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2. 00:29


오늘은 영진이 차를 타고 갔다. 자유로 병원에 계실 때는 집도 가깝고 학교도 가까워 자주 찾아뵙던 놈이 학교 일이 빡빡해지고 박사과정까지 겹치다 보니 요양원 옮기신 후로 처음 가 뵙는 것이다.


모처럼 느긋하게 경치를 구경하면서 가려니 나이를 스스로 느끼게 된다. 20년 전 대구에서 일할 때 더러 차 몰고 서울 올 때 이 구간 경치가 마음에 들어서 이쪽으로 즐겨 다녔는데, 이제 내가 운전하고 다니려면 길바닥에 몰두하느라 그때처럼 경치를 즐기지 못한다.


3시쯤 도착하니 방에 누워 계셨다. 창 쪽에 머리를 두고 계셔서 고개를 들지 않고도 들어오는 사람을 알아보실 수 있다. 둘이 나란히 들어갔는데, 영진이는 힐끗 봐 치우고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떠올리신다. 늘 그렇듯 그냥 편안하고 흐뭇한 웃음이다.


손을 내밀어 내 손을 한 차례 어루만진 뒤에야 영진이에게 다시 눈길을 돌리며 "이건 누구야?" 지나치듯 물으신다. 영진이 인상이 편안하게 느껴지신 모양이다.


"영진이 모르세요? 어머니 손자."

"우리 어머니 손자라구? 그럼 누구 아들인가?"

"어머니의 어머니 손자가 아니고, 제 어머니의 손자예요."

"네 어머니는 난데... 그럼 내 손자? 얘가 내 손자란 말이야?"

이제야 본인이 나선다. "네, 할머니. 제가 할머니 손자 영진이예요."

아직도 미심쩍으시다. "아니, 내 손자라니... 애비가 있을 게 아냐? 그게 누구야?"

나를 가리키며 빈틈없이 설명드리려 애쓴다. "할머니의 아드님인 이분이 제 아버지예요."


몇 초의 공백... 이제 꽂히신다. 옥타브가 올라간다. "그럼... 네가 내 손자로구나! 내 손자가 왔어!" 완전히 그리로 쏠리신다. "어디 좀 보자. 네가... 영진이?"


영진이가 모시고 앉아 있는 동안 복도에 나와 치료사 김 선생에게 어머니 몸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한참 듣고 돌아왔을 때, 아주 새로운 말씀을 하셨다.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진이에게 "네 아버지가 참 착한 사람이야." 하신 뒤에 놀라운 말씀이 나왔다. "그런데 참 나랑은 멀었어." 거듭 강조하신다. "참 머나먼 모자간이었어."


그러더니 마침 생각나셨다는 듯이 내게 마구 따지신다. "야! 왜 그랬는지 설명 좀 해봐라. 너랑 나랑 왜 그렇게 멀었냐?" 그러다가 아주 막말까지 나오신다. "너 나한테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냐? 내가 오입이라도 했단 말이냐?" 오입?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지난 봄 낸 <페리스코프> 머리말에서 어머니와 근년 지내온 곡절이 내 일하는 자세의 변화와 겹쳐지는 느낌을 적은 것이 누설되었나? 요즘 정신이 아주 좋아지시고 간병인 신 여사가 틈틈이 <불광> 읽어드리는 줄은 알고 있는데, 그 책까지 읽어드렸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불화의 시절' 말씀을 꺼내신 것은 영진이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몇 달 전까지는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늘 보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많은 생각을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그 때 그 때 골라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랑 편안하지 못하던 시절 생각이 어머니 마음에 떠올라 있었다. 그러다가 영진이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 관한 분석적 시각이 발동하신 것 같다.


그 참, 그 시비를 지금 와서 또 되풀이할 수도 없고... 겨우 얼렁뚱땅 수습해서 반야심경 외우시게 한 다음 바깥바람 쏘이시지 않겠냐고 권했더니 뜻밖에 거절하신다. 피곤해서 쉬고 싶으시다고.


점심식사 후 내내 앉아 계시다가 우리 오기 조금 전에 누우셨다고 신 여사가 설명해 준다. 그러면 잠깐 쉬시라고, 그 동안 우리는 산보 좀 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리니 선선히 허락하신다. 부자간에 정원을 산책했다. 넉넉하고 잘 다듬어진 정원에 영진이는 탄복해 마지않는다. 이렇게 훌륭한 시설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마침 나뭇가지 다듬고 있던 이사장님 부부 쉬는 시간이 맞아 함께 차 한 잔을 했다. 영진이는 한 차례 방문으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주 깊이 있게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다.


