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 안재홍 선집> 7책이 들어왔습니다. 연재를 끌고 나가는 한편으로 공부할 큰 덩어리입니다. 지금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면모를 뽑아 연재 내용에 많이 담을 수 있기 바랍니다.
<망국의 역사> 작업 할 때 책상 옆에 책장 하나를 갖다놓고 참고자료를 모아놓았었는데, 이제 <해방일기> 자료로 완전히 물갈이가 되었습니다.


작업 착수 후로 들여온 책이 책수로는 이제 100권이 넘은 것 같네요. 얻어오거나 빌려온 것이 절반쯤 되고 구입한 것이 절반쯤. 구입한 액수도 100만원 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제일 무거운 것이 새까만 껍데기의 세 책.)
<프레시안>에서 몇 가지 필요한 책을 출판사에서 얻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기대를 많이 겁니다. 사실, 어디서 연구비 타는 것도 아니고, 책값이 좀 벅차거든요. 제가 아는 출판사에서는 책동냥을 꽤 했는데, 아는 범위가 한계가 있으니... (그리고 아는 출판사라도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지 알 만한 곳에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프레시안>에서 이 작업의 의미를 설득해서 도움을 얻어주면 허리가 좀 덜 휘겠습니다.
앗! 사진 올려놓고 보니 서중석 선생님의 <조봉암과 1950년대(상)>이 두 권 나란히 서 있네요! 서 선생님이 이거 보면 안 되는데! 한 권에는 "김기협 학형께 / 서중석 드림 / 1999. 12. 21"로 적혀 있고, 또 한 권에는 "김기협 선생께 / 서중석 드림 / 2000. 10. 5"로 적혀 있어요. 제가 제주와 서울에 두 집 살림 할 때라 받아놓고 또 받았던 거죠. 두 권이나 받아놓고 그 동안 활용을 못한 것이 너무 죄스럽습니다. 이번 작업에서 곱배기로 활용해야죠.
근데 이제 펼쳐보니 이 책에는 저자 사인을 세 번이나 받았군요. ㅋㅋㅋ 2000년 10월 이 책 받던 때 생각이 납니다. 뒷표지를 열고 그 안에 사인을 했다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앞표지 안쪽에 다시 사인을 해주셨죠. 암튼, 이 책 주실 때는 제가 얼마나 이 책을 요긴하게 활용하게 될지 상사도 못하셨을 겁니다. 저도 상상 못했고요.
Posted by 문천
2010. 9. 24. 11:46

