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1일)에 꺼냈던 중경 임시정부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오늘은 김구의 거취에 초점을 두고 해방 전후 임정의 상황을 설명하겠다.


임정이라 하면 누구나 바로 백범 김구를 떠올린다. 김구는 과연 상해 임정 설립 때부터 참여했고, 1923, 1926, 1935년, 임정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앞장서서 지킨 인물이었다. 1935년 임정 반대파가 민족혁명당을 결성해 임정의 기반이 무너질 때 국무위원으로 복귀한 후로는 10년간 임정을 이끌었다. 임정의 가장 큰 공로가 ‘대한민국’의 깃발을 26년간 중단 없이 지킨 것인데, 이 연속성을 뒷받침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김구였다.


한 국가를 대표한다는 조직이 긴 기간 동안 한 인물로 상징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조직의 한계성을 말해주는 측면이 있다. 김구의 불요불굴한 의지는 임정의 연속성을 위해 요긴한 조건이었지만, 임정의 포용성 측면에는 장애가 되기도 했다. 특히 좌익에 대한 김구의 반감이 큰 작용을 했다. 김구의 반감이 처음에는 국제주의 성향의 골수 공산주의를 향한 것이었지만, 공산주의에 대해 포용적이거나 타협적인 중도파까지 배척함으로써 스스로를 ‘극우’의 입장에 가둔 장면도 적지 않았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서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진영을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고 우파를 다시 합작파와 국수(國粹)파로 나눠 보면서 김구 중심의 국수파 분위기를 이렇게 그렸다. (174-175쪽)


중국 관내에서의 좌우충돌에는 세대 간의 사상적 갭도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지도층은, 19세기 후반 또는 19세기 말경에 유년, 청년시기를 보내고 전통적인 지적 성장을 하여, 일면으로는 위정척사파적인 기질도 갖고 있는 원로들로서, 양반계급 출신이 많았으며, 근대교육을 적게 받은 편이었다.

그런데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경우가 적지 않았고, 독립운동의 선배에 대해 어른 대접을 잘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측의 원로들은 김원봉 등이 나이가 젊고 충동적이며 환상에 차 있고 언행이 너무 편격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중요시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싫증을 내면서, 그들을 ‘봉건영수’, ‘민족 파시스트’, ‘신비적 국수주의자’로 간주하였고, 국수주의를 배척하자고 외쳤다.

한독당의 원로들은 강렬한 충군애국의 관념을 갖고 한국의 고유문화 발양을 크게 중시하였다. 그리고 서양문화에도 반대하였고, 더더욱 공산주의 사회주의에는 반대하였으며, 소련과의 연합도 반대하였고, 반제반전의 일본민중과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반대하였다. 그들은 친중국적이어서 중국에서 유교문화의 훈도를 받아온 것을 감사해 하고, 중국의 원조를 더욱 많이 받아 임시정부가 영향력을 확대하면,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한 독립적인 기구는 생겨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개석 정부에 언명하였다.


김구 일파가 임정을 장악하고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지지와 지원에 있었다. 그 사이의 유대감은 전술전략 차원이 아니라 철학 차원의 세계관과 문명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932년 이후 장개석 정부의 지원이 확대되면서 김구 일파는 임정 장악력을 유지하고 독립운동 진영 내의 주도권을 노릴 수 있었다.


1935년의 민족혁명당 결성은 중도 우파(합작파)가 좌파에 가담해 김구 일파(국수파)를 고립시킨 일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아직 살펴보지 못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고 있던 당시 중국 상황 속에서 임정이 국민당과 밀착해 극우노선을 취하는 데 대한 반발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김구는 장개석 지원금의 독점 사용 문제로 임정 국무위원직을 벗어나 있었는데, 7인의 당시 국무위원 중 5인이 민족혁명당에 동조해 사임하자 이동녕, 조완구와 함께 국무위원으로 돌아와 정면돌파의 길을 걸었다.