어머니께 돌아가니 네 시가 넘어 있었다. 아직도 바깥바람 생각이 별로인 듯하다가 신 여사도 함께 권해드리니까 승낙하고 휠체어에 앉히도록 몸을 맡기신다. 그런데 막상 테라스에 나가니까 너무 좋아하신다. 햇볕과 바람 속에 앉아서는 표정에서도 말씨에서도 충족감이 저절로 넘쳐난다. 행복감을 적극적으로 느끼시는 것 같다.


지난 달 <불광>에 올린 글에서 어머니의 신체 활동을 늘릴 가능성에 대한 생각 적은 것을 보고 원장님과 치료사 김 선생이 이야기를 나눴던 모양이다. 이번 방문길에는 김 선생과 한 번 의논해 보고 싶었는데, 김 선생이 나를 보자 먼저 얘기를 꺼낸다. 역시 근래 어머니의 회복은 놀라운 수준이다. 진지도 거의 손수 떠 잡수신다고 한다. 근육의 힘이 많이 느셔서 기저귀 대신 화장실 이용을 권해드릴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도 참 고마운 일이다. 화장실 수발까지 해드리려면 근무자들 수고가 더 늘어날 텐데... 그러나 간병인 신 여사도 치료사 김 선생도 어머니 회복을 진심으로 기뻐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마음이 하나의 가식 없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 요양원의 운영 기준이 양심적이어서 그럴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주변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는 소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김 선생이 얘기를 마치고 일어나다가 불쑥 생각난 듯 웃으며 한 가지 얘기를 해줬다. 신 여사가 얼마 전부터 어머니 목욕날을 꼭 피해서 휴가를 간다고. 다른 분이 목욕시켜 드리면 "쌍년" 소리를 많이 하신다고. 그 욕을 기분 나쁘게 듣는 사람도 없지만, 신 여사는 어머니가 욕을 하신다는 게 마음 아프다고 휴가 날짜를 조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까 잠깐 인용했지만, 손자 듣는 앞에서 아들에게 "오입" 얘기를 태연하게 하는 것도 보통 경지가 아니시다. 아마 같이 지내는 분들에게도 그 정도 표현은 스스럼없이 하면서 지내시니까 우리 앞에서도 거침없이 나오겠지. 아주 어릴 때 이후 할머니를 못 보면서 큰 영진이, 돌아오는 길에 거듭거듭 감탄한다. "할머니... 기질이 참 대단하신 분이네요."


식탁 앞에 앉아 우리 작별 인사를 대범하게 받으시는 장면도 영진이에겐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혀 드리니까 옆의 할머니가 "이제 어서 가세요들." 하시기에 "어머니께서 숟갈은 드시는 걸 보고 가야죠." 했더니 숟가락을 집어 하늘높이 쳐들고 "나 숟갈 들었다. 가라!" 하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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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일본의 항복 선언 후 달포가 지나 이제 10월이다. 그 동안 국내 상황 파악에 몰두했는데, 국외 상황도 한 번 점검해 봐야겠다. 한민당과 국민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도력을 기대하고 있던 중경 임시정부의 상황부터 살펴본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후 1930년대 들어 중국 남부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40년 이후 중경에 자리 잡고 있는 동안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 존재로 널리 인식되었다. 물론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교육받은 것처럼 절대적 존재는 아니었다. 당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외 일반인들의 인식 속에서는 임시정부가 대표적 존재였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대표적 존재로 인식된 중요한 이유 하나는 상해의 지리적 조건에 있었다. 1919년 당시 중국이 군벌로 쪼개져 있는 상황에서 최대 개항장인 상해는 국제적 도시였다. 국내에 비교적 가까우면서 만주, 연해주, 미국 등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소였다.


임시정부 소재지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연해주였다. 만주와 연해주에는 당시 해외 동포의 압도적 다수가 살고 있었는데, 만주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반면 러시아는 일본과 오랜 숙적이었다는 것이 연해주의 유리한 점이었다. 독립운동의 무장운동 측면이나 대중적 근거를 위해서는 연해주가 상해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연해주 아닌 상해로 결정된 데는 1919년 당시의 상황이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과 3-1운동 발발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의 가능성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래서 모처럼 열의를 가지고 모여들었는데, 모이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상해였고, 상해에서 모였다는 사실이 임시정부를 상해에 두기로 결정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1919년의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서 임시정부가 혼란과 무기력의 침체기에 빠지는 데는 동포 주민의 기반이 협소하다는 위치의 약점이 크게 작용했다.