아내의 휴일은 추석 전날(21)과 당일(22). 21일 아침, 비가 좀 거셌지만 이튿날도 어차피 비가 오실 거라기에 나섰다. 아무래도 22일은 돌아오는 길이 많이 막힐 테니까. 가는 길이 차로 막히는 게 아니라 비로 막혔다. 정말 심했다. 세 시간 반, 평소보다 갑절 시간이 걸렸다.
날씨 때문인지 휴일인데도 방문객이 적었다. 현관에 인상적인 크기의 남자구두 한 켤레만 보였다. 올라가 어머니 방에 들어서니 그 구두의 주인공이 어머니 곁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영규 형님이었다.
참 고마운 형님. 자주 보지는 않지만 근년에 올수록 가까이 느껴지는 분이다. 고종사촌 형님들 중에 아버지(그분들껜 외삼촌) 그늘 누린 것을 잊지 못해 어머니를 극진히 받들어온 분들이 여럿이지만, 대개 80 넘은 분들이다. 영규 형님보다 열 살 위의 대규 형님이 그중 한 분이다. 영규 형님은 외삼촌 혜택을 직접 입은 또래가 아닌데도 대규 형님 기운이 떨어지자 그를 대신해서 우리 집을 보살펴줘 왔다.
세종너싱홈에 모시게 된 것도 참 생각지 못한 인연이다. 여기 이사장님이 영규 형님과 다년간 같은 업계에서 자별한 사이로 지내 온 분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게 모셔놓고 두어 달 됐을 때였나? 내가 박영규 씨 외사촌이란 걸 알고 이사장님이 얼마나 놀라고 반가워하던지! 전화로 그 얘기를 들은 영규 형님도. 그 후로 형님은 틈날 때마다 친구도 볼 겸 외숙모님도 뵐 겸 찾아온다. 언제 간다고 내게 알리는 일도 없는데, 여기 와서 마주치는 게 두 번째다. 아니, 세 번째구나.
형님이 모시고 앉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머니는 한껏 편안하고 즐거운 기색이시다. 형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인식되지는 않으시지만, 어떤 범주의 인물인지, 당신과 어떤 관계인지, 대충 느껴지시는 것 같다. 원래 얼렁뚱땅 시치미 솜씨가 좋기도 하시지만, 적당히 때려잡고 적당히 응대하시다 보면 옛날 대하시던 태도가 저절로 되살아나곤 하시는 것 같다. 형님과 수작하시는 태도가 수십 년간 생질들 대해 오신 태도 그대로다.
워낙 큰비가 와서인지 날씨가 갑자기 무척 선선해졌다. 창문 닫은 실내에서 벗어나 현관 앞 테라스로 모시고 나오니 기분이 마냥 좋으시다. 방안에서도 전혀 불편이나 불쾌의 기미가 없으셨지만, 밖에 모시고 나오니 또 다르시다. 따뜻하게 덮어드리기는 했어도 30분이 넘어가니 좀 조심스러워서 이따금씩 들어갈 것을 권해드렸지만 그냥 여기가 좋으시단다. 형님이 먼저 떠난 뒤에도 한참 테라스에 앉았다가 식사시간이 다 되어서 모시고 들어갔다. 다른 날에 비해 말씀이 끊기는 여백이 꽤 많았다. 싱싱한 바깥바람을 즐기는 데 집중하시는 기색이었다.
오늘도 떠나실 일에 관한 말씀이 꽤 있었다. 그런데 몇 주일 전과도 말씀하시는 태도에 차이가 있었다. 지난 번 뵐 때만 해도 화제를 그리 돌릴 때는 뭔가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시는 기색이 있었는데, 오늘은 이런 일 저런 일 말씀하시다가 그런 일 얘기도 그냥 무심결에 따라나온다. 특별히 긴장할 필요가 없는 주제가 된 것이다.
지난 번 원장님과 함께 모시고 있다가 떠날 일 말씀 꺼내셨을 때, 원장님이 먼저 "왜 그런 말씀을!"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는, 그 뒤에 내가 천연덕스럽게 '떠남'에 대한 토론에 나서는 것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린 일이 있다. 아무래도 크리스천보다 불교도들이 그런 주제를 토론하는 데 익숙한 편일 것이다. 어머니가 '떠남' 얘기를 전보다 쉽게 하시는 걸 보면 아마 그 사이에 원장님과 편안한 토론을 해 오신 게 아닐까 싶다.
반야심경 외우시는 것을 보고 영규 형님이 너무 놀랐다. 사실은 함께 외우는 나도 근래에는 거듭 놀라고 있다. 한창때보다도 더 멋지게 외우시는 것 같다. 강약완급에 뜻이 다 비쳐지면서 곡조 자체의 힘과 균형이 더 바랄 것 없는 경지로 느껴진다. 내가 함께 소리 내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늘 외우시냐고 형님이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이신다. 맞다. 내가 와서 청하지 않을 때, 혼자 계실 때도 속으로 웅얼거리기도 하고 소리내 외우기도 하시겠지. 그러지 않고야 수백 자 경문을 저 수준으로 체화하실 수가 없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난다. 운동신경이 둔해서 놀아주는 아이들이 없기 때문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그때 속으로 뭔가를 외우며 내 마음을 가지고 놀던,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혼자 누워 반야심경을 외우시는 걸까? 나는 참 쓰잘 데 없는 걸 즐겨 외웠었다. 이, 사, 팔, 십육, 삼십이, 육십사, 백이십팔, 이백오십육, 오백십이, 천이십사, 이천사십팔, 사천구십육, 팔천백구십이, 만육천삼백팔십사, 삼만이천칠백육십팔, 육만오천오백삽십육, 십삼만천... 그 대신 반야심경을 외웠더라면 지금 어머니랑 낭송이 잘 어울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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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부내 永樂町78에 사는 일본헌병군조 光谷信次郞(35)외 7명은 8월 17일 오후 1시경에 阿峴町 마루턱에서 술을 먹고 鄭寅燮이라는 사람을 단도로 찔러 전치 3주일간의 중상을 입혔다. 종로 보안서에서 요지음에야 그 일당을 전부 체포하여 취조 중이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24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사건 발생이 8월 17일 오후 1시라면 천황의 항복 방송 49시간 뒤, 헌병군조 같은 골수 제국주의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사태인지 몰라 정신이 없었을 것 같다. 낮술을 걸치고 있다가 해방을 기뻐하거나 일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좀 크게 들렸다고 행패 부리는 장면이 대충 그려진다.


그런데 한 달 너머 지난 이제야 체포했다는 건 어찌된 일일까? 현역 군인 신분이니까 경찰에서는 인적사항만 파악해 놓고 있다가 미군이 들어와 십여 일이 지난 이제 헌병대로부터 신병을 인수한 모양이다.


몇 달째 해방 당시 상황을 조사하다 보니 같은 자료를 봐도 전과 다른 시각에서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8-15의 기억: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한길사 펴냄)에 수록된 강창덕의 회고 중에서 이런 대목이 떠오른다.(183-184쪽)


그런데 17, 18일 밤쯤 됐을 겁니다. 한밤중에 마을에 있던 일본군 부대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어요. (...) “따다다다다!” 기관총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데 불길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놈들이 발악을 하는구나 싶었죠. 놈들이 분풀이를 하려나 보다, 까딱하면 다 죽이려 드는 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어머니를 업고 집에서 300여 미터 이상을 도망갔어요. 그러고는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관목이나 풀숲에 몸을 숨겼지요. (...)