1936년 말 서안(西安)사건 이후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지면서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정면대결의 조건이 해소되었다. 뒤이어 중일전쟁이 터져 대일 항쟁의 한-중 협력 분위기가 강화되고 일본 제국주의의 한계가 가시화됨에 따라 독립운동 진영도 통합의 기운을 타게 되었다. 1940년 임정이 중경에 자리 잡고 새 출발을 하면서 통합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임정 반대파가 임정을 비판해 온 가장 큰 이유가 ‘허위(虛位)’, 즉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임정과 결별한 뒤 민족혁명당 측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임정이 1940년 9월에야 광복군을, 그나마 지휘권도 없고 병력도 없는 사령부만을 만든 데 비해 할 일을 열심히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상황은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임정의 입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민족혁명당 측과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중국공산당 쪽으로 넘어간 뒤 잔류세력은 1942년 말까지 임정에 합류했다. 민족혁명당 측은 1941년 10월에 임정 참여를 결정했으나 한독당으로 조직되어 있던 김구 지지세력이 이를 봉쇄하려 했기 때문에 합류에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1941년 10월 33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일어난 ‘김붕준 탄핵사건’은 국수파가 민족혁명당 측의 진입을 막는 데 거의 파시스트 수준의 배타성을 보인 일이었다. 대한민국 국회의 미개성과 폭력성에 못지않은 행태였다. 결국 국수파가 고집을 꺾고 민족혁명당 측을 받아들인 것은 장개석 정부의 압력에 의해서였고, 그 후 마지막 단계의 임시정부에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측면이 있었다. 1945년 초 중경에 도착한 탈영 학도병들의 눈에 비친 이 분열의 양상이 지난 주 소개한 장준하 ‘폭탄선언’의 배경이었다.


일본 항복을 앞두고 임정은 중국 정부와 정보를 공유하며 전쟁의 종말을 예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군 OSS와 합작으로 국내 침투를 준비하다가 실행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해방 소식을 듣고 김구가 독자적 군사행동을 취할 기회 없이 전쟁이 끝난 것을 통탄했다고 하는데, 우리 민족의 능동적 역할이 적었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임정의 능동적 역할이 적은 데 대해서도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김구를 위시한 임정 요인들은 해방 후 백여 일이 지난 뒤에야 환국했다. 미군정의 비협조 때문에 늦어진 것이라고 통상 이해하고 있지만, 임정 측에서 최대한 서둘렀다면 그렇게까지 늦어질 수는 없었을 것 같다. 임정에게는 그때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가 절대적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고,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장개석도 임정을 통한 한국과의 관계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 김구 측과 장개석 측 사이에 어떤 관계가 펼쳐지는지, 일간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

군정청에서는 5일부로 각계 명망 있는 조선인 지도자를 군정장관의 고문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번에 기용된 고문은 다음의 11氏이다.

金性洙(敎育家) 全用淳(實業家) 金東元(實業家) 李用卨(醫師) 吳泳秀(銀行家) 宋鎭禹(政治家) 金用茂(辯護士) 姜柄順(辯護士) 尹基益(鑛業家) 呂運亨(政治家) 曺晩植(政治愛國家) 前記 11氏 中 曺晩植은 당일 불참하였는데 상경하는 대로 任官될 터이며 무기명투표에 의하여 金性洙가 위원장에 決定되었다. (하략)

자유신문 1945년 10월 0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 ‘공간’의 정치상황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이 ‘분단’이다. 그러나 ‘점령’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실질적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점령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이 존중받는 상황이었다면 분단 문제만 하더라도 극복의 길이 더 활발하게 모색되었을 것이고, 분단은 짧은 일시적 상황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점령의 상황이 “항복 접수라는 실용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출발한 분단을 강고하게 만든 것이다.


분단을 고착화시킨 문제가 아니라도, 겨우 벗어난 일본 통치가 점령군의 통치로 대치되는 데 대한 민심이 좋았을 리 없다. 북한에서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를 후원함으로써 ‘점령통치’의 인상을 약화시키려 노력한 데 대비해 남한에서 ‘유일한 정부’를 자처하는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정은 민심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통치기구에서 일본인을 미군 장교와 한국인으로 대치했다. 그러나 미군 장교들은 직책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고문으로 임명된 일본인 전임자들에게 의지했다. 새로 임명된 한국인들도 거의가 일본인 밑에서 하위직에 종사하다가 승진되어 역량이 부족한 사람도 많고 민족의식이 약한 사람도 많았다.