1920년대 후반 국민당의 북벌로 군벌 할거가 해소되고 장개석 정권이 강화되면서 임시정부는 그 영향권에 들어갔다. 장개석 정권은 임시정부의 거의 절대적인 존립 배경이 되었고, 임시정부는 이에 맞춰 김구의 지도체제로 정비되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대립도 임시정부의 구조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은 일본군의 확산에 따라 물적 기반이 축소되면서 연안의 공산당에 의지하는 일부 공산주의자들 외에는 임시정부로 수렴되었다. 1940년 중경에 자리 잡은 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원칙적 합작을 지키는 상황 덕분에 임시정부도 넓은 폭의 독립운동가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 194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는 그 전 시기에 비해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이 뚜렷해졌다.


포용하는 폭이 넓은 만큼 분파적 양상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초 김준엽, 장준하 등 일단의 학병 탈영자들이 중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는 이 분파적 양상이 개탄스럽게 비쳐졌던 모양이다. 임정 간부들을 앞에 두고 장준하가 터뜨린 유명한 ‘폭탄선언’을 소개한다.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돌베개 펴냄) 162쪽)


“우리는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멀리에서 여러 어른들을 계속 존경하고 사모하면서 이보다 더 행복했을 겁니다. 저 자신은 물론 우리 젊은 동지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여기를 빨리 떠나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지금의 제 심정입니다. 제가 만약 일본군에 돌아간다면 꼭 그들의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본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저는 중경 폭격을 지원하여 여기 임정의 청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싶습니다.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 하면서 겨루고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 많은 사선을 넘으며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하여 죽을 자리를 찾자는 것이지 결코 여러 선배들이 일삼고 있는 당쟁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으로 저의 말씀을 맺습니다.”


청년 장준하의 결벽으로만 몰아붙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중경 단계에서도 임시정부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여운형은 임정 지도력의 한계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 별도의 지도력을 키워내려 했다. 안재홍 역시 임정의 문제점을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임정에 지지를 모아줌으로써 극복의 길을 찾고자 했다. 임정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공통의 입장에서 두 사람은 얼마동안이라도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임시정부의 ‘절대 지지’를 표방한 한민당도 해방 후 임시정부의 역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지지’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근년 많이 쓰이고 있는데, 비판적 지지 아닌 지지라면 어떤 의미 있는 지지가 있을 수 있을까? ‘비판적 지지’의 출현은 종래의 줄서기 식 ‘절대 지지’를 벗어나는, 의미 있는 정치의 시작으로 나는 본다.


지금의 시점에서 임시정부를 바라보는 데도 임시정부와 김구의 절대화와 신화화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표준적 교육과 교양은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와 김구의 문제점과 한계를 투철하게 인식할 때 그들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음미도 가능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

 

며칠 전(9월 27일) 해방 직후 통화량의 급격한 증가에 관한 생각을 적은 후 한 독자께서 그 분야를 많이 살펴온 연구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급히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과 “8-15 이후 ‘融資命令’의 실시와 무책임의 체계”(<한국민족사연구> 33호, 2002. 12)를 찾아서 읽어보았다. 거기서 배운 것을 가지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겠다.


정병욱은 당시의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水田直昌)의 추산에 의거해 8월 15일에서 9월 28일 사이의 화폐 추가발행액을 33억5천만 원으로, 그중 예금인출로 지불된 액수를 19억2천만 원으로 파악했다. 나머지 14억3천만 원의 대부분은 퇴각자금과 대출금 등으로 파악했다. 예금인출은 고객들의 재산권 행사로 볼 수 있지만, 그 밖의 돈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풀려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논문에서 정병욱이 초점을 맞춘 문제는 정치적 대출의 배경이 된 ‘융자명령’이다. 전쟁이 어떻게 되든 은행은 은행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다. 대출을 주려면 융자 목적의 타당성과 상환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원칙과 상식을 무시하는 ‘돈 퍼주기’에 나서려니 은행의 업무처리 방식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래서 총독부가 나서서 융자명령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준 것이다.


