표’, ‘전권대표’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시게미츠 외상은 정부 대표였고 우메즈 참모총장은 군부 대표였다. 두 사람은 천황의 ‘항복 명령’에 따라 항복한 것이고, 연합군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전쟁 책임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 있을 뿐, 일본국과 일본 천황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항복 조인식에서도 천황은 초연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8월 4일에 적은 것처럼 연합국들은 독일에 대해 가혹한 점령정책을 펴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전쟁 책임이 독일 국민 전체에게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1947년 여름, 냉전이 공식화된 뒤에야 독일을 ‘살리는’ 마셜 플랜이 도입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더 오래 버틴 일본에게 이리도 너그러웠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래 버틴 만큼 원한도 더 쌓였을 텐데.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미국의 의도는 널리 알려져 있고 나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 의도가 다른 연합국이나 미국 내 여론의 견제를 받지 않고 관철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설명을 필요로 한다.


연합국 중 일본에 대한 원한이 가장 강한 것은 중국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전쟁 수행 과정에서 약자의 입장에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도 공산당의 도전 앞에서 미국에 의존하는 입장에 있었다. 중국은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발언권이 크고 일본에 대해 큰 이해관계를 가진 연합국은 소련이었다. 미국도 소련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일본 처리의 가장 큰 기준이었다. 소련이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까닭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원자폭탄의 존재가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내 여론이 그리 예민하지 않았던 것은 동양인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이었다. 가해자도 동양인이고 피해자도 거의 다 동양인인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백인 사이의 범죄였던 독일의 경우와 관심 수준이 달랐다.


이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마닐라 학살’의 전범재판이었다. 1945년 2월 미군의 진격 앞에서 주필리핀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대장은 휘하 전 부대에 마닐라 철수를 명했는데 이와부치 해군중장이 이에 불복, 해병대 1만 명을 이끌고 마닐라 사수에 나서며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와부치는 함락 직전에 자살했는데, 직접 책임이 없던 야마시타가 전범재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아 큰 논란을 일으켰다. 서양화되어 있던 필리핀에 대한 전범재판소의 시각이 다른 ‘동양’ 지역에 대한 것과 달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더 심한 가혹행위의 책임자인 731부대의 재판 면제에 대해서는 당시 여론의 항의가 거의 없었다.


1945년 8월 시점에서 미국의 소련에 대한 태도는 경쟁과 적대 사이의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 이 애매한 상태로 인해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맥아더는 이례적으로 큰 재량권을 누렸다. 맥아더는 한 개인으로서 전후 일본과 한국의 진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매우 독특한 개성으로 일화도 많이 남긴 사람이고 그 특성도 여러 가지가 지적되어 왔다. 그 경력을 더듬어보면서 일본과 한국의 상황에 그가 영향을 끼치는 데 크게 작용했을 만한 특성을 생각하니, 전쟁을 좋아했다는 점이 가장 크게 보인다. 그는 전술에 뛰어난 재능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그의 전쟁광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경적(輕敵)’ 경향이다. 그는 적세를 실제보다 크게 평가한 일이 없었다. 참모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묵살하면서 작전을 벌인 일이 수없이 많았다. 참모들도 그의 취향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44년 말 필리핀 탈환작전에 나설 때 맥아더의 참모진은 루손 섬의 일본 병력을 137,000명으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287,000명이었다.


경적으로 인해 실패한 작전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치열한 전투가 유발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그의 화려한 전공이 늘어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경적’ 쪽으로 치우쳐 주장함으로써 ‘확전(擴戰)’의 계기를 만드는 책략을 쓴 것 같다.


그는 참으로 전투를 확대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42년 4월 남서태평양관구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태평양전쟁에 뛰어든 그가 주도한 대표적 작전인 ‘카트휠 작전’에서도 그 재능을 알아볼 수 있다. 1943년 3월 태평양군사회의에서 채택된 이 작전에서 그는 종래의 ‘섬 건너뛰기(hopping islands)’ 전략을 ‘재래식’으로 격하하면서 전략적 요충에 공격을 집중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단시간 내에 전선을 확장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전략이었다.


맥아더가 일본과 한국을 통치하면서 내세운 ‘반공’이 얼마만큼 그의 진정한 정치사상에 입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동아시아 지역에 군사적 긴장을 일으키고 전쟁의 기회를 늘리는 길로 그가 생각했을 것은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그의 ‘전쟁광’ 성향을 언급했는데, 통상적 용례에 비춰보면 ‘전쟁광’ 규정은 적절치 않다. ‘군사적 모험주의자’ 정도 표현이 더 적당할까?


전쟁영웅의 이미지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맥아더의 약점 하나가 1979년에 드러났다. 1935년 커먼웰스로 준독립국이 된 필리핀에 초빙되어 ‘필리핀 건군의 아버지’ 노릇을 하던 맥아더가 1942년 초 일본군의 침공을 앞둔 시점에서 케손 대통령에게 “그 동안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50만 달러를(<Wikipedia>에 의하면 지금 돈 740만 달러의 가치라 한다.) 받은 사실을 한 역사학자가 밝힌 것이다.


압도적인 적군의 침공을 코앞에 두고 이런 돈을 주고받는 장면, 과연 필리핀에서만 벌어진 것이었을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