내 아버지는 금융조합의 지방조합 이사로 있다가 중앙회 과장으로 승진되었는데, 사령장을 받던 12월 5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하상용 씨를 통해서 신 회장에게서 사령을 받았다. 구 회장 이하 일인 간부 환시 하에서 다시 미인의 사령을 받게 되니 얼굴에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다. 저놈들이 옛날은 우리들에게 와서 머리를 굽신거리더니 이제는 또 미인의 앞에 같은 태도로 나갈 것이다 하고 일인들이 속으로 비웃을 걸 생각하니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자꾸만 후회스럽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펴냄) 22-23쪽)


아버지는 몇 달 안 되어 금융조합을 떠났다. 금융계의 중견 간부직을 그만두고 서울대 사학과에 조수(조교)로 들어간 것을 보면 정말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떠나는 결심을 하는 장면은 이듬해 3월 19일자 일기에 적혀 있다.


장덕수 씨 등 민주의원 측이 하상용, 임흥식 씨 등을 초청해서 공작한 결과 과장회의에서 중역들이 우익과 결탁하기를 선포하였을 때 나는 그 비(非)를 지적하고 두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였다. 다시 3월 9일 오후 인민비판사 주최로 좌익 편에서 금융조합 문제를 논의하고 민전, 전평, 전농, 해방일보 등 좌익의 논객들이 금융조합에 공격의 일제 화살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들의 공식주의적인 관념론을 상대로 세 시간 동안 항변하였다.

그러나 금융조합의 우익 편향은 이제 결정적인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나는 이 기관을 물러나야겠다. 나는 현하의 조선에 있어서 좌익의 경거망동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익의 혼란도 보기 숭하다. (같은 책 43쪽)


한국인 고문단 임명에도 한국인의 참여를 선전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북한에서 소련군의 조치와 비교하면 여러 모로 빈약한 조치였다. 능동적 역할이 없는 자문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구성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 넣은 여운형과 조만식을 제외하면 모두 미군정에 순종적인 한민당 사람들이었다. 조만식은 서울에 오지도 않았고, 여운형도 곧 고문직을 사퇴해서 미군정 고문단은 한민당 군정청 지부처럼 되고 말았다.


진주한지 한 달이 거의 지나서야 허울만의 고문단이나마 임명한 사실도 사정을 말해준다. 미군정 담당자들은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채로 들어왔다.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킬 의사도 없었다. 한국이 어떤 변화를 필요로 하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일본을 대신해서 남한을 통치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들어왔다. 전쟁터에서의 고생을 점령자로서의 호강으로 보상받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 사령관이 진주 전부터 일본인들에게 건준에 대한 비방을 듣고 있어서 건준을 적대시했다고 하는데, 그런 비방을 쉽게 곧이들은 것은 권력의 독점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준을 파트너로 인정한다면 대등한 입장에서 긴장된 관계를 풀어나가야 한다. 아무 정치력이 없는 미군 입장에서는 그런 긴장된 관계가 부담스럽고 귀찮고 싫었을 것이 당연하다. 미군의 권력을 깍듯이 받들어주는 일본인 전임자들이 데리고 놀기에 편안했고, 수십 년간 한국인을 통치해 온 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이 임무 수행을 위해 가장 쉽고 편한 길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조만간 돌아가야 했다. 한국인과 놀지 않을 수 없는데, 건준처럼 독자적 권위를 주장하는 집단은 싫었다. 한국인 중에서도 일본인처럼 미군정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상전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좋았다. 한 달 지내며 어울려 보니 영어도 잘하고 태도도 좋은 사람들이 한민당에 많았다. 그래서 한민당 위주로 고문단을 짜게 된 것이었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하지 사령관은 고문단 임명 전날에야 여운형을 처음으로 만났다. 며칠 후에 나올 아놀드의 건준 비난을 보면 4일에도 여운형을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게 아니라 억지로 만난 것 같다. 실권 없는 고문단, 그것도 한민당이 판을 치는 고문단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呂運亨은 미군정 당국의 초청을 받아 4일 오전 9時에 비로소 아놀드 군정장관 同 오후 2時에 하지 중장과의 첫 회견을 하였다. 呂運亨은 이미 미군이 상륙준비로 인천 부근 해상에 있을 때에 白象奎, 呂運弘, 崔謹愚 3氏를 사절로 보내어 하지 중장에 친서를 보냈으나 여하한 곡절인지 이 친서가 수교되지 않고 또한 그 후 하지 중장이 진주한 이래로 呂는 일본인과 결탁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악질의 모략으로 된 중상으로 지금까지 회견이 늦어졌다는데 4日에야 미군은 모든 오해를 풀고 건준위원장의 자격으로 呂運亨에 회견을 요청하여 식량 기타 생산업 운영에 대한 협력을 요망하는 제1차 회담을 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06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미군정에서 하지와 아놀드의 역할을 놓고 “어리석은 놈들”이라는 비판이 당시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다. 나는 이 비판이 아주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게으른 놈들”이라는 데 있었다고 본다. 군정장관 고문단 임명은 이 문제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점령통치 방침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점령통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면 고문단 구성을 그렇게 ‘통역정치’ 수준에 묶어놓을 일이 아니었다. 명색이 ‘통치’를 한다면서 긴장된 관계를 그렇게 싫어하다니, 정말 게으른 놈들이었다. 그 게으름으로 인해 자기들도 나중에 꽤나 고생을 하게 되지만, 한국인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Posted by 문천