그런데 일본군이 총을 왜 쏘았는지는 다음날 직장에 나가서야 들을 수 있었어요. 하양 읍내는 벌써 지하세력들이 조직적인 활동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청년단체의 사람들이 부대장을 만나 항의했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사람 놀라게 하느냐,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그랬더니 실탄이 많이 남아서 그 실탄을 없애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에게 총을 쏜 것이 아니라 과수원 있는 강 쪽으로 발사했다고 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8월 15일의 항복 선언에서 9월 9일의 항복 절차 이행까지 20여 일간은 일본인들이 공권력의 하드웨어는 그대로 쥐고 있었지만 소프트웨어는 무너진, 권력의 혼란 상태였다. 무기가 누구 손에 쥐어져 있는지를 주민들에게 똑똑히 인식시켜 주려 한 이 부대장의 조치는 현명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 현명하지 못한 반응도 많이 있었다. 위 책에는 해방 당시 도쿄에서 육군사관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장지량의 회고도 들어 있다. (340-341쪽)


우에하라 대위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최후까지 궁성에서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다. 그러니 근위사단장 당신이 우리와 같이 해야 할 거 아니냐. 당신 책임 아니냐.”

모리 사단장이 대답했어요. “천황 폐하의 명령이다. 명령인데 어찌 거역할 수 있느냐.”

“아니다. 천황 폐하가 무조건 항복한다고 하신 것은 몇 놈들의 농간이다.”

대위는 좀체 믿지를 않았어요. 일대 혼란이 벌어졌죠. 그러니까 우에하라 대위가 일본도로 근위사단장 모리의 목을 그 자리에서 쳐버렸어요. 그리고 학교로 돌아온 거예요. 나중에 우에하라 대위는 스스로 할복을 했어요.

(...) 나중에 김재권과 같은 구대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는 구대장이 쏴서 죽였다고 그랬어요. 15일, 항복 방송을 듣고 너무 좋아했나봐. 그 사람 조금 경솔한 면이 있었어요. 명랑하기는 했는데 말을 함부로 하는 면이 있었죠. 그때도 너무 좋아서 까불었던 모양이야. “야, 우리 이제 독립한다. 독립한다.” 일본 사람들은 풀이 죽어서 ‘우리는 죽었다’ 이러고 있는데, 한 놈이 나서가지고 ‘우리는 살았다’고 하면 되겠어요? 구대장이 권총으로 그 자리에서 쏴버렸다고 하더군요.


맨 위 기사의 미쓰다니 군조처럼 새로운 상황에 적응을 거부한 일본인들이 조선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어느 수준 이상의 고위층에서는 무책임한 행동이 별로 없었다. 김준엽의 <장정 2>(나남출판 펴냄) 243-252쪽에는 8월 18일 이범석, 장준하와 함께 한국 진입을 시도하는 미군 선발대에 끼어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던 이야기가 있는데(대부분 내용은 장준하의 <돌베개>에서 옮겨온 것임), 일본인 지휘관들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잘 그려져 있다.


일본의 항복 결정에 관한 정보를 8월 15일 이전에 조선총독부에서 입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연재 초입에서 밝혔다. 항복의 구체적 결정이 8월 10일에 내려지자 총독부에서도 바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보가 공식 통보된 것이 아니라 단파방송 청취로 파악한 것이라고 당시 관계자들은 주장했지만, 책임 회피를 위한 주장일 뿐이지, 최대한 정확하고 정밀한 정보가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총독부로 전달되었으리라는 내 추측은 당시 상황을 조사해 나갈수록 더욱 확실해진다.


8월 10일 항복 결정이 확정되기 전에도 생각 있는(그리고 정보도 있는) 일본인들은 항복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적어도 5월의 독일 항복 이후로는 승리에 집착할 수 없게 되었다. 군부 강경파가 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표면화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덜 비참한 조건으로 항복하는 길을 찾는 노력이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 주둔군의 고위층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선후책을 궁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복 결정 직후 여운형, 송진우 등에게 치안 교섭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인의 조선 퇴각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질서 있게 이뤄졌다. 혼란과 충돌, 그리고 개인의 고통에 관한 적지 않은 분량의 기록과 회고가 남아 있지만, 만주와 중국, 그리고 남양 여러 지역에 비하면 시간도 짧게 걸렸고 희생도 적었다. 일본과 가까운 거리라는 조건도 물론 작용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전후에 필요했던 일본인의 노동력과 군사력이 조선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조건이었다. 그리고 조선에 있던 일본인 지도부의 퇴각 계획이 상당히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인상도 받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