융자명령이란 1938년 4월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에 의거해 일본 대장대신이 생산력 확충 등 시국에 긴요한 자금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은행에게 자금 융통 등을 명령하는 조치다. 행정 권력을 절대화하는 전시법령의 대표적인 사례다. 8월 21일 미즈타 재무국장이 융자명령을 발동한 것은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전시법령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전시법령의 시행 요건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한 자의적 조치였다. 그러나 상부의 감독이 없고 은행 경영자들과 배짱이 맞았기 때문에 그냥 시행된 것이다.


융자명령에 따른 대출은 총독부와 은행 양쪽의 심사를 거쳤는데, 어느 쪽 심사도 책임감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정병욱이 “무책임의 체계”라 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총독부 재무국은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했고, 은행에서는 총독부의 결정에 기계적으로 따랐다. 총독부 고위층은 이 조치를 통해 마음대로 화폐를 세상에 풀어낼 수 있었다.


미즈타 재무국장과 조선은행의 호시노(星野喜代治) 부은행장, 조선식산은행 야마구치(山口重政) 이사 등 은행 간부들은 미군정 하에서 몇 달 동안 한편으로 군정에 협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유용, 경제교란 등 혐의를 조사받았다. 빙산의 일각 정도였겠지만 상당한 범위의 혐의가 확인되었으나 아무도 기소되지 않고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사이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드러난 빙산의 일각 중에는 ‘댄스홀 사건’이란 것이 있다. 김계조라는 사람은 융자명령에 의거해 조양광업 대표로 식산은행으로부터도 대출을 받고, 조선석탄주식회사를 통해 조선은행으로부터도 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은행 대출금 250만 원으로 서울 시내에 몇 군데 댄스홀을 만든 것이다.


미즈타 등 관계자들은 미군의 ‘여성 수요’를 댄스홀로 충족시킴으로써 민간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뜻이었다고 변명했단다.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낙랑클럽 활동무대의 하나로 나오는 미츠코시 백화점의 댄스홀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몇 개 댄스홀이 6만 미군 장병의 ‘여성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를 거뒀는지는 몰라도, 후임 지배자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려는 전임 지배자의 노력은 눈물겹도록 알뜰하다.


새로 찍은 조선은행권이 해방 후 조선의 이곳저곳에 뭉칫돈으로 존재하며 권력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리라는 내 추측은 이 논문들을 보며 더욱 굳어진다. ‘융자명령’은 당시 ‘돈 퍼내기’의 전형적 양상을 예시하는 것이지만 돈 움직임의 윤곽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융자명령에 따라 집행된 대출금 규모는 1억 원 남짓에 불과한 것이다. 1945년 9월에 유통되고 있던 조선은행권의 20% 가량이 최근 한 달 동안 어떤 경로로 해서 어디로 풀려나갔는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의 조선처럼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의 사회에서 현금은 매우 큰 힘을 가진다. 숙식만 제공해도 수많은 유민을 조직할 수 있고 약간의 용돈만 줘도 수많은 시위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9월 17일 인용한 글에 “이철승은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김성수 댁을 거쳐 전용순 댁에 가서 활동자금을 타내고, 김구 댁인 경교장,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였다.” 한 대목이 있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33쪽) “인촌의 주머니가 바로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도 있었다. 1945년 연말부터 나타난 반공 조직의 배경에는 강한 자금력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말한 ‘사랑방정치’의 비용에서 명월관, 국일관의 수많은 잔치들까지. 그리고 이승만과 김구 등이 귀국했을 때 제공된 정치자금까지. 아무리 재력가 그룹이라도 당시 상황에서 현금 동원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해방 후 몇 주일 동안 총독부는 막대한 금액의 돈을 풀었고, 그 후에 뛰어난 현금력을 보인 그룹이 있었다. 그 사이의 연결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9월 24일의 글 끝에서 “조선에 있던 일본인 지도부의 퇴각 계획이 상당히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인상도 받는다.”고 했다. 화폐 발행과 관련해 특히 강한 인상을 받는다. 통화량의 확대는 퇴각하는 일본인에게 여러 모로 유리한 것이었고, 조선 사회에는 여러 모로 큰 상처를 남긴 일이었다. 종래의 연구에서 조선의 국부(國富) 유출 문제를 지적해 왔는데, 그 못지않게 조선 사회의 권력구조에 끼친 영향도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번 작업의 참고자료에 관해 한 마디 덧붙인다. 근년 한국사에 관한 글을 쓰면서 참고하는 연구 성과 범위를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에 한정하고 개별 논문까지 찾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 현대사 분야를 살피려니 논문도 꽤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 연구가 199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해 왔기 때문에 정리된 연구에 비해 진행 중인 연구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