 

1942년 10월 이래 만 3년 동안 일본관헌에게 압수되었던 우리 어학계의 유일한 보배인 「우리말광」 전부가 곱게 조선어학회의 손으로 들어 왔다. 이 원고는 수십 년간 李允宰 주간 하에 李克魯 崔鉉培 제씨의 노력으로 거의 완성되어 일부는 조판까지 된 것으로 전부를 합치면 4·6배판으로 6,000페이지에 달하는 거대한 사전이 된다고 한다. 그러면 이 귀중한 원고가 어찌하여 그 동안 일본관헌에게 압수되었으며 그 후 어떻게 하여서 오늘까지 보관되어 다시 완성된 말광으로 우리 어학계에 이바지하게 되었는가? 누구나 궁금하게 여기는 바로 이에 자세한 내력을 조선어학회 金炳濟에게 듣기로 하자.

“지금으로부터 만 3년전 즉 1942년 10월 1일에 李允宰, 한승, 李克魯, 崔鉉培, 李熙昇, 鄭寅承, 金允經 제씨를 함경남도 洪原경찰서에서 검속하였습니다. 이분들 외에도 조선어학회에 관계하고 있던 여러분이 같이 검속되었는데 그 때 증거물로 말광 원고를 압수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함흥 지방법원 검사국에 송국된 후 재판결과는 최고 6년 최하 2년의 극형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윤재와 한승 두 분은 잔인무도한 학대로 인하여 우리말광의 완성을 보시지 못하고 원한의 눈을 감지 못한 채 옥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은 여러분은 가진 곤경을 참아 가며 학자로서의 정의를 밝히고 초지관철을 위하여 경성고등법원에 상고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광원고는 증거물로 금년 7월 28일에 서울로 전송되었습니다. 그러자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의 길이 열린 8월 15일에 석방되어 상고 중이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제씨는 서울로 올라오자 말광원고를 전력을 다하여 찾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기 전까지도 일본관헌의 방해로 찾을 길이 아득하여 일시는 매우 염려되던 차에 정성과 이 꾸준한 노력의 보람으로 10월 2일 만2년에 경성역에 있는 조선운송주식회사(朝運) 창고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상고하지 않았더라면 찾을 수 없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제씨와 내가 주간이 되어 완성을 기하기로 되었는데 4·6배판으로 약 6,000 페이지나 되는 것으로 일본제국주의 하에 된 것인 만큼 註釋에 수정할 것도 있어 좀 시일이 걸리겠습니다. 그러나 인쇄가 원활하면 넉넉잡고 2년 만에는 출판되리라고 믿습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06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중세의 언어는 흔히 ‘공식 언어’(lingua franca)와 ‘지역 언어’(vernacular)로 구분되어 있었다. 공식 언어는 문명의 상부구조에 쓰인 것이므로 하나의 문명권에 공통되는 언어였고, 지역 언어는 각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쓰이는 언어였다. 중세문명은 상부구조와 주민의 일상생활 사이의 거리가 컸기 때문에 두 가지 언어가 따로따로 사용되었다.


근대화는 문명의 상부구조와 일상생활 사이의 간격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공식 언어가 퇴화하고 지역 언어가 공식화하는 변화를 수반했다.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을 계기로 성서가 지역 언어로 번역되면서 지역 언어가 발전의 계기를 맞았고, 18세기 들어 외교와 학술을 비롯한 많은 분야에서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를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15세기 중엽의 훈민정음 제정도 지역 언어의 공식화로서 근대화의 의미를 가진 일이었다. 공식 언어인 한문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기층문화의 성장과 발전이 훈민정음 제정을 촉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화’는 물론 급격한 산업화를 중심으로 한 유럽식 근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세 농업사회 체제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나름대로 중세 체제의 해체 현상이 일어난, 넓은 의미의 근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해 시조와 소설 등 한글 문학이 자라난 과정을 보면 한글 공식화의 필요에 대한 세종의 판단은 충분한 근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간의 한글 사용은 늘어나는 반면 한글의 공식화 작업은 세조 이후 지체되었다. 중세적 천하체제의 핵심 원리인 성리학이 지배층의 담론을 독점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개항기에 이르러 국어(國語)로서 지역 언어의 역할이 갑자기 부각되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담기 위해 기능성이 뛰어난 언어가 필요했기 때문에 한문의 본고향인 중국에서도 백화문의 역할을 키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글이라는 ‘준비된 근대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근대화의 충격 속에서도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은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주시경(1876~1924)이 1896년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며 한글 연구에 착수하게 된 것이 의미심장한 일이다. 독립신문의 한글 사용에는 그 전과 다른 수준의 엄밀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등 주시경의 연구업적이 한글의 현대적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다음 세대 한글 연구자들이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세움으로써 한글 연구와 보급의 조직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사업이 위 기사에 “우리말광”이라고 나오는 사전편찬 작업이었다.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결성으로 시작된 이 작업이 완성을 바라보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1930년대까지 조선어 사용과 연구를 별로 탄압하지 않았다.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에 조선어-조선문학과를 두어 연구 기반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이것은 당시의 식민통치가 종속주의였기 때문이다.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7쪽에 이렇게 썼다.


일본의 학자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정책을 종속-동화-자주의 3주의로 나누고, 종속주의의 전형을 18세기 말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식민정책에서 찾았는데, 한국은 야나이하라가 말한 동화주의와 자주주의의 범주에 들기는커녕, 종속주의의 경우에도 가혹한 예에 속할 것이다. 야나이하라는 종속주의를 식민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식민활동을 하는 주의로 정의하였지만, 일제는 시종일관 경찰과 군대에 의한 직접통치 아래 수탈정책-‘동화주의’-황국식민화정책을 강행하였다.


종속주의 식민통치에서는 동화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수탈의 효율성에 도움이 되는 통치 대상의 연구를 꺼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1937년 이후 전면적 전쟁 상태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동화를 강조하게 된다. 원론적인 동화주의도 못 되고, 극한적 동원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는 상황 속에서 조선어학회의 사업을 탄압할 필요가 떠올랐고, 조그만 빌미를 잡아 한글 연구자와 그 협력자들을 일망타진한 것이 조선어학회사건이었다.


1945년 1월 함흥지방재판소에서 11명에게 내린 내란죄 등 명목의 판결문에는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 사건은 일제 말기 식민통치의 폭력성과 혼란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강로는 해방 후 한글학자들이 사전 원고를 되찾은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8-15의 기억: 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한길사 펴냄) 147쪽)


해방이 되고 징역갔던 사람들이 풀려났어요. 나온 다음에는 당연히 ‘우선 원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찾으려고 보니까 원고가 없었대요. 이 원고가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함흥 감옥에 증거물로 압수됐다가 거기서 상고를 하니까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해방이 되면서 사라진 모양이에요. 그래서 조선통운이라고 있었는데, 그 회사 창고에서 찾았어요. 1945년 10월 1일이에요. 내가 조선어학회에 들어가기 전이니까 나는 찾는 건 못 봤죠. 그런데 한 권이 없어요. 결국 ‘아야어여’ 편은 못 찾고 다시 보충을 했어요. 원고를 가져와서 보니까 딱지에 ‘증거물 제 몇 호’라고 빨간 도장이 콱 찍혀 있었어요.


1929년부터 1942년까지 13년간 여러 한글학자들이 애써 만든 원고가 이렇게 돌아왔다. 그 원고로 1947년 10월 첫 권이 발간되었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0년 후인 1957년 10월까지 여섯 권이 모두 나왔다. 현대 한글의 모습이 처음으로 정리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